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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10-09
 제목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 8.15~1821. 5. 5)
 주제어  [프랑스] [군인] [정치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프랑스 혁명기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훗날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재위 1804년~1814년, 1815년)로 즉위한다. 또한, 라인 동맹의 보호자 겸 이탈리아의 왕이기도 하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또 다른 이름은 Le Caporal이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토스카나 출신의 가난한 지주 집안에서 8명의 아이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태어났을 시의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오나파르테 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하며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파울리가 망명하자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여, 가문의 명칭을 프랑스식인 보나파르트로 개명하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

 

10살 때 프랑스의 브리엔 소년 군사학교에 입학하였다. 유년기에 나폴레옹은 점잖은 성격을 가졌으며, 하루 종일 독서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 처음엔 집안 살림이 어려워 형 조제프와 함께 학비를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인 도툉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곧바로 그만두고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유년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784년에는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놓은 채 숨을 거두었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家長) 역할을 떠맡았다. 그 해 9월,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La Fère) 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21살 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코르시카섬 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코르시카섬 사람들에 의해 코르시카섬에서 쫓겨난다

 

1794년 공안위원장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실각하여 처형되자 로베스피에르의 남동생 오귀스탕과 연줄이 있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석방 후에 총재 정부의 총재 파울 바라스에게 등용되어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왕당파의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수도 시가지에서 대포를 쏘는 대담한 전법으로 진압함으로써 사단장이 되었다.

 

혁명 시기, 여러 전투와 원정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총재 정부 시기 유력한 정치군인으로 부상하였으며,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혁명 후의 프랑스를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정으로 다스려 안정시킨 후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로 전환하여, ‘나폴레옹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전 유럽을 상대로 침공하여 제패하려 한 전쟁(영국이 직접적인 프랑스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해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 전투를 생각하지 못한 나폴레옹은 결국 패하게 된다.)을 벌이다가 패한 뒤 폐위당하여 유폐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1995년 12월 31일자로 발행된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인류 최대의 실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이라고 했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업적은 유럽 대륙 전체에 프랑스 혁명의 정신(자유,평등,박애)을 전파한 것이다. 그와 함께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 각국의 법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798년의 이집트 원정 중에 발견된 로제타석은 근대 이집트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건설을 명령한 개선문은 에펠탑과 더불어 파리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로 남아있다.

 

나폴레옹의 명언

 

훌륭한 장군이란 전쟁에 대한 해박한 지식, 올바른 판단력, 용기, 강한 책임감 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부하들을 대할 때 공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폴레옹

괴로움을 거치지 않고 정복한 승리는 영광이 아니다. -나폴레옹 1세

부하 걱정을 많이 하는 지휘관은 패하기 마련이다. -나폴레옹

사람은 그가 입은 제복대로의 인간이 된다. -나폴레옹

최후의 승리는 인내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인내하는 데서 운명이 좌우되고, 성공이 따르게 된다. -나폴레옹

가난뱅이로 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직한 사람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여자를 손에 넣을 때는 이유도 영탄( 詠嘆 )도 필요치 않다. 그저 내 것으로 만들면 그뿐인 것이다. -나폴레옹

병력에는 절대 우위와 상대 우위가 있다. 절대 우위가 아니면 병력의 기동성으로 상대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즉, 힘의 집중이다. -나폴레옹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 -나폴레옹

 

 

>> 목차고리 : 세계 > 유럽 > 프랑스

>> 연결고리 : 프랑스, [약사]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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