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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신학용어사전  작성일  2007-05-14
 제목  정교회(正敎會, Eastern Orthodoxy)
 주제어  정교회 희랍 교부
 자료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동방정교회,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등의 명칭으로 구분되어 불리기도 하는데 동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 각 교회는 독립된 제도와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음. 공통점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수위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 현재의 정교회는 세 종류의 독립된 교회 전통으로 구분됨.

 

사도교회와의 연속성, 독자적 전례, 지역적 교회에의 강조가 그 특징을 이루고 있는 동방정교회는 기독교의 3대 주류중의 하나이다. 동방정교회라는 용어는 최초의 일곱교회 공의회들에서 정의된 신조와 예배의식을 지키는 거대한 기독교인 집단을 가르키는 말이다. "올바로 믿는"(orthodox)라는 의미의 희랍어를 사용했다. 동서교회 사이의 소외관계가 중세시대까지 계속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1054년)되었다. 서방교회의 신학은 히포의 아우구스투스의 강력한 영향을 계속 받았으나 반면에 동방교회의 교리사상은 희랍교부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공식 명칭은 정통 카톨릭 교회이다.


1, 최초의 동방교회 전통-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네 총대주교구로 형성됨.
2, 러시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게오르기아 정교회 전통.
3, 키프러스, 그리스, 체코, 폴란드, 알바니아 정교회 전통.
역사적으로 볼 때에 정교회라고 불리는 동방교회는 동로마 제국에서 유래되었으며, 초기 에는 헬레니즘 문화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 공의회에 최고의 권위를 둠(교리와 신학의 근거)

 


"Orthodoxy"는 "옳은 의견"이나 "옳은 신앙"(또한 슬라브어로는 "옳은 영화[榮化]")을 뜻한다. 결국, 이미 용납된 사상, 의견, 또는 신앙 체계 위에 그 기초를 두는 어떠한 인간 공동체도 자신의 신조를 '정설"(orthodoxy)로 주장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상황에서 이 용어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특정한 분파-칼케돈파(또는 동방 정교회)와 비칼케돈파(또는 오리엔탈 정교회)를 연상시키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런 좁은 의미에서 그 단어가 취급될 것이다.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한 교제 안에 연합되어 있지 않다. 주요 분열은 5세기에 나타났다. 어떤 이는 제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431년에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다른 많은 이들은 제4차 공의회(451년 칼케돈)를 거부했다. 이것은 그리스도론의 불일치에 기인했고, 공동체적 협의를 통한 교리적 정의는 수도인 콘스탄터노플에 의한 (동로마)제국의 법으로서 부과되어야 한다(참조. 교리)는 사상을 받아들이는 자들, 주로 비(非)헬라나 비(非)비잔틴 그리스도인의 저항에 기인했다. 15세기 이후, 그러한 신학적 차이는 그 당시 주로 용어상의 오해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더 나아가, 이어지는 권력 이동은 비잔틴-콘스탄티노플 또는 신(新)로마의 일부에 대한 제국의 정치적 지배권의 모든 흔적을 없애 버렸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멸망과 함께, 정교회 내 절대 다수의 의식을 점하고 있었던 비잔틴 "교향곡"의 꿈은 무너져 내렸다.


동방 그리스도교 재일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신학적 장애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남아 있는 문제는 실질적인 특성에 속한 것일 뿐이다(참조. 오리엔탈 정교회-정교회 대화).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 사이의 점진적인 불화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라틴인"과 "헬라인"이라는 용어 아래 포함시키는 로마 제국을 결국 이등분으로 나누게 되었다. 실제로 "라틴인"은, 그들 모두가 라틴어를 예배 의식과 신학 언어로 사용하긴 했지만 게르만 프랑크족, 켈트족, 앵글로색슨족을 포함했으며, "헬라인" 또는 "비잔틴인"은 콘스탄티노플 뿐 아니라 소아시아, 이집트(알렉산드리아), 시리아(안디옥),팔레스타인(예루살렘)의 전통을 통합했다. 일반적으로 분열의 시기로 인정되는 1054년은, 교황 레오 9세의 사절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우스가 상대방을 서로 파문시켰던 해이다(이 파문은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에 의해 1964년에 겨우 복권되었다, 참조. 정교회-로마 가톨릭 교회 대화). 그러나 1054년이라는 산정은 다소 관례적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 유명한 "펜타르키"(5개 총대주교구) 가운데 세 교구(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가 (일반적으로 제 1교구로서 인정되는, 참조. 수위권) 로마와 관계를 끊었을 뿐이며, 이미 9세기에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우스와 교황 니콜라스 1세 사이의) 분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분열에서 문제가 된 논쟁점은 교리와 교회론의 문제였다.

(1)서방 교회가 성령의 발현과 관련하여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쿠에("그리고 성자로부터")를 첨가시킴. (2) 교황의 보편적 중재권에 대한 법적 주장. 이 두 문제는 여전히 정교회와 로마 가틀럭 교회의 재일치에 주된 장애물이다.
서방 십자군의 동방 침략(1095-l27O)의 결과 중 하나는 동서간의 단절을 더욱 심화시킨 것이었다.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 같은 고대교구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교회 주교들이 있는데도 교황이 "라틴" 주교들을 당시에 임명한 것은, 실제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의 특권을 빼앗는 것을 뜻했다. 나아가, 리옹(1274)과 페라라-플로렌스(1438-39) 공의회에서 시도했던 재 일치는 실패했을 뿐 아니라, 절대 다수의 정교회의 눈에는 그것이 사실상 분열의 완성을 뜻했다. 플로렌스 회의 이후, 양대 그리스도교는 서로를 대체적으로 무시했다.


이러한 단절과 불화의 결과로서, 정교회 세계는 개신교의 종교개혁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에 기인한 서방 교회의 문제를 경험하지 않았다. 반면 정교회 세계는 이슬람 지배하의 고립, 회교에 의한 그리스도교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민족주의의 태동 등과 같은 동방 자체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정교회의 본질적인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교회는 일곱 차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와 교회 교부(참조 교부학)에 의해 해석되고 증거된 사도적 신앙(참조. 사도성)을 계속 잇고 있다는 아주 강한 의식을 유지했다.


부인할 여지없이, 정교회 신학교, 특히 "비잔틴"이나 동방 정교회 세계 안에서 가르쳐진 신학은, 중세기 스콜라 철학과 개신교와 같은 서방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이곳저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런 영향의 흔적과는 별도로, 정교회는 교부학의 부흥을 통한 그 자체의 올바른 주체성을 재발견해 왔다. 이 부흥은 동방 및 오리엔탈 정교회의 공통 신학정신과, 다양한 결정체를 체계화하려는 경향을 거부하는, 진정한 정교회를 나타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정교회의 본질적인 신학 접근 방법은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 성삼위 일체의 제2위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신앙고백에 대한 양보 없는 고수에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 볼 때, 성육신이야말로 유일한 참 계시이고, 역사의 중심 사건이다. 인격의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역사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실 뿐 아니라 자신을 인류에게 내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은 인간성을 취했고, 인간 상황의 극단에까지 나아갔다. 인간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비탄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분을 통해 질적으로 변화되고, 재생된다. 신격에 의한 이 죽음의 경험-나치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인간성"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인간성"이라고 부른 것-은 죽음의 파멸로, 즉 죽음을 이긴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이러한 성취는 필연적으로 모든 생명에게 새로운 특성을 수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행위는 창조 세계 전체를 재생시키고 재창조한다. '몇 방울의 피가 전인류를 변화시킨다"(나치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이 인간성은 우주적 차원을 갖는다.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는 전 창조물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갈 3:27)고 하는 인간 각자는 왕적으로, 예언자적으로, 목회자적으로 전 우주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주에서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다. 정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스도인의 삶의 부활적 특성에 큰 강조점을 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총의 선물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생명이며, 성령의 숨결-하나님 자신의 선물-이다. 정교회의전망에서 구원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속, 즉 단지 죄로부터 자유한 인간성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 칭의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된 인간 본성의 진정한 운명에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구원은 모두에 의해 자유롭게 용납될 자유로운 선물로서 모두에게 제공된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을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 1:4)이 되게 한다.


인간이 이렇듯 성삼위일체의 신적 생명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들의 가슴속에서 "아바 아버지"(갈 4 참고. 롬 5: 15)라고 부르짖는 아들의 영을 통하여 양자된 아들과 딸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다. 정교회는 이를 그 유명한 교부의 격언을 통해 자주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레니우스 등). "신격화"(theosis)라는 단어의 의미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신적 삶에의 참여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차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적 인간성, 그리스도의 지체, 또 다른 이에게 속한 지체, 성령이 계시는 성전(고전 6: 19, 12: 12: 엡 4:25)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물 전체가 계속(세대를 이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해야 할 공동 책임이 있다. 역사 전체는 그들의 책임이며, 어떠한 인간 상황도 도저히 배제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성과 창조물의 운명에 대한 "성찬적" 관점이다. 그리고 성찬 제물은-생명의 제일 핵심은-"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크리소스토무스의 예전 참고 요 6:51).결과적으로 성찬은 모두에게 역사에 참여하도록 위임한다.


구원에 대한 정교회의 개념은, 순전히 인간적 의미에서 보아도 교회는 단지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이해에로 나아가게 한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과 같이 되었으니, 신령한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벧전 2:5).교회는 교권 제도이지만, 어떤 이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의 좀더 큰 전망에서-동일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다양한 기능을 지니고 사랑에서 서로 맺어져,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는-교권 제도를 바라본다.


교회에 대한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제도적 관점(교권 제도, 계율, 조직체 등)은 위에서 기술된 교회의 심오한 본질의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사실상 모두 카리스마적이며(참조. 카리스마), 그것의 권위는 "성부의 두손"(이레니우스)인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이다. 제도는 모두 교회의 필수적이며 중심적인 행위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한 성령의 일치 속에 있으며,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영국 성공회의 예전에서 인용하면, "하늘에 속한 전회원")과 함께하는 전체 창조물을 위한 성찬 제물 혹은 희생이다. 크리소스토무스로부터 인용하여 정교회가 회상하는 것같이, 이러한 성찬 제물(희생)은 교회 건물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신심을 통해 전체 생명을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다. 모두가 각기 나름대로 다양한 은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기 위해, 증인으로서 세상 속으로 나아가 이러한 뜻을 펼쳐야만 한다.


정교회 교회론의 기초는 지역 성찬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주교(참조. 감독제)는 사제단과 공동체에 의해 보좌되고, 아울러 그것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 교회나 교구(오늘날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례전 집례를 관장하는 등, 사제가 주교 대부분의 의무를 대신하는 지소[parish]를 뜻함)는 교회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표현이다. 지역 교회가 사도들의 신앙, 즉 교회의 보편적인 신앙에 충실함으로써 동일한 신앙에 충실한 모든 지역 교회와 교제하는 한, 그렇다.
결과적으로 정교회는, 교회론에 따라 신앙과 성례전의 교제 안에 있는 지역 교회간의 친교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지역 교회만이 전체교회를 "사랑으로 관장하는" 의무를 담당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주재권은 로마 교회의 책임이다. 동 ·서 분열 이후로는,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동방 정교회를 관장한다.


지역 교회 사이에서 신앙 안에서의 교제와 일치의 관계는, 정교회가 의미를 부여하는 공의회 공동체(conciliarity)를 성립시킨다. 정교회의 이러한 공의회적 본질은 때로는 공의회를 통해 표현되지만, 공의회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공의회의 실제 모임에도 의존되지 않는다. 정교회의 교회론에 따르면, 성찬이 거행될 때마다 그 교회의 공의회적 본질이 표현된다. 지역 주교가 몇몇 교회의 성직을 겸임하는 것 또한 공의회성의 명백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공동 성직자로서 이웃 교회에서 온 주교들은 그 교회가 사도적 신앙에 신실함을 증거하게 되고, 그로써 새로운 주교는 이러한 신실함의 보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치의 상징인 의장을 통한 지역 교회의 공의회적 관계는 소위 사도 교회법(Apostolic Canon) 제34조에서 훌륭하게 표현된다: "자기 관구와 그에 종속된 지역의 일을 돌보는 것이 모든 주교의 임무일지라도, 각 지방의 주교로 하여금 그중 수석 주교인 자를 인정하게 하여, 그를 자기들의 수장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모두의 합의 없이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래야 화합이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영광 받으실 것이다." 삼위일체적 결론은, 교회들 사이의 관계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라는 동일한 원리에 근거해야 함을 가리킨다 인간성은 성삼위일체 안의 다양성 속에서, 일치의 형상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자연스럽게도, 정교회의 역사적 현실과 그 이름이 지칭하는 "바른 신앙"사이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인간의 죄 많음에서 기인하는 "바른 신앙"에 대한 왜곡이 적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정교회는 관할권의 성격을 놓고 많은 분열을 보인다. 이러한 것은 세계 도처에서, 특히 서방 세계에서 정교회의 분산과 함께 아주 명백하게 드러났다. 19세기민족주의의 태동으로 정교회를 하나의 특수한 문화, 즉 한 민족 단체(현대적 의미로는 국가)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경향은(다른 모든 교회가 인정하는) 콘스탄티노플 지역 공의회에 의해 "종족주의"(phyletism)라는 이름으로 1872년 이단시되었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 경향은 현실적으로 주어진 장소에서, 하나의 성찬 공동체 안에 모든 사람들(유대인, 헬라인 등)을 연합하는 사도적 정의("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전 1:2등)를 따르는 전통적인 지역적 원칙을 민족주의적 교회론으로 대치하는 정교회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 세계 도처에 흩어진 정교회는 민족적 ·문화적 ·국가적 원칙에 따라 "모교회"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교회가 많은 경향이 있고, 이는 각처에 한 명의 주교 대신에, 관할 구역이 다양하게 겹치는 것으로 이어진다(참조. 디아스포라). 그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교회의 순수성이 위협받고 있다.


현대 정교회의 또 다른 유혹은, 교부 신학을 사상의 체계로서 새로운 형태의 학문 속에 결정(結晶)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세대를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생생한 의미에서 적응시키려는 점진적인 갱신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교회는 교부들이 과거에 말했던 것을 엄격한 교리 문답으로 단순히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되풀이는 오늘의 역사에 대한 도전을 거부하는 원인이 된다. 이런 유혹에 굴복하는 자들 중에서는, 에큐메니즘을 20세기의 이단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모든 이들이 역사적 정교회로 공식적으로 개종해야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교회 교회론은 성찬에 역점을 둔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례전적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자주, 삶의 현실은 이런 교회의 이해를 실망시킨다.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세례(뿐 아니라 결혼)는 순전히 사회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성찬에 일년에 한 번 정도만 참여한다. 많은 교회가 정교회 안의 이런 모순에 실제로 반대했으나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하다.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성찬 기도는 사람들이 그것을 들을 수 없는 방법으로 행해진다. 그 결과 평신도는 그들 자신을 그 교회의 수동적인 일원으로 여기기 일쑤이다. 교회의 일치에 공동 책임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관장하는 성직자와 성령의 일치를 이루는 데에 공동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 것같다.


정교회의 절대 다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다. 예외적인 한두 공동체(망명 러시아교회나 그리스 구-교회력 교회)를 제외하면, 모두 WCC회원 교회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죄상에도 불구하고 정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일치 회복을 향해 고투해야 할 소명을 지녔다. 세르기우스 불가코프가 말한 대로, "정교회는 지구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을 정교회가 굳게 믿는 한, 이 소명은 아주 특별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확신은 물론 특별한 조건에서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 추구에 이바지할 수 있다. 불가코프는 바로 다음 글에서 첫째 조건을 표현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생명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교회 공동체는 그들이 진정한 신앙(Orthodoxy)을 증거하는 만큼, 그리고 그런 진정한 신앙이 그들 자신에게 깃들여져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것을 고백하는 만큼,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진정으로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불기"(요3:8)때문이다. 또한 정교회는, 하나의 정교회가 되기 위한 본질적인 의무 중의 하나가 "바른 신앙"으로의 영원한 개종임을 기억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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