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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3
 제목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 연구
 주제어  [니버] [문화] [윤리]
 자료출처  박종균  성경본문  
 내용

Ⅰ. 서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랫동안 갈등해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엔 양쪽이 분리되어 대립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교묘하게 그 긴장을 은폐시키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문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시기마다 사람마다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가 문화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규범을 설정하려는 노력을 부단하게 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언제나 사회적 상황과 현실과의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 문화적 삶의 현장에서도 필연적으로 윤리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윤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본래적으로 관계적이요 사회적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이 역시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구성원이라 하더라도, 특정 국가의 국민이요, 시민이며,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정치적 흐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갈등적 상황은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된다. 또한 문화적으로 삶으로의 여부, 만일 참여한다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니버일 것이다. 니버는 그의 저서『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로서 그리스도인과 세상문화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관계를 그는 역사적, 신학적, 사화학적으로 분석했고, 특히 이 관계를 유형론적으로 다루었다. 본 글은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과 그것의 유의미성, 한계성을 논하고자 한다. 

 

Ⅱ. 신학적 주지
 
  여기서 우리는 니버의 문화 유형론을 고찰하기에 앞서 그것의 동인이 되는 신학적 주지들을 검토할 것이다.

 

   1. 하나님의 주권  


   니버는 단 한권의 조직신학에 대한 책도 저술한 적도 없고, “그에게 있어서 ‘신학함’이란 그리고 신학자가 된다는 것이 일관된 체계를 세우는 것을 의미하느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기독교 교리나 가르침에 대한 지적인 동의보다는 신앙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신앙은 자아들의 인격적인 만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상호 인격적인 신뢰와 충성을 포함한다. 그는 교의적인 진술에 얽매이기보다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필연적이고 계속되는 과정으로서의 변혁에 확고한 신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변혁적인 요구에 개방적인 존재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기술 등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힘뿐만 아니라, 교회가 교회 자신과 성서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에게조차도 우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과 같은 내부로부터의 위험천만한 힘들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함을 견지하고 있다.

 

  인간의 문화는 개혁과 왜곡, 메타노이아와 타락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종교적인 사회의 원리들을 신성화시키는 것은 민족적, 경제적 원리의 신성화 못지않게 인간에게 위험하며, 신앙을 호도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내가 믿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자본주의, 민족주의, 기술문명지상주의(technological civilization)와 같은 정신과 투쟁했다면, 이제는 성서와 교회를 신성시하려는 시도들과 투쟁하게 되었다. 비록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교회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성서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유일한 말씀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릇된 신학의 파괴적인 힘을 우려한 탓에 교의신학적 노력을 주저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버는 분명히 그의 신학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니버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인식에 있다. 우주적인 하나님 주권을 강조한 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단언하고 싶은 것일 뿐만 아니라, 주권적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통해 경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다.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지각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니버는 왜곡된 성서주의나 교파주의적 자만심에서 드러난 것 같은 자기 방어적 독단성을 그리스도인들이 보이고 있는 무질서를 보게 되었다. 적어도 하나님 주권에 대한 강조는 방법론적으로 신중심의 윤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학과 윤리의 결정적인 요소로서 그리스도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모든 창조와 연관하여 이해한다. 그의 신 중심덕인 경향성을 다음의 인용이 대변해주고 있다.
  
  가장 만연되어 있고, 가장 기만적이며, 아마도 궁극적으로 가장 위험한 모순을 말한다고 하면 … 기독론으로 신론을 대체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대체한다거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적 삶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대체할 것이며 … [그리고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명제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제로 변환될 때 … 마치 성령이 아들에게서만 난 것처럼 그리고 성서는 신약만을 말하는 것처럼 될 때 예수가 연합되어야 할 분(the One)에 대한 자신의 증언, 성격, 그리고 그의 아들 됨과 관계성이 부여된다.  

  프라이(Hans W. Frei)는 “니버의 신학적 출발점이 아들로부터라기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시작된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라는 견지에서 우리의 신앙의 변혁, 하나님의 능력과 통일성 그리고 신화심(goodnesss)에 대한 신앙적인 새로운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니버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2. 상징적 형태로서의 그리스도  


   니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뿐만 아니라 당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창조, 구속의 주체로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게 된 것을 경고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니버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있어 확고한 입장을 갖게 해주는 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더불어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는 전혀 구분된 존재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가 제거하고자 노력했던 장벽들을 재건하게 되는 것이다. 니버는 그리스도 중심신학의 배타성을 꺼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 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재와 그의 솔선적인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서, 보편적인 존재의 사회적 일원으로 부름을 받고, 존재의 전체성 안에서 인간적인 신분(lot)이 면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과, 특별한 운명 그리고 특별한 실존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한 개인이었다는 점을 확고히 한다. 동시에 자유주의적 입장과도 뚜렷하게 대조된다.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죄 없는 인간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심판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니버의 말에서 자유주의 입장과는 노선을 달리함을 알 수 있다. 균형 잡힌 기독론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약화시키면서 그의 신성을 강변하려는, 즉 그리스도를 역사적 예수에서 유리시키려는 시도들을 거부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아 문화』에서 예수를 도덕적인 형태로 해석하는 데서 잘 엿볼 수 있다. 니버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난 몇몇 덕목들-사랑, 소망, 순종, 신앙, 그리고 겸손-을 고찰함으로써 도덕적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탐구하였다.
  니버에게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인데, 기독교 공동체란 예수 그리스도-그의 생애와 말과 행실과 운명-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최고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며, 그가 하나님과 인간과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주요 원천이며, 끊임없는 양심의 동반자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구원자라고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며,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덕목을 사랑, 소망, 순종, 믿음, 겸손 등으로-여러 중요도나 우선순위에 따라-간주하는 공동체로 인식한다. 이러한 덕목을 또는 성격의 탁월성은 단순히 인격적 자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 중심적 삶의 결과다. 즉 단순히 ‘사랑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이웃 사랑’이다. 소망도 단순히 ‘대망함(hopefulness)’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하는 규칙에 대한 소망이다. 슈바이처의 철저적 종말론에 반대해서, 니버는 하나님의 아들 됨을 소망의 근거라고 보았다. 역시 순종도 율법의 원리로서, 니버는 하나님의 아들 됨을 소망의 근거라고 보았다. 역시 순종도 율법의 원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자연과 온 역사의 창조자요 지배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겸손이라 열등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절대적으로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니버는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그의 주요한 덕목들 중의 어떤 하나에 포섭되지 않고, 관점들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단지 그 해석이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모순이 되어선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리스도의 원 초상화가 보여주는 행위와 인격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비록 그들의 경험 안에 나타난 그의 역할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권위요, 이 권위를 다양한 모습으로 행사하는 분은 한 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니버에게서 그리스도의 의미는 성서적으로 아들됨(sonship)의 상징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표현된 이 상징은 그의 인격과 권위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위한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의 권력들과 수많은 가치들로부터 선하시고 강력한 유일하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준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 됨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 세상에서부터 타자에게로, 타자에게서 세상으로의 이중적인 운동을 함의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에 간계될 때 비롯되는 책임성 역시 이중의 운동을 내포하게 된다. 니버는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써 결정적으로 정의한다. “그[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계속적인 교대를 하는 운동의 초점으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3. 교회공동체  


   니버 신학의 특징은 또한 교회에 대한 관념에 있다. 실제로 회드메이커(Libertus A. Hoedemaker)는 니버 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 주변을 맴돌고 있다”라고 말한다. 니버는 교회 공동체와 교회의 공유된 역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전능한 행위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함께 하면서, 그리고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고대하는 회상과 소망의 공동체로 교회를 묘사하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묘사하는 것, 그리고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사상(思想)의 공동체로서 묘사하는 것은… 신학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작업을 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니버는 교회를 고찰하면서 공동체(community)와 제도(institution)라는 두 가지 대립개념(polar characteristics)을 사용한다. 이들 특징은 서로에 속하면서도 뚜렷이 구별된다.

  제도로서으 교회가 더 중요한가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더 중요한가 또는 어떤 것이 더 우선적인가 하는 문제는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유사하다. 사고 없는 언어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언어 없는 사고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사고는 언어가 아니며, 언어 역시 사고가 될 수 없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타락시키기도 하지만 보존시키기도 한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에 생동감을 부여해줄(enliven)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stultify).

 

  니버는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와 불가시적 교회(invisible church)의 문제에 있어서 신정통주의와 노선을 달리했다. 신정통주의는 교회가 교회의 영원한 실재와는 모순된 존재임을 배타적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니버는 가시적 교회가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교회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불가시적 교회에의 참여는 바랄 수 없으며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는 서로에게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에는 어디서나 현존하는 것이다. 니버의 그러한 교회 이해 때문에 하나님의 주관과 인간 역사의 관계성 문제에 대하서 명확하게 응답할 수 있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경험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역사적 존재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오로지 우리 시대 가운데 있고 또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라는 매개체(medium)를 통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듯이, 우리는 역사 가운데 살고 있으며, 우리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계시란 말은 오직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매개체르 통해 우리가 지시하고 있는 대로만 언급될 수가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공동체, 즉 자신들의 하나님 이해와 신앙 이해를 공동체의 역사 내에서 앞선 경험과 이해들을 통해서 구축하려는 공동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를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려는 간접적인 시도들이다. 사람들은 자산들이 여행해왔던 그 길을 애써서 기억하려고 한다. 앞으로 갈 방향 지식을 안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종착점(the end)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시작된 연유이기도 하다. 회상하는 작업(retrospect) 없이는 진정으로 어떤 일을 전망한다(prospect)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한계성 때문에, 역사적인 공동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아무리 완벽하게 파악하고 표현하려고 애쓴다할지라도 가능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공동체의 역사나 이야기(stories)는 신앙 경험에 대해 과학적인 타당성을 입증해 줄 수는 없으나 신학을 고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자아들과 공동체들의 두체적인 역사들에 매몰되거나 유리됨이 없이, 그 역사들을 통해서 인식하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4. 책임윤리  


   니버는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윤리 사상의 흐름, 즉 의무론적(deontological) 윤리와 목적론적(teleological) 윤리가 있음을 말한다. 의무론적 윤리는 행동규칙을 잘 지킴으로써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법을 지키는 자로서의 인간에 중점을 둔다. 목적론적 윤리는 도덕상의 평가를 위해서 요구되고 갈구되는 목적이나 이상에 중점을 둔다. 니버는 양 윤리의 장점을 인식하면서도 제3의 대안, 즉 책임윤리 또는 응답윤리를 제시한다. 의무론적 윤리가 묻는 것은 “이 행위가 옳은가?”, “그것이 법을 준수 했는가 아니면 지키지 않았는가?”이다. 목적론적 윤리는 “이 행위가 선한가?”,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목적으로 우리를 추동시킬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책임윤리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묻고 나서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니버에게서 공동체의 중요성은 전통적인 윤리 방법론과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목적론적 윤리는 타자아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진 않고 개인주의로 안주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 의무론적 윤리는 타자들을 고려하지만, 타자들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고작해야 법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자아는 우선적으로 타자아들과의 관계에서 실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니버는 응답 모델을 기독교 윤리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하고 필요 충분한 모델로서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의 계속되는 역할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의 은유(metaphor)가 인간의 도덕적 경험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는 점을 니버는 믿고 있었다. 
  니버는 바르트의 방법론과는 대조를 이룬다. 바르트는 올바른 믿음을 강조하고 나서 도덕성을 마치 고정된 일련의 원리들을 엄격히 복종하는 문제로 만듦으로써 의무론적인 패턴을 따랐다.
  그러나 니버는 모든 도덕적 딜레마에 적합한 응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각각의 응답은 타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특수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고려함으로써 풀어나갈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책임적 자아」(The Responsible Self)에서 책임윤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 주체 그리고 도덕적 삶을 자아의 응답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연구다. 그는 책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책임의 개념이나 유형을 압축해서 추상적으로 정의해본다면, 주체의 행위는 자신에게 미친 행위에 대해 해석을 수반한 응답하는 행위이며, 그리고 이러한 응답 행위 전부는 끊임없는 행위 주체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행위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환언하면, 응답모델은 도덕적 행위를 위한 책무(accountability)를 행위 주체에 부여해주는 것이며, 행위주체로 하여금 자신이 현재 응답함에 있어 한계성과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선행된 행위에 대한 응답자로서 이해하게 해준다. 행위의 주체는 자기가 본 것과 자기에게 어떤 행위가 일어났는지를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에게 일어난 행위에 적합한 응답적 행위를 항 수 있다. 니버는 적합함이란 말을 사용할 때 옳고 그름이라는 범주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관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적합한 응답이란 타자들(이웃)과의 상호작용을 도덕성의 중심에 두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타자들은 도덕적 행위가 일어나는 맥락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니버의 윤리는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거스 탑슨은 니버의 모델을 직관적(intuitive)이라 간주하면서, 더욱 규정적인(prescriptive) 윤리가 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일관된 상대주의적 태도에서 야기된 구체적인 도덕적 선택과 판단에서 초래된 도덕기준의 문제일 것이다. 환언하면, 적합한 응담의 기초가 무엇이냐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목적론적 윤리가 의무론적 윤리와 상보적 관계에 있듯이 책임 윤리도 규범적 윤리의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펜탈러(Jon Diefenthaler)는 니버가 윤리적 구체성을 결여한 것은 매우 의도적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니버는 자신의 변혁주의적 노선을 원칙적으로 따르면서, 동시에 발생하는 모든 새로운 상황에 대해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유를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버의 응답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적이 될 것을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응답할 것을 촉구하려는 니버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책임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은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 속에서 행동하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행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응답하라는 것이다.” 윤리를 숙고함에 있어서 니버는 윤리적 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를 개인과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나서 응답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책임 윤리의 강점은 개인의 존엄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개인 자신과 타자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인간으로 서게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5. 교회와 세상   


   니버에게 결정적으로 주요한 주제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다. 회드메이커에 따르면, 니버 사상의 전체는 복음과 그것이 속해 있고, 기능하는 문화 사이의 관계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의 관심은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삶의 변혁에 있었다는 것이다. 갓세이(Jon D. Godsey)도 니버의 사상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과 불신앙의 세상 사이에 있는 날카로운 긴장 속에 머물러 있어서, 어떤 때는 세상에 대해서 신앙의 본질을 사수할 것을 요청하고, 또 어떤 때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세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교회와 세상은 항상 대화적인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러 가지 목적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니버의 저서들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교파주의의 사회적 원인」(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모든 교파들이 계급, 인종, 국가, 등과 같은 인간적 구분 논리에 자신들을 적응시키려는 경향성을 보인다면, 바로 이것 때문에 기독교의 발전이 미국 문화를 통합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세상과 투쟁하는 교회」(The Church Against the World)에서는 사회악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무능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깊이 연루된 것 같은 미국 교회의 현실을 보았다. 그런 시각은 미국 교회가 문화가 지나치게 동일시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통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와 문화를 혼돈하는 자유주의적 개신교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교회와 세상에 대한 주제는 「미국에서의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in America)에서도 계속된다. 그것은 삼백년 동안의 미국 개신교의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미국 개신교의 발전과 그 유전과정(transmission)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운동(movement)"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것은 문화 형성에 미치는 신학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해서 갖는 다섯 가지 유형들을 고찰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였다. 사람과 사회들이 자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그러나 언제나 문화의 틀 내에서, 메타노이아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급진적 유일신론과 서구문화」(Radi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에서는 니버 자신이 서구문화에서 목격한 단일신론적(monotheistic), 그리고 다신론적(polytheistic) 신앙형태를 분석했다. 이 두 가지 신앙형태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적 신뢰와 충성의 왜곡된 형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문화자체로부터 하나의 신을 만들어 내든가 아니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정치적, 과학적, 종교적 인물이나 이념에게 헌신하기 때문이다.  
  니버의 관심이 흔히 교회의 내적인 개혁에 집중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사실 그의 형 라인홀드 니버는 문화 변혁에 책임의식을 가졋던 반면에 리챠드 니버 자신은 교회 변혁에 특별한 사명감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버는 언제나 교회를 세상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였다. 니버의 기본적인 원리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전 피조물의 모든 사건들 가운데 현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니버는 언제나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세계 전반에서 찾았으며 그와 동시에 그는 믿지 않는 세계에 대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교회 개혁은 결국 유일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의 윤리적 숙고이자, 궁극적으로 세상문화의 변혁을 위한 전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Ⅲ. 문화 유형론  
 
  어떤 사회적 제현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일은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사회의 제현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바, 어떤 유형으로의 인위적인 도식화는 이미 한계를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나버도 인정하고 있다.

  유형이란 것은 그것이 수다한 역사적 인물들과 운동들을 다년간 연구하기 전에는 구성될 수 없다 할지라도 언제나 다소간은 구성적 개념에 속한다. 가설적 도식에서 떠나 풍부하고 복잡한 개별적인 사건들로 돌아오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어느 개인이나 그룹이 온전히 그 어느 유형에 꼭 들어맞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화 작업은 유용성을 안고 있다. 니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유형론적 방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연구에 중요한 빛을 던져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유형론적 방법은 역사적으로 정확을 기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영속적인 문제와의 오랜 씨름의 마당에서 다시 나타나는 주요한 동기들의 연속성과 의의를 환기케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방법이 오늘 우리 세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어떤 방향을 정해주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니버의 말대로 단순화 적업은 그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과 주도적 주지(主旨)들을 지적하는데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형론은 교회가 세상 문화에 대한 응답의 유형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서 ‘퇴거(withdrawal)’나 ‘일치(identification)’의 거리감에 따라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유형-이것은 문하로부터의 극단적인 퇴거이다-,‘문화와 일치하는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유형-이것은 극단적인 일치이다-, 그리고 이 양극단 사이에서 기독교적인 영역을 확보하려는 유형이 있다. 즉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유형, ‘문화에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유형,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유형이 그것이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유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문화와의 대림을 강조한다. 이러한 응답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한 권위를 확증하는 것이며, 문화의 충성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니버는 당대의 문화를 거부하고 세상과의 분리를 요청하는 관점의 예로서 소종파주의적 집단을 거론한다.
  이러한 입장의 성서적 지지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위한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2:15) 같은데서 획득할 수 있다. 니버는 이러한 극단적 응답은 신약성서와 초대 교회에서 유래된 것임을 인정하면서, 이것을 “필요한 요인” 또는 ‘불가피한 응답“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또 다른 극단은 ‘문화와 일치하는 그리스도’유형이다. 이것은 문화와 기독교의 화해를 촉진시키는 응답인 바, 양자 사이의 일치가 초점이다.

  그들은 문화적 공동체 안에서 아무런 생소함도 느끼지 않는다. … 그들은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문화를 해석한다. 즉 문화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다른 한편으로 문화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동,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등에서 문명 안에 있는 최선의 것과 일치된다고 보이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킨다.

  니버는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 영지주의자, 아벨라르, 문화 개신교주의자를 예를 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을 세성에서 분별해내려는 급진적인 지도자라기보다는 위대한 도덕 교사이며 문화적인 명분들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성서적 신앙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그러한 입장이 “신약성서의 예수를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니버에게서 그리스도가 만일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면, 단순히 우리의 관념적 등가물 그 이상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유형은 니버의 중도적 입장 첫 번째 유형으로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있어서 ‘둘다(both and)의 해결방식을 택한다. 이 유형의 사람, 즉 종합주의자(synthesist)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과 영적 세상의 주님으로 간주한다. 종합주의자는 기독교를 문화에 적응시키려고 하는 바, 기독교는 위대한 제도를 위해서 사회적 cordladf 기꺼이 수락했고 또 성취했다. 이 유형의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다. 니버는 종합주의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와 문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법과 은혜 등을 사상과 실천의 체계에 넣어버리려는 노력은 결국 불가피하게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며 무한한 것을 유한화하며 생명적인 것을 물질화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고 경고한다.


  두 번째 중도적 유형은 ‘문화에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유형이다. 이것은 루터의 ‘두 왕국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이원론적 관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은혜 아래서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다. 그런고로 타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다.
  니버는 이 유형의 장점을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갈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것의 결정적인 약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적인 것에 철저하고자 했던 마르시온주의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반율법주의나 문화적 보수주의로 몰고 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루터의 두 왕국 사상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독일 루터 교회가 히틀러와 그의 유대인 학살 시도를 저지하는데 실패하는 원인 제공자라는 비판을 완전히 면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니버가 다룬 마지막 유형은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이다. 니버에 따르면 변혁주의자는 이원론자와 마찬가지로 죄와 그 증후군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만, “문화를 향한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변혁주의자들은 인간의 문화가 원래는 선했다가 타락으로 인해 부패되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구속적 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한다. 변혁주의자들의 목표는 문화가 기독교 신앙의 이상과 규범에 부응하도록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어거스틴, 칼빈, 웨슬레이, 에드워드를 변혁주의자의 예로 드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니버의 유형론에서 비판을 제기하지 않는 유일한 경우가 이 유혀이다.


  니버가 그리스도와문화의관계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결론적으로 변혁주의로 기울어지는 근거는 그의 철저적 유일신론(radical monotheism)과 그의 역사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철저적 유일신론은 홀로 절대적인 분이신 하나님을 축으로 모든 인간과 인간의 제도는 상대적이며 그 분을 토대로 해서만 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버에게 있어서 상대적인 모든 것은 변혁의 대상이다. 개별적인 인간뿐만 아니라 사회의 특징제도들도 그것들이 절대화의 소지를 안고 있을 때 모든 것이 변혁의 대상이 된다. 그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 행동 속에서 생기는 거이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역사관을 갖는다. 그는 인간 문화 영역 속에 하나님의 뜻을 개입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 문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문화가 전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적 입장을 지양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를 지양하고 문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변혁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입장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Ⅳ. 문화 유형론의 비판적 고찰 

 

  니버는 그리스도의 문화에 관해서 가장 널리 수락되는 유형론을 제공했다는데 그의 공헌이 있을 것이다. 그의 유형론이 널리 사용된다고 해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다룬 논증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니버가 다섯 가지 유형들을 전개하면서 사용했던 사회과학적 방법이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다루는 작업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니버의 유형론의 비판은 재세례파에 대한 부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물론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유형 분석이 주로 터툴리아누스와 톨스토이에게 맞추어져 있지만, 재세례파도 포함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스스로 재세례파 운동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재세례파를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에 포함시킨 것은 그 경우가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클린든(James William McClendon, Jr)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주요한 공헌을 인정함과 동시에 “니버의 패러다임은 종종 오해가 될 때가 있다. …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니버의 유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화에 기초를 둔 자신의 입장은 ‘책임’으러, 재세례파 진영은 ‘무책임(irresponsibility)’을 암시하는 ‘퇴거’로 재조시킨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은 분명히 첫 번째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겠으나-철저히 반전운동을 전개하는 것과 종교제도 체제 내에서 안수 받은 사제나 목사를 거부하는 등의 반문화적 기독교 신앙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그들음 미국에서 초기에 많은 순교를 당했고, 그들 지도자들 대부분이 여성들이 많았던 터라 ‘마녀(witch)'로 몰려 많은 수가 순교 또는 추방을 당했다. 그들은 초기 여성해방운동의 기수들이었고, 현재는 전세계 인권운동과 반전눙동 전략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 중 한사람으로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가장 큰 공헌을 한 분들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예는 퀘이커가 첫 유형에는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화언하면 퇴거전략이 결국은 문화변혁을 이끌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유형에도 해당하리라 본다. 니버는 재세례파들이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퇴거전략으로 응답했다고 했지만, 그들이 일정한 차원에서 문화와 상호작용했다는 점을 규명하지는 못했다. 스트라이븐은 다음과 같이 재세례파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은 사창가에서부터 인간의 성(sexuality)을 구속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면 이것이 문화 변혁을 위한 적절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급진적 관점이란 일반적으로 존중받는 어떤 것을 포함해서 사회제도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의 가치를 매음제도만큼 치열하게 저항하려는 사람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최소한 전적인 참여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할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는 니버가 퇴거전략을 전혀 무시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 것이다. 단지 그의 유형론이 약간의 한계를 지닌 방법론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거스탑슨(James M. Gustafson)은 학자들이 어떤 집단을 연구하고 그것을 평가적으로 서술할 때는 일반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메노나이트들은)세상에서의 명예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서도, 십자가의 도(道), 그리고 자기 희생적 사랑의 명령(imperative)에의 순종을 처음부터 삶의 방식의 특성으로 삼았다. 이러한 특성 관찰은 메노나이트들 내에서 아무런 차이들이 없었다거나, 그들의 공동체를 떠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이면서도 개연성이 있는(plausible) 관찰인 것이다.

 

  니버가 변혁주의적 입장을 가장 선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문화」에서 다른 유형들과는 대조적으로 변혁주의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다른 유향의 장점들에 대해서도 지적을 했던 바이고, 더 나아가 그 책의 마지막 장인 “하나의 결론적인 비과학적인 후기”에서 “아무리 우리가 그 연구를 연장시키고 세련화시킨다 할지라도, 이것이 기독교적인 답변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버는 극단주의적 기독교운동을 다른 유형들에 비교해서 매력을 느끼진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구분하는 극단주의자들을 존경하면서도 그들의 문화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문화적 사면으로부터의 퇴거는 용인하지 못한다. 니버가 재세례파나 퀘이커들의 접근 방식이나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결핍 때문에 그들의 퇴기전략에 반대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퇴거전략도 니버 자신의 경험에서 추구되는 하나의 방법론임에는 틀림없다.

 

Ⅴ. 나오는 말  

 

  니버의 유형론이 다분히 자신이 강조하는 방향으로 경도되거나 편파적이며 또는 그 유형이 부정확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세상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비판, 즉 개인이나 집단이 어느 유형에 언제나 일치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그 작업의 정확성 문제는 언제나 남아 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항상 변혁주의자 또는 극단주의자일 수만은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론의 일반적인 기능은 특별한 강조점이나 경향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볼 때, 그의 유형론은 계속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또한 니버의 유형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그것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차적인 구성자는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일차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유형의 구성자가 니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그것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니버의 유형론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논의의 기본 틀을 제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절박한 문화적 상황에서 기독교와 문화 관계의 고찰을 위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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