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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1999-08-02
 제목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
 주제어  스위스의 변증법 [신학자] 부룬너
 자료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스위스의 변증법 신학자. 그의 생애를 대부분 츄리히에서 보냈다. 1931년 츄리히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1916-24년 오프스타르덴에서 목회자로 시무 하였으며 1924년 이후 평생동안 츄리히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교수로 봉직했다. 브루너는 의식적인 개혁파 개신교의 신학자였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형식화하고 그들의 독창적인 신학을 굳혀 버린 17, 18세기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기독교 복음의 특수성을 모호하게 만들어 종교개혁 신학을 약화시킨 19세기의 개신교 자유주의도 함께 비판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이 학문적이라면, 브루너의 신학은 언제나 실제적이었다. 브루너의 자연계시는 전통적인 독일 관념론적 윤리관념의 잔해였다. 브루너 신학의 독자성은 만남의 인격주의적 사상에 이끌리어 진리를 교리 가운데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 가운데서, 그리고 살아 있는 현실 가운데서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 교의학으로서보다는 선교신학으로서 자신의 신학을 특정 지었다.

 

   ○ 에밀 브루너의 신학 요약

   ○ 에밀 브루너 : 정의(正義)와 준법(遵法)

   ○ 에밀 브루너의 인간론

   ○ 에밀 부르너의 종교인식론

   ○ 에밀 브루너의 신학 방법론 - 계시와 이성을 중심으로

   ○ 에밀 브루너

 

 

생애: 에밀 브루너는 188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12월 23일에 태어났다. 그는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적 전통 속에서 자랐고 1913년 취리히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그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데 보냈는데 1924년 대학 교수직을 얻고 나서 1955년 퇴임할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 브루너는 오랜 지병 때문에 은퇴 후에는 거의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앓다가 1966년 4월 그의 고향 취리히에서 죽었다.         

 

신학적 관심사: 브루너의 신학적 관심사는 19세기와 20세기초의 신학이 내재성의 형태, 즉 폴 주위트(Paul Jewett)의 말대로, “인간과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윤리적으로 동일한 연속선 위에 놓고 봄으로써 인간이 자기 속에 본성적으로 타고난 가능성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상적 형태 쪽으로 표류해 가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브루너의 신학은 계시와는 별도로 자연적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하거나, 어떤 형태든 인간의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틀로 삼으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하여 일관된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만약 하나님이 철학적 유신론에서 말하는 바와 그 분이라면, 그는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며, 주권적인 주님이나 거룩하고 자비로운 조물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계시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터툴리안이나 파스칼, 키에르케골 등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그는 바르트의 선택 교리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보기에 결국 보편적 구원론으로 이어질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든지 거부하든지 간에 있어야 할 개인적 결단의 필요성을 간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적 인격주의: 현대 신학에 대한 그의 기여는 계시를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나-너의 만남’과 동일시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계시의 진리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전개할 때 그는 페르디난드 에브너(Ferdinand Ebner)와 마틴 부버(Martin Buber)와 같은 20세기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서 진리라는 성경적 개념을 ‘발견’하는 데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유태인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마틴 부버였다.

 

브루너는 부버의 사상을 따라, 신적 계시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리와 지식의 두 가지 종류, 즉 ‘그것의 진리’(it-Truth)와 ‘너(또는 당신)의 진리’(Thou-truth) 사이의 차이를 먼저 식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객체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걸맞는 것이지만, 후자는 인격체들의 세계를 놓고 말하는 것이다. 인격체들과 객체들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지식을 객체들의 지식으로 말하는 신학은 어떤 것이든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만남의 사건성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객체들의 수준을 초월하며, 객체들에 대한 지식에 내재되어 있는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대신 인격적 결단과 반응 그리고 헌신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인격적이다.        

 

 “만남으로서의 진리는 어떤 것에 대한 진리가 아니며, 어떤 지적인 것, 즉 사상들에 대한 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와 지성에 대한 비인격적 개념을 산산이 부숴뜨리는 진리, 즉 나-너라는 형태로만 적절히 표현될 수 있는 진리이다. 신적, 초월적, 절대적인 그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비인격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면 여하한 것이라도 그것에 대하여,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분에 대하여 말하려는 외로운 자아의 생각이 만들어 낸 부적절한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만남으로서 진리, 24).”         

 

기독교적 진리는 만남으로서의 진리,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인간이 반응함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라는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진리이다. 그러한 진리만이 인격체의 자유와 책임을 제대로 취급하며, 그러한 진리만이 복음의 핵심,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보존한다. “이 진리는 사람에게 하나의 인격적 요청으로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찰의 결과에서 나온 어떤 진리가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나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대답하게 하는 진리이다(창조와 구속의 기독교 교리 II, 8-9).” 그가 계시를 나-당신의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그의 신학을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브루너의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은 ‘성경적 인격주의’라고 불리우고 있다.         

 

만남으로서의 계시: 브루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말이나 명제는 결코 계시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객체화시키기 때문에 결국 ‘그것-지식’(it-knowledge)의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신비에는 어떠한 말이나 글도 부적합하다”고 그는 언명했다. 그러므로 계시 그 자체는 항상 주체-객체의 구분을 극복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간에게 표현하는 인격적 만남이라는 관계의 사건인 것이다. “계시는 ... 결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생명을 부여하고 생명을 회복시키는 교섭(communion)이다.”         

 

브루너가 강조했던 비명제적(non-propositional) 계시의 형태는 두 가지 사건으로 발생한다. 역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사건 속에서, 그리고 현재적으로는 신자를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으로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internum) 안에서 발생한다.  “오직 성령의 이 말씀(Word)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곧 그 안에서만 역사적 계시라고는 하지만 비유적 언어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가 된다(교리서 I, 30).”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종종 제기되는 비판은 그 인격체에 대하여 뭔가를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인격체 자체가 전달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계시가 완전히 비명제적일 수 있는가? 브루너는 하나님에 대한 명제적 지식은 계시 그 자체인 신과 인간의 만남으로부터 자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명제적 지식은 계시 자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포된 말씀이 진정한 계시, 즉 임마누엘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 표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간접적인 계시이다(교리서 I, 25)”라고 언명했다. “인간의 말로 나타난 말씀은 간접적인 의미에서만 계시이다. 즉 그것은 그에 대한 증거로서의 계시일 뿐이다(교리서 I, 27)."         

 

브루너가 피해 가려고 했던 것은 교리나 신학을 인격적 신앙의 위치에 두는 ‘신학주의(Theologismus)'라는 이단이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인 나-당신의 만남에서 나오는 인격적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성찰과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을 자아낸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들과 계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브루너는 계시와 영감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을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을 대체시켜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없어서는 안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조차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교리는 ‘당신-진리’가 아닌 ‘그것-진리’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믿음이 진정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브루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계시의 이차적 도구들이 믿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성경관: 브루너는 성경에 대하여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는데 계시와 성경의 말씀들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일차적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는 면에서 계시의 독특한 매개물 내지는 도구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모두가 진실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을 의미했다. 성경은--무엇보다도 먼저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것인데--“그리스도가 누워 있는 구유”(루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메시지이다. 그것의 ‘인간적인 성격’이란 인간적인 모든 것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교리서 I, 34).         

 

브루너는 축자 영감 교리를 비난했는데 메마른 주지주의와 계시를 ‘계시된 교리들’과 혼동하는 등의 ‘비참한 결과들’이 가져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교리서 I,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래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없어서는 안 될 증거로서,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예수와 동시대인이 되게 해주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나-당신의 만남에 대한 현재적 계시의 도구로서 성경의 권위를 매우 높게 보았다. 이러한 성경의 기능 때문에 성경은 기독교 교리의 기초와 규범이 된다고 브루너는 말했다. “이 교리와 이 믿음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한, 기독교의 교리는 합법적이며, 진정으로 계시에 기초한 것이고, 그것에 기초한 믿음은 믿음에 대한 진실한 지식이다(교리서 I, 44).”         

 

브루너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와 규범을 함부로 포기할 수 없었으며 그 근거와 규범을 성경 안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너는 성경이 어떤 궁극적인 규범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것은 기껏해야 차선 또는, 근사한 규범이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하여 주위트는 브루너가 계시교리와 성경관의 입장은 일관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브루너는 축자 영감교리와 무관하게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감동’의 한 형태를 주장하다가 성경의 권위를 송두리째 포기하는 식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20세기신학, 128) 주위트는 또 ‘그것-진리’와 ‘당신-진리’ 사이에 절대적인 구분이 있는 것처럼 주장한 브루너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이 둘의 구분은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제적인 진리가 성립되지 않으면 계시에서 고백으로, 그리고 인격적인 만남에서 교리로 옮겨갈 수가 없다. 브루너도 이러한 어려움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은 인간의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건이었고, 신적인 감동으로 된 증거였다. 브루너가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일치하는 이 한 번의 경우를 인정하게 되자, 명제적 진리와 신적 계시 그 자체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았던 차원적 구분은 깨져 버렸다. 이렇게 되면 계시는 하나의 주관적인 경험으로만 남는다. (20세기 신학,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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