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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2
 제목  칼빈(Jean Calvin, 1509. 7.10~1564. 5.27)
 주제어  [프랑스] [목사] [칼빈] [종교 개혁자] [장로교] 칼뱅 캘빈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칼빈은 루터보다 20년 후에 출생했다. 그는 프랑스의 소도시 노용에서 출생. 칼빈이라는 이름은 코방( cauvin )이라는 프랑스 성을 라틴화된 칼비누스 (calvinus )에서 다시 프랑스화된 것이다. 부친은 당시 노용의 주교관에서 봉직하고 있었다. 14세 때에 파리대학에서 신학 공부. 부친의 권유로 신학을 중단하고 법학을 공부. 이 기간에 당시의 인문주의적 교양을 배웠다. 에라스무스에게 정확한 저작을 위한 정열을 배웠고, 몽떼뉴에게는 문필의 훈련을 쌓았다.

1533년 파리대학의 학장인 니콜라스 코프의 취임연설 원고를 초안해 주었는데, 거기에는 파리의 성직자들을 공격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신학자들이 그를 체포하겨 하자 칼빈은 이리저리 방랑생활을 하다가 스위스의 바젤에 도착했다. 바젤에서 칼빈은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 1536년 제네바에서 뜻하지 않게 파렐을 만나 종교 개혁에 참가하게 되었다.

1542년 신정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 규칙을 제정했는데, 이 규칙에는 목사. 교사장로. 집사의 선이방법과 교회의 운영 방법까지 규정했다. 여기서 근거하여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쥬네브는 오랫동안 유럽에 있어서 개신교의 아성으로 군림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서 칼빈은 루터보다 훨씬 더 위대한 주석가였고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칼빈이 종교개혁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 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  기독교강요

○  루터교 및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과 존 칼뱅

○  칼빈의 삼위일체론

○  칼빈의 인간론

○  칼빈주의 5대 교리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Picard)지방의 노용(Noyon) : 제라르 코벵(Gerard Cauvin)과 쟌느 르프랑(Jeanne Le Franc) 사이에서 네째 아들로 태어남.


1521년 5월 19일 :
-칼빈은 노욘성당에서 한 보조성직에 임직, 교회록(敎會綠)을 받게 됨.

1523년 8월 파리의 마르슈(coll ge dele March)대학 :
-14세 때에 파리;에 가서 마르슈 대학 (Coll ge dele March)에 입학하여 코르디에(Cordier)교수 밑에서 라틴어를 공부함. 이때 칼빈은 함께 Hamgest 가문의 아들과 친해 짐.

1523년 11월 ? 몬태규대학(Coll ge de Mantaigu) :
-마르슈대학을 중퇴하고 몬태규대학(Coll ge de Mantaigu)으로 전학함. 거기서 칼빈은 라틴어에 더 주력하고 동시에 수학과 스콜라 철학의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는 경건주의와 엄격한 이론가로 알려져있는 코프(Cop)교수와 그의 두 아들(Nicolas와 Michel)과 피엘 로벨(Pierre Robert)와 친교를 갖게 되었다.

1527년 :
-이해말이나 이듬해 초에 몬태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1528년 2월 올레안대학(I'Universit d'Orl ans) 입학 :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올레안대학에 입학, 레스트와(Pierre de I'Estoile)에 사사하는 한편, 볼마르(Melchior Wolmar) 밑에서 고전과 성서를 공부함. 여기서 공부에 너무 열중한 결과 소화불량에 걸려 여생을 이 병때문에 고생을 한다.
-칼빈이 몬태규대학을 떠난 직후 이그나티우스 로율라(Ignatius Loyola, Counter-Reformation을 일으킨 자)가 그 대학에 입학함.

1529년 6월 폰테르벅(Pon-tervec) :
-그의 아버지가 살던 땅 폰테르벅으로 전임함. 이해 가을 부르쥬(Bourges)대학으로 전학, 알치아티(Andreas Alciati)밑에서 법학을 배움.

1531년 2월 26일 :
-그의 나버지가 다시 노욘으로 임직 함.

1531년 5월 26일 다시 파리로 :
-휴가중 귀향했을 때 어버지가 돌아가심. 칼빈 22세 때의 일 이다. 이것을 계기로 칼빈은 자기가 원하던 고전(古典 을 공부하기 위하여 다시 파리로 가서 인본주의의 온상인 프랑스대학에서 단네(Pierre Dann s)에게 희랍 고전을 바움, 여기서 코프(Cop)와 더 깊은 친교를 가지게 됨.

1532년 4월 [네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 (L. Annaei Senecae Libri duo de Clementia Io Calvini Commentario)을 출판 :
-이 책에서 칼빈은 인본주의자인 동시에 엄격한 도덕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1532년 5월 올레안(Orleans) :
-다음해 6월 말까지 자유로운 연구생활.

1533년 10월 27일 :
-마아거리트 당굴렘 방비에게 보낸 편지에거 칼빈은 이때까지도 자신이 인본주의자임을 나타냄. 이 편지 직후에 그는 회심(回心)을 경험한 것 같다. 1557년에 출판한 시편 서문에서 "하나님은 그의 신비로운 섭리로써 나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었다"라고 기록한 그 경험은 이때의 경험인 것 같다.

1533년 11월 1일 :
-니콜라스 코프(Nicolas Cop)가 프랑스대학의 학장으로 취임. 그의 취임 강연에서 복음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어구가 있었다. 이것이 소르본느의 신학자들의 비위를 거스려 코프는 바젤(Basel)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도 코프의 원고의 초안자라는 의혹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그의 친구 듀 틸레(Loui du Tillet)의 집으로 피신 함. 다행하게도 듀 틸레는 훌륭한 도서실을 가지고 있어서 칼빈은 여기서 연구를 계속하며 [기독교강요]와 [영혼의 잠](Psychopamychio)의 원고를 썼으리라고 추측된다.

1534년 5월 4일 노용에서 체포 구금 :
-노욘교회에서 받는 연봉(年俸)을 거절하기 위하여 귀향했으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얼마 후 석방됨

1534년 10월 [영혼의 잠]저술 :
-이 책에서 재세례파를 맹공함. 여기서 칼빈이 복음주의로 전향했다는 증거가 나타남. 이 때에 세베르투스(Servetus)를 만나서 삼위일체에 관하여 논쟁을 하기로 하였으나 세베르투스의 도피로 이루어지지 못 함.

1534년 10월 스트라스부르그(Strasburg) :
-칼빈은 이름을 밀티누스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으로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던 부처(Bucer)를 찾아 감.

1535년 1월 바젤(Basel) :
-바젤에 있는 호크라인 부인댁에서 유함.

1536년 3월 [기독교강요] 제 1 판 바젤에서 출간 :
-칼빈이 [기독교강교]를 바젤에서 출판. 전편 여섯장에 519면이었다. [기독교강요]를 출판한 후 친구 듀 틸레와 함께 북이탈리야를 방문했으나 로마교회의 반대를 당해 불쾌하게 바젤로 돌아 옴. 얼마 후 파리로 귀환하여 가사를 정리하고 동생들과 함께 스트라스부르그 바젤에 가서 연구생활을 할 목적으로 고향을 떠났으나 프랑스 완 프랑소와 1세(Francois)와 독일의 칼 5세 사이의 전쟁때문에 길이 막혀 제네바를 거쳐 북향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1536년 7월 24일 :
-밤중에 파렐을 내방. 그에게 설득되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하기로 함

1536년 9월 5일 :
-성 베드로 성당의 교사로 임명 됨.

1536년 10월 1 - 8 : 로잔느(Lausanne) 종교회의 참석
-로마교회 수도사와의 논쟁에서 그의 박식을 이용하여 로마교회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 함. 이 때부터 그의 재능이 인정 됨.
-이 달부터 제네바 교회의 목사회의 회원이 됨.

1537년 2월 18일 : "제네바교회를 위한 신앙의 훈련과 고백" (Instruction de Fayl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 ve-Chatechismus Genevensis Prior)을 공표

-이 발표를 본 로잔느의 목사 카룰루스(Carolus)는 칼빈과 파렐을 아리우스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고소함.

1537년 5월 14일 :
-카룰루스의 고소에 의해 로잔느에서 토론회가 열림. 이 자리에서 비레(Viret)와 파렐, 칼빈은 무죄로 되었으나 고발자인 카룰루스는 교직을 박탈당하고 로잔느에서 추방당함.

1537년 10월 : [성찬에 관한 신앙고백](Confissio fidei de Eucharistia CR. IX) 을 출판.

1538년 1월 3일 - 4일 :
-200인 의회에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성찬식에 참례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칼빈과 파렐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칼빈과 의회와의 대립이 나타나게 됨.

1538년 2월 3일 - 4일 :
-의회 선거에서 개혁자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패배함으로써 제네바시민은 엄격하고 철저한 개혁보다는 온건한 개혁과 자유신학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남.

1538년 2월 21일 :
-스트라스부르그에있는 부처에게 편지를 보내 사태의 심각성ㅇ르 알리고 부처와 루터의 후원을 청함.

1538년 3월 11일 - 12일 :
-시의회에서 목사회에 상의하는 일이 없이 일방적으로 성찬식용 떡을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고 목사들에게 강요함.

1538년 4월 23일 :
-이 결정에 불응한 칼빈과 파렐과 코로(Coraud)대하여 시의회 총회에서는 두 사람이 3일이내에 제네바를 떠날 것을 결의함.

1538년 4월 27일 - 5월 4일 :
-그들은 베를린과 취리히에서 개최된 스위스 개혁자대회에 참석하여제네바시의 처사의 부당성에 대하여 호소하여 동조를 얻음.

1538년 5월 23일 :
-그들은 베를린시 대표들의 호위를 받아 다시 제네바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네바시 정부는 이들의 입시(入市)를 거부함. 모든 것을 단념하고 칼빈과 파렐은 기독교강요를 출판해 준 오포린(Oporin)의 집에 유함.

1538년 7월 23일 :
-파렐은 뉴샤텔(Neuch tel)의 교회의 초빙을 받아 부임. 죽을 때 까지 목회함.

1538년 8월 1일 : 스트라스부르그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부임.

1538년 8월 8일 : 이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함.

1539년 1월 :
-스트라스부르그대학의 신학과 강사로 취임하여 주로 성서주석을 담당함.

1539년 2월 21일 :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개혁자회의에 참석, 여기서 처음 멜랑톤을 만나 평생의 친구로 지냄.

1539년 5월 19일 :
-제베디우스(Zebedius)에 편지를 보내어 루터파의 완고와 쯔빌글리 파의 그릇된 견해를 지적하고 개혁운동의 양대진영이 서로 양보하여 타협해서 합동함으로써 개혁운동의 효과적 추진을 주장.

1539년 7월 : 스트라스부르그의 시민권을 받음.

1539년 8월 1일 : [기독교강요] 2권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펴냄.

1539년 9월 1일 :
-3월 18일 로마 천주교회의 감독 사돌레(J. Sadolet)가 제네바시민에 편지하여 그들이 로마교회로 돌아 올 것을 권고했다. 이에 대해 제네바에 있는 목사중 한 사람도 답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에게 사돌레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주기를 부탁, 칼빈이 이에 응하여 편지를 써줌. 이것은 제네바시의 공기가 개혁운동에 매우 유리하게 변해개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함.

1540년 3월 : [시편주석] 출판

1540년 7월 1 일 :
-제네바시를 완전하게 파렐파가 지배하게 됨.

1540년 9월 21일 :
-제네바의 소의회는 정식으로 칼빈을 초청할 것을 결의함. 아미 페란(Amie Perin)이 칼빈을 다시 제네바로 초청할 것을 위촉받음.

1540년 9월 ? :
-이돌렛 뷰렌(Idollet von Buren)과 결혼함. 그녀는 1남 1녀를 가진 과부였으나 정숙하고 경건하고 가사와 내조하는 모든 일에 힘을 다함.

1540년 11월 13일 :
-웜즈에서 파렐에게 편지로 제네바시에 초청을 받은 것을 알리고 파렐의 의견을 물어 봄. 이에 대해 파렐은 칼빈에게 그 초청을 수락하라고 강권함. 부처도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기 보다는 제네바에 가서 개혁사업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제네바로 갈 것을 권함.

1541년 1월 : [기독교강요] 불어판을 직접 출판.

1541년 2월 :
-파렐로 부터 제차 제네바에서 온 초처응ㄹ 수락하라는 "우뢰와 같은 편지"를 받고 크게 감동 됨.

1541년 3월 10일 - 5월 22일 :
-여러 곳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참석, 루터파와 개혁파와 합동으로 노력함.

1541년 5월 1일 :
-제네바시의회는 1538년 4월 23일에 결의한 칼빈과 파렐에 대한 추방령을 취소하고 칼빈을 초청할 것을 다시 결의함.

1541년 6월 25일 :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 옴.

1541년 8월 9일 : 칼빈은 제네바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함.

1541년 8월 19일 :
-제네바시의회 다시 칼빈에게 초청장을 보냄.

1541년 9월 1일 : 칼빈 스트라스부르그를 출발하다.

1541년 9월 13일 : 제네바시에 들어 감. 기마대의 출영을 받음.
- 취임한 즉시로 "교회헌법제정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200인 의회에 건의하는 동시에 예배의식문의 초안에 착수함.

1541년 11월 20일 :
-교회헌법규칙(Les Ordonnances eccl siatiques de l'Englise de Gen ve) 이 공포 됨. 이 규칙을 시행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한 감시위원회(Consistorium)을 구성, 매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임.

1542년 1월 2일 : 교회헌법규칙이 시행됨.

1542년 7월 28일 :
-아들 잭(Jacques)이 났으나 며칠 후 사망함.

1542년 10월 10일 :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33세)

1543년 1월 : [기독교강요] 제 3 판 이 출간 됨

1543년 3월 24일 :
-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칼빈이 초안해서 가결시킨 교회규칙에 대해서 그것이 너무 엄격하다는 비난이 일어 났다는 것과 시의회와 감사 위원회에서 대논쟁이 벌어 졌으나 칼빈의 노력으로 겨우 무마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1543년 9월 :
-제네바시에 다시 페스트가 만연함. 이에대해 로마교도들은 개혁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비난한 데 대하 칼빈은 그것이 개혁자들의 불신앙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교회의 우상숭배에서 기인한다고 강력하게 주장.

1545년 7월 :
-이 시기에 제네바시 목사회는 친칼빈파에 의해 움지깅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성도덕에 엄격하였다.

1545년 12월 2일 : [제네바신앙문답서]를 출판함.

1546년 1월 :
-시위원회선거에서 반칼빈파의 세력이 다시 대두함. 페랑(Perin)도 반칼빈파에 넘어감.

1546년 1월 26일 :
-아모(Pierre Ameaux)라는 트람프제조자가 자기 집에서 만찬회를 열고 거기서 칼빈을 공적으로 비난 함. 이것이 의회에 알려져 체포당함.

1546년 1월 21일 :
-스트라스브르그에서 얻었던 모든 특권을 사퇴함.

1546년 3월 21일 :
-어떤 결혼식에서 시에서 금지한 무도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페랑부부와 교회규칙실행감시위원장인 코르느(Corne)도 참가했다. 그러나 시 소위 원회에서는 이들을 다 체포함.

1546년 6월 27일 :
-파브르(Favre)가 예배시간중에 자기 집에서 공을 가지고 운동하면서 놀고 있다가 발각되어 체포 됨.

1546년 11월 22일 :
-작명(作名)에 지나치게 종교적인 명칭, 십자가 또는 예수의 이름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시의회 법규를 만들도록 하여 이것을 통과시킴.

1546년 11월 : [고리도전후서 주석] 출판

1547년 2월 2일 : [트렌트회의에 대한 반박문] 출판.
-이 달에 있었던 선거에서 반칼빈파의 세력이 승리함.

1547년 3월 7일 :
-이 때부터 한 시민이 시의 법과 교회의 법에 의해서 이중적으로 처벌받아야 한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페랑을 위시한 반칼빈파에서는 시의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교회훈련을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교회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범칙시에는 교회의 법에의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권위의 확보에 주력함.

1547년 3월 29일 :
-칼빈이 주장한 타협안이 시소위원회에 제출되어 시의 법에 처벌된 자가 회개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법에의해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안이 가결 됨.

1547년 7월 27일 :
-칼빈이 매주 설교하는 베드로성당의 강단에 "너무 엄격하면 복수한다."라는 위협장이 붙어 있었음. 하수인으로 쟉 그류(Jacques Gruet)가 체포되어 가택수사를 하자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며 칼빈을 제네바에서 축출하려는 비밀문서가 다수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백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형에 처함.

1547년 9월 :
-페랑이 불란서에서 돌아오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그해 12월 16일에 칼빈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기로하고 타협이 성립, 페랑이 석방됨.

1548년 2월 1일 : [갈라디아서주석] 출판

1548년 2월 5일 :
-이달 선거에서 친칼빈파와 반칼빈수가 동수가 됨

1548년 5월 :
-칼빈이 설교도중 시정(市政)에 관계있는 몇사람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시의회로 부터 징계를 당함.

1548년 10월 18일 :
-칼빈이 비레에게 보낸 편지를 트롤리(Trolliet)라는 자가 훔쳐 시당국에 제출함. 그 편지 내용은 제네바시의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가운데 시의회와 시민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되어 한때 칼빈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으나 파렐과 비레의 응원으로 겨우 무사히 모면함.

1548년 10월 22일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주석을 출판함.

1549년 3월 29일 :
-칼빈의 처 이돌렛 뷰렌(Idollet von Buren)이 사망함. 이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의 지병인 편두선이 약화되어 고생함.

1548년 5월 23일 : [히브리서주석] 을 출판함.

1550년 12월 25일 : [이사야서 주석] 주석 출판.

1551년 :
-5월부터 시작한 볼섹과의 예정론 논증은 결국 칼빈의 주장으로 승리하였으며, 이 해 말에 볼섹은 제네바를 추방당한다. 예정론을 변증하는 한 해였다고 하겠다.

1552년 1월 1일 :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을 출판함.

1553년 1월 1일 : [요한복음 주석] 출판.
-세베르투스는 비엔나에서 가명을 쓰면서 의사개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복구](Christianismi Restitutio)라는 책을 출판하고 그 안에서 재차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오류(誤謬)라고 주장하였다. 이 책이 칼빈에게 기증되었다.

1553년 4월 4일 :
-세베르투스는 비엔나에서 체포되었다가 4월 7일 탈옥하여 도주함. 비엔나 정부는 세베르투스의 부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함. 제네바시에서는 시민권을 가지지않은 자의 무기휴대를 금하므로 칼빈파의 세력제거에 노력함.
-이 해 칼빈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으며, 제네바에서 완전히 제거(除去)될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1553년 8월 13일 :
-세베르투스는 나폴리로 가던중 제네바에 들려 칼빈의 설교를 듣던중 체포 됨.

1553년 8월 16년 :
-세베르투스 공판에 있어서 시 정부는 반칼빈파의 거두 베르텔리에를 변호사로 선임, 칼빈과 베르텔리의 사이에 격렬한 논증이 벌어 짐.

1553년 8월 17일 :
-칼빈자신이 직접 시소위원회에 참여하여 세베루투스의 성서관이 성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번신론적 신관을 가진것으로 비판함.

1553년 9월 1일 :
-옥중에서 세베루투스와 칼빈이 대결하여 논쟁함.

1553년 9월 22일 :
-세베루투스 오히려 칼빈을 이단자로 고발하다.

1553년 10월 26일 :
-시 소위원회는 세베르투스를 산채로 화형할 것을 선고함. 이에 대하여 칼빈은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고 초소한 단수형(斷首刑)에 처할 것을 호소했으나 소위워노히는 이를 거절함.

1553년 10월 27일 :
-그 때까지도 세베루투스는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이 낼리줄 아록 있다가 화형의 선고가 내리자 실신할 정도로 낙망, 그는 파렐을 통하여 칼빈과의 단독 면담을 요구하고 그자리에서 칼빈에게 사과하였으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27일 낮에 시청 앞마당에 나아와 선고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실신, 파렐의 부축을 받아 일어 섰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자신을 단죄한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그날 화형에 처하였으나 끝까지 예수의 영원성을 부인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글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죽음. 이사건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대체로 칼빈이 정당하다고 했으며, 멜랑톤 조차도 칼빈에게 '정당한 처사'라고 써 보냈다. 이 일후에 제네바에서의 반칼빈파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1554년 3월 :
-스코틀란드에서 존 낙스(John knox)가 망명을 와서 칼빈과 접촉, 많은 감화를 받음.

1554년 11월 :
-존 낙스는 프랑크프르트에 있는 영불망명자(英佛亡命者)들의 복음교회의 목사로 부임.

1555년 3월 26일 :
-낙스는 프랑크프르트교회에서 예배의식문제가 악화되어 더 있을 수 없어서 취임 4개월만에 그 곳을 사임하고 다시 제네바로 돌아 옴.

1555년 6월 10일 :
-낙스가 제네바에 있는 동안 영국망명자교회 목사로 부임. 그러나 동년 가을에 부인의 요청으로 모국으로 돌아 감.

1555년 8월 1일 : [공관복음서주석] 주석 출판

1556년 7월 초 :
-존 낙스는 제네바시의 요청으로 부인을 동반하고 제네바에 옴.

1557년 7월 22일 : [시편주석] 출판
-서문에서 그는 시편을 "사람의 심령의 모든 부분의 해부학"이라고 표현

1557년 9월 19일 : [호세아서 주석] 출판

1558년 후반 :
-건강의 급속한 악화로 절식(節食) 때로는 일일일식(一日一食)주위로 강의와 설교를 계속함.

1559년 5월 2일 :
-녹스는 스코틀랜드개혁운동의 추진을 위해 귀환

1559년 6월 5일 :
-성베드로성당에서 칼빈대학(혹 칼빈 아카데미)의 개교식과 베자의 개교 강연이 있었음.

1559년 8월 1일 : [기독교강요]제 7 판 출판

1559년 12월 25일 : [이사야서 주석]재판, [소 예언서 주석] 출판
-이 때에 비로서 제네바시의 시민권이 칼빈에게 부여 되었다. 이제부터 제네바시의 정식 시민이 되었다.

1560년 8월 19일 : [다니엘서 주석] 출판

1562년 11월 17일 : [블란서교회신앙고백] 출판

1563년 7월 23일 : [예례미야주석] 출판

1563년 11월 30일 : 모세 5경 불어판 완역

1564년 2월 2일 :
-대학에서의 최후의 신학강의

1564년 2월 6일 :
-최후의 설교를 함

1564년 5월 27일 :
-오후 8시, 임종, 54세 4개월

1564년 5월 28일 :
-오후 2시, 제네바시 공동묘지에 안장

 

>> 목차고리 : 신학 > 역사신학 > 종교개혁사 > 종교개혁자

>> 참고고리 : 칼빈주의, 종교개혁, 프랑스 신앙고백서(기독교 강요), 칼빈의 삼위일체론

>> 연결고리 : 프랑스, 목사, 칼빈,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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