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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11-14
 제목  한석진(韓錫晋, 1868∼1939)
 주제어  
 자료출처  이덕주 감신대 교회사 교수  성경본문  
 내용

신학반에서 얻은 은혜

한석진은 평북 의주 선비 가문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열 살을 넘겨 「통감」(通鑑), 「사략」(史略) 등 중국 고대사를 배우던 중 “왜 조선 사람이 중국 역사를 배워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가, 훈장에게 “어린 놈이 주제 넘는 소리를 한다”며 호된 꾸중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남다른 ‘주체 의식’을 갖고 자랐다. 그는 철이 들어 양반 소리를 듣는 어른들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유교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훈장이 툭하면 술에 취해 아내를 구타하거나 이웃 주민들에게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 삶과 연결되지 못하는 유교의 가르침에 실망했다.
그는 열여섯 되던 해에 ‘심령’을 만족시킬 만한 종교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다. 석숭산 불교 암자에서 불경을 공부했으나 크게 만족을 얻지 못했다. 또 백두산에 유명한 도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출을 시도했으나, 출발 직전 아버지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 열여덟 살 때 가족들의 강요로 결혼해 아들까지 얻었으나 가정도 그의 마음을 붙잡아 두지 못했다.


당시 의주에 ‘이상한 교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알고 보니 기독교였다. 그 무렵(1887년)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온 서상륜백홍준을 중심으로 10여 명의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고 있었다. 한석진은 호기심을 갖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복음을 믿은 것은 아니다. 일생을 걸만한 종교인지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탐색 기간이 3년 넘게 계속되었다. 1891년 3월, 의주를 방문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마펫(S. A. Moffett, 마포삼열)과 게일(J. S. Gale, 기일)을 만나 장시간 대화한 후에 그들의 발전된 문명에 매력을 느껴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곧바로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기는 했으나, 온전한 믿음 상태는 아니었다. 그 해 11월 서울 정동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서 개최된 ‘신학반’에 참석해 복음의 진수를 배우면서 온전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신학반 체험은 ‘비관에서 낙관, 절망에서 희망, 금세에서 내세로’ 자신의 영을 유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의 후원금을 거절한 이유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1907년), 앞줄 맨 왼쪽이 한석진 목사.

그는 신학반이 끝난 뒤에도 서울에 남아 개인적으로 마펫에게 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1893년 3월 마펫과 함께 평양 선교 개척의 사명을 띠고 서울을 떠났다. 그는 평양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 집을 한 채 마련하고 교회를 시작했다. 평양의 모교회인 장대현교회의 시작이다. 교회가 발전하자 수구파였던 당시 평양 관찰사 민병석은 기독교의 세 확산을 우려한 나머지 1894년 5월 평양 교인 열댓 명을 체포했는데, 이때 한석진은 ‘교인 수괴’로 체포돼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도 그의 신앙을 꺾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박해를 받으면서 교회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한석진 목사의 지도력은 교회 밖에서도 통했다. 1896년 독립협회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한 목사는 관서 지부장이 되어 평안도 지역의 민족 운동 세력을 규합해 서울 못지 않은 독립 협회 조직으로 키워나갔다. 유명한 도산(島山) 안창호의 ‘쾌재정 연설’도 그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南崗) 이승훈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설교를 듣고 난 후였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민족의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이 그의 설교에서 단골 주제였다.


이 같은 자주, 주체 의식은 목회의 모든 과정에 반영되었다. 그가 마펫 선교사의 조사(助事)가 되어 평양 선교를 개척할 때, 마펫은 다른 조사들처럼 그에게도 봉급을 주려 했다. 그러나 한석진은 거부했다. “내가 복음을 믿고 감격해 동포에게 기쁨으로 전하는 것인데 당신에게 보상받을 필요는 없지요.”
‘삯군 목자’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와 돈으로 인한 선교사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훗날 한 목사가 선교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받지 않았던 때문이다. 1896년 마펫이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들어가자 “왜 선교사만 안식년 휴가를 누리는가? 한국인 목회자들도 안식년이 필요하다”며 평양을 떠나 인근 소우물(장천)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면서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선교사와 한국인 목회자 사이의 평등을 강조한 것이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 장대현교회 예배당을 지을 때도 그 원칙을 고수했다. “우리 예배당이니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우리 힘으로 짓도록 하자. 하다가 안 되면 그때 도움을 청할 일이지, 처음부터 선교사의 도움을 받을 요량이면 될 일도 안 된다.”
이 원칙은 그가 목회한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 제일교회 예배당 건축과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축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선교비를 준다 해도 거절하는 한석진의 당당함에 선교사들은 감격하면서도 때로 당혹했다.

나라의 독립, 교회의 독립

평양신학교 교수와 학생들(1905년), 앞줄 오른 쪽에서 세 번째가 한석진 목사.
3·1운동이 끝나고 민족의 ‘자주 의식’이 고조된 1920년대 ‘반선교사 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사회주의 급진 세력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으로 발생했지만, 일부 선교사들이 보여준 인종 차별적, 문화 우월주의 행태에도 원인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25년 자신의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딴 어린 학생을 붙잡아 뺨에 염산으로 ‘도적’이라 새긴 안식교 선교사의 ‘야만적인 행위’는 일반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 교회 지배자로 군림하는 오만한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자존심이 강한 한석진 목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1925년 12월, 서울 조선호텔에서 세계적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 모트(J. R. Mott)가 주재하는 ‘한국 교회 지도자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한석진을 비롯한 한국 교회 대표 31명, 마펫을 비롯한 선교사 대표 31명 등이 참석해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선교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벌였다. 이날 주요 의제는 ‘한국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였다. 의식 있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대해 지배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석진 목사가 그 선봉에 섰다.
“선교 사업을 성공시키고 효과적으로 하려면 선교사가 한 나라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기초가 서게 되면 그 사업을 현지인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다 보면, 자기가 세운 교회며 학교라는 생각에 우월감을 가져 영도권을 행사하려 하니 이것은 복음 정신에 위배되고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자립의 기반을 구축했으니 한국인들에게 맡기고, 선교사들은 떠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의 발언이 30년 넘게 선교 활동을 해 온 선교사들의 귀에 거슬릴 것은 당연했다. 한석진 목사의 말은 계속 되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수고 많이 하면서 머리들이 희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에서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셔도 좋을 줄 압니다. 이것이 참으로 한국을 위한 것입니다.”
그 때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마펫 선교사가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한석진 목사가 일갈했다.
“마 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 유해 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 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준 선교사에게 ‘떠나라’고 한 것은 언뜻 ‘배은망덕’한 행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석진 목사의 분노에 찬 호소는 한국 교회의 독립을 촉구하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여전히 한국 교회를 유아기의 미자립 교회로 인식하고 보호하려는 명분 하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교회 발전을 저해하는 선교사들을 향한 것이었다. 또 자립의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능력 발휘보다 선교사에게 의존해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한 한국 교회를 향한 것이었다. 일제 시대를 산 한석진 목사의 꿈은 ‘나라의 독립’과 함께 ‘교회의 독립’이었다.

하나된 교회를 위해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전경.

한석진 목사에게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된 교회’였다.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는 교파별, 선교부별로 갈라지고 나뉘어진 교회였다. 같은 복음,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분리된 상태로 들어왔고, 우리 민족은 원인도 모른 채 ‘갈라진 교회’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다. 갈라진 교회는 외국의 정치, 역사 상황에 따라 이뤄진 것일 뿐, 성경에서 봐도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한석진 목사는 교회 일치 운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1909년 일본 도쿄에 건너가 유학생 중심으로 한인 교회를 설립할 때도 장로 교인들이 많았지만 ‘연합 교회’로 조직해 장로교감리교가 교대로 목사를 파송하도록 조치했다. 국내에서 갈렸다고 해외에 나가서까지 갈라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0년대 이후 장로교감리교 선교 협의체인 장감연합공의회와 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초교파 연합 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1915년 경기·충청노회의 ‘조선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명칭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꾸자고 헌의했으나 기각되기도 했다. 1930년 장로 교인들의 헌금으로 금강산에 수양관을 건립하고도 명칭을 ‘장로교 수양관’이라 하지 않고 ‘기독교 수양관’으로 정했다. 한 목사는 ‘장로’와 ‘감리’를 초월한 ‘하나의 교회’를 꿈꾸었다.
한석진 목사는 한국 교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로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립을 마무리한 뒤 서울 당인리의 작은 집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가끔 후배 목사라도 찾아오면 “국수 눌러 먹세”하곤 친히 냉면 기계에 올라 국수를 뽑아 대접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냉면을 먹고 돌아가는 목사들의 손을 잡고 부탁하는 말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부디 싸우지 말고 주 안에서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시오.”

 

 

>> 목차고리 : 독노회 창설과 한국최초의 7인목사 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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