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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10-07-06
 제목  선교지 교회개척의 과제(발제)
 주제어  [선교] [선교전략회의]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선교대회] [NCOWE V] [세계선교전략회의] [분야별4]
 자료출처  성남용  성경본문  
 내용 선교지 교회개척의 과제

선교지 교회개척의 과제


성남용 목사



  한국교회는 선교 120년 만에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역동적으로 성장했다.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지만 복음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성도들의 교회성장에 대한 열정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짧은 선교역사 안에 선교를 받는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변신하였다. 한국교회는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교회 없는 지역은 거의 없지만 교회가 끊임없이 개척되고 있다. 교회개척을 꿈꾸며 신학교에 지원하는 목회후보생들이 적지 않다. Grady and Kendall(1992)이 설문을 통해 발견한 교회개척과 성장의 일곱 가지 원리들이 있다: 1)기도, 2)전도, 3)창의적 전도 방법들 사용, 4)흔들리지 않는 신학적 좌표, 5)사회적인 필요에 민감, 6)지역 이해, 7)성도들의 참여. 이런 특징들은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며 실행하는 원리들이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다. 매일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가 자랑할 만한 전통이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새벽을 깨워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많은 교회가 전도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관계전도도 활성화되어 있다.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고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생활에도 열심이다. 전도방법도 창의적으로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신학은 한국교회의 또 다른 성장 동력이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성경의 축자완전영감(verbal plenary inspiration)을 흔들리지 않고 붙잡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절대 순종하도록 훈련하여 왔다. 신학이 건전하고 흔들리지 않는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하며 지키려 하고 있다. 사회적인 필요에도 부응하여 다른 아아(亞阿)지역과 다르게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기독교가 토착민족주의자들과 연결되어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였다. 선교 초기에 민중들이 사회개혁과 변화의 동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교회는 각종 구제나 사회복지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많은 교회들이 노인들을 위한 경로대학 등의 실버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선교원이나 어린이집, 그리고 아기학교나 방과 후 반 등을 운영한다. 성도들의 참여 역시 뛰어나다. 세계적으로도 드러날 정도로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다. 매일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수요예배, 주일 낮 예배와 찬양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순이나 구역 모임 등이 있어서 성도들은 매주 10차례 이상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인다. 그 외에도 각종 봉사와 헌신을 위한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한국교회는 성공적인 교회개척의 특징들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


  현재  53% 이상의 한국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직접적으로 교회개척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성남용 2009).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출신의 선교사들이 교회개척 사역을 잘 하지 않는 현실과 비교하면 놀랄 만큼 높은 수치다. 교회개척사역을 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중요한 이유를 들자면, 선교사들이 선교사가 되기 전부터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데 익숙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국선교사들이 목회자 출신이기 때문에 교회개척이외의 사역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선교사들이 교회개척 사역을 원치 않아도 가시적 효과를 중시하는 한국교회의 사역적 요구에 따라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후원교회들이 선교지의 교회개척 사역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사역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협력사역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교회개척사역은 홀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사역을 선호하는 한국선교사들에게는 적합하다 할 수 있다. 한국선교사들이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협력사역을 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은 많다. 선교사들이 동역할 때 수평적 구조가 아니라 서열을 매겨 수직 계열화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선교지 정착순서, 사역지 재산의 소유권, 나이, 신학교 졸업년도 등등 서열을 매기는 요인은 다양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분명한 사실은 한국 선교사들의 42%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교회개척 사역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그 사역의 진행과정이나 결과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회개척사역방법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성공적인 교회개척과 성장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면 선교지의 교회개척사역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하는데 왜 다른 평가가 나올까?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한 요인은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성공적으로 급성장했으니 세계선교에 줄 수 있는 성공경험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1)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나눌 수 있는 성공경험들이 있다면 무엇일까? 2)한국교회가 가진 부정적인 유산들은 무엇일까? 3)현재 선교지에서 시도되는 다양한 교회개척 유형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4)과연 성경적 교회개척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한국교회의 성공경험들은 우리가 세계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며, 부정적인 유산들에 대한 점검의 필요성은 같은 실수를 선교지에서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다양한 교회개척 유형들에 대한 점검과 함께 성경적인 교회개척방법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이유는 교회개척사역의 방법이 성경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한국교회의 지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범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개척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교회개척 사역의 성공여부가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이 한국선교사역의 성패와 직결될 정도로 비중이 크고, 오늘 날의 한국선교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모델로 삼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1.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나눌 수 있는 성공경험들.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제일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교사들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일본과 만주에서 먼저 한글성경을 번역하게 하셨다. 일본에서 이수정은 홀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미국 선교계에 요청하기도 했다. 박용규(2004, 325)는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마게도니아인의 역할을 감당한 이수정의 편지를 읽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들이 한국행을 택했다고 했다. 만주에서는 존 로스 선교사가 서상륜 등의 의주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했다. 김대인(1995, 130-132)은 로스의 한국어 실력이 짧았으므로 그 최초의 번역본은 로스 서상륜 공역이라 불리는 것이 옳다고 할 정도다. 서상륜은 1883년 성경을 가르치며 판매하는 권서(勸書)의 자격으로 번역된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한문 성경 등을 지참하고 귀국하여 전도인이 되었다. 초기에는 서상륜처럼 권서인으로 활약하며 교회를 세운 전도인들이 많았다.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 등의 한국인들에 의해 1883년에 설립되었다(김대인 1995, 51-84). 그 후 소래교회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 복음전도의 교두보로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5년에는 동생 경조에게 소래교회를 맡기고 서울로 상경한 서경륜에 의해 서울에 벌써 300명의 성도들과 79명의 세례지원자가 있었다(김대인 1995, 142-143). 1885년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해이니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부터 한국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토착교회들이 있었던 셈이다. 1895년부터는 세례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는데 교회들이 선교사들보다 앞장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김대인 1995, 264-265). 그리고 로스의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젼셔’는 한국 땅에서 선교가 시작된 지 2년만인 1887년에 완간되었으니 선교가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이 한국선교의 기초를 놓아주신 셈이다. 하나님의 한국교회를 향한 섭리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하여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 기존의 종교사회적 전통을 흡수하여 변혁시킴으로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토대로 삼았다. 장동민(2009, 255)이 언급한 기존의 종교적 습관이 어떻게 기독교적 전통으로 변환되었는지에 대한 다음의 내용은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알려 준다.


우리나라 기독교에 새벽 기도회가 생긴 것은 과거 종교적 습관에서 기이한 것이다. 동트기 전 인시(寅時, 오전3시-5시)를 신성하게 여겨 불교에서도 새벽 예불을 드렸고, 무속에서도 몸을 씻고 신령님께 기도했으며, 여염집 아낙네들도 길 떠나는 남편을 위해 정한수를 떠 놓고 무사 귀환을 빌었는데 이 전통이 기독교에 이식되어 새벽기도회가 되었다. 유교의 경전을 신성시하고 이를 암송하고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습관이 성경공부에도 적용되었다. 품앗이의 전통에서 일 년 중 며칠을 오직 전도를 위해 바치는 ‘날 연보’가, 무병장수를 위해 성주님께 바치던 성미에서 기독교적인 성미가 유래하였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며 세계 선교에 기여할 선교방법이 될 만한 새벽기도회나 성경암송과 성경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 그리고 ‘날 연보’나 성미제도가 과거 이방 종교행위로부터 유래하여 기독교의 선한 전통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선교할 때, 현지인들에게 이와 유사한 경험들이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이 그런 전통들을 변혁시켜 교회부흥의 틀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복음의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혼합주의적 경향성을 주의해야 하겠지만 이런 토착화를 위한 노력은 복음이 선교지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덕주(2006, 178)는 사경회 때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날 수를 적어내고 그 날 동안 자기 돈을 써가며 전도하는 ‘날 연보’제도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고 했다. ‘날 연보’는 농경사회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날 품앗이 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날 연보’를 통해서 자립전도의 전통을 세우고, 기도하며 드린 쌀로 전도자의 생활을 책임지던 성미에서 자립의 전통을 세웠다. 선교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토착적 전통들을 찾아 신학화하여 교회를 자립케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성수주일에 모범적이다. 여행을 갔다가도 본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려 하고 이런 습관을 권장하고 있다. 서구교회의 성수주일에 대한 개념은 상대적으로 아주 약하여 교회출석인원은 등록 교인수에 비하면 아주 낮다. 교회가 세속화되어가며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것이 제일의 원인이지만 교회에서 성수주일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 왔던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엄격한 주일성수를 강조한 것처럼, 우리도 개척하는 교회에 철저한 주일성수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전통도 세계교회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신앙적 유산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가 1906년 길선주 목사가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전부터 자발적으로 시작된 전통이다. 이덕주(2006, 186)는 1905년 초 교인들이 새벽에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자신도 깨어났던 한 선교사가 교인들에게 낮에 기도하라고 권면하기도 했다고 한다. 새벽을 신성시 했던 한국인들의 습관에 영적인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들이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새벽기도회의 전통을 만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져서 기도하셨다(막1:35), 새벽에 도우시리이다(시46:5),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2).’ 한국교회의 성공경험 중에서 성경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려는 태도를 빼놓을 수 없다. 박용규(1992, 103)는 한국에서 사역했던 초창기 선교사들은 축자완전영감에 기초한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무오설을 역사적 기독교 교리이며 성경의 가르침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순복하는 성경중심의 선교가 시행되었다. 초기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가 일반인들에게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영적 정신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규(2007, 55)의 지적대로 아아제국 대부분의 나라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상호수용의 결합을 하며 기독교 민족주의를 형성했다.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선교할 때 기독교가 외부인에 의한, 외부인을 위한, 외부인의 종교로 인식되게 한다면 그 선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경험했던 것처럼, 어느 곳에 복음을 전하든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을 위한, 현지인의 것으로 인식되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성공했던 요인이며, 모든 선교지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원칙이다.


  한국교회는 네비우스 원리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네비우스(곽안련 1994)는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선교비로 고용했던 현지 지도자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교회의 자립을 강조했다. 그의 자립에 대한 강조는 기존의 선교사들이 교회를 개척할 때 외부의 자금으로 예배당을 구입하고 현지인 전임사역자를 고용하던 전통적 방법에 대한 전면 부정을 뜻한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1989, 220)에 의하면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해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1)스스로 생업을 꾸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가르치고, 2)교회의 조직은 토착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발전시키며, 3)교회 스스로가 가능한 인력과 재정을 공급하게 하고, 4)교회당 건물을 스스로 마련하며 토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마펫 선교사가 보충한 두 가지는 1)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신자들에게 성경교육을 실시하고, 2)선교사는 개교회의 담임을 삼가하라는 것이었다. 1930년 클라크 선교사는 이를 자전, 자치, 자립으로 요약했다(김대인 1995, 247-248). 네비우스 방식은 성도들의 자립정신과 개개인의 헌신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선교정책이 있다 해도 성도들에게 그럴 의지가 없었다면 제대로 시행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김대인(1995, 271-272)은 한국교회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립, 자치, 자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하며 그런 의지를 갖게 된 두 가지 원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당시 사회적인 여건을 지적했다. 사회적 여건이란 주인을 잃어가는 나라를 보면서 교회마저도 주인 없는 교회가 되지 않게 하려고 초기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내가 교회를 책임져야겠다는 철저한 주인의식으로 무장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김대인(1995, 99-105)에 의하면 소래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가 경제적으로 돕겠다고 했지만 지도자 서경조는 최초의 민족교회라는 자부심으로 그 제안을 거절하며 순수한 성도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는데 이런 태도는 모든 교회들에게 본이 되어 비록 초라하게 지을지언정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당을 건축하려 했다고 한다. 박용규(2004, 53)는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왕복 여비는 물론 그 기간 동안의 모든 체제비 등을 감당했는데 1910년 곽안련 선교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오면서도 쌀자루나 연료까지도 짊어지고 참석했다고 했다.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자립을 향한 굳센 의지가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런 성공경험들이 선교지 교회들의 성공경험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유산들


  한국교회가 긍정적인 유산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잘 볼 수 없지만 부정적인 유산도 있다. 한국교회가 물려받은 부정적인 유산들을 개척한 선교지 교회에 그대로 물려주면 한국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식민지선교시대의 여러 폐해들이나 중세시대의 선교적 오류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선교를 시행하는 선교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세시대는 중세선교 패러다임에, 식민지개척시대에는 식민지선교 패러다임에 빠져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시대의 선교 패러다임에만 빠져 있다면 우리의 오류를 제대로 모른 채 선교에 참여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교패러다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크게 두 가지 부정적인 유산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기독교 왕국적 교회관과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에 따른 교회분열의 경향성이다.


1) 유산으로 받은 기독교 왕국적 교회관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크리스텐덤(기독교왕국)적 교회론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프로스트와 허쉬(2009)가 소개한 크리스텐덤의 틀이 담고 있는 폐해가 있다. 크리스텐덤의 틀이라 하면 국가와 교회의 제도적 동반자 관계를 당연하게 여기게 하고 필수적인 성직계급과 화려한 교회건물이 교회 개념과 교회 경험의 중심이 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교회를 사회와 문화의 중심으로 인식하여 성육신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교회가 아닌 끌어 모으고 끄집어내는 교회를 의미한다(프로스트와 허쉬 2009, 26-39). 우리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내재화되고 신학화된 기독교 왕국적 교회관이 만든 성직계급주의와 건물 중심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회안의 성직계급주의


  서구의 크리스텐덤이 낳은 전통적 교회론의 핵심적 사상이며 개혁교회에도 스며든 성직계급주의(sacerdotalism)나 성례중심주의(sacramentalism)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개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영적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가 AD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되면서 성직계급주의가 자연스럽게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로마 정부는 성직자들에게 공공 및 사회적 의무를 면제시켜 주며 정부의 관리들처럼 특권계급으로 인정했고 이런 특례는 그대로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되어 교회를 변질시켰다. 성직자들은 점차 정부 관리들처럼 일반사람들과 구별된 옷을 착용하며 스스로를 구별하였다. 게다가 AD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는 성만찬예식을 감독들에게만 집례하게 함으로 계급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성직계급주의는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중요한 중재자이며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에 의하면 성도들이 중재자 없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나 성찬에 참여하는 것, 또는 축복을 받는 행위를 안수 받은 성직자에게 의존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신 이스라엘을 축복할 권한은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한이 되었다(민6:23-27). 성경의 어떤 말씀도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을 포함한 개혁주의자들이 주창한 교회의 개혁은 성직과 성례중심주의에 대한 개혁이었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특별히 구별된 성직제도가 있어서 유대인 중에서도 레위지파 남성들만이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중보하며 모든 제사를 대행했고, 백성들은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속죄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히5:1). 하지만 구약의 제사장제도는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예표지 교회 성직자들의 사역에 대한 예표가 아니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으므로(롬10:4),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딤전2:5).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벧전2:5,9), 이제 누구든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다(히10:19-20). 따라서 사람이 교회의 머리역할을 하게 되는 성직계급주의 구조는 성경적 교회구조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6항도 그런 구조를 반대한다(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니,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주장은 비성경적이요, 사실에 근거가 없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욕을 돌리는 권리 침해이다). 하지만 개혁교회 안에도 교회직분의 계급적 서열을 당연시 하는 교권 주의적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짐존(2004, 123)은 초기 개혁자들이 기독교의 내용은 개혁했지만 형태는 개혁하지 못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유지되어 온 교회의 사회학적인 행태들과 단호히 결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성직계급주의를 부인했다. 그런데 오늘 날의 교회모습은 어떠한가? 성직자들이 구약의 제사장적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전임사역자들을 기름부음 받은 성직자라 하여 그 지위를 구약의 중보자였던 제사장이 가졌던 것과 동일한 역할을 부여하지는 않는가? 한국교회는 유교적 전통인 가부장적 권위가 교회의 지도력에 접목되어 더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을 띄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500년 전에 개혁자들에 의해 교회가 개혁되었지만 개혁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e Semper reformanda est)는 명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 목회자를 구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처럼 배타적 성직자라 하는 전통 아닌 전통에 대해 칼빈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고후11:19-20). 목회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목회자는 배타적 계급이 아니라 목양사역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세운 직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 제4장 1조 8항에서 목사는 ‘계급을 가리켜 칭함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리켜 칭하는 것뿐’이라 밝히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헌법). 따라서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기존 크리스텐덤적 세계관에 따른 유급 사역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고 자원 봉사자형 지도자들을 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부터 유급 사역자를 두고 사례를 지불하면 교회를 외부 의존형 교회가 되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어느 정도 자라서 현지 교회의 성도들이 전임사역자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얼마든지 세울 수 있지만 그것은 세워진 교회의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지 선교사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박기호(2005, 94)는 교회의 재생산을 막는 가장 보편적인 장애 요소로 현지인들이 헌금하는 일을 막고 의존심을 길러주는 선교사 후원이라 했다. 게리슨(2005, 291)도 외부 교회개척자들이 확보한 재정으로 교회건물을 세우고, 목사의 사례비를 충원해 주면 우선 빠른 결과들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될 수 없다고 했다. 교회의 세계 선교를 위해 휘튼 대회에서 채택한 휘튼선언(The Wheaton Declaration 1966)도 현재 선교지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이 제한되는 이유를 몇 가지 지적했는데 그 중에서 유급 사역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나 거대한 평신도 그룹에 대한 훈련과 활용의 부족 등이 있다.


건물 중심의 교회


  크리스텐덤의 영향에 따른 서구교회의 선교적 영향을 받은 한국선교도 건물 중심의 교회개척에 익숙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선교지 교회개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선교지에 교회를 하나 개척하려면 얼마나 듭니까?’ ‘2천만 원이면 개척할 수 있대요.’ ‘우리 교회는 벌써 몇 군데 개척을 했는데 앞으로 몇 개의 교회를 더 개척하기로 했어요.’ ‘우리도 선교하려고 하는데 그런 데가 있으면 좀 소개해줘요.’ 많은 교회들과 선교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있으며 간혹 자신이 개척하고 돌보는 교회가 수십 개가 된다고 자랑하는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무어가 지적한대로(2006, 174-175) 교회를 개척하려는 사역자들이 가장 먼저 완벽한 건물을 찾으려는데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크라이더(2009, 97-100)는 교회를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닌 사람으로 보는 일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서구교회가 공동체보다는 건물과 프로그램에 치중하여 그 힘을 잃고 있음을 경고하며, 성경에 바탕을 둔 소그룹 형태의 가정교회와 참석하는 시설로서의 교회가 아닌 삶을 나누는 방식으로서의 교회를 기대하고 있다. 크라이더(2009, 17)는 대형교회의 유행이 지난 후에는 가정교회가 복음주의 예배를 이끄는 영적흐름을 주도할 것으로 예견하며 2009년 현재에도 5% 정도의 교인들이 가정교회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선교지에서는 유급사역자로서의 성직자와 교회 건물을 교회를 성립케 하는 필수요소로 보게 하는 전통적 교회론이 의존형 교회를 만들어내고, 선교사들의 교회개척사역에 대한 만족도와 효율성을 감소시키고 있다.


2)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분열)


  가톨릭교회는 사도적 정당성을 교회에 계승되는 성직 제도에 두고 있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사도적 정당성을 성직제도가 아닌 무형의 사도적 말씀 선포에 두기 때문에 끊임없이 분열되는 약점이 있다. 사도적 말씀 선포를 각 사람의 양심과 이성에 맡겨두니 교회가 나누어지고 교파주의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개혁교회 교회론의 신학적 취약점이다. 하나 되라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는 치열한 영적각성과 다름을 이해하려는 성숙한 인격이 동반되지 않으면 분열과 교파주의를 피하기 어렵다. 개혁교회는 교회의 분열을 당연시 여기면서까지 더 선명한 사도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자성이 필요하다. 한스 큉(1978, 119)은 교회의 4가지 속성을 교회의 특징만이 아닌 교회가 수행해야 할 교회의 중대한 과업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한국교회가 경청해야 할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 문제와 함께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자립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개교회주의와 교회간의 경쟁구조, 교단과 교회의 분열, 무인가 신학교의 범람 등이 교회문제를 넘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목회자 후보생을 남발하여 교계가 혼란스럽게 되고, 사회에서는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선교 초창기에 선교사들 간에 맺었던 예양협정(comity arrangement)이라하는 선교지역 분할정책도 교회 간의 선한 경쟁심을 촉발케 하여 교회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후일 한국교회를 분열케 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 사역하던 초창기 선교사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이상규(2007, 57)는 한국에서 사역하던 미국선교사들의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는 비블리시즘(Biblicism)과 감성적이며 개인적 신앙을 강조하는 부흥주의 등을 부정적인 요인들로 꼽았다. 감성적이고 개인적 신앙을 강조하니 교회는 감성적으로 분열되었는데 한국교회는 분열하면서도 성장하였기 때문에서 분열을 성장의 동력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분열상은 선교지의 교회들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 한국교회의 부정적 유산이다.



3. 시도되는 다양한 방법의 선교지 교회개척


  한국교회는 그동안 기존의 방식대로 교회를 개척해왔다. 유급사역자를 고용하고 예배당을 건축해주며 교회를 개척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가져오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사역의 낮은 만족도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교회개척을 시도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할 때, 그 원리는 변할 수 없지만 개척하는 방법들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려는 지역의 종교사회적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미접촉종족이 많은 지역에서는 법적으로 개종이 금지되어 있어서 개종을 한다면 법적제재를 피할 수 없다. 법적으로 금지가 되지 않는다 해도 문화사회적으로 고립과 추방 등의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지역들도 적지 않다. 물론 복음을 받고 회심을 하는 것에 아무런 종교사회적 제한이 없는 지역들도 있다. 따라서 지역의 특성에 따라 교회개척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교지 교회개척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것들이 있다. 대안으로 제시된 방식들 중에서 크게 두 가지를 살펴보면,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와 교회 없는 기독교의 형태가 있다. 가정교회 형태는 기존의 크리스텐덤적 교회론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며 교회 없는 기독교는 미접촉지역 등에서 세울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다.


1)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는 먼저 기독교왕국적 교회론에 수반되는 유급사역자와 건물 중심의 교회를 교회개척의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고 자원봉사형 사역자와 사람 중심의 교회를 강조한다. 최근에 아시아와 남미 등의 선교지에서 놀라울 정도로 개척되며 성장하는 교회현상을 데이빗 게리슨과 그의 동료들은 교회개척 배가운동(church planting movement)이라고 명명했는데 일례로, 북인도의 한 종족에서는 1989년에 28개의 교회에 불과했던 교회가 2000년에는 약 4천5백 개 이상의 교회와 30만 성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Garrison 2005, 22). 그는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세워지고 있는데 개척된 교회들도 빠른 시간 안에 자신과 동일한 형태로 재생산을 하는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고 있다고 했다(Garrison 2005, 28-29). 비록 선교사가 외부인으로서 미전도종족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지만 곧 내부자들이 그 일에 참여하게 하는 구조로 교회를 개척한다(Garrison 2005, 29). 전임사역자가 필요 없고 건물이 필요 없으니 헌신된 전도자만 훈련시키면 교회들은 빠른 속도로 개척된다. 이런 형태의 교회개척 방식은 크리스텐덤적 교회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교회성장운동형 교회개척 방식과 최소한 세 가지 영역에서 분명하게 구분된다.


  첫째, 교회성장형 교회개척이 큰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가정교회형 교회개척은 작은 것이 더 좋다는 원칙을 고수하여 20명 정도의 구성원을 가진 가정교회들이 주축을 이룬다. 크리스텐덤의 거대한 교회에서 소외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작지만 유기적인 초대교회와 같은 영적공동체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짐존은 ‘가정교회’라는 책을 통해 교회가 너무 커진 결과 교회가 ‘교제 없는 공동체’가 되었다하며 교회가 바람직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작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2004, 19). 짐존이 언급한 작은 교회는 형식적이고 예전 중심적인 교회가 아닌 내밀하고 친밀한 가정교회를 의미한다. 그는 현재의 대형교회들이 종종 자신들의 영적예배처일 수 있는 가정을 도외시 했다 하며 교회는 교회가 생겨난 뿌리인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2004, 27). 짐존의 가정교회는 20%의 성도만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참여자가 되게 하고, 가정을 믿음으로 회복시킬 것을 강조하는 등의 좋은 점도 있지만 작은 공동체는 그 나름대로 많은 부정적인 요인들을 처리하기에도 바쁠 수 있다.


  둘째, 교회성장운동은 복음의 무반응지역으로 여겨지는 곳과 미전도지역을 포기하고, 잘 알려진 추수지역에 자원을 집중 투입할 것을 권고하지만 가정교회형 교회개척은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미전도 종족그룹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게 함으로 보다 더 선교적이다(Garrison 2005, 32-33). 동일집단의 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나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는 수용성(receptivity)의 원리 등이 교회성장운동의 특징인데 이런 원리들은 복음의 무반응지역에 집중하게 하는 가정교회형 교회개척과는 전혀 다르다. Elliott(1981)는 교회성장운동을 낡은 자본주의적 정신구조에서 태어난 미국교회가 만들어낸 최악의 교회에 대한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동일집단의 원리는 벽을 허무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하며, 수용성의 원리는 교회가 하나님 말씀보다 사회현상에 더 민감해 지도록 만들었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아닌 사람들이 반응하는 지역으로, 소외된 자가 아닌 교회성장에 필요한 자가 있는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으며, 목회자를 목회전문가로 인식하도록 하여 섬기는 종으로서의 자세를 잃게 했다고 했다. 맥가브란의 교회와 선교를 향한 충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이론들이 크리스텐덤의 영향 속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교회성장형 교회론이 크리스텐덤의 양식에 따라 세워져 교회로 찾아오게 하는 가정교회형 교회론은 성육신적으로 가정 속으로 찾아가 그 안에서 사역이 이루어지게 한다. 유급의 전임사역자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므로 교회개척의 전제가 전통적 형식의 교회론과 다르다 할 수 있다.


2) 교회 없는 기독교와 구원론


  선교지 교회개척의 대안으로 허버트 호퍼(Herbert E. Hoefer)의 교회 없는 기독교(churchless Christianity)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호퍼(1991)는 타밀 나두(Tamil Nadu)의 한 시골지역과 수도 첸나이(Chennai)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수집해서 책을 썼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지만 유형교회에 참여한 적이 없고 그대로 힌두공동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호퍼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는 대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진 예수 브하크타(Jesu Bhakta)라고 불렀다. 이들은 세례를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NBBC, Non-Baptized believers in Christ)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성도들이다. 세례를 받고 교회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의 수는 NBBC보다 훨씬 적다(Hoefoer 1991, 106). 특히 높은 카스트에는 신자가 6%밖에 되지 않는데 그 중에서 NBBC가 4.5%이니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1.5%에 불과하다. 일반 카스트에는 21%의 신자 중에서 NBBC가 6%이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15%이다. 불가촉천민 카스트에는 33%의 신자 중에서 NBBC가 13%이며 20%가 교회에 출석한다(Hoefer 1991, 114-115). 특히 높은 카스트에서 NBBC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다. 높은 카스트의 NBBC는 4.5%지만 NBBC 안에서 그들의 비중은 1/3(32.69%)이나 된다. 그들이 예수님을 예배하면서도 신학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sociologically) 교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힌두공동체에서 배타적으로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예수 브하크타들은 예수를 자신들이 선택한 신(ishta devata)으로 경배하면서도 힌두사람으로서의 문화사회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토착화된 기독교(an indigenous Christianity)가 아닌 기독교적 힌두교(a Christianized Hinduism)가 되기 쉽지만 호퍼는 이 둘의 차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목표가 문화를 바꾸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포로가 되지 않고 복음이 교회의 담을 넘어야 하며 바로 그 일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힌두 종교 공동체 안에서 교회 없는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교회 없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이유는 힌두와 무슬림 공동체가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힌두사회에서 교회의 세례는 그리스도에 연합되는 표지가 아닌 자신들의 사회정치종교 공동체를 거부하고 다른 사회정치적 공동체로 전향하는 예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가족 중에 회심자가 있다면 가문의 수치로 여겨 명예살인까지라도 행하여 수치를 씻으려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도 세례를 받고 지역교회에 속하는 것을 가족과 민족 공동체에 대한 배신으로 이해하니 그들이 힌두교도라는 정체성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 것이다. 내부자운동(insider movements)을 통한 교회 없는 기독교를 지향하는 교회개척방식은 법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개종이 금지되거나 억압되는 선교지에서 어찌하든지 영적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많은 힌두교도들은 조직된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을 신고 예배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을 경멸한다. 기독교인들이 바닥에 않지 않고 의자에 않는 것을 보고도 문화적 이질감을 느낀다. 왜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팔지를 차지 않고 유명한 문화적 축제자리에 참여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힌두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끌린다 해도 교회의 일원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에 반감을 갖는다. 힌두교도들만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해서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무슬림교도들도 기독교인들을 풍기문란과 호색문화를 조장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부도덕한 삶을 시작했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가족과 민족을 배반한 자로 여긴다. 그래서 무슬림 공동체에서도 교회 없는 기독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무슬림, 이사(아랍어로 예수)를 따르는 이슬람적 모스크가 생겨나고 있다. 특수한 지역에서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 없는 기독교가 선교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호퍼의 교회 없는 기독교를 유효한 선교적 대안이라 하며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미전도종족이나 미접촉 지역 등에서 전통적인 방법을 통한 선교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설혹 개종자들이 생긴다 해도 그들이 치러야할 엄청난 값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힌두교나 이슬람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만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도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다. 실제로 힌두나 이슬람 환경에서 종교를 떠날 때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나라가 있다 해도 사회문화적으로는 고립과 박해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회심자들을 불러내어 교회를 세우지 않고 그 사회문화 속에 거하며 은밀한 성도가 되게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만 세례를 받지 않고, 공중에서 믿음을 고백하지도 않으며, 지상교회에 참여하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윈터는 현재 선교지에 수백만의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교회 없는 기독교는 존 트라비스가 구분한 상황화 레벨에서 C5와 C6의 경우에 해당한다(Parshall 2003, 70-83). C5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슬람 공동체에 남아있지만 이슬람 신학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거나 거부하며 스스로는 메시야 이사를 따르는 무슬림이라 하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을 무슬림으로 여기는 단계다(Parshall 2003, 71).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C5 이상의 상황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전하는 것조차 불법이며 추방이나 박해를 피할 수 없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교회 없는 기독교를 주창한 호퍼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을 전방개척지역의 선교적 대안으로 택하기에는 교회론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점이 많다.

  

  데이빗 웰스는 교회 없는 기독교를 비판했다(David Wells 2006). 벌써 미국에만 해도 수백만의 성도들이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이것은 미국적 상황의 선교전략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인터넷 교회(the cyberchurch)는 북미에서 새로운 사회현상이 되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3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 인터넷을 통해서 종교적 정보를 찾는데 이는 지난해의 2백만 명에서 증가된 수다. 사이버교회가 흥왕하고 있다. 기존의 교회가 채워주지 못하는 영적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짐존(2004, 56)이 인용한 "믿음의 장벽들(Barriers to Belief)"에서 존 켐벨(John Campbell)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이니 교회 밖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들이는 것(church the unchurched)보다 교회를 하나님이 의도하던 대로의 교회로 회복시키는 것(unchurch the church)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방개척지역에서의 교회 없는 기독교는 어느 정도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지역에 선교적 교회론으로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전방개척지역이라 해도 교회 없는 기독교가 다음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무슬림이나 힌두교도로 자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스스로와 이웃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예전의 종교적 관습들을 계속 지키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역교회에 참여하지 않고 구별된 성도로서의 삶이 가능할까?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한 성도들이 예수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그들은 내부적으로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신 죽음을 각오하고 세례예식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에 고백하고 선포하였다. 또한 당시 제국의 다신교적 문화의 틀 안에서 예수를 따르지 않고 핍박을 각오하면서 예수를 유일신으로 고백했다. 바로 이런 단호한 결단 때문에 예수의 유일성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에는 문화도 거듭나야 한다. 따라서 선교적으로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의 범주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교회 없는 기독교를 특정한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일반적 교회개척의 대안으로 채택할 수는 없다.



4. 선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 교회


  크리스텐덤적 모델에 따른 교회개척은 선교사나 후원교회에서 현지 지도자에게 사례를 지불하고, 큰 교회건물을 구입하고 운영하게 하며, 교회와 사역자를 외부 의존형 교회와 지도자가 되게 한다. 선교사는 영적 지도자라기보다는 교회의 운영자로 인식되고 현지지도자와의 관계는 수직적 계급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실제로 아시아지역의 한 선교사는 백 명도 넘는 현지 지도자들에게 사례를 지불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현지 지도자들은 선교사에게 영적인 감화를 받는 관계가 아닌 물질적인 혜택을 주고받는 영리적 관계를 맺고 있다. 성경적으로 선교사의 역할은 현지 토착지도자를 발탁한 후, 복음이 아직 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옮겨가는 것이지만 크리스텐덤의 모델을 따르는 선교사들은 개척된 교회에서 영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선교사는 복음이 뿌리내림에 따라 지도자 역할을 포기하고 새로운 지도자에게 그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새로운 개척지로 이동해야한다(Garrison 2005, 315). 한국선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성경적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선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 교회를 세우려면 다음 세 가지, ‘1)토착형 자립교회를 지향하는 성경적 교회, 2)선교적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3)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마음속에 두어야 한다. 


1) 토착형 자립교회를 지향하는 성경적 교회


  토착형 자립교회는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교회건물보다 회심한 성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다. 교회는 어떤 기관(institution)이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모임인 예수 공동체(community)이다. 초대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예배당대신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 형태로 회집했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행12:12),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행16:40),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몬1:2) 모였다. 물론 교회가 성장하면서 독자적 예배공간을 소유했겠지만 개척의 조건으로 건물을 먼저 짓지는 않았다. 선교지에서 교회건물을 중심으로 한 교회개척은 식민주의 형태의 의존형 교회를 만들 가능성이 많다. 또한 선교사가 교회 건물을 소유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교인들에게 일방적인 관계를 강요하는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나 일방주의(triumphalism), 또는 인종주의(racism)나 유사애국주의(pseudopatriotism) 등의 형태를 유지하기가 쉽다. 이런 형태는 그동안 2/3세계 교회들이 서구 선교를 비난했던 중요한 이유들이며 크리스텐덤적 교회론의 산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런 형태의 선교는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원치 않는 선교사 모라토리움을 불러와 교회를 약화시킬 위험도 크다. 물론 필요에 따라 건물을 세울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를 세우는 일보다 건물을 더 우선할 수는 없다.


  둘째, 현지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자립적 교회다. 전통적 형태의 교회는 시작할 때부터 목회사역을 전담하는 유급사역자를 필수로 한다. 자연히 지역교회는 외부 의존 형 지도자를 갖는 셈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바울이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꼭 각 교회를 책임지고 지도할 일군을 세웠다. 교회의 권위를 외부자의 손에 의존하지 않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세워지자마자 현지 지도력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회를 지도하게 했다(행14:23).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1차 선교여행 기간 동안에도 지도자들을 세워 각 교회를 돌보게 했다. 마지막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도 그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에게 교회를 위임했다(행20:17).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도 각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게 하기 위함이었다(딛1:5). 싱클레어(2008, 337-339)는 어떤 저항적 민족 그룹이라고 해도 현지인 장로들을 리더십으로 세우면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 했다. 각 교회(단수형)는 사도들이 임명한 장로들(복수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성경 기록에 나타나는 일관된 패턴이다(싱클레어 2008, 341). 초대교회에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각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급 자원봉사자였을 것이 분명하다. 아직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가정교회 형태였기 때문이다. 성경적 만인제사장 제도의 선교적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바울처럼 일하며 전도하는 무임 사역자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같은 조명(illumination)을 받는다. 따라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성도들이 목양사역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론 교회가 성장해서 전임사역자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사례를 받는 전임목회자를 둘 수 있지만 필수조건만은 아니다. 이슬람교나 많은 지역의 토속종교는 전임유급사역자 개념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지역에서 전임유급자 종교지도자라 하면 종교 사기꾼이나 불성실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 존경을 받기 어렵다. 남침례교단의 국제선교부는 “POUCH"라 하는 교회개척 방법을 개발했다. 참여적이며(Participative), 하나님 말씀에 순종적이며(Obedience), 사례를 받지 않는(Unpaid), 평신도 지도자들로 구성된 가정(House)교회 형태의 교회개척 방법이다(싱클레어 2008, 319). 가정교회는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교회를 건물이 아닌 사람으로 이해하며,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게 하고, 창의적이고 토착적이며,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 가정교회와 셀 교회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가정교회는 유기적이지만 셀 교회는 계급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조직적이다. 가정교회가 미국의 쇼핑 몰처럼 작은 단위가 주체가 되는 컨소시움 형태의 연합을 추구한다면 셀 교회는 백화점처럼 하나의 상호를 가진 대형 조직에 속한 지부 형태의 연합을 추구한다. 자연히 가정 교회의 구조는 단층적으로 병렬로 되어 있다면 셀 교회는 이드로가 충고한 대로 리더 중심의 복층구조로 직렬로 연결되어 있다. 전임사역자의 경우에도 가정교회는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셀 교회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크라이더(2009)는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를 선호하면서도 다양한 교회의 형태를 인정하고 있다. 실로 전통적인 많은 교회들도 셀 교회 형태의 지부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짐존(2004)은 가정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 형태를 부정하며 제3의 종교개혁적 자세로 대형교회를 가정교회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가정교회가 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교회의 형태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라 할 수 있다. 특히 데이빗 림(David Lim, n.d.)이나 라드 즈더로(Rad Zdero)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김활영 2010, 70-79), 가정을 강조하기 위해 예배당을 부인하고, 평신도 지도력을 강조하기 위해 목회자를 부인하며, 모든 날을 강조하기 위해 거룩한 날로 구분한 주일을 부인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하며 구별된 예물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경적 교회론이라 할 수 없다. 기존의 교회를 부인하며 가정교회만이 성경이 지지하는 유일한 형태의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도 균형잡힌 교회론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자립형 토착교회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한국적 개교회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 또 다른 형태의 왜곡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초대교회가 가정교회의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고 해도, 현대와 같이 대형화되고 전문화되는 시대에 초대교회의 형태를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남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이 적용되는 현장사이에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2)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소유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처럼(출19:5-6), 하나님은 성도들을 에클레시아인 교회로 부르셔서 하늘에 속한 천국백성이 되게 하셨다(엡2:6). 천국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는 세상으로 보내시기 위함이다.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요3:17, 5:30, 11:42, 20:21).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두 가지를 암시한다. 보내시는 분과 보냄을 받은 분이 동일한 권세와 동일한 영광을 갖고 있다는 것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다.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바의 사명을 완수하셔서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백성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교회로 부르신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요17:18, 요20:21).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중에서 일부인 사도들이나 목회자 또는 특정한 선교사들만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보내시니까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보내심을 받은 교회와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이다. 보내심의 뜻을 가진 라틴어 미시오(missio)에서 선교를 뜻하는 미션(mission)이 나왔으므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선교적 교회와 선교적 성도다. 이처럼 교회와 선교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내용의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참된 교회론은 참된 선교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숨 쉬는 행위에 비교하면 교회는 들숨과 같고 선교는 날숨과 같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를 언급할 때 선교가 교회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며 선교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최근에 선교적(missional)이란 용어의 사용이 부쩍 늘어났다. 로흐버그는 선교적이라는 단어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뉴비긴이 언급한 하나님의 백성(교회),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그대로의 복음, 그리고 주변 문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삼방향 대화(three-way conversation)의 중요성에 대해서 기술했다(Roxburgh n.d.). 선교적인 만남은 교회, 복음, 문화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며 복음이 세상에 효과적으로 제시되려면 어떤 곳, 어떤 시간에도 삼중적 대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교회로 성육신적이다. 하지만 선교적 신학, 선교적 교회론을 현장에 적용할 때 문화에 대한 지나친 적용이 자칫 교회의 거룩함을 손상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적(missional)이라는 용어는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가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선교적 교회와 선교적 성도라는 깨우침을 주었고, 보내심을 받은 교회로서의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었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 문화에 대해 성육신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의 문화에 성육신적으로 반응하는 선교적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교회가 또 다른 선교적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가 세계와 나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성공경험이다. 한국교회는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기도하는 교회였다. 데이빗 게리슨이 교회개척 배가운동에서 성공적으로 세워지는 교회들을 통해서 발견한 열 가지 특징인 “1)열정적 기도, 2)풍성한 전도, 3)재생산 교회의 의도적 개척, 4)하나님 말씀의 권위, 5)현지 지도력, 6)평신도 지도력, 7)가정교회들, 8)교회들을 개척하는 교회들, 9)급속한 재생산, 10)건강한 교회들(Garrison 2005, 197-230)”은 기도하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징들이다. 열정적 기도는 바로 한국교회가 성장하게 된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교회만의 특징이 아닌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한 모든 교회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먼저 교회를 세울 때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또 전도하는 교회,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급격한 재생산이 있는 교회들은 모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증거들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복음전도에 활발한 전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신다. 또한 성장하는 교회는 모두 선교사가 아닌 현지 지도자들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게리슨은 외부 의존형 교회는 결코 교회의 부흥을 이루지 못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개척 배가운동에서 핵심역할을 하는 지도자들은 자기 직업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평범한 평신도들이다. 이는 만인제사장(벧전2:9) 정신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역의 전문성을 위해서 전임 사역자를 두는 것은 선교사가 아닌 세워진 교회들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건강한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다. 교회성장은 어떤 기능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셔야 생명운동이 일어나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나눌만한 성공경험들이 많다. 우리가 세계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이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이방종교로부터 전해온 관습이지만 믿음의 선조들이 그 내용들을 변혁시켜 교회의 새로운 전통으로 만들었다. 창의적인 영성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네비우스의 정책이 있기 전부터 한국교회를 자립, 자치, 자전하는 교회로 만들었다. 성미나 날 연보 등을 드림으로 교회를 외부 의존형으로 만들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립하게 했다.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주일을 성수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며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완전축자영감의 성경관을 가져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다.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이며 우리가 세계교회와 나눌 수 있는 복된 유산들이다. 한국교회의 성공적인 경험이 한국교회만의 경험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선교지의 모든 교회가 함께 공유하는 경험이 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교지를 잠시 어렵게 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비결이다. 한국교회가 물려받은 부정적인 유산도 있다. 우리는 서구교회로부터 변형된 성직계급주의의 흔적들과 웅장한 건물 중심의 교회를 중시하는 기독교왕국적 교회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결과 선교지에 다음 다섯 가지의 좋지 못한 전통을 만들었다. 1)사람이 아닌 교회건물을 더 중시하여 교회개척을 예배당건축과 동일시한다. 2)사역자의 사례나 교회의 운영을 선교사나 외인의 지원에 의존하게 하여 선교사를 사역자(minister)가 되게 하기보다 선교운영자(mission manager)가 되게 한다. 3)교회의 성도들이 주인의식을 갖지 못하고 방관자처럼 행동하게 하여 자립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4)개척된 교회가 현지의 교단이나 다른 교회와의 원활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도리어 교회연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 쉽다. 5)드림으로서 받게 되는 하나님의 역동적 은혜를 체험하기 어렵게 한다. 또한 한국교회에는 교파주의로 상징되는 개교회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하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선교지에 전해주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유산들이다. 세계적으로 기독교왕국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무장하여 교회를 개척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개척과 교회 없는 기독교 형태의 교회개척이 그런 시도들이다. 물론 이런 시도들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함유하고 있다. 내부자운동을 통한 교회 없는 기독교 운동은 선교지의 암울한 영적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특수한 선교적 환경에 유효할지 모르지만 모든 선교지에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므로 그 적용범위를 특정한 지역과 문화로 제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선교지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에 힘써야 한다. 성경적 교회란 토착형 자립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로 교회 건물보다 성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이며 현지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자립적 교회다. 또한 토착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성육신적 교회이며 재생산하는 선교적 교회다. 우리는 세워지는 선교지의 교회들이 한국교회에 속한 교회가 아닌 하나님께만 속한 교회,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 건물보다 믿음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교회가 되길 기대한다. 또한 부르심을 받아 교회를 이룬 모든 교회들이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다하며 처해있는 문화적 현실에 잘 대처하는 선교적 교회와 선교적 성도가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기도하는 교회, 드리는 교회, 헌신하는 교회의 높은 영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선교지에 세워지는 교회들이 모두 성령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이 높은 영성을 유지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한국선교의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높은 영성과 성공적인 교회개척사역은 포스트모던의 가치관이 성행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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