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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4-03
 제목  윤치호(尹致昊, 1865. 11.20~1945.12. 9)
 주제어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정치가로서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좌옹(佐翁)이다. 충남 아산(牙山) 출생이다.

충청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1908년 현재의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그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가 아버지 때에 이르러 가세가 재건되었다. 아버지는 무관출신으로 군부대신을 지낸 웅렬(雄烈)인데,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으며 '개화당'에 속했던 인물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1세부터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했으며, 15세 되던 해 정동의 강씨(姜氏)와 정혼한 뒤 1881년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조사(朝士) 어윤중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이 때 이때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알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1882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L. G. 밀레트와 동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또한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 최고의 문명개화론자들과 교유했다. 이 과정에서 서구근대문명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체험하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근대화 방안을 구상했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 실패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미국 총영사 G. 스탈의 알선으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과 영어 코스를 수학하고,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동안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수강했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 기독교와 민주주의,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사회를 경험하면서 이를 근대사회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그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었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방식이었다. 5년 동안의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청일전쟁 기간 동안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95년 2월 귀국해 김홍집 내각의 총리대신 비서를 거쳐, 외부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협판 등을 지냈다.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친러파·친미파 고위관료들과 주한 외교관들의 간여하에 을미사변 이후 불안에 떨던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하여 을미사변으로 성립된 친일내각을 타도할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공사 실은 본국 정부로부터 조선 내정에 간섭하는 일체의 행동을 엄금하라는 훈령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3국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뻐하는 모순된 사고구조 속에서 한국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했으며,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했다. 당시 상소운동·외교운동·자결행위·의병전쟁 등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신민회의 회원이 되었다.또한 안태국(安泰國)과 더불어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는 한편, 신사상·신사업의 개발 등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했다. 그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인 사업은 남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통한 교육사업이었다. 그는 원장으로 실업교육을 제일 중시하여, 청년들에게 근로정신을 고취, 노동을 천시하는 폐습을 타파하고 경제적 자립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힘썼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있다가 1911년 105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뒤 YMCA 총무·회장, 연희전문학교·기독연합재단법인·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이사, 송도고등보통학교·연희전문학교 교장, 조선체육회·흥업구락부 회장 등을 역임하며 신교육운동과 기독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 조선의 당면문제는 유해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지적·경제적인 상태의 향상을 통하여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1920년대에는 교풍회(矯風會)·각도인민대표자대회·조선인산업대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친일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했다. 만주사변 직후 총독부 관료와 친일조선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 1941년에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으로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8·15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결하였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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