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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6-26
 제목  양기탁(梁起鐸.1871.4.2∼1938.4.19)
 주제어  언론인 [독립운동]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언론인ㆍ독립운동가. 호는 우강(雩岡). 아명은 의종(宜鍾)이다. 평양 출생. 1895년 캐나다 선교사 J.S.게일(Gale:奇一)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도왔고, 1904년 영국인 E.T.베셀(Bethel:裵說)과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假)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義成團)]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吳東振)ㆍ김동삼(金東三) 등과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池靑天)ㆍ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때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ㆍ화성의숙(華成義塾)ㆍ동명의숙(東明義塾)을 세워 혁명간부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大東民報)]를 발행하여 재만한인 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언론인ㆍ독립운동가.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 아버지는 한학자 시영(時英)이며,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어려서 한문사숙에서 수학했으며,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나현태(羅鉉泰)를 비롯한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았다. 당시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자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영어를 배웠으며 기독교 사상도 접하는 한편 동학과도 관계를 맺었다.

   1895년 캐나다 선교사 J. S. 게일(한국 이름은 奇一)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인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찬하는 일을 도왔다. 그 뒤 원산 일본 영사관원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키 상업학교[長崎商業學校]에서 한국어 교사로 2년간 체류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도총무(都總務)로 활동했다.

   그 뒤 이상재(李商在)ㆍ민영환(閔泳煥) 등과 개혁당 조직운동에 가담했으며,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여했다. 1904년 3월 궁내부(宮內府) 예식원(禮式院) 번역관보로 임명되어 영어 통역을 맡았다.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단행하자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던 영국의 기자와 제휴하여 한영합작의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언론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덴마크의 전무기사(電務技師)였던 H. J. 뮐렌스테트의 소개로 영국 특파원 E. T. 베셀을 만나 신문을 발간하기로 했다.

   베셀은 사장, 그는 총무 겸 주필로 취임하여 1904년 7월 18일부터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매일 6페이지 발행으로 4페이지는 영어, 2페이지는 한글전용이었으나, 1905년 8월 11일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해 발행했으며, 1907년 5월에는 국한문판ㆍ한글판ㆍ영문판으로 발행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 민족운동을 고취하는 한편, 일제의 대한정책에 반대하고 이를 국제여론에 알리는 활동을 했다. 또한 사내에 국채보상지원총합소를 설치하고 회계를 맡아보았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가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로 발전하자 일제는 먼저 베셀을 상하이[上海]로 추방했으며, 1908년 7월 12일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그를 구속했다. 일제 통감부는 그를 재판에 회부했다가 영국과의 외교분쟁이 일어나자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대한매일신보]가 이승용(李承鎔)에게 넘어가고 일제의 간섭으로 논조가 크게 변하자 퇴사해 프랑스인과 새로운 신문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해 총감독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을 추진했다.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1911년 1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같은 해 7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복역중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연루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2월 석방되었다.

   1916년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18년 12월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약 2년 동안 거주지 제한의 유배생활을 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봄 통천교(統天敎)를 창교해 표면적으로는 종교운동을 하면서 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이해 8월 25일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체포되었으나 어머니의 별세로 가출옥한 틈을 타서 만주로 탈출했다.

 

   만주에서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했으며, 오동진(吳東振)ㆍ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광복군총영ㆍ군정서ㆍ통군부ㆍ한교민단 등을 통합해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했다. 1925년 이청천(李靑天)ㆍ김동삼 등과 통의부ㆍ길림주민회ㆍ의성단 등 남북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정의부(正義府)를 창설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했다. 1926년 고려혁명단(高麗革命團)을 조직해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1930년 톈진ㆍ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활동했다.

 

   1934년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했다. 그 뒤 김규식(金奎植)ㆍ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해 대일통일전선 모색에 힘썼다. 1938년 장쑤 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길당암(吉堂庵)에서 선도(仙道)를 닦다가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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