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 ·청나라의 싸움이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명의 요동주둔군이 조선에 파견된 틈을 타고 세력을 확장시킨 만주족은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칭하고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명은 조선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후금은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구해왔다.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탁월한 정치적 안목으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워 중립외교노선을 지향하면서 전후 복구 작업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인조반정(1623)에 의해 쫓겨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과의 명분을 내세워 후금을 배척하고 명을 옹호하였고 자연 후금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은 형제지국을 맹약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632년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해마다 황금·백금 1만 냥, 말 3,000필을 보낼 것, 그리고 군사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용골대·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고는, 조선에 대해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主和論)보다는 척화론이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군 7만·몽골군 3만·한군 2만으로 편성한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이르자 인조의 수레는 수구문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청나라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성내에는 군사 13,000명이 절약해도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 밖에 없었다. 게다가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어 노숙하고 있던 장수와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병들어 죽어갔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군과의 결전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파와 김상헌(金相憲) 등 척화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세자와 함께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였다.
그리고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봉림대군 등의 2왕자와 척화의 주모자인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3학사를 잡아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무려 50여 만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니, 사실상 청나라에 복속되고 만 것이다. 정묘호란를 통해 이미 조선은 군사력의 열세를 실감했다. 그 뒤 10년 가까운 기간에도 군비 증강을 위한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으므로 군사력의 열세는 지속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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