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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4-11
 제목  정묘호란(丁卯胡亂)
 주제어  [한국사]
 자료출처  차석찬의 역사창고  성경본문  
 내용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이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중립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다. 즉,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이괄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등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l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 ·평산(平山)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란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그리하여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①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②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③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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