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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6-26
 제목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주제어  [한국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조선 후기의 정치가로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백온(伯溫)이다. 그리고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이며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또 아버지는 병태(炳台)로 안동김씨 가문이나 몰락한 양반이고, 어머니는 송씨이다.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인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다. 11세 때 병기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자, 16세까지 강릉 송담서원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1872년(고종 9)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1874년 교리·정언을 지냈다. 이때 그는 개화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었던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유대치(劉大致)·오경석(吳慶錫) 등의 지도를 받고,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나갔다. 한편 동지를 규합하여 일종의 정치적 결사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집권층이 문호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개화파는 각광을 받으면서 개화운동을 추진했다. 개화파는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정치세력을 확보하고 군사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통리기무아문 설치 등 정부기구의 개편, 군제개혁,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간행 등을 주장했다. 나아가 식산흥업을 위하여 공장제도에 따른 공업건설, 광업개발, 선진과학기술의 도입, 상회사제도의 장려, 농업의 개발과 양잠의 장려, 임업의 개발, 어업과 포경업의 개발, 기선해운업의 도입 등을 추진했다. 또한 1879년 일본 근대화의 실태를 알아보도록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그 자신도 1882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明治]유신의 진행상황을 살펴보고 일본 정치가들과 민간 지도자들을 접촉하는 한편,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이 결성한 '흥아회'(興亞會)라는 친목회에 참가하여 토론도 했다. 귀국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한 뒤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에 이어 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치며,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근대화를 급격히 추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금력이 대단히 부족했을 뿐 아니라 정치 실세였던 민씨정권과 그 배후세력인 청나라의 방해로 개화파들이 구상한 개화정책의 추진은 상당히 어려웠다. 당시 청은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해가고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도 군대를 서울에 그대로 주둔시킨 채 민씨정권을 재수립하고,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내정간섭을 자행했다. 이러한 정치정세 속에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식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려 한 개화파의 행동반경은 대단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1882년 9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17만 원의 차관을 얻는 한편, 서광범과 함께 서재필(徐載弼) 등 본국에서 선발해보낸 청년 유학생을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뒤 1883년 3월에 돌아왔다. 1883년 6월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3차로 일본에 건너가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했다. 이 일은 P. G. 묄렌도르프와 민씨 일파의 반대공작, 일본의 거부로 실패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일본정부나 민간재계에서 당시 일본 1년 조세수입의 22분의 1이나 되는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3차례의 일본 방문을 통해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보고 근대화가 더욱 시급함을 깨닫고 개화정책을 서둘렀지만, 그럴수록 소극적이면서도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던 청과 민영익(閔泳翊)을 비롯한 민씨세도정권과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한성판윤 박영효의 좌천, 화폐주조문제를 둘러싼 의견충돌, 일본 고야마[戶山]육군학교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서재필의 축출 등 집권파의 압력은 계속 가중되었다. 개혁 방식을 둘러싸고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에 정치적 위기에 빠진 김옥균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써서,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하여 이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즉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방법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았다.

 

  때마침 청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1884년 5월 조선주둔군 1,500명을 안남(安南)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 주둔한 청군은 1,500명만 남게 되었다. 그해 8월 일어난 청·프 전쟁에서 청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김옥균은 이를 정변의 호기로 판단, 개화파 정치인을 규합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11월 서울에 귀임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조선에서의 일본의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동안 개화파에 냉대하던 태도를 바꿔 군사지원을 약속하자 김옥균은 이들과 화해하고 정변에 착수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개화파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윤태준(尹泰駿)·한규직(韓圭稷)·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 민씨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튿날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새 내각이 조직되었다. 김옥균은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국가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준비된 혁신정강을 12월 6일 공포했다. 이 모든 정권수립과정은 국왕의 전교(傳敎)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조보(朝報)로 서울 장안에 알려졌다. 이때 발표된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치면에서는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단절하고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왕의 전제권을 축소하고 내각의 권한을 확대한 내각제도, 근대적 경찰제도·군제를 도입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경제면에서는 지주자본을 이용하여 농상공업을 육성하고, 국력을 진흥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중세적 부세제도를 근대적 조세제도로 개혁하기 위한 지조(地租)개정도 뒤따랐다. 사회면에서는 문벌·신분제의 폐지를 통한 만민평등을 지향했다. 이는 자본제를 수립하기 위해 신분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노동력을 창출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국왕은 이를 추인하고 개혁정치를 천명하는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러나 청군은 6일 오후 정변을 무너뜨리려고 무력개입을 시작하여 궁궐로 공격해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한 조선군이 청군에 저항하다 패퇴하자, 중위(中衛)를 맡은 일본군은 무기력하게 배신하고 도망 철수했다. 이결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을 뒷받침할 만큼 시민계층이 성숙하지 못했고, 개혁방향도 지주적 입장에서 추진하였기 때문에 당시 변혁세력이었던 농민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데도 있었다.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5년 1월부터 1894년 3월까지 10년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집권한 민씨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정부에 이들을 체포하여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만국공법(萬國公法)상 망명한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1886년 8월 태평양상의 고도(孤島) 오가사와라 섬[小笠原]으로 강제추방하고, 1888년 7월에는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에 연금하였으며, 1890년에야 도쿄로 돌아오게 했다. 1894년 3월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上海]로 건너갔으나, 민씨정권이 보낸 자객인 홍종우(洪鐘宇)에게 동화양행(同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되었다. 이 일이 터지자 청은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정부에 인도했다.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의 민간인과 언론기관은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를 조직하여 도쿄의 혼간 사[本願寺]에서 장례식을 거행하는 한편, 조선과 청을 응징하자는 시위를 벌여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의 갑오정권이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김홍집이 상소하여 사면복권되었다. 1910년(융희 4) 규장각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기화근사 箕和近事〉·〈치도약론 治道略論〉·〈갑신일록 甲申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 http://delux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3g1764b
[2003. 6. 20자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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