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9-01-13
 제목  신규식(申圭植, 1879. 1.13(음)~1922. 9.25(양))
 주제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신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을 꾀했다가 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게 구명되었다. 이듬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후 1912년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과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과 협력해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1919년 9월 여운형·선우혁(鮮于赫)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국무총리 대리·외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혼 韓國魂>과 시집 <아목루 兒目淚>가 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충북 문의(文義)서 출생

  신규식 선생은 1880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현재 淸原郡)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역임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신백우(申伯雨)와 함께「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다. 17세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 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武德)을 쌓게 되었다. 신동(神童)으로 불리며 한학 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乙巳年) 순국기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參尉)로서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였다. 청년장교 신규식은 계동·가회동·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 소리질렀다.
 
한·일합방 직후 망명…12년간 항일운동 매진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니동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문걸어 잠그고 굶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민영환 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내한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韓國魂」참조·26살 신규식의 이같은 생각은 그러나 후일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적 신념으로 바뀐다).
  신규식은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약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 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 )자, 볼 관(觀)자 - 예관( 觀)으로 자호를 삼아 끝까지 사용했다.
  문동학원·덕남사숙의 설립 또는 지원, 중동(中東)학교장 취임, 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한 「공업연구회」조직, 월간「공업계」창간, 윤치성 민대식 등 퇴역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廣業)주식회사 서립 운영, 민족종교인 대종교에의 입교, 분원자기공장의 설립과 고려자기 재현운동…등등이 선생이 무서운 행동력을 입증한다.
  그러나 1910년「보호」라는 양(羊)의 탈을 쓰고 있던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 경술국치(國恥)가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통째로 그들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선생은 다시한번 자결을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1911년 상해로 망명, 운명할때까지 12년여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신해혁명 참여…손문정부와 연결투쟁 길터

  첫째는 당시 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 송교인(宋敎人), 진기미(陳其美), 손문(孫文) 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여름 어느날 선생은 손문과 함께 자리를 했다.
 『예관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신 참으로 장한 일이십니다.』
 『바로 중국혁명운동이 한국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사이는 순치(脣齒)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은 우리를 속국시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혁명이념으로 볼 대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 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훌륭한 논객이요, 애국자이십니다.』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됐다. 이 우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손문의 도움을 얻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적성에 따라 교육시켰다.

3·1운동을 점화

  둘째는 3·1독립운동과 상해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선생은 1917년 조소앙(趙素昻),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대동단결선언」을 통한 핀란드, 폴란드 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국내와 일본 등에 동지들을 밀파, 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22년 임정분열에 통분, 병석에서 25일간 단식…43세로 생 마감

  1919년 3·1운동이 터졌고 상해에서 선생은 프랑스 조계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 정부수립을 추진했다(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호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당시 일경(日警) 비밀정보도 『…이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해거주 불령선인들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쓰고 있다.)
  상해 임정도 수립되었고 5월에는 손문 등 중국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수립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 4월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4월 10일 소위「재미파(在美派)」 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되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이나 불식(不食)·부언(不言)·불약(不藥)을 고집했다.
  이튿날인 1922년 9월 25일. 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 정부…』
  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두는 그이 목에서 새어나왔다. 단식 25일만에 처음 나온 말은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 말은 70년이 지난 지금 이대에도 남아있을 유언이 아닐는지….
  정부엣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대한민국

 



   


A-Z




  인기검색어
kcm  346500
설교  175342
교회  128123
아시아  101905
선교  97744
세계  87879
예수  84601
선교회  74743
사랑  70741
바울  70023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