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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12-04
 제목  신사참배(神社參拜)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朝鮮總督府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天皇制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總督府는 1915년 ‘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朝鮮神社가 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1931년에는 만주를 침략했고,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감행했다. 이런 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 內鮮一體를 표방한 皇民化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神社參拜는 그 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神社參拜, 궁성요배, 국기게양, ‘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 神棚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皇民化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성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일본 정부는 1882년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로부터 분리시킨다고 하면서 제사와 종교의 분리조치를 취하여 교묘히 타종교를 지배, 통제하였고 또 이를 통해 침략정책을 수행하거나 식민지 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뒤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은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여 1938년 9월에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신사에 굴복케 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을 네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신앙을 지키며 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 투쟁하는 노선이며, 둘째는 신앙을 지켜야 함을 알고 있으나 용기가 약하여서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 신앙지조나 지키겠다는 노선이고, 셋째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이며, 넷째 신사참배는 국가양식이라고 하여 신앙양심의 가책없이 하나님의 명령도, 신앙정조도, 민족의 체면도 망각해 버리고 일제 앞에 아부한 지도자들의 노선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반대와 타락의 노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의 수난을 겪은 지도자가 70명이요 옥고로 순교 당한 자가 50명, 사경에서 살아 나온 자가 20여 명이다. 1945년까지 이로 인해 투옥된 자가 2,000여 명에 달하고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에 주도적인 인물들은 평북에 이기선 목사, 평남에 주기철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 전남에 손양원 목사, 만주에 한부선 선교사 등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전쟁이 종결되었고 일본은 GHQ의 간접통치를 받게 되었다. GHQ의 초기 대일정책의 목표는 일본에 있어 정치 · 경제 · 사회적인 제도에 민주화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점령정책은 종교분야에 대해서도 동일했으므로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전 천황제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했던 국가 신도를 해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GHQ는 전전의 국가 신도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군국주의적 정신을 깃들이게 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국주의자와 초국가주의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는 결론 하에 특히 메이지 정부 수립이후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 건립된 신사, 그중에서도 국가신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야스쿠니신사와 각지의 호국신사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2차대전 뒤 ‘덴노(天皇)’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은 데서 비롯 한다. 덴노는 연합군사령부(GHQ)로 맥아더를 찾아가 접견했고, 1946 년 1월 1일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선언했다. 맥아더 사령부 도 덴노에 대해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덴노는 일단 인간이 됐지만, 과오를 인정 하지 않았다. 군국의 역사를 부인하려면, 덴노의 과오를 인정해야 하 지만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점령군의 지령에 의해서 국가신도가 폐지되기까지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국가신도라는 국교와 다름없는 체계 속에서 군국주의의 중심적인 역할을 다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 신도 그 자체이며,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국가 신도 특유의 종교적 의례를 제거해 버리면 이미 종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완전한 국가주의의 전당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와 GHQ측은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 시설로서 남길 것인지 아니면 전몰자 추도라는 기념비적인 시설로서 남길 것인지의 선택 문제를 놓고 절충 작업을 벌였다. 이에 일본은 두 개의 선택지 중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적 시설인 하나의 신사로서 존속시키자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에 의한 전몰자 추대시설로서 유지시키는 길을 폐쇄시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일본 정부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왜 하나의 신사로 존속시키는 길을 택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메이지시대 이래 국가 신도의 역사에서 야스쿠니 신사가 차지해 왔던 커다란 종교적 지위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종교적 지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신사로서의 일본 정부의 선택은 이후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의 발판이 됨을 예시해 준다.

 

 

   ○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21)

   ○ 신사참배 결의와 반대 운동(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수난(남영환 편저 )

   ○ 일제의 신사참배(神道) 강요정책

 

 

>> 목차고리 : 단체 > 교단 / 한국교회사

>> 연결고리 : 일본신사참배  

>> 바같고리 :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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