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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9-19
 제목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9.13)
 주제어  [프랑스] [스위스] [종교개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프랑스, 스위스 종교개혁가. 까르디날ㆍ르모와느학원 교사(1517)를 지내고, 르페브르와 함께 「모(Meawx)의 사람들」에 가담하여 종교개혁을 추진(21-23), 그 좌절로 국외망명했다. 바젤에서 시당국의 기독교의 자유에 관한 13개조 사항을 제출하여 공개토론에서 승리했으나, 인문주의자들의 점진적 개혁을 비판하여 추방당하고(24), 이후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개혁에 분투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종교개혁을 도입한 인물이다. 그곳에서 그의 노력은 장 칼빈제네바에 개혁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파렐은 파리대학교 학생으로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라는 학자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그는 파렐이 파리에 있는 카르디날무안대학에서 문법 및 철학 교수 자리를 얻도록 해주었다. 파렐은 곧 이 대학의 학장 대행이 되었다. 그는 1521년 이전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그해에 종교개혁가이자 모의 주교였던 기욤 브리소네에 의해 교구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종교개혁이 더디게 진행되자 성격이 조급했던 파렐은 참지 못하고 1523년 파리로 돌아갔으나 곧 종교개혁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스위스 바젤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이다가 추방되었다. 파렐은 2년 동안 몽벨리아르·스트라스부르·바젤·베른에서 설교했고, 마지막에는 발레의 에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1526~29년에 설교했다. 1530년 그는 뇌샤텔로 이주했고 그 다음에 제네바로 이주했는데(1532), 제네바 시는 1536년 종교개혁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주도적인 프랑스 종교개혁가가 되었는데, 1536년 10월 제네바를 지나가던 장 칼빈을 설득하여 그곳에 남아 자기 일을 돕도록 했다. 1538년에 이르러서는 칼빈이 파렐과 비슷한 명성을 얻게 되었으나 두 사람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파렐은 뇌샤텔로 갔고, 그곳에서 잠시 방랑하다가 1543년에 다시 뇌샤텔로 돌아와 남은 생애 동안 사역활동을 했다. 그는 점점 더 칼빈에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열정적인 설교가였던 파렐은 제네바에서 칼빈을 계승한 테오도루스 베자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에게 프랑스 종교개혁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베자는 파렐의 설교가 마치 우뢰와 같았다고 했다. 칼빈은 비록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만일 연구에만 치중하고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파렐이 선언하자 떨면서 복종했다고 한다.

 

파렐이 한 설교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그가 프랑스어로 쓴 책들은 여러 권 남아 있다. 그 가운데는 교리 입문서, 예배의식, 자유사상파에 대한 논쟁, 성상과 유물 사용에 대한 반(反)가톨릭 입장의 공박 등이 있다.

 

 

 

>> 목차고리 : 세계 > 유럽 > 프랑스, 스위스

>> 연결고리 : 프랑스, 스위스,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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