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 이름은 혁(赫)이다.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으로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뒤 상하이[上海(상해)]로 망명하였다(1913년 3월 증거불충분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되어 방면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교포계몽·간민이식(墾民移植) 등에 주력하였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조선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여운형·장덕수·서병호 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한 후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1919년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국내에 파견되어 주로 평안도 지방에서 양전백·이승훈·길선주 목사 등 기독교와 천도교의 지도자들을 만나 3·1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해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1919년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 독립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송하였다. 그해 5월 여운형(呂運亨) 등 15명과 같이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을 조직하였으며, 인성학교(仁成學校)를 확장, 운영하고 구국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항저우[杭州(항주)]로 옮겨가 송병조(宋秉祚)·김두봉(金枓奉)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진광(震光)》을 발간, 배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림:1923년 6월 14일 선우혁(鮮于爀)이 흥사단에 보내는 입단 청원서 / 출처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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