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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1999-08-02
 제목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
 주제어  미국 신학자 윤리학자
 자료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미국의 신학자. 특히 기독교 윤리학자. 부친은 독일 복음교회 목사로 미국에 이주. 니버는 미주리주 라이트에서 출생. 1915년 예일대학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 취득.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으나, 평생을 개의 명예박사 칭호를 받았다. 1915-28년 데트로이트에 있는 베델복음교회의 목사가 외어 자동차 공장의 직공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1932년 이 경험을 기초로 하여<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저술했고, 1930-60년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기독교 사회윤리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는 미국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할 만한 성서적이며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전위이며 부흥자이기도 했다. 그는 유럽의 변증법적 신학자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조직신학이라는 형식에서 전개하지 않고 인간 역사와 사회분석 비판을 통하여 전개했다.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을 거부하고 역사의 궁극적 의미와 완성을 지향한 점에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인간의 본성을 기도교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파악하고, 여기에서 인간의 책임과 죄에 대한 분석은 현대신학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신학자. 이든 신학교에서 신학과 철학공부.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16년 목사로 시무. 1919-227-31년 이든신학교 교수. 1924-27년 엘름허스트대학 학장. 1931년 예일대학 신학부 기독교윤리학 교수. 그의 저서<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기독교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종래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문화적 배경이나 정신적 사회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하나님. 개인. 문화의 긴장관계를 강조했다. 니버는 비형이상학적이며 인간과 인간과의 대화적 인격적 관계에 그의 신학의 기초를 두어 실존주의적 윤리를 모색했다.

 

  ○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 연구

  ○  리처드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요약


 

A. 니버의 생애

라인홀드 니버는 1892년에 미국 미주리州에 있는 라이트市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독일계통이고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Gustav Niebuhr)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정착한 것이다. 구스타프는 독일에서 루터교회에 속해 있었고 미국에 이주한 후에도 루터교회의 경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니버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에 형성된 종교적 영향력은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는 열살이 되었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그후 두 루터파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엠허스트(Elmhurst) 대학과 이든(Eden) 신학교를 마치고 예일(Yale)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가 아직 이든에 있던 1913년에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는 세상을 떠났다. 니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구스타프는 그의 가정을 세가지 원칙에 따라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깊은 종교적 바탕과 자유와 평등의 가치 강조와 학문적 생활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라인홀드는 엠허스트대학에서는 교양교육과 고전어의 훈련을 받았다. 또한 이든 신학교에서는 성서와 조직신학에 관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예일대학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사회철학과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사 학위(BD)를, 그 다음 해에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하였으나 휴학하고, 목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받은 최고의 학위는 문학 석사였으나, 그 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으로부터 18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15년에 니버는 자동차산업이 번창하던 디트로이트시의 벧엘교회에서 그의 첫목회이며 유일한 목회였던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 교회에서 13년간 목회생활을 했는데, 이 기간이 니버에게 있어서는 그의 일생중 가장 귀중한 체험을 했던 기간이었다. 1915년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던 해로써 파나마 운하가 1914년 개통되었고, 제1차세계대전이 1915년에 일어났으며, 미국의 생산력은 극도로 상승했다.

이러한 때에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보고 느낀 것은 대량생산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계화하는 한 과정이었다. 니버는 그곳에서 아메리칸 유토피아를(American Utopianism) 내세운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그 교회에서 13년간 목회하는 동안에 20여명의 교인이 650명으로 성장되었으며, 이 교회는 그가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논쟁의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었고, 후에 그의 평화주의 지지때에도 마찬가지로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그의 경건과 도덕적 이상주의가 팽창해가는 산업제도의 야만성을 뒤덮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일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예일대학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포드자동차사와 대결을 시도하여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여타의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논문을 1926년 [크리스쳔 센츄리](Christian Century)지에 여러번 게재하였다.

또한 니버는 임금문제가 심각해져감을 발견하고 임금문제 위원회 회장직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니버는 격동하는 사회에 대하여 기독교사상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신앙을 재해석하기 위한 임무를 느꼈다. 그러한 일을 통하여 기술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필요성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니버는 1923년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의 도움으로 세미나 참석차 구라파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이 여행에서 그는 전쟁이후 독일의 비참함과 영국의 노동복지정책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이상에 가장 근사한 정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미국장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니버 사상의 전기, 즉 첫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니버는 13년간의 디트로이트의 목회를 고별하고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의 응용신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니버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주로 기독교사회윤리를 강의하였는데 학문적인 분위기와 학술 연구의 기회가 좋아서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강의와 강연들 그리고 신학적 저술들을 통하여 윤리학자와 신학자로서의 그의 이름을 미국에서 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리기에 이르렀다.

아메리칸 유토피아니즘이 1920년말의 세계 대공황으로 쇠퇴하게 되자 니버는 종교사회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1931년 니버는 "사회주의 크리스쳔 동지회"(The Fellowship of Socialist Christians)에 가담하여 투쟁적인 사
회주의 정당과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선동운동에 직접 개입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1930년에 소련을 다녀왔고 그때 발견한 것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면이었다.

산업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데 대하여는 깊은 감명을 받은 반면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해가면서 능률을 강조해 가는데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그의 사상의 중기 즉 두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니버는 공산주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독일의 나찌전체주의, 소련의 전체주의로 초래될 미지의 미래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하여 니버는 사회주의 정당과 결별하였다.

또한 니버는 그가 가졌던 초기의 평화주의도 버리고 말았다. 그는 미래에 예측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국제 정치무대에서 미국이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제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을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현실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하여 순수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민주주의야말로 서양운명의 최종적 소망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니버가 이러한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 중요한 이유는 세계 대공황과 미국의 뉴딜정책의 성공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니버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정치무대에서의 미국의 책임의식을 고양시키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지적 대변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39년 니버는 에딘버러대학에서 기포드 강연을 부탁받았다. 그는 이때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인 인간이해를 탈피하고 실존주의 인간론을 전개한다. 인간의 본질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이라는데 인간존재의 모호성이 있다. 그는 1952년에 초인적일 만큼의 사회참여와 저작활동으로 인하여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B. 니이버의 사고구조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활동하는 동안 니버는 그의 신학적 사고를 심화 발전시켰다. 그의 저작활동은 매우 활발하였고 그의 관심은 거의 무제한적이었다. 이미 서론에서 지적하였듯이 니버의 저서들도 많은 역설들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그의 사상의 줄거리를 명확하게 잡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니버의 사고의 기본적인 틀을 이해해야만 그의 사상을 곡해하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니버의 신학적 방법은 역설적인 변증법적 긴장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리 데이비스(Harry JR. Davi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니버사상의 전구조는 상치된 두가지 개념들의 변증법적 긴장으로 형성되어있다." 니버는 그가 사용하는 용어를 정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사실을 동시에 여러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그는 이를 변증법적이라고 한다.

이 변증법은 재래의 정, 반, 합을 따르지 않고 합을 무한정 연기해 버린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either-or"보다는 "both-and"를 택한다. 예를 들면 그가 Christian Marxist일 때에도 그는 Marx사회 건설을 위해 자유사회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재식 씨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한다.

"니버는 항상 자유를 역사와 필연, 질서와 정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등의 상치개념들을 긴장관계에 대립시켜 놓고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이 개념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한 정확한 분석과 잠정적 해결책을 찾아내려 하였다." 니버는 또한 변론법을 썼는데 그는 남의 사상을 비판함으로 자기사상을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부정적 변론가"라고 불리웠다. 먼저는 어떤 사상이나 사람을 비판 공격하고 그후에 가서 어떤 좋은 점을 그 속에서 찾아낸다.

즉 그는 사회복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비평하고,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그를 심하게 공격했다. 니버는 또한 역사적 방법론을 택하여, 어떤 사상을 다룰 때 희랍이나 로마의 근원까지 올라가서 역사적 사실에서 진리를 찾아낸다. 그는 한 이론을 시험하고 평가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했다. 역사에서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경험적으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또한 그는 성서적 신앙과 현실의 상황을 계속 함께 다루었다. 그는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조명하는가를 나타내 주었다.


C. 니버의 신학사상의 발전과정(단계)

니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상의 발전 단계를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발전단계를 소개하고, 더불어 그의 신학사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자.

1) 첫번째 단계- 자유주의적 시대(1915-1928): 이 시기는 니버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시절로서 니버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자처하였다. 이 당시 니버가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그가 자유주의자들이 내놓는 프로그램, 즉 국제연합회 지지자들과 인종문제의 관용적 태도를 찬성한다고 지지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그는 디트로이트 공업사회의 노동자 문제라든가 20년대말의 미국의 대경제공황들을 체험하면서 자유주의의 한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니버는 자신이 주관하고 있던 잡지인 'Radical Religion'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공통분모적 요소로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부정(Injustice)이란 무지의 소치이며 교육이 이를 해결할 것이다.

인류운명은 점차 더욱 윤리적으로 되어간다. 이 점진성의 불가피함을 거스르는 것은 죄악이다.
사랑, 정의, 선의, 우애에의 미소는 궁극적으로 효과를 볼 것이다. 니버는 이와같은 자유주의의 공통분모적 요소들을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오해로서 인간의 이성, 성선설, 점진적 발전을 믿는 하나의 낙관주의적 신앙이 곧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의 역사속에서 신국(Kingdom of God)이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 자유주의도 세속적 자유주의의 한 부류로서 인간이해의 오류에서 나온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이란 그렇게 믿을 만한 것도 아니며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인간의 역사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로 쏠리게 되었다.


2) 두번째 단계-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의 시대(1930-1937): 이기간은 니버가 유니온 신학교에 부임한 이래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직접 개입한 시기로써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때부터 니버는 정치적 현실주의와 기독교 현실주의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당시에 그가 심취했던 혁명적 마르크스 주의는 폐쇄적인 소련의 권력체제나 이데올로기 체계인 공산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 무렵 니버의 사상은 사회복음과 마르크스주의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회문제 분석의 밑바닥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이 있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비폭력주의와 평화주의였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마르크스의 중대한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다. 결국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오류인 지나친 낙관론이 맑시즘에 옮겨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나 맑시즘이나 인류 역사안에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데에는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론만이 다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는 자유주의를 '부드러운 유토피아주의', 맑시즘을 '딱딱한 유토피아주의'라고 불렀다. 맑시즘 역시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것을 무시함으로 지나친 낙관론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3) 세번째 단계-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단계, 실용주의적 시대(1940-1971년): 4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자유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거쳐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간 시기이다. 그때부터 그는 어떤 태도나 정책의 절대적인, 항구적인 타당성을 부인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재 마르크스주의를 정당안에서 구현하는데 실패했다.


둘째 정치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부당성, 세째 종교화되어가는 마르크스주의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추구했던 그의 정치철학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신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우그스티누스의 신학을 깊게 연구하게 되었고, 그후의 그의 정치철학의 근원을 신학적 인간론과 세계관에 두게 되었다. 니버는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를 위한 준비단계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인 인간이해를 탈피하고 실존주의 인간론을 전개한다. 니버는 비록 사회학과 제도에 관심을 집중했을 때라도 한번도 인간의 문제를 소홀히 다룬적이 없다. 니버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인간의 문제였다. 니버는 그의 '지적 자서전'(Intellectural Autobiograph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1939년 에딘버러대학의 Gifford 강좌에 초빙되었을때 나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주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분야는 나의 능력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이종성 씨는 다음과 같이 그의 저서를 평한다.

그의 가장 신학적인 저서인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은 그때까지 그가 의존하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청산하고 신정통주의로 옮겨간 경로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후의 니버는 점차 더 기독교적 인간관과 역사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점점 더 기독교적 입장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니버는 만년에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자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 자유주의는 20C초 미국에서 유행했던 그러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역사철학과 신정통주의적 보수주의에 의해서 재구조된 자유주의였다.

이와같이 니버가 자본주의의 부패상을 보고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가 다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좀더 보수주의적으로 전향한 이유는 '원죄'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 때문이다. 즉 니버의 사상적 전환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인간의 죄성에 대한 그의 철저한 신학적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의 생애와 사고구조, 그리고 사상의 발전단계를 살펴보면서, 그의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출처 : 장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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