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단체  작성일  2008-09-16
 제목  광복군(光復軍)
 주제어  [일제시대] [대한민국]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직할 군조직으로 중국 중경(重慶)에서 창군(創軍)되었다.

총사령관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3개의 지대로 편성하였으며, 1941년에 제5지대를 편성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정식으로 정식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고,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과 합류를 추진하였다. 또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것을 임시정부로 이관하여 임시정부의 통수부에서 통할하였다. 광복군 1,2지대는 인도, 미얀마 전선에 출정하였고,2지대 중 일부는 미국의 오에스에스라는 특수부대와 합동 작전을 펼쳤다. 3지대는 중국에 파견된 일본군 중에서 한국인들을 광복군에 복귀시키는 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광복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실현해 보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의 격화, 독·이 군사동맹(獨·伊 軍事同盟)에 이어 독일과 소련이 상호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을 체결하고도 쌍방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등 날로 급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와 주변정세의 변화는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하는 군사조직이 그 어느 때 보다 시급한 때였다. 사실상 한국광복군 창설은 1936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군무부(軍務府)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에 관한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몇 년 동안 그 실현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이며 광복군 창설 준비 위원장인 김구 선생은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제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주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선언문이 발표된 2일 후인 9월 17일에는 중국 전시 수도 중경시(重慶市) 가능빈관(嘉陵賓館)에서 김구 주석의 주관 아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韓國光復軍 總司令部 成立 典禮, Inaugural Cerem ony of the Headquaters of Korea Independenence Army)라는 명칭으로 창군식(創軍式)을 거행하였다. 이 창군식장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부단한 항일투쟁과 아시아 인민의 자유·평등을 위해 공동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임시정부 포고문을 통하여 “한국광복군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날인 지난 8월 1일에 성립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광복군이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서 지난 33년 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정통 무장단체임을 천명하였고 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후에 제정된 바 있는 군사조직법에 의해 구성 발표하였다.

또한 동년 10월 8일에는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수부관제(統帥府官制)'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 광복군 특무대조례 광복군 복무규정 등을 의결하고 이를 1940년 11월 1일부터 시행토록 공포하였다. 이러한 광복군의 창설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하여 거행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특히 당시 어려운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소요경비는 중국측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미주와 하와이의 동포들이 보내온 애국헌금으로 운영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창군하여 군사조직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광복군은 최초 30여명의 인원으로 지휘부인 총사령부만을 조직하여 1940년 9월 17일 창설되었다가 1945년 4월에는 564명으로 그 기간조직이 확대되었고 1945년 8월에는 700여명에 이르렀다.

부대 편성을 보면 광복군 총사령부는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사단의 6단계의 부대로 구성하되 2~3개 사단 규모로 확장 발전시킬 계획이었으나, 초기에 응모자가 제한되어 지대를 편성하고 각기 3개의 구대를 두며, 각 구대는 3개의 분대로 나누었다. 이러한 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에 제정된 바 있는 `군사조직법''''에 의해 다음과 같이 구성 발표하였다.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목표와 당면전략, 임무를 선정하고 독립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 활동 목표

첫째, 우리의 분산된 역량을 광복군에 집중하여 전면적인 조국광복 전쟁을 전개한다.
둘째, 중국의 대일항전에 참가하여 중국군과 연합, 왜적을 박멸한다.
셋째, 국내 민중의 무장 반일운동을 적극 지도한다.
넷째, 정치, 경제, 교육 등 균등한 신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무력적인 기간(基幹)을 이룬다.
다섯째,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저해하는 일체의 요인을 제거한다.

▲ 당면 전략

첫째, 군의 경비와 장비, 물자는 외국의 원조로 충당한다.
둘째, 군사 간부를 다량으로 단기 양성하는 한편, 국내, 만주, 중국 각 지방에 필요한 인원을 파견하여 동포 사병을 초모(招募)하여 훈련을 실시한다.
셋째, 총사령부 창설 1개년 후에는 최소한 3개사단을 편성하여 국토를 회복할 때까지 전투를 전개한다.
넷째, 선전공작을 실시하여 밖으로 우리의 과거 투쟁의 역사와 현재의 분투상황을 소개하고 우리민족의 독립 자격이 충분함을 선양하며, 안으로는 적 후방의 동포들을 고무 격동시켜 우리의 군사행동에 협력하도록 촉진한다.

▲당면 임무

첫째, 사병의 모집 및 훈련.
둘째, 선전과 정보 수집.
셋째, 최전방의 적정 정찰.
넷째, 필요에 의한 유격전 수행.
위와 같은 당면임무를 추진하기 위해 최전방으로 파견할 부대를 편성하는 동시에 공작 근거지 및 활동 지역을 지정하여 효율적인 공작임무를 과감하게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광복군의 역할은 첫째, 우리 청년들의 애국충성을 한데 모아 군인을 양성한 뒤 직접 국토 수호 작전을 펴 빼앗긴 조국을 우리 자신이 키운 무력으로 탈환하자는 원대한 광복 완성과 최후의 일전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며, 둘째, 임시정부의 지위를 공고화시켰다는 점이다.

정부수립 직후부터 내부적 갈등으로 인해 침체상태에 빠졌고 때로는 정부의 이름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에 처하기도 했던 상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선상에서 본연의 역할과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라는 무장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없는 군대, 군대 없는 국가를 상정해 볼 때, 광복군의 존재 그 자체가 임시정부의 확실한 지탱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선전(宣傳)분야 활동

임시정부는 정수수립 이후로 망명정부(亡命政府)로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대외적인 선전에 부심하였으나, 광복군이 창설된 이후로는 광복군에 대한 선전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킬 수 있게 되었다.

광복군의 창설과 더불어 당면전략(當面戰略)을 통해 한민족의 항일 투쟁에 대한 대외적인 선전과 모병을 위한 대내적인 선전을 병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활동을 목적으로, 광복군은 1941년 2월 1일에 기관지인 광복(光復)지를 발간하여, 군 자체에서 선전 업무를 수행하였다.

태평양전쟁(1941)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중국의 대일 선전포고에 이어, '3000만 한국인을 대표하여, 연합군 전선의 1개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樞軸國)에 대하여 선전한다' 는 요지의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12. 9.). 그리고 아울러 선전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였다.

1942년 1월 25일, 선전위원회는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告國內外同胞書)' 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국내외의 전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존재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① 임시정부의 승인 ②무력의 통합 ③ 광복군의 확충 ④ 지원의 획득 등을 위한 노력을 함께 기울여 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1942년 5월에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에 통합된 이후, 임시정부는 연합국들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 받기 위한 외교적 선전과 함께 광복군의 군사적 대적 선전(對敵 宣傳)에 주력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관계 문헌을 정리하여 한국민의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내외에 재인식시키면서, 임시정부와 광복군 내부의 대일 항전 의식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1942년 10월 29일에 국가(國歌,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와 광복군 군가(軍歌)를 제정하여, 국기게양식과 하기식 등, 공적인 식전(式前)에서 연주 또는 제창하도록 하였다.

1943년 4월에는 임시정부의 관제(官制)를 고쳐, 선전위원회를 내각의 한 부서인 선전부(宣傳部)로 개편하고, 선전 업무를 강화하는 한편, 상해에서 한글판으로 간행하다가 1925년 9월에 중단하였던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6월부터 중국어판으로 속간하였다.

11월에 카이로선언으로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부상(浮上)하게 되자, 한·중·영 3개 국어로 선전 책자를 펴내는가 하면, 1944년 4월부터는 중국 국민당 선전부와 합작하여 중경방송(重慶放送)을 통해 우리말 방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1943년 이후로 대외적인 선전에 주력하는 동안,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중국내 곤명(昆明·쿤밍)지역의 미 제5공군사령부와 협조하여,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대적 선전 전단을 작성하여 적 점령지에 공중살포하는 등, 대적 선전을 강화하였다.

(2) 초모(招募; 모병)분야의 활동

광복군이 창설되자 병력모집을 위한 초모(招募) 활동이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구되었고 모병을 실시한 다음, 이들을 훈련시켜 전투부대로 편성하여 대일 작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사령부를 우선 발족시키고, 이어 지대(支隊)를 조직한 다음 각 지대를 사단(師團) 내지는 군단(軍團)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광복군 총사령부의 창설로부터 1년 이내에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하여 정식 교전 단체로 연합군에 참가시킴으로써 국토 수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광복으로 모병할 수 있는 대상은 지원병(志願兵) 또는 학병(學兵)이란 미명하에 일본군으로 전선에 끌려 나온 한인(韓人) 병사와 교포 청년들뿐이었다. 일본군 소속의 한인 병사들이 광복군에 입대하는 경우는, 일본군 병영을 자진하여 탈출하거나, 초모 요원에게 포섭되어 귀순하거나, 중국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하여 광복군에 이첩되거나 하는 세 가지의 유형이 있었다.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하여금 육군 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1938.4.)을 필두로 징병제(徵兵制) (1943.8.) 학병제(學兵制)(1943.10.)를 실시하여, 한인 청년들을 일본군에 강제로 끌어들여 전선에 동원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전방 지역에 배치된 광복군 지대에 초모임무를 부여하고, 초모 공작원들을 적 점령지에 투입한 다음 이들 한인 사병과 교포 청년들을 초모하게 하였는데 이들의 초모 공작은 다음과 같은 5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대상 지역 침투(제 1단계) → 공작 거점 구축(제 2단계) → 대상 인원 포섭(제 3단계) → 소속 병영 이탈(제 4단계) → 피점령지 탈출(제 5단계)

일본군 점령지 후방의 교포 청년들을 모집할 경우는 5개 단계 중에서 제4단계가 생략되었으나 이들 역시 일본군 전선(戰線)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초모 과정에서 초모 공작대원이 희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초모되는 인원보다 희생되는 대원의 수가 더 많았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감안하여 임시 정부는 1942년 4월에 초모 대원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베풀기 위한 전선공작인원 우대 잠정 규례(戰線工作人員優待暫定規例) 라는 규정을 제정하여 공작대원의 사기진작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3) 훈련분야의 활동

광복군이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모병과 더불어 간부의 양성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간부 양성이 없이는 광복군의 골간(骨幹)을 유지 내지 확장시켜 나갈 수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복군은 초기의 창설요원 전원을 대원제(隊員制)로 하여 장교의 신분을 부여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자대교육과 중국군의 교육기관에 위탁하는 두 가지 방법을 병용하였다.

자대교육은 공작요원으로 적지에 투입된 인원을 제외한 각 지대원을 자대의 교육 계획에 따라 술과(術科)인 기본 훈련과 학과(學科)인 정신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며 위탁교육은 중국군 각 전구 사령부에 설치된 중국군 간부 교육단(보수 교육기관)에 한국 청년 훈련반을 부설하여 한국측 교관 요원의 참여하에 중국군 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개편된 제5지대의 전신인 한국 청년 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1940년 7월에 서안의 제 1전구 전시 간부 훈련단에 `한국 청년 훈련단''''을 설치하도록 협조하여 2주 1기의 단기 교육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제3전구·제 5전구·제10전구 등의 간부 훈련단에 한국 청년 훈련반을 특설, 전선에서 초모한 한인청년들을 교육시킨 다음 각 부대에 배치하였다.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은 역사성·정통성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창군과 건군 과정에서 소외·배척됐다. 그 이유는 크게 4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수적인 열세이다. 해방전 일본군·만주군에 복무했던 한국인은 39만여명이었으나 광복군 출신은 3만5000여명에 불과했다.

둘째, 미군정이 일본군 전력자나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학도병 출신들을 종용했다.

셋째, 광복군 계열의 분열현상이 심했다. 광복군출신 가운데 오광선은 광복청년회, 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 이청천은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 이념적으로도 임시정부 우파계열을 중심으로 대한무관학교, 좌파계열로 조선국군학교(중앙육군사관학교)등이 대립했다.

넷째,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인사정책이 편파적이었다. 이승만은 임정요인들과 광복군을 건군 참여에서 배제했다.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임정 배척 노선을 극복하지 못했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대한민국

 



   


A-Z




  인기검색어
kcm  315994
설교  164593
교회  118806
아시아  94665
선교  90919
세계  80651
예수  78389
선교회  68844
바울  64656
사랑  64547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