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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4-08
 제목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0.25~1973. 4. 8)
 주제어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스페인] [화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런 천재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게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 살 때에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바람구두의 대학시절 은사인 시인. 오규원 선생의 연구실, 선생님의 책상 위에 덮어 논 유리 밑에는 피카소의 흥미로운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 그림은 피카소가  추상적으로 그린 황소 그림이 어떤 순서로 그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연속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세밀하게 그려진 황소 데생이 있고, 점차로 선이 생략되고 추상화되어 가는 황소의 모습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규원 선생은 그 그림을 예로 들며 시(詩)라는 것도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주곤 했었다. 피카소의 추상화들은 대개가 이런 그의 치밀한 데생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어설픈 그림이거나 미치광이의 그림이라는 식의 비판은 피카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다.(물론 이런 견해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있어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책까지 나와있으니 참고하심도 좋을 듯하다.)

 

나폴레옹이 피레네산맥 이남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스페인(이베리아 반도)지역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던 유럽의 변두리였다. 스페인 회화의 오랜 전통은 프란시스코 델 고야 이후 그 맥이 끊겨 19세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들라크로와와 마네의 영향으로 20세기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찌감치 자신이 라파엘로보다 낫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던 피카소에게 파리는 '꿈과 빛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00년 피카소의 나이 열아홉 살 때 그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파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답답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시의 파리는 거리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넋을 잃었고,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에 빠져들게 했다. 원래 태생이 스페인인데다가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었던 피카소였음으로 이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열적이었는 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아틀리에는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피카소의 여성 편력과 화풍의 변화

  그와 비슷한 시기의 스페인 출신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친구였던 시인. 뽈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결별하면서까지 평생 한 여자에 충실한 편이었다면 피카소는 숱한 여성편력을 남겼다.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을 혹을 한 여자가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일인지 아니면 지극히 적합하지 않은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카소 개인의 경우로 국한해 놓고 본다면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의 경우를 말하라고 한다면 귀찮아서 혹은 게을러서 그런 사랑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절대 마누라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 이런 강한 부정은 역시 강한 긍정이던가?)

  어쨌든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말하는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등의 구분은 모두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이 그의 화면에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에 침잠케 했다면(이 시기를 일컬어 '청색시대' 1901-1904년에 이르는 시기), 그가 첫 여자 피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는 그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분홍시대를 열게 만든다.(1905년) 이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되는 데 이 시기에 피카소 주변의 인물들은 시인 막스 자콥과 아폴리네르, 미국인 화상 스타인 남매, 독일인 화상 칸 바일러, 화가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새로운 미술의 태동과 피카소

  현대의 회화사에 있어 '사진의 등장'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글을 통해 다룰 예정이긴 하지만) 사진의 등장은 그 동안 자연의 모사에 치중했던 화가들에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자 동시에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들라크로와 같은 이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사진가인 A.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기존의 예술이라는 제도권 안에 진입시킨 공로가 크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유럽의 예술계에서 사진이 예술이라는 체제 안으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1859년에 있었다. 프랑스사진협회의 노력으로 샹젤리에 궁에서 열렸던 '사진 살롱 개최'가 바로 그것인데, 사진의 예술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하던 보들레르조차 '1859년 살롱비평'을 통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1862년에는 앵그르를 비롯한 유명 미술가들이 사진의 예술편입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 예술에 편입된 사진은 그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술의 한 갈래가 되었다.

 

  좀더 거칠게 말하자면 화가들이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더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피카소가 등장하기 직전인 19세기의 일이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행했던 것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한걸음(아니, 몇 발짝은 더 앞서간 셈이다.) 더 나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구체적인 결실들을 맺어가는데, 1907년 일찌기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처리될 수 있다"고 말했던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현실화시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함축된 기하하적 그림을 경쟁적으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입체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런 혁명적 활동은 단순히 화풍(양식)의 변화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 콜라주, 아상블라주(뭔지 묻지 마세요. 저도 잘 모르니까)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술의 고귀함은 작품의 주제만의 문제도, 대상이나 방법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미술이란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그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뽈 엘뤼아르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길고 풍요로운 생애와 거듭되는 홀로코스트

   파블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다. 93세의 나이로 1973년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그에게 있어 살아 생전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작품 이외에 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낸 시대는 그렇게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자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전쟁을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그가 이런 전쟁과 대학살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바로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로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발표하였다. 그는 국제연합미국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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