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벨라루스의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새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카센코가 히틀러식 경제체제를 적극 옹호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의 일간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같이 밝혔는데, 히틀러치하의 대학살의 망령을 잊지 못하는 벨라루스의 유대인들에게 루카센코 대통령의 발언은 잊고 있던 공포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벨라루스의 유대인들은 나찌의 대학살과 러시아의 반유대주의를 경험하면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느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문화 유산과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찌의 대학살기간 동안 벨라루스의 600 만 유대인들 가운데 81만 명이 사망했다. 지금 벨라루스에는 2만 8천에서 10만 정도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 숫자의 편차에서 볼 수 있듯이 벨라루스의 유대인 집계는 기준과 발표 매체에 따라, 그리 정확하지 않다. 20세기의 혹독한 시련은 오히려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고 그들의 민족주의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벨라루스의 유대인들은 그들 특유의 견고한 교육체계와 결속력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입지와 대외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벨라루스의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그들만의 학교와 유대교 회당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나찌 대학살 이전에 누리던 민족적 자긍심과 영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경제도 문제이다. 벨라루스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는 이보다는 풍요로왔다. 현재의 벨라루스는 노인 인구의 비중이 높은 가난한 나라이다. 게다가 노인들의 상당수는 과거 군인으로 복무한 것에 대한 대가로 연금을 수령하기 때문에 국가재정은 과도한 연금지출로 휘청거리고 있다.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독립 전쟁으로 인해 형제들을 잃었고, 결혼을 하지 못한 것도 전쟁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유대인 남성의 수는 여성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벨라루스의 유대인들이 모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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