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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칸트 '실천이성비판' 책의 개관
 주제어  [칸트]
 자료출처  박정하  성경본문  
 내용

윤리학의 역사에서 보면 칸트는 도덕, 혹은 윤리성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실천 철학을 변혁시킨 이론가로 종종 평가된다. 윤리성의 원천을 자연이나 공동체의 질서, 행복에의 희구, 신의 의지 혹은 도덕적 감정 등에서 찾던 것이 칸트 이전의 전통적 시도들이라면,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이러한 방식으로는 윤리성의 객관적 타당성이 주장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론의 영역에서처럼 실천의 영역에서도 객관성은 주체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모더니티 철학의 핵심 명제인 '주체의 확립'을 철학적으로 논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계몽주의의 완성자로서의 칸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도덕의 원천은 자율(Autonomie), 즉 의지의 자기 입법성에 있다. 자율은 자유(Freihei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근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는 핵심 개념인 자유는 칸트에 의해서 철학적 토대를 얻으며 그 점에서 『실천 이성 비판』은 바로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으로 평가된다.

 

칸트는 저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이는 물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선험적인 구성 작용에 의해 대상 세계가 인간사유의 보편적인 형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이다. 칸트는 실천적으로도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위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세계는 보편적인 인과율에 따르는 순수하게 기계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 속에서 도덕적 의도 및 목적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이성적 체계를 발견한다. 이런 내적인 체계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게 되며 또한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킨다. 자연은 기계론적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서는 목적론적인 의미가 없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실천만이 목적을 부여한다.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지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부여하는 목적이 자연 속에서 실현되기를 요구하고 세계가 그 목적에 따라 변혁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이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도덕적, 또는 목적론적 이성이 바로 의지의 원리이다. 세계의 목적은 세계 자체를 넘어서 있는 무엇이며, 성취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은 실천이성으로서 작용하는 인간의 의지이다. 『실천 이성 비판』은 바로 이 도덕적 의지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수행한다.

 

『실천 이성 비판』에서의 칸트에게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천의 주체인 인간이 주관적으로 세운 준칙이 어떤 경우에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론 철학에서 범주와 같은 주관의 순수 지성 개념이 왜 한갓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 실재성,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달리 말해 한갓 주관적인 규칙이 어떻게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통틀어 중요한 문제이며, 그 점에서 칸트는 관념론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천 영역에서 이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크게 보면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 단계는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에 기반하여 도덕 법칙에 의해서만 의지를 규정할 수 있음을 확인하여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확립하는 작업이다. 둘째 단계는 첫째 단계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덕적 의지의 전체적 대상을 규정하는 작업, 즉 도덕행위(=실천)의 결과로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칸트가 둘째 단계에서 제시하는 실천이성의 전체적·무제약적 대상은 바로 최고선(das hochste Gut)이다. 그리고 이 최고선을 확보할 필수적 전제로서 영혼의 불멸성, 신의 현존 같은 요청들을 끄집어냄으로써 이성 신앙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실천 이성 비판』의 작업은 결국 칸트 철학 체계 전체에서 보자면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인 '두 세계론' 중 당위의 세계, 도덕의 세계의 전모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칸트 철학의 두 세계론은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를 엄격히 나누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 즉 '이미 있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으로서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당위의 세계, 즉 '아직 없지만 있어야 할 것'은 우리 행위의 대상으로서 도덕의 세계에 속한다. 안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아는 것이지 아직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은 이미 있는 것의 세계, 즉 현상계로 제한된다. 이미 있는 세계, 즉 자연은 결정론적인 인과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가능하며, 과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중에는 과학의 영역, 사실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또 하나의 풍부하고 오히려 더 중요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의 영역, 도덕의 영역, 가치의 영역이다. 칸트가 오히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이 영역이다. 유명한 『순수 이성 비판』이란 저작에서 칸트가 한 작업은 좁게 보자면 현상 세계로서의 자연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성립 가능함을 밝힌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뉴튼의 자연 과학이 참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넓게 보자면 사실은 과학이 의미 있게 성립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밝혀서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과학의 틀 속에 들어올 수는 없지만 사실은 인간에게서 더 중요한 문제들을 올바로 다룰 수 있는 올바른 철학이 필요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올바른 철학, 즉 '진정한 형이상학'의 중요한 내용이 『실천 이성 비판』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실천 이성 비판』은 칸트의 철학적 탐구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연 철학적인 관심이 강했던 이전의 탐구 작업들은 1781년 『순수 이성 비판』으로 일단락 된다. 그러다가 1784년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1786년까지 한편으로는 역사 철학적인 단편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1785년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거쳐서 1788년 『실천 이성 비판』이 완성된다. 그리고 1790년 『판단력 비판』이 출간된다. 이런 저술의 흐름은 칸트 자신이 이미 세워 놓았던 계획과 물론 관련이 있겠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과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1781년까지 이론 철학을 일단 완료한 칸트는 이후로 프랑스 혁명 전야인 17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자유와 목적론의 문제를 다룬다. 도덕 철학을 통해 당위의 영역을 원리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엄밀한 학문적 탐구는 아니지만 역사의 영역에서 당위로서 설정될 역사의 방향을 목적론적으로 제시하는 1780년대의 칸트의 주된 작업은 프랑스 혁명과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인과 개념이 1781년까지의 칸트의 이론 철학적 작업의 초점이 되는 문제라면, 자유와 목적론의 문제는 1780년대 이후 칸트의 실천 철학에서 초점이 되는 문제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인 1790년 이후의 저작들이 주로 정치 철학과 종교 철학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이러한 관점에 의할 때, 『실천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다루는 자유와 도덕 법칙의 문제는 이론 철학 후 진행될 실천 철학의 원리적 토대를 닦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을 엄격히 나누고 둘이 서로 관계 맺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 칸트의 입장에 대한 가장 유명한 비판자는 바로 헤겔이다. 헤겔은 존재와 당위가, 즉 지금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칸트를 비판했다. 현실은 항상 변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은 동시에 있어야 될 것이었으며, 지금 있어야 될 것은 동시에 있게 될 것이라고 보아 이른바 두 세계에 대한 변증법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는 유명한 헤겔 명제의 의미 심장함 속에는 존재와 당위의 구분을 거부하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과정에도 불구하고 칸트와 헤겔은 양립하는 경쟁 가능한 두 모델로 정착되어 있으며 『실천 이성 비판』은 칸트 모델의 핵심을 논쟁적으로 보여주는 저작인 셈이다.

『실천 이성 비판』에서 보여주는 칸트 윤리학은 실제로 철학사에서 하나의 모델로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신칸트학파를 통해 심지어 사회주의 내부의 논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마르부르크 학파의 헤르만 코헨을 대표로 하는 이른바 '윤리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여, 칸트야말로 사회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항상 목적으로 대우하고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이야말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의 핵심적인 본질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역사 과학이 참이라서 사회주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사실이 사회주의가 바람직하고 선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지해야 된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는 점을 최초로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가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곧, 사회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유물론 외에 다른 근거가 필요한데, 칸트 철학이 바로 그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역사적 유물론 없이 칸트 윤리학에만 근거해서도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칼 포랜더로 대표되는 독일의 신칸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칸트의 도덕 철학이 과학적 사회주의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사회 변혁 의식을 고취하려고 한다면,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될 목표로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목적론적인 관점을 배격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목적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칸트주의를 보완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 이성 비판』에서 제시되는 칸트의 윤리학은 오늘날에도 단순히 역사적 가치를 갖는데 그치지 않고 주류 윤리학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칸트는 도덕적 규범의 정당화에 관한 중요한 대화 상대자로 대접받는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상대자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칸트 윤리학은 현대의 규범 윤리학이 갖추고자 하는 최소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칸트 역시 윤리학에서 상대주의, 회의주의,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행위는 개인적 감정이나 자의적 결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또한 사회적 문화와 유산, 생활양식, 혹은 관습의 문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칸트는 도덕의 원리를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윤리 문제에 접근해 가고자 한다. 그리고 윤리학의 영역에서 현대의 논의를 지배하는 공리주의 이론에 대해 자율과 정언 명법을 내세우면서 도덕 원리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따라서 『실천 이성 비판』은 철학사에서 역사적인 가치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론적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대면해야 할 살아있는 저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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