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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10-07-06
 제목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회고와 전망(발제)
 주제어  [선교] [선교전략회의]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선교대회] [NCOWE V] [세계선교전략회의] [분야별1]
 자료출처  백신종  성경본문  
 내용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회고와 전망[1]

 

 

백신종 선교사 (캄보디아, SEED 선교회)

 

 

 

한국교회는 단기선교를 통하여 배태(胚胎) 되었으며, 초기부터 단기사역자들의 협력을 통하여 성장하고 확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 땅의 선교사로 입국한 1884년 이전, 중국의 선교사로 사역하던 칼 귀츨라프(Karl F.A. Gtzlaff, 1803-1851)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1866) 선교사는 단기적으로 조선 땅을 방문해 성경과 서양약품, 감자등을 전달하였고, 조선을 서구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만주지역의 고려문에서 조선인들을 만난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등은 중국의 선교사로 사역했지만 조선 선교에 꿈을 가지고 보부상인 이응찬과 서상륜등과 언문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초기 한국인 신자였던 보부상인들은 자신들의 사업루트를 통해서 단기적으로 성경을 보급함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조력하였다.

선교와 목회 경험이 부족했던 조선의 선교사들은 1890년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 2주간 초청하여 선교정책을 소개 받았다. 곽안련 (Charles A. Clark)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요인이 바로 네비우스 정책에 있었다고 진단한다 (곽안련 1994:317-324). 2주간의 단회적인 방문이었지만 네비우스가 전해준 자립선교의 원칙은 한국적 토양에서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교회의 역사에 점철되어온 단기선교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시기의 특징을 통하여 교훈을 찾고 오늘날 단기선교의 대안적인 전략을 제시할 것이다.

 

한국교회 단기선교의 세 시대

 

조선 땅에 교회가 설립되고 지금까지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는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시대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주로 중국과 일본의 이민자들을 위한 선교사역에 헌신하고 해외로 나갔던 선교초창기 시대이다. 이 시기를 유사문화 선교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 한국교회는 장기선교사 한 가정을 파송하는데 그치치 않고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와 동역할 다양한 종류의 단기선교사들을 개발하고 파송하여 몇 개월에서 몇 년간 동역하게 하였다.

두번째 시대는 일제의 식민기와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한국교회 선교자체가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동란 이후 한국교회는 유신과 군부독재라는 난류를 만나면서도 꾸준하게 타문화권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선교하는 교회로써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는 단기선교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번째 시대와는 다르게 타문화권 해외선교가 진행되면서 언어와 문화에 한계를 가진 단기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생겼고,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추구하던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비싼 재정을 들여 단기간 선교를 간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직 법적인 정비나 제도적인 장치가 미흡했던 정부로써도 해외출국에 대한 법규가 전무했거나 미비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았다.

세번째 시대는 1980년대 말 이후에 서구 스타일의 단기선교가 소개되면서 일어난 현대적인 단기선교 운동의 시대이다. 앞 장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한국사회는 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에 편승해 발전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운데 놀라운 교회성장과 선교부흥을 맞이하였다. 더불어 단기선교 운동은 사회적, 교회적 변화에 적응하며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한국교회 단기선교와 단절된 서구스타일의 단기선교는 한국교회와 선교에 적지않은 문제를 안겨 주고 있다. 이 세 시기에 대해서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고 현대의 단기선교를 위한 교훈들을 생각해 보자.

 

첫번째 시대: 전략적인 단기선교사 파송 (1907-1940)

 

1907년 한국 장로교회에서 처음으로 독노회를 조직하게 되었을 때 놀라운 회개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장로교회는 처음으로 일곱 명의 목사들을 안수하게 되었다. 사실 한국인 목사 일곱 명이라는 수는 1885년부터 1907년까지 개척된 장로교회들을 모두 목회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명의 목사중 한 사람인 이기풍은 당시 언어와 관습이 생경하던 제주도의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따라서 독노회는 이기풍의 청원을 기쁘게 허락하였고 즉시 해외선교 실행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교사 파송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박기호 1999a:45).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도착해 사역을 시작하면서 평양여전도회는 이기풍 선교사의 사역을 돕기 위해서 이관선 여전도사를 동역자로 파송하였다. 그 이후 다양한 단기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이기풍 선교사의 사역을 도왔다. 1909년에는 평양에서 공부하던 김현철 형제가 학생 선교사로 이기풍 선교사의 사역을 도왔다. 그리고 같은 해 평신도 선교사인 김창문이, 그리고 1915년에는 김홍련이 동역하였다 (김활영 1994:37). 장기선교사와 다양한 단기선교사들과의 협력사역은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에서 배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선교를 위해서 함께 동역함으로 안수 받은 목회자였던 이기풍은 홀로 일할 때보다 선교팀으로 더 폭넓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제주도의 선교팀들은 약 13년동안 3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1934년에는 독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박기호 1999a:60).

제주도 선교뿐 아니라 이후에 진행된 만주를 중심으로 한 중국선교,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러시아 선교, 그리고 일본 선교의 경우에도 이러한 협력사역의 예들이 보고되고 있다. 윤산온 선교사(George S. McCune)는 시베리아 사역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선교계획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금년에 두번째 새로 안수받은 여덟 명의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을 한반도 밖, 곧 해양지방인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한인들 가운데 사역하도록 파송하였다. 소련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약 2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이 지방에 살고 있다. 퀠파트(제주도)에 파송된 선교사는 조사와 권서인 그리고 여전도사 등이 있었다. 해양 지방인 블라디보스톡에 가 있는 모든 선교사들에게도 후에 이런 돕는 사역자들을 딸려 보낼 것이며 그들의 모든 경비는 노회가 담당할 것이다 (KMF Vol.6, No.1, 1910:19).

 

독노회는 또한 일본에 주재하는 유학생들의 선교를 위해서 한석진 목사를 삼 개월간 동경에 파송하여 새로운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시 탁월한 설교자로 인정받고 있었던 길선주 목사를 중국의 산동성에 파견하여 한국선교사들을 위한 부흥회를 인도하도록 하였다. 그의 방문은 특히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선교사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정재덕, 박상우, 서영복은 시베리아에서 사역하던 김덕수 목사의 선교를 돕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1923년에는 안수받은 목사인 김영학 목사가 시베리아의 한인들 사회에 교회를 개척하도록 삼 년간 파송을 받기도 하였다 (박기호 1991:48).

한국교회사에 기록된 이 시대의 단기선교 사역들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첫째, 단기선교의 파송이 지역교회의 선호나 선교사와의 개인적인 연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교단 차원에서 전략적인 사역을 위해서 결정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략적인 파송을 통해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 가장 적합한 장소에 배치됨으로 최대의 효과를 맛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기선교사들도 교회와 교단 차원의 파송을 받음으로 개인적인 수준이 아닌 공식적으로 공인된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 단기선교사들에게는 선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고 조사, 전도사, 권서인 등 교회의 직분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 시기의 단기선교사들은 독자적인 사역을 개척하기 보다는 장기선교사와의 협력사역을 통해서 장기적인 결실을 남길 수 있는 사역을 위해 헌신하였다. 진정한 지도자는 훌륭한 지도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단기선교사들은 장기선교사들과 함께 협력하면서 그들이 훌륭한 사역을 남길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여야 말로 하늘에서 보상받을 귀한 섬김이다. 박기호 교수는 이 시기의 선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교회는 제주선교와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팀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선교사 그룹(band of workers)을 파송하였다 (박기호 1991:47).

셋째, 통신수단이 제한된 시기에 단기선교사들은 선교사와 선교지의 소식을 파송교회에 전하는 일에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단기선교사들의 사역은 한국교회의 선교적인 관심을 고취시켰으며 선교지와 장기선교사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단기사역자들이 한 두 사람의 방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한 점에서 알 수 있다.

넷째, 장기선교와 협력하는 단기사역자들은 경비를 노회(교단)가 후원하였다는 점이다. 윤산온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기풍 선교사와 협력했던 사역자들도 한국교회가 비용을 지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앞으로 3개월 이상의 반복적인 단기선교를 위해서 선교지를 방문하는 한국교회의 단기사역자들도 교회와 노회 차원에서 혹은 선교단체에서 일정 부분 후원해서 파송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 시기의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현지어를 사용하며 현지인 사역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인 디아스포라인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따라서 해외선교라고 하지만 살아가는 환경만 이국적일 뿐 대부분 문화와 언어적인 이질성은 크지 않았다. 따라서 단기선교사들 역시 문화적응이나 언어습득의 큰 부담감 없이 선교지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선교사역에 종사하며 장기선교사들의 사역을 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두번째 시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의 선교환경에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번째 시대: 단기선교의 암흑기 (1940-1980)

 

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열정은 일본식민시대, 2차 세계대전, 한국동란(1950-1953)이라는 민족적 시대적 아픔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대전 이후 중국과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성공하면서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감당해 온 선교사역에 큰 장애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주력했던 선교지였던 중국과 러시아가 죽의 장막과 철의 장막을 두르고 선교의 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인 장기선교사들은 중국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장단기 선교협력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선교적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는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공산당의 핍박으로 순교하거나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고 한국교회는 해외선교를 지원할 능력을 상실한 것 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미미 하지만 본격적인 타문화권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박기호 교수는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한국전쟁기간 동안(1950-1953) 주춤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선교의 비전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교회는 다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999a:123)고 진술한다. 하지만 첫 시대의 유사문화권 선교의 장점을 포기하고 새로운 타문화권 선교를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동란이 끝난지 불과 2년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교회는 선교사 두 가정을 태국교회에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1956년 파송이후 일 년여 동안 여권과 비자발급을 위해서 기다리던 김순일, 최찬영 선교사 가정이 태국에 도착하였고, 이듬해에는 계화삼 선교사가 대만에 도착하였다. 첫번째 시기의 선교가 대부분 교포와 유학생들을 위한 자문화권 선교였다면 이 두번째 시기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대부분 타문화권 상황속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940-1980년에 이르는 40년간 한국교회의 선교를 기록한 대부분의 자료에서 단기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이 두번째 시기 동안은 시대적인 상황과 선교현장의 타문화적인 사역의 특징 때문에 단기선교의 암흑기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전 시대와 같이 장기선교사를 돕는 단기선교사들이 팀으로 함께 사역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후원교회와 파송교단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방문들은 간헐적으로 이루어 졌다.

왜 이 기간 동안 단기선교 사역이 어려웠는지 몇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타문화권 사역의 특성상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이었다. 한인 디아스포라 사역의 경우 언어습득과 문화적응의 시간을 줄이고 바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타문화권 사역을 위해서는 필요한 언어를 습득하고 익히는데만 2년정도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단기선교사가 선교지를 방문한다 할찌라도 언어를 배우는 1-2년간은 장기선교사들이 돌봐 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단기선교 사역뿐 아니라 장기선교사들에게도 장애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장기선교사가 2년 정도 언어를 배우고 나면 본국의 단기선교사보다는 현지의 동역자들과 사역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단기선교팀을 구성하고 단기선교 사역을 준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초기에는 교단내 해외선교 실행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돕기 위한 단기사역자들을 파송하고 지원하였다. 하지만 일제시기와 동란을 전후해서는 교단차원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장단기선교사와 협력사역을 했던 첫번째 시기 동안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역분담을 통해서 단기선교 사역자들도 얼마든지 함께 동역할 수 있었다. 대부분 장기선교사는 선교지에 도착해서 바로 이민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회자로 사역을 했고, 다양한 단기선교사들은 목회사역을 협력하는 조사, 전도사, 권서인 등으로 사역했다. 하지만 타문화권의 선교는 선교사의 정착과 언어문화 적응이 급선무였고, 사역 자체를 개발하고 시작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단기선교사와의 협력이 절실하게 요구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세번째 더 중요한 요인은 한국의 정치적, 경제문화적인 부분에서 생각할 수 있다. 육로로 여행이 가능했던 중국, 러시아 선교나 인접한 일본 여행과는 달리 태국이나 대만으로의 여행은 경비도 많이 들고 당시 배편으로 여행하는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전후에 국가재건과 경제개발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사회적인 상황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성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단기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배부른 꿈으로 치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단기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1990년대 까지도 한국교회 안에 팽배하게 존재해 왔다. 정치적인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최찬영 선교사는 1955년 태국의 선교사로 파송받고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 정부 부처를 돌아다니고 일 년을 기다려서야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최찬영 1995:29-34). 이후에도 반공정서와 국내외적인 상황, 경제우선적인 정책으로 인해서 일반인들이 해외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에도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성공적인 경제개발과 1980년대 한국교회에서는 사경회를 중심으로 한 말씀 중심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기간은 교회성장과 선교적 도전, 한국사회의 경제성장, 민주화, 외교관계 확장 등을 통해서 199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한 단기선교의 배양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1977년의 민족복음화 운동, 1980년의 세계복음화 운동, 1985년의 한국선교100주년 기념성회 등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영적인 부흥운동과 교회성장의 결실들을 선교운동으로 발산할 수 있었다.

 

세번째 시대: 단기선교의 르네상스 (1980-1995)

 

두 번째 시대와 세 번째 시대를 무자르듯이 1980년 한 해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세 시대 구분은 각각 어느 정도의 교차 기간을 가지면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1979년 엑스플로 복음성회를 기점으로 한국교회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단기선교의 새로운 움직임들이 시작되었다.

단기선교의 부흥과 성장은 한국교회의 장기선교 파송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과 발맞춘 교회부흥을 경험하면서, 1980년대에는 점점 더 많은 선교사들을 선교지에 파송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폭발적인 교회성장과 선교성장을 경험하였다 (선교사의 성장은 앞의 제4장의 그림 4를 참조하라).  

이러한 성장과 더불어서 1980년대 이후에 점차 단기로 선교지를 방문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약 320여명의 선교사가 해외 선교지에 나가 있었는데, 80년대 초부터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선교지를 방문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 안정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운동, 외교관계 수립으로 인해서 해외여행의 기회가 증가하면서 단기선교 운동은 교단과 지역교회 뿐 아니라 다양한 선교단체를 통해서도 시작되었다. 특별히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조취 이후에 한국사회는 봇물 처럼 터진 단기선교의 물결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단기선교 운동의 중요한 흐름은 기존의 교단과 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선교지 방문, OM이나 YWAM과 같은 단기선교를 위한 전문적인 선교단체, 그리고 대학생 선교단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 부터는 선교단체를 통해서 유입된 서구 스타일의 단기선교가 소개되면서 몇몇 지역교회들이 국내 단기선교뿐 아니라 해외 단기선교팀을 조직하여 파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교단체의 단기선교와는 달리 선교에 대한 이해, 사역준비, 훈련과 팀웍 면에서 경험과 지식이 전무한 지역교회의 단기선교는 수많은 시행착오로 인해서 선교사들에게 까지 부정적인 눈길과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보다 전문적인 단기선교 동원과 훈련이 선교한국(Mission Korea) 조직위원회를 통해서 제공되었으며, 1995년에는 예장합동 선교국(현 총회 세계선교회)에서도 단기선교팀을 훈련하고 파송하기 위한 훈련과정을 개발함으로 교단산하 지역교회의 단기선교 개발에 주력했다. 특별히 지난 15년 간의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운동을 공시적인 관점으로 기술하고 평가해 보자. 

 

지난 이십년 간의 한국단기선교

 

1990년대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단기선교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OM YWAM을 중심으로 단기선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실시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 단기선교 사역에 자원해서 사역하였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장기선교사가 되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KCCC) UBF, 한국기독학생회(IVCF), 죠이선교회 등의 대학생 선교단체에서도 해외사역을 위한 단기선교팀을 조직하여 파송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대학생 선교단체를 통해서 단기선교를 경험한 학생들이 교회로 돌아와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을 조직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교회들이 단기선교팀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단기선교는 한국교회 설립초기의 단기선교와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초창기 단기선교는 대부분 교단에서 파송했으며 장기선교사와의 협력사역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난 15년 간에는 적지 않은 선교단체에서 단기선교를 통한 선교프로젝트를 운영하거나 실질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보다는 선교지 탐방 내지는 단체의 장기선교사를 발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선교현장에서 장기선교사들과의 긴밀한 협력이나 전략적인 팀사역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단체의 단기선교 유형이 초창기에 그대로 교회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지역교회의 단기선교 역시 선교지를 방문하고 선교사들의 사역을 견학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각 선교부와 교단의 노력으로 단기선교에 관련된 세미나와 훈련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는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1991년 한국예수전도단(YWAM Korea)을 통해서 훈련을 받고 국내 전도여행을 다녀오면서 단기선교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는 러시아에 단기선교를 떠나기 위해 준비하다가 예기치 않은 공산화 쿠데타(coup d'état)로 인해서 항공편이 결항되어 계획했던 선교봉사가 취소되었고, 당시 교회에서 후원하던 필리핀에 단기선교를 다녀오게 되었다. 이듬해 귀국해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선교국 산하의 선교훈련원(MTI)에서 봉사하면서 교단내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을 지원하고 훈련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지난 90년대의 한국교회 단기선교운동의 성장과 발전을 목격할 수 있었으며, 이후 풀러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이러한 경험을 선교학적인 방법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지난 이 십년간 한국 단기선교 발전의 거대한 두 축은 바로 선교단체와 교단선교부의 선교성장 이었다. 특별히 선교한국을 조직한 대학생 선교단체와 일반 선교단체에서 한국교회 단기선교 운동을 점화시켰으며, 특별히 YWAM OM과 같은 단기선교 전문단체들이 구체적인 방법론을 주도해 가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였다. 교단 역시 장로교 합동측 선교부에서 90년대 중반 청년학생 선교운동과 단기선교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선교단체와 교단 선교부 모두 지역교회를 모판으로 하고 있으며, 지역교회의 선교개발과 선교교육을 위해서 공헌해 왔다. 지역교회로서도 선교단체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선교훈련을 도입하고 교단과 연계된 단기선교를 수행함으로 보다 전략적이고 효과적인 단기선교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한국과 대학생 선교단체의 단기선교운동

 

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운동들 중 하나가 바로 1988이후에 매 2년마다 개최되는 선교한국 (Mission Korea) 대회이다. 선교한국대회는 선교동원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 대회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헌신자들이 실제 장기와 단기선교사로 선교지에 나갔는지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교한국 대회가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인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2004년 까지 지난 16년간의 선교한국 대회 참석자와 단기선교 헌신자의 숫자를 보면 대략적인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증가폭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그림 7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16년간 선교한국 전체 참가자의 59.2%가 단기선교 이상의 선교헌신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교헌신자들은 일부 선교단체에 연결되어 단기선교에 참가하였고 장기선교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헌신자들은 지역교회로 돌아가 선교사 후보로 파송받거나 지역교회에 단기선교를 소개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특별히 1992년 대회 이후 선교한국 조직위원회에서는 단기선교에 대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2001년도에 단기선교핸드북 (선교한국조직위원회)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교회의 단기선교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선교한국에서는 지역교회에서 단기선교를 담당하는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와 선교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임은 한국교회의 단기선교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 가운데 진행될 수 있도록 선교적인 기반 구축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장점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선교한국 조직위원회 차원에서 아직까지 한국교회를 위한 단기선교 시스템 구축이나 단기선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2000년대 초부터는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단회적 단기선교를 지양하고, 수 개월에서 2년 가량의 (반복적인 개념의) 단기선교사 파송에만 주력하겠다는 전략적인 방향성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방침은 오히려 지역교회 단기선교팀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개발하기 보다는 단기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방어하려는 수동적인 자세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 판단으로 선교한국과 소속된 선교단체들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감당해야 할 단기선교 개발 분야에서 스스로 사역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단기선교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서 지역교회의 인식개발을 주도하고 중장기적인 선교전략을 개발해 주기 보다는 선교단체의 행정적인 관점에서 장기선교사의 발굴과 성과중심의 선교사역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내려진 판단이라 생각된다.

그림 7 선교한국 참석자와 단기선교 헌신자 통계

(http://www.missionkorea.org)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몇몇 대학생 선교단체에서도 단기선교 자료들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예수전도단 (YWAM)에서는 미국의 단기선교 전문가들이 모였던 단기선교대회의 자료집으로 발간된 Stepping Out(십분의 일 선교) 1994년에 번역해 출간하였고, 1998년에는 킴허스트의 목적이 있는 휴가를 번역하였다. 한국 대학생 선교회에서도 교회 단기선교여행의 완벽가이드북: 마게도냐 프로젝트 핸드북(2001)을 발간하여 지역교회 단기선교를 위한 매뉴얼을 제공해 주었다.  이 두 단체는 제자훈련 프로그램과 단기선교를 통합해서 매 년 수 백에서 수 천명의 대학생들이 해외선교를 다녀 올 수 있도록 파송했다.

 

평신도 선교사 훈련원 (LMTC)

 

1994년 한국 교단으로는 처음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선교국(현 총회 세계선교회)에서 지역교회의 단기선교를 돕기 위한 선교훈련 프로그램이 개설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직접적인 동기는 1994년 선교한국 대회였다. 당시 교단 선교부에서 교단내 지역교회의 선교교육과 훈련을 지원하고 단기선교 동원을 협력하기 위해서 선교한국 준비모임에 참여하였다. 오랜 홍보와 협력을 통해서 교단내 지역교회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한국 94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선교한국 대회 기간 동안 교단 선교부를 홍보하기 위해서 안내 공간을 마련하였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은 선교단체의 홍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해외선교국이란 간판은 흘겨보고 지나갈 뿐 이었다. 그리고 실제 단기선교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이 찾아와도 선교단체와는 달리 특별한 단기선교훈련이나 선교지 방문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안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회를 마치고 9월 한 달간의 연구 끝에 당시 천 여명에 육박하는 장기선교사를 파송한 교단 선교부의 장점을 적극 활용해서 지역교회 청년들을 위한 선교훈련 프로그램을 설립키로 결심한 것이다.

설립 당시 선교국에 청년학생선교훈련원 (YMTC)를 설치하고, 각 지역교회에 동일한 프로그램을 확장 설립하면서 평신도선교사훈련 (LMTC)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994 9월 총회선교국에 제출된 『YMTC설치 및 운영 백서』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천명하고 있다.

 

서울 시내의 많은 교회들이 단기 해외선교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프로그램 진행에 있어서 실제 선교지의 장기선교사들에 대한 행정지원이나 선교사들과의 필요한 동역이 되지 못하고, 번거러운 방문식이나 단순 여행식의 선교훈련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방치한다는 것은 외화 낭비와 더불어 총회의 장기적인 선교전략에도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에 앞으로는 총회에서 각 선교사들로 부터 필요한 단기사역자의 종류 및 협력 가능한 사역의 유형을 접수한 후, 총회에서 헌신한 청년들 중 선교지의 요구와 일치하는 헌신자를 보내어 동역하며 선교훈련을 받게 하는 종합적인 선교동역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구축에 앞서 교단내의 청년학생 선교헌신자들을 발굴, 양육하고 각 교회의 선교훈련을 통합하는 과정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에 YMTC의 설치는 선교동역 시스템의 계획적인 운영을 위한 중요한 사전 작업이라 하겠다 (백신종 1994:1).

 

현재 총회세계선교회(GMS)에 설치된 평신도선교훈련(LMTC)과정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초창기 장기선교사와 단기사역자들의 협력사역의 모델을 재현하고자 하는 선교동역시스템 개발에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역교회의 단기선교가 보다 선교현장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는 준비와 훈련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초기에는 지역교회의 평신도 선교지도자들과 단기선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지역교회에서 단기선교팀 전체를 보내어 훈련받게 하였고 숫자가 늘어나면서 훈련 팀을 지역교회로 보내어 각 교회의 단기선교 실정에 맞는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총회선교국과 동현교회 (예성철 목사) 두 곳에서 선교훈련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왕십리교회 (오치용 목사)에 선교훈련과정이 설치되었으며, 1998년에는 서울의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 와 부산의 수영로 교회 (정필도 목사)에서도 LMTC과정을 개설하였다. 같은 해 정규적인 훈련과정은 아니었지만 구리와 남양주 지역을 위해서 평화교회와 서울 북부에서는 혜성교회 (정명호 목사), 그리고 동도교회(홍성개 목사)에서도 단기선교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였다. 아래의 그림 8은 교단내의 지역교회에서 실시하는 LMTC선교훈련원의 증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2007년 현재 총회세계선교회의 LMTC훈련과정은 36개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림 8. 총회세계선교회 LMTC훈련원의 수[2]

 

1990년대 말부터는 수많은 해외선교단체에서 단기선교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역교회를 대상으로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또한 지역교회와 교단에서도 파송선교사나 후원하는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단기선교팀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1998년 개인적으로 조사했던 자료에 기초해서(백신종 1998:19), 2006년 현재 한국교회에서 적어도 매년 약 25만명(최대 80만명)의 단기선교팀들이 선교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산출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파송한 1 7천명의 장기선교사의 약15(최대 50)에 육박하는 숫자이다.[3]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력과 엄청난 자원을 사용해서 실시하는 단기선교가 이제는 한국교회 선교의 위상에 걸맞게 통합적인 시스템 가운데 전략적으로 시행되어야만 하는 시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현재 한국교회가 실시하는 단기선교는 초창기의 단기선교가 보여준 협력사역모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2000년대 초기만 해도 적지않은 단기선교팀들이 선교지의 필요보다는 자신들의 관심지역과 자신들이 할 수 있는(혹은 하고 싶은) 사역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적인 이해나 준비도 부족해서 타문화권 선교지에서 결례를 행하거나 한국인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사례들 보다 더 많은 단기선교팀들이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돕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내가 선교지에 부임한 2004년 부터 동역했던 단기선교팀의 경우 현장의 사역적인 필요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실질적인 사역개발과 타종교권의 마을 침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앞으로 더 나은 연구자들이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통해서 더 좋은 단기선교의 사례들을 발굴해 내고 실제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교훈들을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한국교회 단기선교를 위한 제언

 

첫째, 교단과 선교단체 중심의 전략적인 단기선교를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초기 단기사역자들은 해외 사역현장의 선교사들의 요구에 의해서 교단에서 파송한 사역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필요와 충족이라는 경제학적 공식에 충실한 단기선교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소비문화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소비자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소비를 강요하듯이 단기선교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장의 필요에 기초해서 선교사를 관리하는 교단과 선교단체의 지도하에 단기선교를 감당한다면 보다 효과적인 단기선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단과 선교단체의 전략적인 단기선교 운영은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단기선교의 불균형중복투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장기선교사들이 단기선교를 이해하고 장단기 협력선교의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된 해외선교 초기부터 한국선교는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방식으로 장기선교사들과 다양한 배경의 단기선교사들이 함께 동역하는 협력선교모델을 보여주었다. 제주도 선교팀이나 일본의 유학생 선교, 중국과 러시아의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에  있어서도 단기선교사들은 효과적으로 장기선교사들의 사역을 도왔다. 언어와 문화적 제한을 가진 단기선교팀이나 단기사역자들이 현장에서 효과적으로 사역에 동참하고 중장기적인 선교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은 현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장기선교사들에 의해서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지역교회의 단기선교는 비전트립과 협력선교의 틀안에 유지되어야 한다.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은 비전트립이나 단기봉사의 형태로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의 선교사뿐 아니라 선교단체와 교단과도 협력하는 협력선교의 틀안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 모집과 훈련과정에 교단이나 선교단체에서 제공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효과적인 사역을 위한 적절한 선교훈련과 사역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지역교회는 비전트립을 통해서 단기 사역자들을 발굴해 교단과 선교단체를 통하여 선교전략에 협력해야 한다. 단기선교에는 선교인자뿐 아니라 여행인자가 결합되어 있다. 지역교회의 비전트립은 단기선교 참가자 안에 있는 여행인자를 선교인자로 전환 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3개월에서 3년 내외의 단기사역에 헌신해 사역할 수 있는 단기선교 사역자를 발굴해야 한다. 지역교회에서 단기선교 정책과 후원기준을 마련하고 현장의 장기선교사와 교단, 선교단체등과 협력하여 중장기적인 장단기 선교전략을 마련하게 되면 단기선교 사역자의 발굴과 파송을 통해서 좋은 선교의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단기선교의 재정, 사역, 운영의 투명성과 적합성을 평가할 만한 기준과 평가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매년 25만명의 단기선교팀을 파송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100만원씩만 사용한다고 해도 매년 단기선교에 소요되는 비용은 250억을 육박하게 된다. 이만한 규모의 재정이 항공교통을 포함한 국내 산업과 선교현장에 투입된다면 이에 따르는 투명성과 적합성을 평가할 만한 기준과 시스템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미국의 선교단체와 교회들은 US Standard of Excellance in Short-Term Mission (미국 최상의 단기선교 표준협회)를 조직하여 매년 진행되는 각 선교단체와 교단, 지역교회의 단기선교팀을 평가하고 지도해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4]

 

이제는 한국교회의 단기선교운동을 점검하고 한국선교의 미래상에 걸맞는 장단기 선교협력을 위한 사역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단기선교는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다. 단기선교는 한국교회가 처한 시대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상황에 깊이 뿌리박힌 전략적인 선교방안이다.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단기선교는 본격적인 연구와 개발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투자와 실험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선교를 뒷받침할 만한 거대한 선교자원을 일으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목록

 

김활영

       1994             From Asia to Asia. Manila:The Philippines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곽안련 (Clark, Charles Allen)

1994           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llustrated in Korea.  Translated by Yong Kyu Park.  Seoul, Korea: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박기호

1991           “A Two-Thirds World Mission on the Move: The Missionary Movement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1999a         한국교회 선교운동사 (Missionary Movement of the Korean Church). Pasadena, CA: Institute for Asian Mission.

백신종

       1994             “YMTC 설치 운영백서.” 예장합동 총회선교국 기안자료. 미발간.

       1998             단기선교. 서울:총회선교훈련원(MTI).

       2008             단기선교 퍼스펙티브. 경기도 고양시: 도서출판 두날개.

윤산온 (George S. McCune)

1910              Korean Mission Field, Vol.6, No.1

최찬영

1995           최찬영 이야기. 서울: 두란노.

 



[1] 이글은 필자의 저서인 단기선교 퍼스펙티브 (두날개, 2008)7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역사 수록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LMTC 홈페이지 참조. http://training.gms.kr/?sec=404

[3] 트리니티 신학교 선교대학원장인 로버트 프리스트(Robert Priest) 교수는 개별적으로 시행되는 단기선교의 통계를 내는 것이 어렵지만 북미주에서만 매년 만에서 만명 정도가 단기선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05/julyweb-only/22.0.html 참조. 이것은 북미주에서 파송된 장기 선교사의 20~80배에 이르는 숫자이다. 지난 5년간의 종교관련 출국자와 전체 여행객 증가를 분석해 보면 한국에서도 장기선교사 숫자의 최소 15배에서 50배에 이르는 단기선교팀들이 선교지를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25만이라는 숫자는 최소한의 숫자로 감안한 것이다. 필자의 추산에 관해서는 1장의 각주 7) 참조하라.

[4] http://www.stmstandards.org/ 웹싸이트를 참조하라.

 

 

>> 목차고리 : [발제]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회고와 전망 -> 응답
                    신학선교
                    신학교회사한국교회사 > 성회(기독교 집회) >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
                    단체 > 선교단체 >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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