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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11-24
 제목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 5.29~1963.11.22)
 주제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미국 대통령]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이자,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이다.

그의 임기 2년 동안에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미국 민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역사가들은 케네디를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존은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 사이에서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에 닥친 대기근으로 인해 케네디 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하였다. 194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영국은 왜 잠자고 있는가 Why England Slept〉(1940)는 영국의 군사적 무방비상태를 논한 것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케네디는 1958년 상원의원에 재선되었으며, 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후보지명을 받았다. 아이젠하워시대의 침체를 타파할 참신한 후보로서 뉴프론티어의 슬로건을 내걸고 공화당 닉슨후보와의 텔레비전 토론에서 우위에 올라, 격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사상 최연소(43세)대통령이고, 최초의 가톨릭교도 대통령이었다. 61년 1월 취임연설에서는 미국의 전진을 호소하고,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헌신을 부르짖었다. 웅변과 재기에 뛰어나 기자회견 등에서 텔레비전을 교묘히 이용해 이미지를 심는 정치를 하였던 케네디는  화려한 슬로건에 비해 의회와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고 내정에서도 그다지 뛰어난 업적이 없었다. 그러나 평화봉사단을 창설해 국민의 봉사 정신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결부시킨 일은 환호를 받았고 62년 10월 쿠바미사일위기 때 핵전쟁 위험을 무릅쓴 해상봉쇄에서 흐루시초프와 대결, 쿠바 불침략 공약과의 교환조건으로 미사일·폭격기 철수를 수락받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험으로 63년 6월 아메리칸대학 졸업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전략을 제창하여 7월 미· 영·소 3국간의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1963년 11월 인종문제, 중국과의 국교회복 등 현안문제를 남겨 둔 케네디는 정치 유세를 위해 텍사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64년 대통령 선거가 채 일년도 남지 않았고, 남부지역에서 그에 대한 인기도는 민권에 관한 입법에 대한 그의 강력한 지지로 말미암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1월 22일, 케네디가 무개차에 앉아서 자동차 퍼레이드로 달라스시를 지나가고 있을 무렵,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 한발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 다른 총알을 맞고 그의 머리 절반은 부숴졌고, 또다른 한발로써 같은 차에 타고있던 텍사스 주지사 존 B. 코넬리는 부상당했다.
이는 텔리비젼과 전세계 동시방송의 츨현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세계적 주요 지도자의 암살이었다. 케네디의 암살 사건은, 이틀후의 그의 장례식과, 암살자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왈드(1939-1963)가 잭 루비(1911-1967)에 의해 살해된 것을 포함하여 방송되었는데, 이 방송은 는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FBI와 달라스 경찰은 '리 하비 오스왈드'를 대통령 암살 용의자로 체포하고 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린다. 25일, 오스왈드가 호송도중 '잭 루비'에게 살해당하고 결국은 진실을 알수 없게 되어버린다. 존슨대통령은 '알 워렌'을 위원장으로 "워렌 위원회"를 구성하고 케네디 암살사건을 조사하게 하고 워렌 위원회는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임을 최종결론 내리고 종결하게 된다. 그런데 워렌 위원회의 결론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짐 게리슨 검사처럼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 아니라, 여러 명이 암살에 가담했고 그 뒤에는 CIA, FBI, 국방부 등 군산복합체 (軍産複合體) 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월남전이 발발하자, 미국의 군부는 적극참여를 주장하지만, 케네디는 철수를 결정한다. 특히 취임 초, 쿠바의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CIA의 피그즈만 작전때 공군의 지원을 거부하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부의 반발이 심했었다. 62년 쿠바사태때 강경한 정책으로 소련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그 영향으로 소련의 흐루시초프 수상과의 정상회담 등을 통한 화해무드가 무르익어가자 이를 불만으로 여기던 군산복합체의 음모로 암살이 진행되었고 오스왈드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워렌 위원회 또한 진실을 무시한 채, 군산복합체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이론만을 발표했다.」 


이것이 게리슨 검사를 비롯한 사람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청문회가 1978년 미 의회에서 재개되었을 때에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났다. 결론은 두번째 암살범이 또 다른 장소에서 케네디에게 총을 발사했으며, 아마도 그 총격은 치명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의 암살범은 결코 밝혀질 수 없으며, 해를 이어 증식되온 수많은 케네디 암살 음모설 중 어떤 것도 밝힐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낸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메리카 > 미국 > 역대 대통령

>> 연결고리 : 미국대통령, 존 F 케네디(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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