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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6-26
 제목  서광범(徐光範, 1859~?)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개화사상가로서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서구(敍九)이다. 그리고 호는 위산(緯山)·사시(私諡)·익헌(翼獻)이다. 증조부는 영의정 용보(龍輔)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상익(相翊)이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부응교, 세자시강원 사서·필선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1882년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도일에 수행, 문물제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을 계획했다.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소장층들과 집권층인 수구당(守舊黨) 제거를 획책하였고, 1884년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에 가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었으나 사흘 만에 와해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 후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에 계속해서 이들의 소환을 독촉하자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1년 미국정부 기관지에 조선의 자연·경제·인종·문화·행정·종교·교육 제도 등을 검토하고 개항 이후의 근대화과정을 소개하는 〈조선교육론 Education in Korea〉을 발표하고, 신지학회(神智學會)지인 〈패스 The Path〉에는 〈조선민담 Korean Stories〉 4편을 소개했다. 1892년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뒤, 미국 연방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으로 일했다. 1894년 인사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는 한편,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의 관리인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사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1894년 일본 외무성의 주선으로 12월초 귀국했다. 당시 갑신정변 관계자에게 특사령이 내려져 있어 그해 12월 내각개편을 할 때 법무대신으로 임용되어 내무대신이 된 박영효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사법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여 의금부를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바꾸고 모든 재판업무를 관할하게 했으며, 재판소구성법·법관양성소규정 등을 제정·공포하고 참형 대신 교수형 제도를 채택했다. 한편 기독교선교사에 대한 제한을 철폐했다. 1895년 4월에는 고등재판소제도를 만들고 스스로 고등재판소장을 지냈다. 그해 10월 민비학살사건 당일 제4차 김홍집내각에서 임시서리학부대신을 겸하게 되었으나, 이후 법무대신으로 민비의 폐서인 문서에 서명한 것이 문제가 되어 민비학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자청하여 주미특명전권공사로 미국에 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내각이 무너지자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중추원일등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1897년 8월 지병이던 폐병이 악화되어 미국에서 죽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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