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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4-25
 제목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ov, 1931. 3. 2~ )
 주제어  [소련] [러시아] [정치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러시아의 정치인으로 제8대·9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수반 겸 당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부터 1991년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국무총리에 있었으며, 1990~1991 대통령을 지냈다.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였고, 이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공산주의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연방 남서부 스타브로폴 지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6년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으며, 이후 4년 동안 국영농장의 콤바인 기술자로 일했다. 콤소몰에서의 활동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1952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그해 공산당원이 되었다. 19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콤소몰과 정규 당조직의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지역 당위원회의 제1서기에 올랐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드로포트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 제 2인자이 자리를 굳혔다. 1985년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었고, 이어 소비에트 연방의 국무총리와 국가 수반을 겸임하였다. 집권 이후 그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社會主義計劃經濟)의 문제점(비능률적인 행정으로 인한 물자부족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모스크바에 최초의 시장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언론 자유화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고르바초프의 집권 후, 텔레비전방송에는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가 방영되기도 하였으며, 정치에 대한 비판 즉, 사회주의나 소련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었다. 또한 이전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러시아 정교회)사제들의 성직활동을 금하는등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는 지지세력을 얻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활동을 허용했다.

 

1990년 3월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수반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권위와 국내경제가 현저하게 약화한 가운데 벌인 급격한 개혁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고, 이에 반발한 보수파틀이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흐루쇼프처럼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고 구체제로 환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보수파의 쿠데타 기도는 옐친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들과 민중의 저항으로 3일만에 실패하였고, 4일 뒤 그는 다시 권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 정부와 공산당의 지도력은 걷잡을 수 없이 땅에 떨어져 결국 12월 벨라베자 조약에 의해 소련은 해체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직과 공산당 서기장을 사퇴하였으며, 소련의 각 공화국들은 느슨한 독립국가연합을 구성하기는 했지만 결국 모두 별개의 주권국가로 분리독립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해체 이후 러시아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위기'를 배경으로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 안드로포프와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개혁을 통해 경제 침체와 기술 낙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서기장으로 취임한 후 소위 .근본적 개혁'을 선언했을 때 이를 곧 경제개혁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1988년 6월 협동조합법이 발효됨으로써 모든 경제 부문에서 사기업 활동이 허용된 것이다. 뒤이어 임대기본법(1989.11)과 토지법(1990.3), 소유권법(1990.3)이 채택됨으로써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실상 생산 수단의 부분적 사유화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시장화 개혁은 역류를 경험하게 된다. 소연방 최고회의는 1989년 10월 협동조합법을 개정하여 생산품의 가격통제 등 영업 행위를 규제하기 시작했고, 특히 국영기업법의 개정으로 기업에게 부여되었던 각종 권한은 대부분 다시 중앙의 계획 및 경제관리 부서에 회수되었다. 끝으로 1989년은 가격 규제와 자본재 공급 등에 있어서 중앙의 통제가 실질적으로 강화된 해로 개혁은 구호와는 달리 퇴행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 개혁이 파행을 거듭한 데는 물가 상승과 방만한 재정 적자를 줄이고 일단 경제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성, 실업 등 개혁에 따르는 부작용 및 시장화 개혁에 대한 반대 등의 문제들이 정치 안정에 미칠 역효과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고르바초프는 경제 개혁을 미루고 집권 엘리트내 개혁 반대 세력의 제거를 겨냥한 가운데 정치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6월 제19차 당회의에서 서구식 의회 및 강력한 권한을 갖춘 대통령제의 도입을 골자로 하는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지방의회도 실질적인 민의의 대표 기구로 변신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대신한 국가 기구로의 통치권 이전과 이를 통해 정부 조직에 대한 통제를 보다 강화할 수 있도록 바랐던 것이다. 이후 소련에서는 '정치 개혁'으로 지칭될 수 있는 변화가 발빠르게 전개 되었는 바 이는 크게 '민주화'와 '정보공개'의 기치 하에 진행되었다.

 

민주화

고르바초프는 1987년 1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경제 개혁은 정치체제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천명했다. 그는 주택 부족과 식량 공급상의 애로에서부터 범죄조직의 발호 등이 모두 정치체제의 결함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주장, 일반 시민이 스스로를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느끼게 되도록 폭넓은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집안은 그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 의해서만 정리될 수 있다."고 말하고 민주화를 고무할 수 있도록 바랐다. 고르바초프는 이로써 '위로부터의' 지도와 '밑으로부터'의 (국민들의 개혁반대 세력에 대한)통제를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종래 후보 선택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던 선거제도를 바꾸고 입법부를 정비했다. 또 정치 개혁에 관한 논의는 자연히 공산당의 위상도 포함하게 되었다. 임명제로 인해 당이 전위적 역할 대신 특권과 부패의 온상으로 변모하게 된 현실을 비판하고 당내 민주화를 주장했다. 1990년 2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는 고르바초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당의 지도적 역할에 관한 헌법상의 보장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정치에 있어서 집권당으로서의 공산당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으나 이것은 헌법상의 보장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또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보다 근본적으로 법치주의의 확립과 더 나아가 시민의 정치활동 확대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88년이래 소련은 '사회주의적 법치국가'개념을 도입하여 '법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모두 허용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제19차 당회의 채택) 고르바초프는 1988년부터 뚜렷해지기 시작한 시민 정치의 현상을 '의견의 사회주의적 다원화'로 지칭했다.

소련은 이러한 민주화 다원화 추세와 함께 1990년 대통령제를 도입함으로써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 왔다. 대통령제의 도입은 개혁에 제동을 걸어온 중앙당 조직을 우회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1987년 말부터 검토되어 왔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제가 경제, 민족문제, 공안 등의 사안의 신속한 대처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개주의

고르바초프는 집권을 전후하여 재정 러시아 이래의 전통적인 비밀주의를 지양하고 정보의 공개를 추진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는 1984년 12월 한 회의석상에서 "최선의 각종 정보를 정직하게 제공하는 것은 인민에 대한 신뢰의 표시이자 그들의 지적 능력과 감정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이로써 "일반 국민들의 일하려는 의욕을 고취하고 관료주의를 배격함으로써 당 및 국가 사업에서 과오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또 그는 그의 저서에서 정보 공개를 통해 국민들은 소련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페레스트로이카 노력에 자각을 갖고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되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보공개를 통해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했던 것이다.

공개주의 정책은 먼저 소련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고취하게되었다. 과거 재조명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스탈린에 관한 평가였는데 처음 스탈린 시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했지만, 결국 고르바초프는 당 내외에 수천 여명의 사람들이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시인했다. 또 공개주의 정책은 각종 정보의 공개 및 공개적인 토론이 금기되어 온 문제들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공개주의는 소련의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도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게되었다.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작품들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민이 긍정적인 발전으로 평가한 공개주의는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까지도 확고히 뿌리 내린 것은 아니었다. 공개주의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지지하는 한도 내에서 소위 건설적 비판이 가능했던 것이었지 개혁을 반대하는 데까지 허용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소연방의 해체

앞에서 살펴본 정치 개혁과 고르바초프의 권력 강화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체제는 급속하게 불안정에 빠져들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1991년 8월 보수 세력의 불발 쿠데타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아울러 소연방 자체가 해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역설적인 것은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직에 더해 스스로 신설 대통령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이전의 어느 소련 지도자보다도 공식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도 무력함을 감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불안정은 체제의 쇠퇴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나 이와 함께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의 집권 중 경제는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정치 개혁은 억압되어 있던 사회적 불만과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열망을 걷잡을 수 없이 분출시켰던 것이다.

소련 체제의 붕괴요인을 살펴보면 ⸁경제 침체 ⸂체제밖 정치세력 대두 ⸃소수민족 공화국 도전 ⸄보수 쿠데타와 지배 엘리트의 분열 등이 있다.

먼저 소련경제는 70년대부터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둔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1991년에는 국민총생산상으로 17%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고르바초프의 경제 개혁은 예기치 않게 임금 상승과 이에 따른 가계 소득의 증가를 초래했으나 환류되지 못하고 극심한 물가 상승과 재정적자 증가 요인으로 전환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온 것이다. 급기야 시민의 항의와 노동자들의 파업 등으로 발전했으며 또한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화 현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 사회는 전문직 종사자를 주축으로 하는 도시 중간계층이 형성된 가운데 서방과 비슷하게 소비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중산층을 주축으로 하는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적 가치와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체제에 대한 지지도는 젊은 세대일수록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 집권 오래 전부터 서서히 시민사회가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개혁에 힘입어 소련 정치에 있어서 주역의 하나로 부상했으나 이들 체제 밖 세력은 불행히도 구심점을 잃은체 주로 경제적 어려움을 배경으로 반체제화되고 있었다.

소련에는 이와 같이 '인민'이 점차 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과 함께 '민족'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동질성을 갖추고 있는 민족은 다민족 국가인 소련 사회의 주요한 구성 요소로서 이들 민족의 자주권 요구는 체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소련은 이제까지 이들 소수민족 공화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토착 민족엘리트에 의존하여 왔고 이들로 하여금 민족적 열망이 분출되는 것을 막도록 한 가운데 공업화를 추진하여 왔으나 이들 집권 엘리트도 경제 침체 등으로 같은 민족 내의 민족적 열망을 막고 잠재적 대항 엘리트들을 체제로 인입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는 것이 한계에 도달하자 스스로 중앙에 대해 소속 민족의 대변자로서 그들의 역할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경제 침체와 사회 근대화 등 체제의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적 요인의 변화는 소련에서 지배 엘리트의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고르바초프는 집권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개혁에서 후퇴하여 개혁-보수 세력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히려 1990년 말까지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보수 세력 모두로부터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해 8월 19∼21일 쿠데타는 이를 계기로 야니예프 부통령과 크류치코프 KGB의장을 위시한 보수 세력이 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포기 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수파들은 급진 개혁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소연방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중앙의 통제가 유지되는 국가 형태를 주장했던 것이다. 쿠데타는 왜 실패했는가? 러시아의 학자 셰프쪼바에 의하면, 이는 옐친이 이끄는 반대 세력의 효과적인 저항애도 기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쿠데타 지도자들의 거사 준비의 부족과 우유부단에 기인하고 있다. 또 다른 주요한 이유로 쿠데타의 성패를 좌우하는 군부와 KGB가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지배 엘리트가 분열된 것이다.

여하튼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고르바초프는 8월 24일 공산당 서기장을 사임하는 동시에 당의 해체를 선언하게되었다. 이어 연말까지 많은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 자체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 새회주의의 믿음에 대한 잠재적인 위기가 충족되었고, 그러한 위기의 현실화는 고르바쵸프 개혁정책의 초기에 나타났다. 물론 고르바쵸프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정책을 시도 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히려 위기를 강화시키고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이데올로기상의 위기는 소연방 붕괴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국가 지도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불신과 이를 대체 할 국가발전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고르바쵸프의 '현실적' 뻬리스트로이카는 1989-1991년에 경제악화는 물론, 행정부를 마비시키고, 분리주의적 경향을 유발시켜으며, 소련의 국제적인 위치를 약화시켰다.

결국 고르바쵸프시기에 국가발전에 관한 정책 및 발전 이데올로기의 부재로 인해 나타난 서구에 대한 의존의 결과는 러시아에 서구화의 물결을 고양시켰고, 이는 서구식 정치체제의 차용으로 나타났다. 서구의 정치체제인 다당제, 의회, 자유선거, 대통령 중심제, 삼권분립 등은 러시아에 무분별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풍토에 익숙하지 못한 서구의 정치체제 이식은 러시아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적 형태가 아닌, 옐친에 의해 변형된 새로운 '개발독재체제'로 나타나고 있다.

 

 

>> 목차고리 : 세계 > CIS(구 소련지역) > 러시아

>> 연결고리 : 러시아,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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