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칸트 도덕 형이상학에 관한 소고
 주제어  [칸트]
 자료출처  권오경  성경본문  
 내용

1. 서론
2. 형이상학 완성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3. 도덕의 기준 확립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4. 결론

 

 

 

1. 서론

 


본 연구의 목적은,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밝히고 정당화함으로써,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을 요구하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볼 때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체계의 구조에 따라 칸트의 전체 철학이 빈틈없이 얽혀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를 간과하고 부분적인 지식들에 얽매이게 된다면, 자칫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이는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곡해하기 쉽게 만들며, 실제로 많은 변용과 남용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본 연구는 칸트 비판철학의 체계적인 구조의 틀을 도덕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도덕 형이상학은 칸트의 실천적 관심사, 특히 윤리설과 관련이 깊다. 물론 비판철학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근간을 사변적인 이성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더 명료한 근거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판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살펴볼 때 오히려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말대로 "예비학"1)으로서의 역할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 볼 수 있다. 특히 칸트의 시(詩)구절과도 같은 다음의 말은 더욱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나는 신앙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지식을 지양해야 했다."2) 여기서 "지식"이란 이성의 이론적 사변적 사용을 뜻한다. "신앙"이란 도덕적 신앙(moralischer Glaube)을 뜻하는 것이요, 이는 곧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실천적 사용의 최고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 도덕 형이상학임을 상기한다면, 이는 결국 도덕 형이상학을 위하여 사변이성의 권한과 범위를 제한해야만 했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정당하다면 칸트의 전체 철학 체계에 있어서 이성의 사변적 사용보다 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이 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핵심적인 위치라는 것은 전체 체계 속에서의 중핵(中核)이라는 뜻이요, 이는 전체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벼리(綱)3)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에 대한 연구는 곧 칸트 철학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것은 칸트 철학 전반의 요석(要石, Schlußstein)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말하는 철학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본래의 한계를 오인하는 이성의 환영(幻影)을 폭로하고 우리의 개념들을 명확하게 해명하여 사변의 헛된 자만(Eigendünkel)으로 하여금 겸허하고도 근본적인 자기 인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4) 이 말은 단지 사변적인 이성 사용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사용까지 모두 포함하는 전체 인간 이성 사용의 규준(Kanon)을 밝히고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칸트의 본래적인 의도를 볼 때 당연히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대하여 그 우위성을 주장하는 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에 대한 명료한 규준의 제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대한 규준의 제시는 단순히 이성의 실천적인 사용의 해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실천적인 관심과 사용이 사변적인 관심과 사용보다 더 우위(Primat)를 차지한다면 당연히 전자는 후자의 규정근거로서의 우월성을 지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5) 따라서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대한 규준의 제시는 칸트가 말하는 전체 철학 체계의 규준을 제시하는 것이요, 그 체계의 완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의 규준 제시 작업이 바로 도덕 형이상학인 것이다. 따라서 도덕 형이상학은 칸트 철학 전반의 체계적 완성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그리고 그 자체 완성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의 완성이라는 측면과, 도덕의 기준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보고 그 의미를 따져볼 것이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본래적인 형이상학의 완성과 이를 통한 인간의 전체적인 규정이라는 칸트의 본래적인 의도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2. 형이상학 완성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본 장에서는 형이상학의 본래적 의도가 인간 이성의 비판6)을 통한 전체 인간의 본질 규정이라는 칸트의 설명을 살펴봄으로써,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을 새로운 형이상학의 완성으로서 필연적(notwendig)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칸트가 말하는 철학이란 결코 선대의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역사적인 형태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주어진 것에서의 이성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것은 원리에 기본한 이성 인식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모사적 능력이 아니라 이성의 산출적인 능력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란 인간 이성 자체의 힘으로부터 사고 수행을 통해 얻어내는 이성적 인식이지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역사적인 인식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지 철학함(Philosophieren)일 뿐이다.7) 철학에 대한 이러한 칸트의 설명에 대한 선이해(先理解)는 그의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즉 칸트가 말하는 철학의 정의가 이러한 것이라면 형이상학도 역시 역사적인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인간 이성의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형이상학은 존재한다.8) 실제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초월한 존재자로 믿어지는 어떤 절대적 존재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능력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자라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포착되는 대상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 즉 오감(五感)에 포착된다는 것은 이미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곧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존재자라는 그 자신의 정의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에서 자유로운 무제약자여야만 한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감성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초감성적 존재자라는 뜻이다. 이러한 초감성적 존재자에 대한 인식이 바로 형이상학의 궁극 목적인 것이다.9) 따라서 인간은 그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그를 극복한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추구를 그 본질로 삼는 이성의 본성상 이미 형이상학의 세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인간의 본성상 형이상학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인간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을 본래적인 것이게끔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 인간은 형이상학을 통해 무엇을 진정으로 알 수 있고 발생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인가? 본 장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사변이성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이성비판』의 의도를 진정한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공사로 보고, 이를 토대로 칸트가 말하고 있는 진정한 형이상학의 완성이라는 것이 바로 필연적으로 도덕 형이상학을 요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2.1. 『순수이성비판』의 의도       

 

 "어떻게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가능한가?"10)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재판 [들어가는 말]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 질문은 사실상 그의 전 비판철학의 여정의 약도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학(Wissenschaft)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체계(System)이다. 칸트에 따르면 체계는 이성으로부터 주어진 초월적 이념에 의하여 그 형식과 범위가 결정된, 다양한 인식들의 조직이다.11) 이는 이성의 건축술에 의거한다. 이성의 건축술이란 학적 체계를 구성하는 기술이요, 인식의 한갓된 집합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이러한 특성에 따른 학이라는 것은 건축술적 체계를 뜻한다. 이것은 단순히 외적 통일만을 노리는 기술적 체계와는 다르다. 건축술적 체계는 칸트의 예에서 보듯이 유기체와 같은 것이다.12) 유기체라는 것은 그 신체의 일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부분들 자체만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각각의 부분들은 그것들이 마치 전체 유기체의 목적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이에 상응하여 각자가 자신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가 말하는 건축술적 체계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여러 다양한 인식들이 복종해야 할 전체 체계의 목적이라는 것은 이성의 이념이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건축술적 체계라는 것은 이성의 이념이 도식화(schematisieren)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 그런데 앞에서 인용된 문장에 따르면 이성의 이념이 도식화된 것으로서의 체계인 학이라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이어야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바로 이성의 본성14)에 의한 것이요, 그것이 만약 진정한 것이라면 논리적 모순이 없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이어야 한다.15) 이렇게 앞에서 인용된 문장을 해석할 수 있다면, 이 문장에서 보이는 칸트 비판철학의 약도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인간의 이성을 통한 인식의 정당한 규준의 제시가 먼저 구명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인간 인식의 구명된 규준을 바탕으로 하여 정당하게 초감성적인 것으로의 초월이 가능함을 밝혀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이론적인 토대지움이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완수되었을 때 하나의 완전한 체계, 즉 인간에 대한 통일적 전체 규정으로서의 형이상학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이성비판』의 근본적인 의도는 바로 첫 번째 작업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성 자신에 대한 이성의 비판을 통해 자기 본래의 한계를 오인하는 이성의 환영을 폭로하고, 우리의 개념들을 명확하게 해명하여 사변의 헛된 자만(Eigendünkel)으로 하여금 겸허(Demüt)하고도 근본적인 자기 인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이다. 이는 곧 철학의 근본 의도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은 이성의 모든 진행을 이성 자신의 가장 명백한 조명에서 밝여야 한다. 즉 순수이성의 비판이라는 참된 법정에서 이성 자신의 전체 체계와 능력과의 적격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성은 그 자신의 한계를 제시해야만 한다.16) 그런데 한계의 제시라는 것은 그 안에서 안주하고자 하는 안일한 소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가상(假象)의 암초로부터 참된 진리의 육지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단단한 기반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작업이다. 이는 종래의 독단적이고 맹목적인 연구들과 회의주의라는 파괴적인 세력으로부터 형이상학을 구하려는 이성 자신의 노력이다. 이를 통해 성립하는 형이상학의 개념이 바로 강단 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이다. 강단 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이란 인간 인식의 제 1원리의 학문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전문학술적 개념(Schulbegriff)으로서의 학으로, 철학적 앎의 체계적 통일을 목적으로 삼는, 따라서 인식의 논리적 완전성을 목적으로 삼는, 인식 체계의 개념이다.17) 물론 이것으로써 이성의 본래적 목적이 달성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강단 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다시금 그것의 마지막 근거를 필요로 한다. 즉 모든 인식을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과 관련시키는 학을 필요로 한다.18) 그리고 그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형이상학이요, 본래적 형이상학이다. "철학은 모든 인식의 인간 이성의 본질적(학술적 또 도덕적) 목적들에 대한 관계의 학문이다."19) 그러나 일단 『순수이성비판』의 원리론과 변증론에서 밝혀진 것은 앞서의 강단 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이다. 이는 순수오성의 올바른 사용의 규준을 제시한 것이요, 인간 인식의 정당한 한계점 설정이다. 이는 아직 완전한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의 제시도 아니요, 아직 진정한 형이상학의 완전한 제시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첫 번째 여정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바로 세우기 위한 기반을 닦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선험적인 순수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을 연구하는 예비학"20)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앞에서 밝혀진 비판철학의 약도에 따라서 두 번째의 여정, 즉 본래적 형이상학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 원칙 체계와 그 범위가 제시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칸트는 이것이 이성의 실천적 관심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2.2. 본래적 형이상학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이성은 본성상 체계적이며, 건축술적이다.

 

다시 말해서 건축론적 체계로서의 학문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성의 자기 비판은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세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절에서 밝혀졌듯이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성립된 것은 강단 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이었다. 그것은 아직 진정한 형이상학으로서의 완전한 인간 규정은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형이상학이란 "세계적 개념(Weltbegriff)"21)에 의한 형이상학이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지 않은 완전한 체계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성의 궁극적 목적, 즉 자유,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야만 한다.22)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서는 밝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감관에 대응하는 아무런 대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무시하거나 폐기할 수도 없는 것이 이성의 본성상 불가피한 것이라면 이것의 완전한 해결만이 진정으로 완성된 형이상학의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칸트의 실천적인 관심사와 만날 수 있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단순히 이성의 사변적, 이론적 사용에 머물러 있는 이상 그것은 변증적 모순을 피할 수 없으며, 또한 이성 본래의 욕구 충족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이론적 영역을 초월한 실천적 영역으로의 이행(Übergang)을 단행한다.

 

이러한 이행은 이성이 오로지 감성적인 자연만을 대상으로 하는 사고에서 해방되어 초감성적인 세계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이요, 이성 스스로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다.23) 이러한 이행의 완성은 무엇을 통해서 밝혀져야만 하는가? 이행의 단초는 변증론에서 밝혀진 초월적 자유의 이념24)이다. 사변 이성의 비판에서는 소극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가능성만 인정되었던 자유는 이제 이성의 실천적 관심에서 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 탐구의 수단으로 쓰인다. 인간은 실천적 자유, 즉 의지의 자유의 주체로서 자유로운 의지 결정을 통해 자연법칙, 즉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감성세계로부터 예지계에로의 진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25) 그런데 이러한 이행은 무규칙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정당한 법칙을 요구한다. 그런데 법칙은 오직 인간의 통일적 전체 규정 체계로서의 학을 통해서만 제시된다. 따라서 모든 인식을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과 관련시키는 학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본래적 형이상학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들에 대한 관계의 학문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간 자신에 대한 문제요, 인간의 전체적 규정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세계 개념이요, 지혜(Weisheit)인 것이다.26) 이러한 본래적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형이상학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만을 제시할 뿐이요27), 이것은 곧 인간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대한 규준 제시인 도덕 형이상학이다.28) 따라서 형이상학의 완전한 체계라는 것은 오로지 도덕 형이상학의 완전한 체계적 수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이성의 본래적 관심사들, 즉 신, 영혼불멸과 같은 이념들의 객관적 타당성 확립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실천적 이성이 사변적 이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통해 증명된다. 그러나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의 규준 제시인, 도덕 형이상학이 주는 지혜는 비록 가상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아무리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존시 어느 한순간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의 "신성성(Heiligkeit)"29)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의 본성상 거부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은 오직 요청(Postulat)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유한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규정이요, 동시에 인간의 가상적 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이는 이미 보았듯이 오로지 도덕 형이상학을 통해서 인간에게 제시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칸트가 말하고 있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통일적인 전체적 규정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것은 단순히 감성적 세계의 인과법칙에 얽매여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뿐만 아니라 가상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정까지 포함하는 통일적인 전체적 규정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이성을 통한 자기 반성과 규정이므로, 그 전체에 대한 규정이거나 혹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완전한 체계, 즉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본래적 관심사인 실천적 영역에서의 인간의 가상적 본질에 대한 이론적 토대지움30)인 도덕 형이상학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도덕의 기준 확립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Ⅱ부인 선험적 방법론에서 이성의 관심사들을 밝히고 있다. 이 질문들은 사실상 그의 비판철학 전 과정에 있어서의 근본 의도들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칸트는 다시 질문들의 최종적인 귀착점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밝히고 있다.31) 그렇다면 질문들이 제시하고자하는 바, 즉 전체 인간 이성을 통한 탐구의 과정이 결과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인간의 사변적, 실천적인 모든 관심사와 능력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인 인간에 대한 규정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탐구는 단순히 주어진 것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사변적인 앎의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새로운 인과계열을 개시하는 인간의 실천적인 행위의 차원에 대한 것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실천적인 행위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을 통한 행위의 도출이다.32) 그런데 자유로운 의지 결정이라는 것이 인간 전체에 대한 규정이 될 수 있으려면 보편적인 법칙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만인이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으로서 반드시 그렇게 의욕(Wollen)할 수 있어야만 하는 법칙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실천적인 확장을 위해서는 이미 이론적인 토대지움, 즉 법칙의 제시와 제한이 있어야 한다33). 좀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비판철학의 근본 의도인 인간 이성 사용의 규준 제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34) 결과적으로 인간 이성의 규준 제시가 완성되었을 때 인간에 대한 전체적 규정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규정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본래적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아니라 도덕 형이상학이다. 이는 곧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위해야 옳은가라는 윤리설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칸트가 밝힌 순수이성의 근본적인 관심사 중에서 두 번째의 것인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 즉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제에 있어서 우선 순수 도덕의 성립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살펴봄으로써 도덕 형이상학이 정당화됨을 탐구하도록 하겠다. 이를 바탕으로 전체 인간의 본질 규정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이 필연적으로 요구됨을 탐구하도록 하겠다. 3.1. 순수 도덕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의 머리말에서 철학의 전반적인 분류를 제시하고 있다. 이 분류에 따르면 철학은 이성의 모든 인식에 있어서 실질적(material)이어서 어떤 대상을 고찰하는 학문과 오로지 형식적(formel)이어서 대상의 구별 없이 오성과 이성 자체의 형식과 사고 일반의 보편적인 규칙만을 연구하는 학문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후자는 형식적 철학으로서 논리학이다. 전자는 다시 특정의 여러 대상과 그 대상이 종속하는 바 여러 법칙을 다루는 실질적 철학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다루는 물리학과 자유의 법칙을 다루는 윤리학으로 나뉜다. 순전히 형식적인 철학으로서의 논리학은 경험적인 부분을 가질 수 없으나 자연철학과 도덕철학은 각각 경험적인 부분을 지닐 수 있다. 이에 실질적 철학은 다시 경험적인 부분과 합리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철학이 경험에 의거할 경우 경험적 철학이라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적으로 선험적 원리로부터 전개하는 철학은 순수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순수철학은 그것이 단지 형식적이라면 논리학이라고 하며, 오성의 특정 대상에 제한되어 있으면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이에 자연철학과 도덕철학의 각각의 합리적인 부분에 대하여 자연의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의 이념을 지닐 수 있다.35) 이러한 구분 끝에 칸트는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오직 경험적이어서 인간학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도        덕철학을 마련해 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36) 칸트의 이러한 요구를 앞서의 분류에 따라서 해석한다면 오직 경험적이어서 인간학, 즉 심리학에 속하는 것은 실천적37) 인간학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도덕철학이라는 것은 바로 도덕 형이상학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칸트는 단지 경험적인 사실들에 대한 탐구로서의 학문과는 별도로 완전히 경험을 배제한 선험적인 학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 있다. 칸트는 이와 같은 순수 도덕철학이 필요한 것은 의무와 도덕법과의 통속적 상식으로부터 명백하다고 주장한다.38) 왜냐하면 어떤 법칙이 도덕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의무의 근거로서 타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의무의 근거가 인간의 자연적 성질에서나 혹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환경에서 탐구된다면 그것은 실천적 규칙(praktische Regel)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필연성을 지니는 도덕적 법칙(moralisches Gesetz)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의 근거는 오직 순수이성의 순수개념에서만 선험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39)

 

왜냐하면 만약 경험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어떤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경험을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 아니 똑같은 경험을 했을 지라도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인 인간에 의해서 그 판단의 진위가 달라질 것이며, 그렇다면 그러한 법칙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당위성을 지닐 수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도덕의 법칙은 단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자칫 윤리학을 단지 자기애(Selbstliebe)의 만족을 위한 수단적인 학문으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건전한 상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바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도덕적 당위의 상황에 직면할 때 보통의 상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너와 똑같이 행위해야 하는 이유가 너의 경험이나 판단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항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직면해서 만약 도덕의 법칙이 절대적 당위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인정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그렇다고 공감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개인에게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도덕철학은 인식의 순수한 부분에 기인하고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비록 도덕적 당위가 순수한 인식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고려로부터 연역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40)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이성의 사용의 근거 제시는 결코 경험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 형이상학은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 안에 선험적으로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사변적 동인에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도덕을 이끄는 실마리와 정확한 도덕판단을 위한 최고의 규범이 없는 한 도덕 자체가 모든 종류의 타락으로 빠지기 때문이다."41) 3.2. 인간의 본질 규정 도덕 형이상학은 순수 도덕으로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순수 도덕을 무엇보다도 먼저 확립하려고 했던 칸트의 의도는 바로 앞 절의 마지막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연한다면, 순수 도덕의 확립이 선행되지 않을 경우 도덕 자체가 삶의 기술로서의 처세술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순수 도덕, 즉 도덕 형이상학이 노리고 있는 바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규정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인간 자신의 타락이다.42) 물론 이러한 점을 칸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앞 절의 인용한 문장을 보도록 하자. 이 문장 안에는 칸트의 도덕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본래적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근본 의도가 담겨 있다. 이성의 본래적인 관심사인 초감성적 존재자들에 대한 탐구가 바로 본래적 형이상학의 근본 의도라면, 우리의 이성 안에 선험적으로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사변적 동인이라는 것은 본래적 형이상학의 정초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도덕 판단을 위한 최고 규범의 제시라는 것은 바로 인간 이성, 특히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의 규준을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순수 도덕, 즉 도덕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2.1. 인간의 본질 규정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 칸트가 말하는 도덕 형이상학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오직 형식(Formel)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실질(Materie)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질이라는 것은 실제 행위의 결과물로서의 대상적인 내용을 뜻한다. 이는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형식을 말한다는 것은 곧 의지 결정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필연적인 형식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별적인 인간 존재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로지 순수이성에 그 기원과 좌석을 둔 순수이성의 개념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건전한 상식을 지닌 인간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용하고 있는 주어져 있는 것이다.43) 이렇게 보편적이면서도 필연적인 형식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도덕법(moralisches Gesetz)"44)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이미 인간에게 "순수이성의 사실(das Faktum der reinen Vernunft)"45)로서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도덕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개인적 준칙의 전형(Typus)이다.46) 다시 말해서 형식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 결정의 순간에 있어서 자신의 준칙을 이것에 견주어 봄으로써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도덕적 타당성의 조건이란 도덕법과의 일치, 즉 보편적인 형식과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과 같이 지적 직관을 가지지 못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다시 말해서 예지계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감성계에도 속한, 그래서 항상 감성적인 충동에 얽매여 있는 유한한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도덕법을 인식했다고 해서 항상 도덕법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도덕법은 인간에게 강제(Verbindlichkeit)로써 가해진다.47) 다시 말해서 정언명법의 형식48)으로서 주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순히 도덕법을 주어진 것으로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칸트가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 의지의 타율(Heteronomie)49)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의지의 타율로서의 주어진 도덕법에 따르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나 책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는 곧 도덕이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50) 이것을 역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 결정이 가능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곧 도덕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덕법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그 형식이 주어져 있는 것이요, 이것에 따라 자신의 의지의 준칙을 보편적인 형식으로 의욕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도덕법에 따른다는 것은 곧 인간이 단지 가능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현실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51)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자기 입법의 능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인간 의지의 자율(Autonomie)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보편적인 자기 입법에 의하여 도덕적일 수 있다.52) 물론 이러한 자유의 현실화는 결코 무책임하고 방임적인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만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의욕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도덕 형이상학이 형식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구명하고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자율적 입법의 규준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중적 존재자로서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 존재자의 의지의 성질, 즉 성격(Charakter)53)을 도덕적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확립은 오로지 보편적인 자기 입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물론 이것의 바탕은 인간의 실천적인, 즉 의지 결정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3.2.2. 최고선의 실현 : 자연과 자유의 합일 인간의 본질을 자유로 밝힌 칸트는 인간이 정당하게 희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정당하게 희망할 수 있는 것을 밝히는 작업은 도덕54)을 종교와 만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이 종교적 교리로 변질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신앙으로서의 종교이다. 왜냐하면 도덕과 종교가 만나는 연결점이란 바로 이성의 실천적(의지 결정적) 사용에 있어서 필연적인 목적인 바 최고선(das höchste Gut)의 이념이기 때문이다.55) 다시 말해서 도덕적 궁극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의 실현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절대적 존재자, 즉 신과 영혼의 불멸이 요청(Postulat)되고, 바로 이 점에서 도덕은 종교로 진행하게 된다. 사실 도덕이란 행복론이 아니다. 도덕은 오직 행복에의 합리적 조건만을 문제 삼는다. 다시 말해서 도덕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행복하도록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답변을 찾는 이설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 우리가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Würde)이 있겠는가에 대한 답변을 찾는 이설이다.56) 따라서 만약 도덕이 행복에의 희망을 허용한다면 종교에로의 진행이 이루어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최고선이란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으로서의 덕과 행복이 정비례로 배여(配與)되어 있는 상태이다.57) 이때 행복할 만한 자격으로서의 덕(Tugend)이란 최고선의 최상 조건으로서의 최상선(das oberste Gut)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의지가 도덕법과 일치되어 있는 상태, 즉 도덕성을 말한다.58) 이러한 도덕성과 그에 비례하여 주어진 행복의 결합이 바로 최고선이요, 인간의 실천이성이 궁극 목적으로 삼는 바이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행복이란 "이승에 사는 이성적 존재자가 자기의 존재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상태"59)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행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이성적 존재자의 전(全)목적에 일치해야만 하며, 동시에 자연이 이성존재자의 의지의 본질적인 규정근거에 일치할 때에만 가능하다.60) 그러나 사고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도출할 수 있는 신적인 직관 능력이 없는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연 세계에 있어서 일어나는 일은 사실상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도 일부인 자연의 이러한 우연적인 사건들을 인간 자신의 의지에 본질적, 필연적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다. 즉 무능력하다. 그러나 인간의 실천적 이성이 최고선을 목표로 삼는 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무능력에 대한 보충으로서 실천적 관점에서의 요청(Postulat) 개념이 제시된다.61)

 

그것은 인간의 삶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인격의 지속을 통해, 도덕성과의 합치라는 의지의 완전성(Vollkommenheit)으로의 끊임없는 전진을 보장하기 위한 "영혼의 불멸(die Unsterblichkeit der Seele)"62)과 그러한 도덕성에 일치하여 주어질 행복을 보장하는 최고 존재자로서의 신, 즉 "신의 실존(die Existenz Gottes)"63)이다.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보충으로서 요청(Postulat)된 이 두 개념은 최고선을 위한 전제이다. 이것은 곧 실천 이성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을 위한 것이요, 사변 이성에서 단지 사유될 수만 있었던 절대적 무제약자의 이념이 이성의 실천적 측면에서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제를 통해서 인간 이성은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것을 의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선의 실현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도덕적인 지적 세계의 감성화이다.64) 최고선이라는 것은 실천이성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 세계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단순히 사물들의 집합체로서의 세계는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성의 법칙 아래에 놓여 있는 감성계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앞에서 요청한 신이 도덕적 세계 창조주(der moralische Welturheber)로서 통치하는 도덕적 왕국이요, 세계 전체로서의 자연이다.65) 즉 도덕적 목적 실현을 위한 목적의 왕국(Reich der Zwecke)은 자연의 왕국(Reich der Natur)이다.66)

 

사실 이 세계에서 구현되는 최고선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현실 자체가 도덕적 본질의 참된 표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의 세계를 이념적 근거로 하여 현상 세계를 도덕적 이념의 현실적 결과로 전개시키는 것이다.67) 이러한 것이 가능하려면 인간의 가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측면까지 모두 도덕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가상적 측면이든 감성적 측면이든지 간에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도덕적으로 어긋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감성적인 경험 자아와 초월적인 순수 자아의 완전한 합일을 뜻하는 것이요,68) 이승에 사는 이성적 존재자가 자기의 존재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인 행복이다. 이러한 합일이 가능한 것은 가상체로서의 인격이 자연 법칙적 인과성의 규정근거가 되기 때문이다.69) 역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인간 존재자가 두 세계를 매개할 수 있는 존재자임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자는 이중적 존재자로서 매 순간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 결정을 통해 새로운 인과계열을 개시한다. 인간의 본질로 규명된 자유는 도덕적 행위자의 행위를 통해서 인과법칙 자체를 파괴함 없이 그 고리를 끊는다.70) 이를 통해 인간은 이 세계를 단순히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로서가 아니라 도덕적 목적을 궁극 목적으로 삼는 목적론적 세계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세계 안에서 최고선의 실현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의 조화의 영역이요, 자연법칙과 자유법칙이 합일하는 장소이다.71) 그런데 자연과 자유의 합일이라는 최고선의 실현에서 도덕 형이상학은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궁극 목적으로서의 최고선, 즉 자연과 자유의 통합이라는 것은 우리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궁극 목적이 생겨나는 원천에 대한 이론적 개념들, 즉 요청 개념들이 먼저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72) 그것은 오로지 도덕 형이상학이 노리고 있는 바요, 도덕 형이상학의 궁극 목적이다. 이에 도덕 형이상학은 최고선의 실현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도덕 형이상학은 인간의 본질로서의 자연과 자유의 합일에 대한 이론적 토대지움이기 때문이다.

 

 

 

4. 결론

 


본 연구는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에의 요구를 두 가지 방향에서 탐구하였다. 이러한 탐구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결론들을 살펴본다면, 먼저 칸트가 말하는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완성에 있어서 도덕 형이상학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야 함을 탐구하였다. 이를 통해 칸트가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인간의 통일적인 전체적 규정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의 완성을 위해서는 인간의 가상적 본질에 대한 규정인 도덕 형이상학이 본래적 형이상학으로서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야함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사실상 인간의 본질 규정이라는 차원에서 도덕의 기준 확립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에의 요구를 탐구하였다. 그 결과 순수 도덕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은 인간의 가상적 본질이 자유라는 것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인간을 단순히 감성계의 인과법칙에만 종속된 존재자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 결정을 통해 새로운 목적의 설정과 이를 현실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는 자연과 자유의 합일의 장소로서, 즉 최고선의 실현 장소로서 규정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탐구들에서 도덕 형이상학이 감성계와 예지계에 모두 속한 유한한 인간 존재자에 대한 초월적 인간 규정을 제시하는 이론적인 토대지움으로써 칸트 비판철학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요구됨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 볼 때, 칸트가 말하고 있는 본래적인 형이상학이란 인간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예지적인 측면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이면서도 체계적인 학문이어야 한다. 따라서 감성계에서 예지계에로의 초월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월은 유한한 인간 존재자의 특성상 사변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하였고 실천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실천적 측면에서의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연구, 즉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그것을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고 있는 도덕 형이상학은 단순히 이론적인 완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래적 목적의 실현, 다시 말해서 최고선의 이념을 실천적으로 규정하는 일, 즉 우리의 이성적 태도의 준칙이 되기에 충분하도록 규정하는 일에서 지혜론이다. 이것은 이승에서 최고선이 완성되기를 정당하게 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제시요, 감성계와 예지계의 합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계와 예지계의 합일로서의 최고선은 결국 인간의 전체적인 도덕적 완전성이라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바로 최고선의 주체이자, 도덕적 세계의 주체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을 요구하는 의미는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요, 그 해결을 제시함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즉 인간이 도덕적인 주체로 거듭남으로써 이 세계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요구인 것이다.

 


참고문헌 

1. 칸트의 저작(출판 연도 순)

1.『Kritik der reinen Vernunft(순수이성비판)(1781, 1787)』,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4.

2.『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auftreten können(철학서론)(1783)』,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7.

3.『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도덕 형이상학 원론)(1785)』, 최재희 역, 서울:    박영사, 1997.

4.『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실천이성비판)(1788)』,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7.

5.『Logik, ein Handbuch zu Vorlesungen(1800)』, Hrsg. von Wilhelm  Weischedel, Darmstadt:Wissenschaftlidhe Buchgesellschaft, 1983. 2. 다른 사람의 저작

 


(저자 이름의 가나다순)

1. 공병혜, 『칸트, 판단력 비판』, 울산:울산대 출판부, 1999.

2. 박선목, 『칸트철학에로 가는 길』, 부산:부산대 출판부, 1987.

3. 소광희, 이석주, 김정선 공저, 『철학의 제문제』, 서울:벽호, 1990.

4.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5. Höffe, O. Immanuel Kant(임마누엘 칸트), 이상헌 역, 서울:문예출판사, 1997.

6. Paton, H. J. The Categorical Imperative:A Study in Kant's Moral Philosophy(칸트의 도덕철학), 김성호 역, 서울:서광사, 1988.

7. Pieper, A. Einfürung in die Ethik(현대윤리학 입문), 진교훈, 유지한 역, 서울:철학과 현실사, 1999.

8. 랄프 루드비히, 『순수이성비판』, 박중목 역, 서울:이학사, 1999.

9. 『論語』

 


3. 논문류(저자 이름의 가나다순)

1. 공병혜, "자연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의 윤리적 목적의 실현",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2. 김광명, "칸트에 있어서 미와 도덕성의 문제",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3. 문성학, "칸트의 양립론",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4. 박찬구, "윤리학의 학문적 성격과 과제", 『윤리학과 윤리교육』-진교훈 교수 회갑기념논문집, 서울:경문사, 1997.

5.      , "칸트 윤리학에서의 자율 개념 형성 과정", 『국민윤리연구』 34호, 서울:한국국민윤리학회, 1995.

6.       , "흄과 칸트에 있어서의 도덕감", 『철학』 44집, 한국철학회, 서울:관악사, 1995, 가을.

7. 박채옥, "자유와 필연의 가능성", 『칸트와 형이상학』,  한국칸트학회 편, 서울:민음사, 1995.

8. 손봉호, "칸트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칸트와 형이상학』, 한국 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5.

 


* 이 논문은 필자의 2000년 2월 석사학위 취득 논문에서 일부를 발췌 수정한 것임.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윤리교육전공 석사과정, 서울 중동고 윤리 강사.

 


1)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순수이성비판)』,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4), p. 574(B869). (앞으로는 『K.d.r.V』로 인용한다. 번역서의 페이지와 함께 번역서에 표시되어 있는 원전의 페이지를 괄호 안에 같이 표기한다.)

2)『K.d.r.V』, p. 39(B XXX).

3) 벼리란 삼강(三綱)의 강(綱)의 의미이다. 그 뜻을 보면 그물에 있어서 가장 굵은 줄이 바로 벼리이다. 그 줄을 근거로 하여 그물망들이 뻗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4)『K.d.r.V』, p. 518(B763), 참조.

5) 칸트가 사용하고 있는 우위(Primat)의 의미는 일자가 모든 타자와 결합하는 데 있어서, 그 일자가 첫째의 규정근거로써의 우월을 뜻한다. (I. 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실천이성비판)』,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7), p. 131, 참조. (앞으로는 『K.d.p.V』로 인용한다.))

6) 칸트가 사용하고 있는 비판(Kritik)이라는 말은 독일어의 조사하다(untersuchen), 검사하다(prüfen)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희랍어 krinein(구분하다, 판단하다, 법정에 세우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비판이라는 말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한계를 원리로부터 규정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O. Höffe, Immanuel Kant(임마누엘 칸트), 이상헌 역, (서울:문예출판사, 1997), p. 59, 참조. ; 랄프 루드비히, 『순수이성비판』, 박중목 역, (서울:이학사, 1999), p. 20, 참조.) 칸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비판이란 책들과 체계들의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능력 일반의 비판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비판은, 이성이 모든 경험에서 독립하여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관해서이다. 따라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에 대한 결정, 가능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원천, 범위, 한계 등의 규정을 의미한다." (『K.d.r.V』, p. 21(A XII).)

7)『K.d.r.V』, pp. 571∼572(B864∼866), 참조.

8) I. Kant,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철학서론)』,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7). p. 357, 참조. (앞으로는 『Prolegomena』로 인용한다.) ;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 39, 참조.

9)『K.d.r.V』, p. 286(B395), 참조.

10)『K.d.r.V』, p. 66(B22). ;『철학서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이상학과 같은 것이 도대체 과연 가능한가?", "도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 것이냐?"『Prolegomena』, p. 259, p. 277.

11)『K.d.r.V』, p. 569(B860), 참조. ; 손봉호, "칸트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칸트와 형이상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5), pp. 17∼18, 참조.

12)『K.d.r.V』, pp. 569∼570(B860∼861), 참조.

13) 칸트의 초월철학 체계에서는 이념의 도식을 개념의 도식과 구별하여 상징(Symbol)이나 유사물(Analogon)이라는 말들로 대용되고 있다. 이때 상징이나 유사물이 뜻하고 있는 바는 선험적 개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현시요, 초감성적인 것이 감성화된 것이다.(손봉호, "칸트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칸트와 형이상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5), p. 21, 참조. ; 김광명, "칸트에 있어 미와 도덕성의 문제",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p. 238, 참조.) 따라서 '체계는 이념의 도식화이다'라는 말은 순수이성의 이념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서의 체계라는 말이 된다.

14) 이성의 본성은 체계적이며, 건축술적이다. 다시 말해서 체계 세우기를 좋아한다.(『K.d.r.V』, p. 49(A5∼6), p. 376(B502), pp. 518∼519(B764∼766), 참조.)

15) 형이상학이 하나의 완전한 체계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그 근원을 인간 이성에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인간의 통일적인 전체적 규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전체로서의 인간 자신이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규정만이 가능한 것이지 각각의 부분들에 대한 개별적인 측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rolegomena』, p. 266, 참조. ;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p. 44∼45, 참조.)

16) 이것이 바로 칸트의 초월철학의 의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존재론의 근거지움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초이다. (한자경, 앞의 책, p. 56, 참조.) 칸트가 말하는 존재론이란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과 관계하고, 따라서 경험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한에 있어서의 모든 오성 개념과 원칙들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는 "강단 개념의 형이상학"의 토대지움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새로운 형이상학, 즉 독단적이거나 회의적인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공사이다. 이때 독단주의나 회의주의의 문제는 인간 이성 능력에 대한 비판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한 그것의 권한과 범위가 먼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이성의 무한한 능력 내지는 무능함에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한자경, 앞의 책, pp. 55∼56, p. 63, p. 68, 참조.) 그러나 칸트는 "회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물론 이성의 문제에 대한 만족을 주지는 않으나 이성의 신중성을 환기하고 이성에서 합법적인 소유를 확보시킬 수 있는 근본책을 지시하기 위하여 예습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보고 "독단적인 궤변론자를 오성과 이성 자신의 건전한 비판으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라고 하여, 이성의 훈련에 있어서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K.d.r.V』, p. 536(B797), 참조.)

17)『K.d.r.V』p. 573(B865∼866), 참조. ;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 41, 참조.

18)『K.d.p.V』, p. 154, 참조.

19)『K.d.r.V』, p. 573(B867). (괄호는 역자 주임)

20)『K.d.r.V』, p. 574(B869).

21)『K.d.r.V』, p. 573(B866∼867).

22) 손봉호, "칸트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칸트와 형이상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5), p. 26, 참조. ; "형이상학은 그 탐구의 본래 목적으로서 하나님, 자유, 영생이라는 세 종류의 이념만을 갖는다. ........ 형이상학이 이러한 이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과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을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K.d.r.V』, p. 286(B395).

23) 손봉호, 앞의 글,  p. 27, 참조.

24) 우주론적 이념에 대한 이율배반 중 세 번째의 것은 곧 자연법칙으로서의 인과법칙과 그에 상반되는 자유로부터의 원인성(die Kausalität aus Freiheit)이다.(『K.d.r.V』, p. 360(B472), 참조. ; 『K.d.p.V』, p. 15, 참조.) 칸트는 여기에서 이성(순수이성)을 인간이 가상적인 주체로서 가진 능력이라고 간주한다.(박채옥, "자유와 필연의 가능성",『칸트와 형이상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5), p. 325, 참조.) 즉 행위 자신을 산출하는 능력으로 보고 있다.(『K.d.r.V』, p. 417(B578), 참조.) 따라서 이러한 이성을 지닌 인간은 가상적인 주체로서 자유로부터의 원인성을 통해 지금까지 있지 않았었던 새로운 인과계열을 산출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산출된 행위는 감성계에서 현실화되어야 한다. 즉 인과법칙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설명에서 칸트가 인간을 예지계와 감성계 양자에 모두 속한 이중적 존재자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유한성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차라리 감성적일 뿐이라면 이중적일 이유도 없다. 또 오로지 이성적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어느 한 세계에만 속한 것이 아니다. 신과 같이 오로지 예지계에만 속한 존재자인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감성계에만 속한 존재자인 것도 아니다. 이 양 세계에 모두 속한 유한한 존재자인 것이다. (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도덕형이상학 원론)』, 최재희 역, (서울:박영사, 1997),  pp. 243∼244, 참조. (앞으로는 『Grundlegung』으로 인용한다.) : 박찬구, "칸트 윤리학에서의 자율 개념 형성 과정", 『국민윤리연구』34호, (서울:한국국민윤리학회, 1995), p. 216, 참조.)

25)『Grundlegung』, p. 245, 참조.

26) "순수이성의 사변적인 제한과 순수이성의 실천적인 확장과는, 순수이성을, 이성일반이 합목적적(조화적)으로 쓰일 수 있는 동등성의 관계 중에 이제야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이런 보기(예)가 다른 어느 보기보다도 잘 증명하는 것은, 만일 지혜에 도달하는 길이 안전해서 차단되거나 방황하게 됨이 없어야 한다면, 그런 「지혜에의 길」은 우리 인간에 있어서 반드시 학문(철학)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이 「지혜에의 길」이라는 목표에 도달함을, 우리는 학문을 완성한 뒤에만 비로소 확신할 수가 있다."『K.d.p.V』, p. 154. (괄호는 역자 주임)

27)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p. 41∼42, 참조.

28) 칸트에 따르면 도덕 형이상학은 최고선의 이념을 실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즉 우리의 이성적 태도의 준칙이 되기에 충분하도록 규정함에 있어서 지혜론(Weisheitlehre)이라고 불리게 된다.(『K.d.p.V』, p. 120, 참조.)

29)『K.d.p.V』, p. 134.

30)『K.d.r.V』, p. 555∼556(B832∼836), 참조. ;『K.d.p.V』, p. 148, 참조. : 본 연구에서 "토대지움"은 "Grundlegung", 즉 "정초(定礎)"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도덕 형이상학은, 인간 순수 이성의 규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인간 이성의 정당한 사용 근거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31) 칸트가 밝히고 있는 이성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우선 첫 번째로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느냐?(Was kann ich wissen?)", 두 번째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Was soll ich tun?)",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것은 "내가 무엇을 바라서 좋은가?(Was darf ich hoffen?)" 등이다.(『K.d.r.V』, p. 555(B833), 참조.) 그런데 1800년에 출판된 『논리학』에서는 이상의 세 질문들이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Mensch?)"라는 좀 더 포괄적인 질문에 귀착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I. Kant, 『Logik, ein Handbuch zu Vorlesungen』, Hrsg. von Wilhelm Weischedel, Darmstadt:Wissenschaftlidhe Buchgesellschaft, 1983. S. 448. 참조.)

32)『K.d.r.V』, p. 553(B829∼830), 참조.

33)『K.d.p.V』, p. 148, 참조.

34)『K.d.r.V』, pp. 552∼553(B828∼832), 참조.

35)『Grundlegung』, pp. 183∼184, 참조. ; 『순수이성비판』의 방법론에서는 이러한 두 부분의 내용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형이상학은 순수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형이상학과 실천적 사용의 형이상학으로 나누인다. 즉 자연의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으로 나누인다. 전자는 만물의 이론적 인식에 관한 이성의 모든 순수한 원리, 한갓 개념에 기본한 이성의 모든 순수한 원리를 포함한다. 후자는 행동 태도를 선천적으로 규정하고 필연화하는 원리를 포함한다." 『K.d.r.V』, p. 574(B869).

36)『Grundlegung』,  p. 184.

37) 이때의 실천적(praktisch)의 의미는 의지 결정(Willensbestimmung)의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pragmatisch)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Grundlegung』, 역자 주석(註釋) 1번 참조.)

38)『Grundlegung』, p. 187, 참조.

39) 칸트의 설명을 좀더 살펴보자. "모든 도덕적 개념들은 철두철미 선험적으로 이성 안에 좌석과 기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개념의 기원의 이러한 순수성 중에 우리에게 최상의 실천 원리들이 될 수 있는 가치가 존립"하기 때문이다.(『Grundlegung』, p. 185, p. 206.)

40) "도덕적 의무를 도덕과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식론적인 고려로부터 연역해 내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할 것이다." (H. J. Paton, The Categorical Imperative:A Study in Kant's Moral Philosophy(칸트의 도덕철학), 김성호 역, (서울:서광사, 1988). p. 324.) 왜냐하면 전자(도덕)는 경험에 대하여 새롭게 발생하여야 할 것, 즉 당위에 대한 탐구이지만 후자(형이상학적, 인식론적 고려)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사변적인 앎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있는 것(사실)에서 있어야 할 것(당위)을 도출하려고 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소광희, 이석주, 김정선 공저, 『철학의 제문제』, (서울:벽호, 1990), p. 355, 참조.)

41)『Grundlegung』, p. 185.

42) 이것은 질서 개념으로서의 도덕(Moral)/윤리(Sitte)와 원리 개념으로서의 도덕성(Moralität)/윤리성(Sittlichkeit)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한 지역, 한 민족, 한 세대에 걸쳐 그 사회 내에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하나의 가치와 규범의 총체, 즉 집단 도덕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회의 가치와 규범의 총체적인 질서 체계이다. 그에 반하여 후자는 어떤 행위를 도덕적이게 하는 행위의 질을 결정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의 질서 개념으로서의 도덕/윤리를 비판, 평가하고 정당화해주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곧 제도로서의 도덕과 도덕의 정당화로서의 순수 도덕의 구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 Pieper, Einfürung in die Ethik(현대윤리학 입문), 진교훈, 유지한 역, (서울:철학과 현실사, 1999), pp. 21∼67, 참조.) 박찬구 교수는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하여 도덕의 정당화는 도덕을 이끌어주는 향도의 별로써, 이것의 상실은 곧바로 도덕의 타락이라고 설명한다. "참된 도덕이란 유한한 인간의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지기 쉬운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이상 세계의 예지로써 붙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찬구, "윤리학의 학문적 성격과 과제", 『윤리학과 윤리교육』-진교훈 교수 회갑 기념 논문집, (서울:경문사, 1997), p. 23.)

43)『K.d.p.V』, p. 26, pp. 28∼29, pp. 30∼31, 참조. ; 『Grundlegung』, p. 184, p. 185, p. 206, p. 237, 참조.

44)『K.d.p.V』, p. 31. ;  칸트에 따르면 도덕법은 행위의 형식적인 규정 근거이다. 그러나 동시에 도덕법은 행위 대상, 즉 선과 악의 실질적이며 객관적인 규정근거이다. 또한 그것은 주체의 감성에 영향을 미쳐 도덕적 감정을 낳는다는 점에서 행위에 대한 주관적인 규정근거이다. 즉 도덕법이 애착을 끊어버림으로써 인간은 우선 불쾌감을 느낀다. 이는 곧 애착의 단절이라는 고통의 감정을 일으킨다. 그러나 동시에 자만(Eigendünkel)를 쳐부수어 나감으로써 도덕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겸허(Demüt)하게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자기애(Selbstliebe)를 끊고 그 자신만으로 의지의 규정 근거인 점에서 도덕법은 그 자신에 대한 존경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도덕법에 대한 존경(Achtung)은 선험적인 유일한 감정인 것이요, 필연적인 것이다. 이는 행위의 주체 측면에서 볼 때 도덕적 동기이다. 따라서 도덕법은 그 자체 도덕적 동기이다. (『K.d.p.V』, pp. 82∼84, 참조. : 박찬구, "흄과 칸트에 있어서의 도덕감", 『철학』 44집, 한국철학회, (서울:관악사, 1995), 가을, pp. 102∼106, 참조.)

45) "근본 법칙의 의식을 우리는 이성의 사실이라고 이를 수 있다. ...... 이 근본법칙이 결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순수이성만이 갖는 사실(절대적 양심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K.d.p.V』, pp. 34∼35. (괄호 안의 내용은 역자 주임)

46)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자유에서의 원인성, 즉 인간 행위의 준칙이 판정받아야 할 때 자연법칙을 자유법칙의 전형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상식은 경험의 경우에 실례로 삼을 수 있는 것을 손 앞에 가지지 않고서는 순수한 실천이성의 법칙을 실용(實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법칙은 도덕적 원리들에 좇아서 행위의 준칙을 판정하는 전형이다". 이렇게 자연법칙이 전형으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것의 합법칙성 일반의 형식 때문이다. 즉 그 규정 근거를 어디에서 끌어내든지 법칙들 자신은 합법칙성 일반의 형식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K.d.p.V』, pp. 77∼78, 참조.) 칸트의 말을 직접 보자. "우리는 우리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행위의 도덕적 판단의 일반적 규준이다." (『Grundlegung』, p. 218.)

47) 칸트에 따르면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와 도덕 법칙을 따르는 의지는 다르다. 전자는 정언 명령을 인식하지만 필연적으로 이에 복종하지는 않는 의지를 뜻한다. 즉 유한한 존재자로서 경향성(Neigung)의 충동에 의하여 의지 규정 근거가 불순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 아닌 의지가 자율의 원리에 종속하는 것은 곧 도덕적 강제(Nötigung)요, 책무(Verbindlichlkeit)이다. 이 책무로부터 행위해야할 객관적 필연성이 의무(Pflicht)이다. 이에 반하여 후자는 도덕 법칙에 항상 부합되게 행동하는 의지이다. 즉 의지의 준칙이 자율의 법칙과 필연적으로 조화되어 있는 의지는 신성한 절대적인 선의지요, 자유를 현실화하는 의지이다. (『K.d.p.V』, p. 36, 참조. ; 『Grundlegung』, p. 232, 참조 ; 문성학, "칸트의 양립론",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p. 202, 참조.)

48) 칸트에 따르면 모든 명법은 당위(Sollen)로서 표현된다. 그들 명법은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구조 때문에 객관적 법칙으로써만 반드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의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명법이란 의욕 일반의 주관적인 법칙이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 즉 인간 의지의 주관적인 불완전성에 대하는 관계를 표현하는 법식(Formel)으로써 불완전한 인간 의지에 대한 강제로써 관계한다. 이때 어떤 경향성에서 생긴 제약도 전제하지 않고 어떤 행위를 선험적으로, 따라서 필연적으로 의지와 결합하는 초월적 종합 명제로서의 명법이 정언 명법(kategorischer Imperativ)이다. 이것은 어떤 행위의 의욕을 이미 전제된 어떤 다른 의욕으로부터 분석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서의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개념과 직접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언 명법이 종합명제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존재자의 불완전한 의지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의 결합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K.d.p.V』, p. 208, p. 214, p. 227, 참조.)

49) 칸트는 타율적인 모든 원리를 경험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전자는 곧 행복의 원리를 말하며, 자연적 감정과 도덕적 감정(도덕감)이 이에 속한다. 특히 도덕감에 대해서 칸트는 전(前)비판기에는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으나 비판적 윤리학이 정립된 이후에는, 도덕감은 의지의 타율이자 보편적 합리성을 결여한 것으로서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특수한 성향이나 주관의 특수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완전성의 원리이며, 이것에는 우리 의지의 가능한 결과로서 완전성이라는 이성, 즉 합리적 개념과 우리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서의 자립적 완전성, 즉 신의 의지라는 개념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 의지 결정에 주어진 것으로서의 규정 근거인 점에서 타율이며 오로지 제약된 명법을 제시할 뿐이다. (『Grundlegung』, pp. 234∼236, 참조. : 박찬구, "흄과 칸트에 있어서의 도덕감", 『철학』 44집, 한국철학회, (서울:관악사, 1995), 가을, p. 98, 참조.)

50) 도덕의 성립 조건은 곧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강제에 의해서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직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한 행위라는 것과 그로 인해 도출되는 결과로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도덕의 성립 조건인 것이다. (A. Pieper, Einfürung in die Ethik(현대윤리학 입문), 진교훈, 유지한 역, (서울:철학과 현실사, 1999), p. 161, 참조.)

51) "칸트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때, 인간의 자유는 ...... 자유의 내적 가능성을 말한다. 이 가능적 자유로서의 인간이 도덕 법칙에 따라 자신을 결단하면 그는 자신의 자유의 내적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것이 되고 자연 법칙의 강제에 굴복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자유의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 된다." (문성학, "칸트의 양립론",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p. 218.)

52) "인간은 목적 자체 그것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적 주체요, 그러므로 신성한 것의 주체이며, 이런 주체를 위해서 또 이런 주체에 일치해서만, 그 어떤 것을 일반적으로 신성하다고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은 도덕법이 자유의지로서의 인간 의지의 자율에 기본해 있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보편적 법칙에 의거해서 인간이 스스로 복종해야 하는 것에 반드시 동시에 일치하는 데에 있다." (『K.d.p.V』, p. 144.)

53) 칸트가 말하는 성격이란 일정불변한 준칙을 따르는, 실천상의 시종일관된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의지의 특유한 성질이 성격인 것이다. (『Grundlegung』, p. 189, p. 194, 참조. ; 『K.d.p.V』, p. 108, p. 166, 참조.)

54) 이때의 도덕은 순수도덕을 의미한다.

55) "도덕법은 순수한 실천이성의 객관이요 또 절대 목적인 바 최고선의 개념에 의해서 종교에 도달한다." (『K.d.p.V』, p. 141.)

56)『K.d.p.V』, p. 142, 참조.

57)『K.d.p.V』, p. 122, 참조.

58)『K.d.p.V』, 같은 곳, 참조.

59)『K.d.p.V』, p. 136.

60)『K.d.p.V』, 같은 곳, 참조.

61)『K.d.p.V』, p. 131, 참조.

62) 칸트의 설명을 직접 보면 다음과 같다. 영혼의 불멸이란 "동일한 이성 존재자의 무한히 계속하는 생존과 인격성"이다. 도덕법과 완전히 일치된 의지라는 것은 사실상 의지의 완전성, 즉 신성성(Heiligkeit)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 당시 어느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짧은 생애에 있어서 그러한 것의 완성이라는 것은 헛된 꿈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신체의 수명이 다할지라도 변치 않고 도덕적 완전성을 향한 전진이라는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인격의 지속성이 요구된다. 이것은 도덕법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요,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이다.(『K.d.p.V』, p. 134, 참조.) 이때 칸트가 말하는 영혼의 의미는 사유하는 자아(Ich)로서, 내적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영혼이란 뜻이다. 즉 심리학적 대상을 초월한 죽지 않는 마음, 또는 계속성을 지닌 인격성을 뜻한다. (박선목, 『칸트철학에로 가는 길』, (부산:부산대학교 출판부, 1987),  pp. 309∼310, 참조.)

63)『K.d.p.V』, p. 136. ; 두 번째로 요청되는 것은 바로 도덕성과 비례하여 주어져 있는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 존재자로서의 신이다. 이 때의 신은 종교적인 신이 아니다. 도덕적 이념이 형성해낸 신적 존재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이 선험적으로 구상하고 자유의지의 개념과 불가분적으로 결합시키는 도덕적 완전성의 이념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즉 실천적으로 제약된 것에 대한 무제약자로서 요청(Postulat)된다고 할 수 있다. (『K.d.r.V』, p. 562(B846∼847), 참조.)

64)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 230, 참조.

65) 공병혜, "자연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의 윤리적 목적의 실현",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p. 248, 참조. ; 이때 도덕적 세계 창조주의 이념은 반성적 판단력을 위한 규제적 원리로서 자연의 초감성적인 이념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를 통해 인간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자연의 합목적적인 체계를 반성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합목적적인 체계의 이념에 따른다면 전체 자연이란 도덕성과 자연적 본성이 분리되지 않는 가능한 세계이다. (공병혜, 앞의 글, p. 259, 참조. ; 공병혜,『칸트, 판단력 비판』, (울산:울산대학교 출판부, 1999), p. 40, 참조.)

66)『Grundlegung』,  pp. 229∼231, 참조.

67) 칸트는 법칙 아래 있는 사물들의 현존이라는 의미로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다시 경험적으로 제약된 법칙 아래 있는 이성존재자의 현존으로서의 감성적 자연과 모든 경험에서 독립된 순수이성의 자율에 속하는 법칙 아래 있는 이성 존재자의 현존으로서의 초감성적 자연으로 나눈다. 이때 초감성적 자연이란 순수한 실천 이성의 자율 아래 있는 자연을 뜻한다. 이때의 법칙은 곧 도덕법이요, 따라서 도덕법은 초감성적 자연, 즉 순수한 오성계의 근본 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도덕적 세계는 곧 이성만이 인식할 수 있는 원형적 자연(urbildliche Natur)을 뜻한다. 이에 반하여 감성계의 법칙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원형적 자연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모형적 자연(nachgebildete Natur)이다. 이것은 의지 규정 근거로서의 원형적 자연의 이념에서 가능한 결과를 내포하는 것이다. 즉 도덕법은 그 이념에 따라 우리를 자연 속에 옮겨 놓는다. (『K.d.p.V』, pp. 47∼48, 참조.)

68)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 231, 참조. ; 이러한 내용은 공자가 말한 "從心所欲不踰矩(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와 유사하다.(『論語』, 爲政編) 즉 도덕적 완전성의 경지요, 성인으로서의 완전성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본다면 이러한 내용을 통해 칸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그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69)『K.d.p.V』, p. 126, 참조.

70) 문성학, "칸트의 양립론",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p. 220, 참조.

71)『K.d.p.V』, pp. 158∼159, 참조. ; 박선목, 『칸트철학에로 가는 길』, (부산:부산대학교 출판부, 1987),  pp. 267∼269, 참조. ; 자연법칙과 자유법칙의 합일 장소로서의 인간 존재자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의 반성적 판단력에 대한 설명을 통해 좀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경험적 자연 현상을 기교적 절차에 따라 이념에 근거한 자연의 통일, 즉 체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한다. 칸트는 자연의 체계를 산출하는 이러한 인위적인 절차를 도식적 절차와 비교하여 자연의 기교(die Technik der Natur)라고 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자연에 이러한 것이 있다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력이 자연에 대해 갖는 기술인 것이요, 마치 자연이 기교를 부리는듯이 판단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주관적 원리로서의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 이성이 주관적으로 산출해낸 개념인 것이요, 이를 통해서 자연과 자유의 합일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판철학의 과제로서의 자연과 자유를 매개하는 주관적 원리인 것이다. (공병혜, "자연의 목적론적 체계 속에서의 윤리적 목적의 실현", 『칸트와 윤리학』, 한국칸트학회편,  (서울:민음사, 1996), p. 265, 참조. : 공병혜, 『칸트, 판단력 비판』, (울산:울산대학교 출판부, 1999), p. 15, 참조.)

72) 한자경,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서광사, 1992),  p. 233, 참조. 


 

 

>> 목차고리 : 신학 > 종교철학 > 철학자 > 칸트

                               윤리학

>> 연결고리 : 철학자, 칸트  

 



   


A-Z




  인기검색어
kcm  337501
설교  171764
교회  125030
아시아  99391
선교  95397
세계  85687
예수  82757
선교회  73655
사랑  69918
바울  69048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