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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12-03
 제목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883년 말 미국 방문 길에 나선 민영익과 개화파 일행이 일본에서  찍은 사진. 이들은 일년 뒤 개화의 속도와 방법론을 놓고 동지에서 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부터 서광범·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유길준이 보인다. 앞줄에 보이는 어린이는 당시 게이오의숙에 유학 중이던 박용화이다.민영익(閔泳翊, 1860년 ~ 1914년)은 조선 말기 민씨 외척 정권의 주요 인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사호(賜號)는 예정(禮庭)이다. 

아버지는 태호(台鎬)이며, 어머니는 송씨이다. 1875년(고종 12) 민승호(閔升鎬)가 폭사한 뒤, 양자로 입양되어 민비의 친조카가 되었다. 1877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가 된 후 중책을 맡았고 개화당 소속으로 활약하다가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의 12사 가운데 군무사 당상이 되어, 별기군의 교련소 당상관으로서 임오군란(1882.7)이 일어날 때 까지 별기군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으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 김옥균과 비공식사절로 동행하여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했다.

 

1883년 주한(駐韓) 미국 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하자 보빙사(報聘使)의 정사가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고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와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중도 개화파의 후원자였으며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기습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 선교사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의 권유로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

 

그의 정치노선 등이 문제가 되어 반대파에 몰려 중국 망명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86년에는 정부의 친로정책을 반대하고 이를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밀고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당하여 잠시 중국으로 망명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선혜청 당상이 되었으나 후에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홍콩·상해 등지로 망명하였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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