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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6
 제목  길선주(1869~1935)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장대현교회 평양신학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양력

1869년 평안남도 안주 출생
1897년 북장로교 선교사 이길함에게 세례받음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한국인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
1935년 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 순교.

 

주요 사역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회
숭실학교, 숭덕학교 등을 설립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문집《영계 길선주 목사 저작집》
저서《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평북 서북쪽 깊숙한 골짜기에서부터 여러 갈래의 산맑은 산여울이 합쳐서 큰 물줄기를 이루어 황해로 내닫는 청천강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안주땅은 일찍이 고구려의 맹장 을지문덕이 수나라 양제(煬帝)의 100만 대군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맞아 과감히 무찔러 빛나는 전공을 세운 고장이다. 고려시대에는 도절제제사영(都節制使營)이 있었고 이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둔 요지이며, 평양의 관문으로서 중죽으로 뻗어나간 대로가 통과하는 관계로 이 고장은 외교사절과 상인의 왕래가 빈번하고 많은 고을이 인접한 산업의 중심지였으므로 사람들은 일찍 재리(財理)에 눈떠 있었다.

한국 교계에 거성 길선주는 1869년 이곳 안주 후장동에서, 무사인 길봉순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노강첨사(老江僉使)의 벼슬을 한 분이었다. 네 살 때부터 모친에게서 한문을 익히고, 일곱살이 되자 글방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총기가 있어 학업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사고력과 정서도 풍부했다. 선주는 여덟살 되던 해의 어느 날, 같은 또래의 두 아이들과 함께 뜰에서 구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쪽 학의 날개와 같은 구름이 내거냐”
“저 산 봉우리 맨 위의 접시 같은 구름이 내거야”
한 아이가 말했다.
“그럼 그 아래 주먹같은 구름이 내거야”
또 한 아이의 말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모양의 구름을 가리키면서 서로 자기 구름이 멋있다고 우겨대었다. 이윽고 이 구름은 서풍에 의해 그 형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보자 선주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왜 그래?” 두 아이가 일제히 물었다.
“우리 구름들이 다 없어지니 저절로 눈물이 나”
“임마, 그럼 구름이 늘 그 모양대로 있는 줄 아니? 병신같이....”
한 아이가 선주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뭣 때문에 우는거야?”
“우리도 나중에는 저 구름처럼 없어지고 말게 아니야?”
선주는 이렇게 다감하고 조숙했다.
선주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열 한 살 때 안주 성내의 같은 무관인 신선갈(申先達)이 외동딸 선행(善行)양과 결혼하였다.
하루는 서당에서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온 선주는 곧장 부엌에 들어가 솥에서 밥을 퍼담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며
“나 누룽지 좀 줘.하고 졸라대었다.
이것은 이미 상투를 틀어 올린 지체 높은 가문의 서방님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아내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으나 하도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만 화가 치밀어 “점잖치 못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고 부지깽이를 집어들고 덤벼들었다. 선주는 얼른 몸을 피해 부엌 뒷문으로 도망치다가 뒷뜰에서 어머니와 맞닥뜨렸다. 어머니는 혹시 어린 남편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하면서 뒤좇아 나온 며느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선주가 아내 대신 얼른 둘러댔다.
“글세 내가 방안의 아버님 수저를 가져 오겠다는데 제가 가져온다고 이 야단이지 뭐예요”
당시에 지체 높은 집안에서는 수저를 아름답게 수를 놓은 수저집에 넣어 안방에 따로 보관하는 것이 상례였다. 어린 선주가 임기응변으로 잘 둘러대었기에 망정이지, 사실이 그대로 알려졌다면 며느리는 큰 변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선주는 이웃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려 연을 날리다가 (평안도에서는 여름에도 연을 날린다.) 그만 발을 헛디딘 바람에 두엄발치에 빠져 온몸이 거름 투성이가 되었다. 선주는 얼른 집에 뛰어가 자기 방문을 두드리면서 아내를 불러내었다. 아내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꼬마 신랑이 온몸이 거름을 뒤집어쓰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얼른 옷장에서 새옷을 한벌 꺼내 가지고 신랑을 뒷뜰에 우물가로 데리고 갔다. 신랑을 홀랑 벗기고 나서 몸을 깨끗이 씻고 이제 치부만 남았다. 아내가 한참 망설이다가 손으로 치부에 물을 끼얹자 신랑은 눈을 살짝 흘기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뭐 거긴 관둬!”
이때 먼 발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시어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
“볼상 사납게 거기서 뭣들을 하고 있는 거냐?”
며느리가 얼른 대답했다.
“네, 서방님이 연을 날리다가 소똥에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시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얼른 지나갔다.

그해 8월 추석이었다. 선주는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자 어린 신랑은 아내의 두 귀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내려다보는 거야”
아내의 대답은 이랬다.
“흥, 등에 업힌 서방님의 강짜가 너무 심하네요”

(농부의 아내를 만들지 말지니)
(해마다 고생이 이와 같도다)
(옥 같은 소니에 신고가 그치지 않고)
(꽃다운 마음속에서 팔자를 한탄하네)
(청루에 있는 것은 뉘집 딸인고)
(밤마다 끄리는 옷이 닳는 소리뿐일세)

이것은 선주가 12세 글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한 시이다. 제목은 十指不動衣ㅅ (열 손가락을 까딱도 하지 않는데 옷상자에 옷이 가득 찼네) 그는 시문에 상당한 재질이 있었다.

그는 17세때 안주에서 우위도식하던 불량배 윤학영(尹學榮) 3형제로부터 억울하게 무수히 구타를 창하였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식구를 거느리고 평양에 이주까지 했으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선주 자신은 인생의 고뇌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허망한 현세에서 불변의 영계(靈界)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부친은 이미 늙어 그가 집안 살림을 보살펴야 할 처지였다. 그는 평양의 거상 이재경(李在璟) 씨의 상점에서 1년 동안 상술을 익히고 18세 때 따로 상점을 경영하였다. 그는 성격이 맞지 않는 점포를 꾸려가는 동안에 이해와 타산에 매인 생활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늘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살았다. 평양 북마을의 면장으로 있으면서 첩을 두고 두 집 살림을 하던 형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쓰고 원금도 갚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장사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에누리를 할 줄 몰라 매상은 올렸지만 이문을 내지 못해 결국 장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그는 세태에 대한 실망과 혐오만 더하여 염세에 빠진 데다가 깡패들에게 두둘겨 맞은 어혈(瘀血)로 허약한 몸에 중병까지 겹치게 되었다. 다행히 부인의 극진한 간호와 부모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병세가 차츰 호전되었으나, 그는 세상이 싫어 살맛이 나지 않았다.

그는 막연하나마 수도에 뜻을 두고 관성제군(關聖帝君-關羽를 높이는 관성교)의 보고문(譜告文) 몇 가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가 정성껏 이 보고문을 외운 어느 날 밤 꿈에 관공(關公)과 한 중이 나타나 서로 희롱하는 것을 보고 “중이 어찌 관공과 희롱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말했더니 옆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보정 대사(保精大師)를 몰라보나? 을밀대(乙蜜臺-평양 명승지 금수산에 세워진 정자)로 가보게” 하는 것이었다.
하도 신기한 꿈이라 길선주는 이튿날 을밀대에 올라가서 주위의 절경에 도취되었으나 피로가 겹쳐 어느새 사르르 졸음이 와 돌을 베고 한참 자고 깨어났다. 그때 두 사나이가 다가와 그를 한 사람이 “보아하니 이 젊은이는 세상을 비관하고 도를 숭상할 생각이 간절하군”하고 한 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길선주는 첫눈에 자기 마음을 환히 꿰듫어 보는 것으로 보아 필경 도사임에 틀림이 없고 어제 밤 꿈에 을밀대로 가보라고 일러 준 것은 신의 지시였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나는 함경도 사람으로 김순도(金舜 )라고 하오. 호는 창일(蒼日)이라 부르오”하고 사나이는 선선히 대답했다.
“저를 창일 선생의 제자로 삼아 주실 수 없겠습니까?”
길선주가 간청하자, 부모님의 허락한다면 운산 벽운암(雲山 碧雲岩)에 가서 새해 겨울 동안 공부를 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길선주는 집에 돌아와 부친에게 자기 뜻을 밝히고 창일 선생에게 가서 수도하고 싶다고 했더니, 부친은 “안된다”고 한 마디로 거절하셨다. 그러나 길선주는 수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여관에 묵고 있는 창일 선생을 찾아가서 부친의 허락을 받았으니, 선생을 따라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창일 선생은 도를 닦으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되나”하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길 선주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에 다시 감탄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문하생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길선주가 칠성문 밖까지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제자로 삼아 줄 것을 여러번 간청했더니 선생은 마지못해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써 주면서 말하였다.
“어느 조용한 암자에 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주문을 외우면 한 주일이 못가서 영(靈)이 내려 몸이 떨리고 마음이 상쾌해지면서 힘을 얻어 도에 취미를 느끼게 될걸세”
길선주는 창일 선생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며칠 후에 대성산 두타사에 가서 조용한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하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산신차력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애써 잡념을 없애고 사흘만에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게 되자 차츰 몸이 떨려오더니 아닌게 아니라 기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7일간 주문을 외우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생기가 돌아 병에서 완전히 놓여나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삶의 비결을 찾은 듯싶어 도에 전념할 것을 결심했다.


길선주는 본격적으로 수도에 전념하기 위해 평양에서 도사(道士)로 알려진 장득한(張得漢) 선생을 찾아갔다. 장선생은 수십년 동안 선도(仙道)를 수련한 분으로 절간에서 경(經)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장선생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그 동안의 경위를 말한 다음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라겠습니다.” 하고 간청했더니, 선생은 쾌히 승낙하고 우선 경의 구령삼정 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주문(呪文)은 이러했다.

천생(天生), 무영(無英), 현주(玄珠), 정중(正中), 자단(子丹), 회회(回回), 단원(丹元), 태연(太淵), 영동(靈童), 대광(台光), 상령(爽靈), 유정(幽精).
이어서 그는 장선생으로부터 삼령주문(三靈呪文)을 배웠다.
비천 중천(飛天中天)하니 삼령신군(三靈神君)이라 삼령신(三靈神)
사사강어(事事降於) 제자(弟子) 길선주 하소서
도유신(道有神)헉흐 신유통(神有通)하니 천(天)이라 천은 천에 천하니 사수사수(事授事授) 대(大)하소서

길선주는 깊은 산속에 암자에 가서 위의 두 주문을 수만 번 외우고, 때로는 밤을 뜬눈으로 새우면서 열심히 송독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19세에 시작한 관성교의 연구를 중단하고 21세 때부터 선도(仙道)의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마다 서너 차례씩 산사를 찾아가서 경을 연구하는 한편 21일 혹은 49일 또는 100일 동안 주문을 외우면서 수도에 몰두했다.
이것은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신통력(神通力)을 얻기 위한 수도로서 순간이라도 잡념이 들어가서는 안되므로 예정한 기간 동안은 정신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와 주송(呪誦)에 전념하다가 심신이 피로하여 잠이 오면 엄동 중이라도 얼음물에 목욕하여 잠을 몰아내거나 다리에 뜸을 놓아 졸림을 깨우기도 하고 심지어 불을 붙여 손가락 끝에 지지기도 하는 고된 수련이 뒤따랐다. 이렇게 해서 수도에 몰두하노라면 때로는 방안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옥피리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옆에서 탕 하고 요란한 폭발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도의 수련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얻게 되자 길선주는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한 기쁨을 혼자서 마냥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쁨을 아내와도 함께 나누기 위해 아내에게 선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부인도 그와 함께 밤을 새워 주문을 열심히 외워 온 몸이 떨리는 강령(降靈)을 체험하게 되었다.
때로는 방안에 앉아 주문을 외우는 자세로 몸이 두세 척 높이 뛰어 오르기도 했다. 그 후부터 부인은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평안하여 두 내외는 이보다 더 좋은 도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생의 이치를 찾아내지 못한 길선주는 아직도 세상을 비관하여 번민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이것은 자기의 도(道)가 부족한 탓으로 생각하고 수도에 더욱 전념하기로 했다. 그가 선도와 신차력(神借力)으로 얻은 힘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수차력(水借力)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었다. 수차력이란 물을 마셔 힘을 얻는 것을 말한다. 즉 자정마다 한번에 일곱 대접의 정화수(井華水)를 마시면 배에 힘을 얻고 피를 맑게 하며 하체의 기운을 보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길선주는 이 수차력으로 배에 힘을 주면 사람들이 주먹으로 그의 배를 아무리 힘껏 후려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굉장한 장사가 되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방망이를 손으로 부러뜨리는가 하면, 웬만한 개천은 단숨에 건너뛰어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라고 불렀다. 그는 정력도 뛰어나 60이 지나도 정력이 감퇴되지 않았으며, 성경을 암송하는데 아무지장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평양에서 불량배들 사이에 패싸움이 시작되어 양민(良民)까지도 해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길선주는 절에서 내려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곧 패싸움의 주모자들을 불러 타일렀다.
“너희가 작당해서 성내를 온통 시끄럽게 해서 되겠느냐,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괜한 참견은 말아줘” 한 사나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싸움을 해도 너희끼리나 할 일이지, 애꿎은 다른 사람들까지 왜 해치는 거냐?”
“뭐가 어쩌구 어째?” 그는 팔을 걷어 붙이고 길선주에게 덤벼들었다.
길선주는 씩 웃고 나서, 방안 화로에 꽂힌 부손을 들고 나와 말했다.
“너 우선 이것부터 네 손으로 꺾어 보고 나서 덤빌테면 덤벼 보아라”
그는 부손을 받아 들고 꺾으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러자 길선주는 그에게서 부손을 받아들고 단숨에 꺾어 버렸다.
“몇 푼어치도 안되는 힘으로 무슨 행패를 부리는 거야? 모두들 집에 돌아가 자기 일이나 착실히 해” 하고 그는 그들을 훈계해서 돌려보냈다.
선도에 통달하고 차력(借力)에 일가를 이룬 그의 명성은 차츰 주위에 널리 퍼져, 사방에서 선도를 배우고 차력을 연마하기 위해 사람들이 잇따라 모여들었다. 그리고 수도에 힘쓰는 선비와 나라를 걱정하는 지사(志士)들도 찾아 왔다. 그는 이들과 담론을 하면서 한때를 모내는 것이 즐거운 소일거리이기도 하였다.
그는 선도에 전념하여 신령한 체험을 많이 했으나 건장한 육체의 본능적 욕구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가 25세 때의 일이다. 산사에 들어가 수도를 하다가 선도를 배우러 온 묘령의 여자와 그만 뜨거운 사이가 되어 한때 외도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곧 범부(凡夫)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자기자신의 수양 부족을 통감하고, 다시 수도에 열중하였다.
한편 그는 인격의 조화된 육성을 위한 예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일찍 서화와 모용, 풍악을 익혀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종이와 필묵이 갖춰져 있어, 시인 묵객(墨客)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시를 읊고 서화로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고, 북, 단소, 해금 등이 준비되어 있어 악인(樂人)들이 모여 연주와 춤으로 흥겹게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가 선도와 시화, 무악 등으로만 소일하니 자연 살림은 억망이 되었다. 어느 날 깊은 밤중에 주문을 외우는데 비몽사봉간에 평양 임원방(林原坊)에 살고 있는 황인후(黃仁后) 형이 오정때 나타나 허리띠에서 엽전 열냥을 꺼내 주었다. 깨어나 보니 새벽 한 시였다. 그는 날이 밝으면 오전때쯤 황 인후가 엽전 열 냥을 갖고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침에 그가 조반을 먹으러 안방에 들어가 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식량이 떨어졌으니 어떻게 한담!”
하고 부친이 혼잣말처럼 탄식을 했다. 길 선주가 말했다.
“아버님, 과히 염려 마십시오. 오늘 오정 때 황인후형이 엽전 열 냥을 보내올 겁니다.”
“황서방이 웬 일루...”
부친은 말끝을 흐리면서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네 두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렇게 될 겁니다.” 길선주는 부친 앞에서 이렇게 장담했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정때가 되자 과연 황인후의 조카 기풍(基豊)이 찾아와서 엽전 열냥을 내놓으면서 “이 돈 삼촌이 갖다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부친은 아들이 과연 대도(大道)에 통했다고 생각되어 대견스럽기 짝이 없었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성교육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 중에서도 성의 축복을 만족하게 누리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똑똑한 자식을 낳는데 요긴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을 하나의 예술로 보았다. 예술의 공통된 특징이 조화라면 이성간의 조화의 극치가 예술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이 생동적인 예술은 하나의 새 생명을 창조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작업이라는 인식을 자녀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는 이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성문제로 일어난 여러 가지 가정 분규를 해결해 주었으며, 성교육은 민족 개량의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이것을 [영웅을 낳는 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성에서 향락 위주로 흐르는 것을 배격하고, 향락주의는 파괴에 이르는 넓은 길이라고 경계하였다.


19세에 관성교(關聖敎)를 숭상하고 21세에서 29세까지 9년동안 선도(仙道)에 심취된 도인 길선주가 기독교에 입신하게 된 경위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느 날, 평양에서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평양에 괴상한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더라.
키가 꺽다리이고, 파란 눈이 우묵 들어가고, 코가 크고, 머리털은 볼그레하고 옷은 괴상하게도 쳇다리 같은 바지에 무당의 덧옷 같은 긴 저고리를 입고, 말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게 바로 양귀자(洋鬼子)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양교(洋敎)라는 교를 가지고 와서 전하는데, 한번 거기 발을 들여놓으면 혼을 뽑아서 미치고 만다더라“는 것이었다. 선교사에 대한 이런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쫙 퍼져 온 성내가 떠들썩했다. 이 괴상한 인물은 한국에 파송된 마펫 선교사로, 그는 1890년 1월에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으며, 그 해 8월에 평양에 와서 여문 앞 김선달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때 기독교에 귀의한 한석진(韓錫晋)씨가 평양에서 마펫 선교사의 일을 돕고 있었다.

길선주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간 것은 그가 평양 널다리골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양귀자가 새 교를 전한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 날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담론을 나누었는데, 그 선교사가 전하는 교에는 뭔가 취할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알쏭달쏭하여 감히 잡히지 않았다.
그 후 1893년 봄에 그는 친구 문흥준을 마펫 선교사와 한석진씨에게 소개하고, 그 해 여름에는 도우(道友) 김종섭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기독교가 뭔지 좀더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길선주가 23세때 김종섭은 선도를 숭상하면서 도인 길선주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도리를 담론하는 사이에 지기(志氣)가 서로 어울려 친교했으며 나중에는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남들이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양교에 대해서도 이렇게 큰 관심을 갖고 여러모로 깊이 알아 보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구도심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조정에서는 기독교를 비척하고, 부친은 국내 치안을 다스려야 하는 직책상, 기독교도를 탄압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길 선주로서는 민족적인 긍지와 자기 도에 대한 자부심으로 양교를 정도(正道)로 인정하기는 어려웠으나 그 내용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에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시비를 하는 것은 도인으로서 경솔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양교의 내용을 알아보라고 마펫 선교사에게 소개한 김종섭이 어느새 예수를 믿게 되고, 길선주에게도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 양교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나라에 전해진 천주교를 새로 바로잡은 것으로 선도와는 댈 것이 아니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바르게 살아야 하오.....”
“듣기 싫어요”
길선주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양코가 뭔지 알아보라고 선교사에게 소개했더니 형님은 금방 양귀신에 홀렸구려. 그런 경솔한 변심(變心)과 회도(回道)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내가 득세하여 세상을 휘어잡는 날에는 형님의 목대부터 먼저 칠테니 그리 아시오”하고 쏘아 부쳤다.
그러나 한편 길 선주는 김종섭의 회도에 큰 충격을 받고, 필경 거기에는 그럴 만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해 중국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관주 신약(貫珠新約)을 입수하여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 관주가 있는지라 구약을 읽지 않을 수 없어 곧 한문으로 된 구약 성경도 구입하고, 성경 주석과 그밖의 기독교 서적도 사들였다. 당시에는 한글로 된 기독교 문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서는 한문이 이해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전설이나 신화 같기도 하고 심지어 무당의 독백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고, 불교와 같이 오도의 지름길을 설파하거나 유학과 같이 깊은 인륜도덕을 논한 것도 아니고, 선도의 주문처럼 신비의 묘리를 제시한 것도 아닌 아리송한 내용으로 표현은 쉬운데 알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가타부타 비판할 수도 없었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 사교에 젖은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쉽사리 박힐 리가 없었다.
당시에 길선주는 평양성내 해주골 입구에 집을 마련하고 가게를 내고 있었다. 김종섭은 매일같이 그를 찾아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형님, 글쎄 예수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덮어놓고 믿으란 말이오“ 하고 길선주는 짜증섞인 어조로 말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러나 김종섭은 실망하지 않고 그를 찾아올 적마다 회보(回報)인 [그리스도 신문]을 갖고 와서 읽어 주곤했다. 그리하여 어느새 길선주의 거부반응이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으나, 예수를 믿을 생각은 없었다.

하루는 김종섭이 [이 선생전]이라는 전도 책자 한 권을 가지고 와서 읽어 보라고 길선주에게 주었다. 그 책에는 아편 중독자로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어떤 중국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게 된 경위가 쓰여 있었다. 길선주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착해졌다는 이야기가 신기하기는 했으나, 별로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김종섭이 다시 찾아와서 물었다.
“그 책을 읽어 보았소?”
“읽었어요”
“그 책을 보니 어때요?”
“글세 별로 흥미가 없던데요”
김종섭은 두말하지 않고 [장원양우 상론(張元兩友相論)]이라는 다른 책 한권을 꺼내 주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주고받은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길선주는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길종섭이 또 찾아와서 물었다.
“그 책을 읽어보니 어때요?”
“그 책은 일리가 있더군요”
김종섭은 또 다른 책한 권을 읽어보라고 주었다. 그것은 [천로역정]이었다. 길선주는 별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장롱밑에 밀어 넣고 여전히 선도에 몰두하였다. 그날도 주문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데 김종섭이 찾아왔다.
“아직도 삼령 주문을 외우고 있소?”
“....”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는게 어떻겠소?”
그러자 길선주는 선도를 신봉하는 자신의 신앙관을 내세워 이를 거절했다.
“삼천존(三天尊)의 일체이신 구천응원 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宝化天尊)과 삼령신군(三靈神君)이라는 칭호는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 3위일체와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하나님께 기도할 게 뭐요.”
김종섭이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임자가 신봉하는 삼령신군께 예수교의 도리가 거짓인지 안닌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 봐요”
“그렇게 하지요”
이리하여 길선주는 날마다 삼령신군에게 기도하였다.
“삼령신군이시여, 예수교가 참 도인지 거짓 도인지 알 수 없으니 가르쳐 주옵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며칠이 지나니 선도가 과연 영생불사(永生不生)의 도인지 차츰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기는 지금까지 썩은 새끼줄을 튼튼한 생명줄로 잘못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종섭처럼 예수교를 냉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예수교 역시 구원의 길이 보장되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심한 번민에 빠져 입맛을 잃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문득 김종섭이 갖다 준 [천로역정]이 생각나 장롱 밑에서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는 뜻밖에도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큰 감동을 받아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예수를 믿어볼 생각도 없었다. 그가 [천로역정]을 다 읽고난 어느 날 김종섭이 찾아와서 물었다.
“삼령신순께 기도하니 어때요?”
“기도하니 마음이 산란하기만 해요”
“그럼 하나님께 기도해 봐요”
“하나님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단 말이오?”
“그럼 상제님이라고 부르고 기도하지 그래요”
“그렇게 해 볼까요?”
길선주는 새벽마다 상제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령하신 상제님이시여, 저는 심히 마음이 괴롭습니다. 오랫동안 영생불사의 도로 알고 정성껏 선봉해온 선도에 대해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의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알 수 없으니 저는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나이다.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그는 이런 내용의 기도를 며칠간 계속했다. 하루는 밤이 깊어 새벽 한시쯤 되었을 때였다. 사방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구슬피 들려왔다. 그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상제님이시여 저는 심한 번민에 빠져 헤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가 참으로 인류의 구세주인지 아닌지 분명히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미쳐 마치기도 전에 천장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너무나 놀랐고 두려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사랑하시는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하고 기도했다. 그는 이때 비로소 마음문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흐느껴 울면서 회개했다.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그는 통곡하면서 큰 소리로 계속 기도했다.
웃방에서 깊이 잠들었던 이정식이 이 소리에 깨어나 무릎을 꿇고 전에 길선주가 가르쳐 준 경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길선주의 기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러 마음에 기쁨이 용솟음치고, 감사의 눈물이 샘솟듯 하였다. 선도의 도인이 하나님의 성도로 변모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김종섭이 찾아와서 물었다.
“상제님께 기도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소?”
“이제부터 나는 예수를 구주로 믿기로 작정했어요”하고 길선주는 그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를 죽 들려주었다. 김종섭은 너무나 기뻐서 길선주를 얼싸안고 어쩔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길선주는 그 길로 김종섭을 따라 널다리골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길선주가 교회안에 들어서자 교인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예배를 인도하던 김종섭이 그에게 대표 기도를 청하였다. 교인들은 다시금 깜짝 놀랐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했으니 말이다. 교인들은 혹시 길선주의 기도가 막히거나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여 몹시 불안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의 기도는 유창하고 간절하여 매우 은혜스러웠다. 그는 9년 동안이나 선도에 열중하니 그는 여러 가지로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가운데 영생의 도리를 체득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으나 끝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욕구인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수가 참으로 인류의 구주인지 알게 해 달라고 매달린 끝에 마침내 [인격신]을 인격으로 대하는 순간 그의 입술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비로소 자아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이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속량의 의미를 깨닫고 닫혀진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피하여 100일 기도와 성경 연구에 열중하였다. 전에는 아리송하기만 하던 성경 구절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인간을 생명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꿀맛처럼 달아, 밤을 새워가면서 탐독했다. 그는 성경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감격스러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밖에 전에 고개를 ri웃거리게 되던 성경구절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가슴에 박히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원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했다. 천지 창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소명, 이스라엘 선민에 대한 역사, 선지자들의 활동,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순절날의 성령의 역사, 제자들의 활동, 복음을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운동등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동시에 영원한 하늘나라를 이룩하려는 원대한 경륜의 일환으로 이해되었다.


길 선주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생각과 말과 행실이 전과는 판이했다. 이 기쁨은 일찍이 선도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했을 때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잠자고 있을 수 없었다. 먼저 가게 일을 돕고 있는 이정식에게 전도했다.
“이 사람아, 전에는 선도가 제일인 줄 알고 내가 자네에게도 권면했지만, 알고 보니 기독교는 선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네 그러니 자네도 나처럼 하나님을 믿고 축복 받도록 하세”
이정식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진실한 신자가 되고 후에 영수(領袖) (조직이 아직 미비한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가 되었다.
길선주는 그리스도에게 귀의하기로 결심한 징표로 상투부터 잘랐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선도에 통달한 도인으로 추앙해 온 사람의 입에서 난데없이 양교(洋敎)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길 도인의 배교가 민족의 긍지를 손상시킨 처사라고 비난했으며, 그의 삭발을 미풍양속에 역행한다고 비웃기도 했다.
1897년 그는 선천에 이주한 본가로 돌아왔다. 그의 부친은 본래 예수교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선교사와 교인들을 호되게 핍박하였다. 그는 아들이 오랫동안 신봉해 오던 선도를 버리고 예수교 신도가 되어 삭발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의 눈에 비친 아들은 중도 아니고 도인도 아니며 선비도 아닌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노기에 가득찬 그는 정중히 인사드리는 아들을 외면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길선주는 말없이 부친의 방에서 물러났다.
밤이 되자 그는 다시 부친의 방에 들어가 꿇어 엎드렸다. 노후의 아버님께 영생의 도리를 전하여 화평과 기쁨을 안겨 드리는 것이 자식된 최대의 효성이었던 것이다. 방안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부친이 입을 열었다.
“너 뭣하러 집에 돌아왔느냐?” 싸늘한 목소리였다.
길선주는 부친에게 자기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사뢰고 [장원양우상론(張元兩友相論)]이라는 전도 책자를 한권 놓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그의 부친은 그날 밤으로 그책을 다 읽고 나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튿날 길선주가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갔더니, 부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놓고 간 그 책자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많이 생각해 보았다. 역시 네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된다. 나도 이제 구주가 되시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다”
이리하여 부친은 전에 아들에게서 받은 구령삼정(九靈三精) 주문을 버리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벽에 성경을 붙여 놓고 읽을 정도로 기독교에 심취되었으며, 1911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길선주는 어머니에게도 전도했다. 그의 어머니는 후처였다. 선친의 전처는 그의 이복형 희주(喜宙)를 낳고 안주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후처로 들어와 선주 하나만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는 소망을 선주에게 걸고 살아 왔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전도를 받고
“네가 믿는 교를 내가 어찌 마다하겠느냐, 나도 너를 따라 예수를 믿을란다.”하고 그 자리에서 구령삼정 주문을 버리고 예수를 믿어 이듬해 그의 부친과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그 이듬해 61세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어서 아내에게도 전도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다. 이리하여 온 식구가 가정예배도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합심해서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가정예배의 기도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월요일-식구를 위하여, 화요일-친척(신자. 불신자)을 위하여, 수요일-친구(신자 불신자)를 위하여, 목요일-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금요일-교육기관과 자선사업단체를 위하여, 토요일-해외 동포와 혁명유지들을 위하여, 일요일-국내외 교회를 위하여.


길선주는 도(道)와 의리로 굳게 맺은 의제(義弟) 김찬성의 개도(改道)를 위해 꾸준히 기도했다. 당시에 김찬성은 갑신정변을 피해 강원도 인제군의 깊은 두메산골에서 숨어살고 있었다. 그가 하루는 벽에 기대어 삼령주송(三靈呪誦)을 하면서 묵념에 잠겨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의형(義兄)이 나타나 웃는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는 너무 반가워서 “형님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손을 덥썩 잡으려고 하자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꿈이었다.
그는 의형 길선주가 보고 싶어 불원천리하고 성천군 남정방 굴동을 찾아 갔다. 그러나 의형의 가족은 이미 평양으로 이주하고 없었다. 그가 성천읍에 살고 있는 의형의 제자 이지억을 찾아서 의형의 안부를 물어보았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 찾을 필요도 없어요. 그렇게 독실히 믿고 우리에게도 가르쳐준 선도를 내동댕이치고 예수쟁이가 되어, 글세 나한테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어제 평양으로 떠났어요. 내가 보니 선생은 물론이고, 온 가족이 다 예수에 미쳤더군요”
김찬성은 기가 막혔다. 그는 어이가 없어, “내가 곧 형한테 쫓아가서 기어코 회도(回道) 시키고야 말겠어요”하고 그 길로 평양을 향해 떠났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서 얼어붙은 대동강 위를 어기적어기적 걸어 가는 길선주 일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인사를 나누고 나서 의형에게 대뜸 물었다.
“듣자하니 형님이 천주학을 한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네”
길선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리하여 빙상(氷上)의 대화는 긴변론으로 커져 갔다. 길선주는 자기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와 동기를 죽 이야기하고, 복음의 골자를 간추려 의제에게 들려 주었다.
“형님, 말이 청산유수군요.”
하고 그는 삼공혜월홀조심(三空慧月忽照心-하늘에 둥근 달이 홀연히 마음에 비추나니)이라는 시 한 짝을 부르고 나서 1분 사이에 대구(對句)를 불러 보라고 했다.
길선주는 지체하지 않고 즉석에서 무진은광장임군(無秦恩光將臨君-무진한 은혜의 빛이 장차 그대에게 임하리라)이라고 대구를 놓았다.
“대구는 재미있게 잘 되었지만, 저한테 양교의 무진한 은혜의 빛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는 이 대구가 자기에게 앞으로 나타날 큰 예언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선주의 집 사랑채에 들어갔다. 의제는 책상 위에 놓인 성경을 보고 물었다.
“이게 소위 그 천주학 책입니까?”
“천주학에 대해 아직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빈정대는 어조로 말하는 건 도인의 태도가 아니야”
길선주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날은 기독교의 원리에 대한 토론으로 보내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 김종섭이 찾아왔다. 그는 김찬성과 반가이 인사를 나누고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독생자를 통한 구속의 도리를 자상히 가르쳐 주고 밤이 깊어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김찬성은 종일 전도서적을 읽더니 밤이 깊어지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길선주의 손목을 덥석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 나도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길선주는 의제와 함께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그 후 독실한 성도가 되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에 힘을 기울인 결과 평남 순천(順天), 자산(慈山), 안주(安州), 숙천(肅川) 등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북으로는 만주 안동현, 남으로는 황해도까지 걸어다니면서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길 선주는 의재를 위해 30여 년을 계속해서 기도했으며, 의제는 그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였다.


1898년 길선주는 30세에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목회자)로 피택되어 민족 복음화 운동의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당시에 정국은 매우 뒤숭숭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에워싼 청.일 두 나라의 이권 다툼에서 빚어진 청.일전쟁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친로정책을 취하는 민비를 살해하고, 러시아와의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국을 무대로 소.일 두 나라 사이에 공기가 자못 험악했다.
이렇듯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부대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걱정한 길선주는 이길함 선교사를 찾아가서 당면한 국내외 정세에 대해 환담하고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극동정책을 간파했다. 당시에 한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민족의 비극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길은 민족의 복음화로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며, 기독교는 현실적으로 국제 무대에 나서는 좋은 교량이기도 했다.
길선주가 시무하는 널다리울 교회는 크게 부흥되어 이듬해 장대현 언덕에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식 신축건물의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이 건물의 규모가 하도 거창하여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 평양에서 민간인으로서 그렇게 큰 건물을 세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이 과연 그런 거대한 건물을 세울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한 눈초리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1900년 웅대한 건물이 복음의 전당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건물의 총비용은 대지값을 합쳐서 7000원이었는데, 교회 헌금 5천원과 미국 선교회 보조비 2천원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선교회 본부에서 기증한 커다란 종은 교회 서쪽언덕에 세운 종각에 달았으며, 그 종소리는 10리 밖까지 널리 울려 퍼졌다.

한편 길선주는, 안창호(安昌浩)등 17인에 의해 발족된 독립협회(獨立協會), 경성 본부에 연락하여 평양 지회로 인준을 받아 발족시키고, 사법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협회가 평양 대동관 뜰에서 개최한 민중대회에는 평양 관찰사, 부윤을 비롯하여 남녀 5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안창호와 길선주가 정치 연설을 하여 청중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1902년 길선주는 장대현 교회 장로 및 조사(전도사)겸 황.평(黃海道.平安道) 양도의 도조사(都助事)에 취임하여 활동 무대가 더욱 넓어졌다.
이때 그는 매우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조사가 되어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려면 지금까지 해 오던 약국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난감했다. 당시에 다달이 소요되는 생계비 80원은 약국에서 올리는 수익으로 충당해 왔으며, 조사의 월급은 6원밖에 되지 않았다. 자식들의 교육비도 있고 하여 지금까지의 생활 수준을 갑자기 크게 낮춘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길장로가 이 일로 고민하자 부인이 말했다.
“선도(仙道)룰 하실 때 가정을 돌보지 않아 식량이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집안에 우환이 겹쳐 점포가 거덜이 나도 참고 도에 정진하셨는데, 그렇게도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던 끝에 구원의 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는 이 마당에 망설이게 되면 그 동안의 모든 보람이 헛되지 않겠어요. 나도 참고 따르겠으니 용단을 내리시는 게 좋겠어요”
그는 하나님의 일을 다음과 같이 해 나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1)전도사업
ㄱ. 개인 전도에 주력하여, 신도마다 적어도 한 명씩은 교회로 인도하게 할 것.
ㄴ. 구역을 분할-설정하고, 심방대(尋訪隊)를 조직하여 가정방문을 장려할 것.
ㄷ. 여자 교회를 세우고, 여성 개방운동을 전개할 것.
ㄹ. 해마다 전도대회를 개최하여 복음화 운동에 힘쓸 것.
(2) 교육사업
ㄱ. 기독교 주간 학교를 설립하여 교회의 일꾼을 양성할 것
ㄴ. 극빈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설립할 것.
(3) 문맹퇴치 운동
ㄱ. 성인의 야간학교를 설립하여 한글교육을 실시할 것.
ㄴ. 교인의 성경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 성경야학과 계절 사경회를 개최할 것.

그는 이와 같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 당분간 교회를 개방하기로 했다.
그의 계획이 활발히 실천에 옮겨지자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되고 신도들의 신앙열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외부의 핍박도 이에 정비례하였다. 관가의 실시와 박해, 민중의 무지와 행패는 날로 심해갔다. 개인 전도에 있어서의 야유와 비방과 폭언은 주로 배타적인 대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무뢰한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심지어 치고 받는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핍박이 심할수록 신도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올라 교회는 날로 발전되어 갔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초창기에는 공통된 현상이었으나, 한국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한국 교회가 당면한 애로는 당시의 풍습에도 있었다. 당시에 여자들은 규방에 갇혀 살고, 외간 남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가옥 구조도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어, 여자라면 하녀까지도 사랑채에 드나들지 못하였다.
여자들은 대문밖에 좀처럼 나가 다닐 수 없었으며,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 얼굴을 내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1893년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자만의 집회였다.
그 후 남편이나 친지들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한 여자들은 개인 집에서 따로 모임을 가졌다. 그래서 길장로는 선교사와 상의하여 평양에 “부인교회”를 따로 마련하였다. 이것은 한국에서 여성 해방운동의 시발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이 부인교회를 장대현교회에 병합하기로 한 것은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여건으로서는 모험적인 일대 용단이었다.
길장로는 하나님의 일로 바뿐 나날을 보내면서도 성경에 매혹되어 수시로 탐독했다. 그가 정통한 동양의 고전들은 성경에 비하면 너무나 이지적이고 윤리적이어서 인간의 냄새는 물씬 풍기지만 영적인 예지와 구원의 도리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여 조사가 될 때까지 신.구약 성경을 스무번쯤 통독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대.소 선지서, 시편, 신약의 복음서, 로마서, 요한서신 등은 개별적으로 50번 가량 독파하고 중요한 대목은 거의 다 외우다시피했다.
그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에 도취되어 성경 해석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 자신이 은혜를 받기 위해 그를 가끔 집회에 초대하여 설교를 들었다. 그의 설교에는 청중의 심령을 찌르는 영력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의 기도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은혜가 충만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기도와 성경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도시간은 아침 다섯시와 밤 열시로 정하고, 심혈을 기울여 땀을 흘리면서 기도했으며,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는 그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속한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경륜을 펴나가는 과정의 한 상황으로서 부활의 전제이며, 부활은 주의 재림의 필수조건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신(現身)이며 성령은 자연계에, 특히 인간 사회에 스스로 내재(內在)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役事)하고 계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인 임마누엘로 탄생하신 예수는 피조물계의 존재자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신으로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그 본래의 위치에 환원하신 존재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 완성을 위해 인류 가운데서 역사하시면서 재림을 대기하고 계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말씀으로서 선지자들이 위탁받은 그대로 성령의 감화로 기록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전 인류에게 공개하신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위탁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성령을 힘입어 기도와 성경 연구로 영적인 오묘한 경지에 도달하여 터득한 신학 사상의 일면이기도 하다.
교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추수감사절에는 농작물과 의류가 산적했고 성탄절에는 헌금이 많이 걷혀 자선 사업에도 착수할 수 있었다. 해마다 교회 구역 내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200여 세대를 구제하고, 직업이 없는ㅇ 교인에게 일자리를 알선했다. 그리고 전도사업이 확대되자 지방에도 전도대원을 파송하여 곳곳에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자]는 슬로우건을 내세워 남에게 먼저 주는 행동의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평양 장대현교회를 위시해서 황.평 양도(黃.平兩道)의 각처의 교회를 보살피는 도조사(都助事)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다. 그는 지방 순회와 전도 여행을, 대중에게 자신의 시대적인 사명을 전달하는 유일한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복음을 통한 민족 개량의 소신을 피력하여, 신앙으로 뭉칠 것을 역설했다. 어느새 그는 교역자로서 대중의 갈채를 받기 시작하고 일제의 달갑지 않는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우선 신학을 체계있게 철저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마펫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에서는 최초로 평양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신학교는 조사를 위해 3년제 예비과를 두고 예비과를 마치고 나서 분과를 계속하게 되는 5년제로서 졸업자에게 목사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길선주, 방기창(防基昌), 김종섭(金鍾燮), 한석진(韓錫晋), 이기풍(李基豊), 송인서(宋麟瑞) 등이 추천되어 입학했다. 갓쓰고 도포를 걸친 3,40대의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 신학생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관이지만, 영생의 도리에 눈뜬 이들의 향학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길장로의 신학교시절은 목자의 수련기간으로서 보람찬 시기였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훈련도장으로서 그는 많은 것을 새로 익히고 배웠다.
한편 그는 자기 안에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도록 기도와 독경에 힘썼다.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 서방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는 소식을 길장로에게 하나의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속화된 서방 교회의 재건이 절실히 요망되던 당시에 일어난 이 역사는, 세계 1차대전의 비극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운총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몽매하고 미개한 동방세계를 개발하시려는 하나님의 영륜 속에는 먼저 교회를 부흥시키는 역사가 있어야 하며, 또 있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선교사들도 성령의 은사를 몹시 갈망했다. 그들은 1906년 8월 원산에서 하디(Howardie)박사를 초청해서 한 주일 동안 집회를 열어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다시 이들은 서울에서 존스턴(Howard Agnew Johnston)박사를 초청해서 집회를 열어 큰 은혜를 받았다. 존스턴 박사는 이 집회를 마치고 평양을 방문하여 길장로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는 단상에서 청중을 향해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인도에 번져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조선에서 성령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교회를 부흥시킬 자신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중은 잠잠하기만 했다. 아무도 감히 손을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윽고 장로이며 조사이자 신학생이던 길선주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존스턴 박사는 앞으로 조선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길장로와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해 가을에 길장로가 황해도 재령에서 사경회를 인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눈물로 자기 죄를 회개하였으며, 김익두(金益斗)목사도 이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이 성령의 불길은 이윽고 한반도를 휩쓸었으며, 이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나님이 길장로를 도구로 쓰셨던 것이다.
길장로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처음으로 시작한 새벽 기도회는 참석자의 수가 점점 늘어 자연히 부흥회와 같은 양상을 띄게 되고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평양에서 처음으로 부흥회가 열려 길장로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설교하는 도중에 청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아이고!”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눈물로 통회자복하다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길장로는 설교를 계속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아이고!”를 웨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병이 나은 사람, 불을 본 사람들은 길장로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설교를 마치고 길장로가 기도를 하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집회 셋째 날 저녁이었다. 평양 영문 앞에 사는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순경)는, 길장로의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저마다 자기 죄를 자복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범인을 잡기 위해 참석했다. 그런데 그는 길장로의 설교에 감동되어 자기 죄를 크게 뉘우치더니 드디어 “아이고!”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그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눈물아 글썽하여 길 장로에게 “장로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했다. 길장로는 설교를 중단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나서 회중에게,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다고 역설했다.
그때 승복을 걸친 한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장로님!”하고 외쳤다. 청중의 시선은 일제히 스님에게로 쏠렸다.
“저는 이 모임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며칠째 참석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목에 걸었던 염주를 벗어서 길장로에게 드리고, 그 자리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불도를 닦은 김 덕화(金德華)라는 스님이었다. 이 염주는 지금 길장로의 아들 길진경 목사가 보관하고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길 장로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찬송을 마치자 한 가톨릭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는 이 집회에서 기독교의 구속의 역사(役事)를 처음으로 체험하고, 성령이 일으키는 기적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하고 자기 목에 걸었던 십자가목거리를 벗어서 이 집회에서 받은 은혜의 기념으로 길 장로에게 드렸다.


1907년 1월 6일에 장대현교회에서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부흥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 많은 회중들이 회개의 눈물을 쏟았다. 이길함 선교사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모두 뭔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사람들이 연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흐느껴 울기도 하고 거꾸러지기도 하였다. 새벽 2시까지 회개의 울음과 기도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평양의 오순절]이었으며, 그 후 지방 교회에서도 여기저기서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한국의 초대교회는 튼튼한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길장로는 기일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이처럼 나타내지 않았더라면 한국 교회는 외관상으로는 커졌을지 모르지만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을 것이며, 몇 사람이나 구원을 얻게 될지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1907년 6월 10일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장대현교회 뜰에서 거행되었다. 그것은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목사를 장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 주일이 지난 17일 장대현교회에서 당회장으로 시무하는 선교사와 조선 교회 대표 장로들은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했으며, 이 모임은 한국 장로교회로서는 제1회 노회였다. 그리고 이 노회가 곧 총회의 전신이다. 이리하여 평양의 한국기독교 장로교회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길목사가 시무한 장대현교회는 그 중심 교회로서 교계에 크게 공헌했다.
길목사는 모든 교회는 모름지기 기도하는 교회, 성경 읽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회를 계속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길어질수록 교역자로서의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 그의 교역 활동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었으며, 자기는 그리스도의 손에 매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으면 기꺼이 응하여 복음을 전했으며, 집회는 언제나 은혜스러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 기도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았고, “한국의 바울”이라는 호칭도 받았다. 그는 자기가 교회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인간 길선주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이 자기를 통하여 행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고 어떤 명예나 찬사도 자기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날마다 한 시간의 보통기도와 매주 사흘간의 금식기도와 매년 1주간의 금식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했다. 성경을 날마다 한시간씩 읽고 외우기를 힘쓰고, 성경연구와 집필에 하루평균 세시간,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씩 독서를 계속했다. 일생을 통해 구약을 30회, 창세기와 에스더와 이사야서는 540회, 요한서신은 500회, 신약 전권은 100회, 계시록은 만독(10000)했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영원한 세계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으며, [말세학]을 저술하여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후세에 남겨 놓기도 했다.

이 [말세학]은 길목사의 대표작으로, 신이 인간이 됨으로서 신격과 인격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니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땅위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신격이 하나님의 인격과 조화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대로 영원세계가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신앙의 입문이요, 계시록은 신앙의 결론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세계가 회복된다고 ale고 주의 재림을 기다린 그의 [말세학]은 그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내세에 대한 신념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시 그의 신앙관을 더듬어 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다섯 단계로 구분해서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신앙, 소망, 사랑은 어디에나 일관되어 있지만 신앙과 소망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며, 사랑만이 마지막 안식의 세계에까지 존속될 것으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다섯 단계는 이러하다.
1.구약시대-하나님께서 율법과 예언으로 역사(役事)했으며, 메시아의 탄생으로 성부의 역사는 끝났다.
2.구속(救贖)의 시대-예수께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시고, 대속(代贖)의 제물이 된다음 부활 승천하신후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는 끝났다.
3.교회시대-성령께서 교회의 발전을 위해 역사하시다가 주의 재림으로 역사가 끝난다.
4천년시대-사랑으로 이루어진 지상 낙원이다.(사11:1~9).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간의 최후 심판으로 천년시대는 끝날 것이다.
5.영원한 안식세계-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영원히 안식하게 된다. 이 시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가 하나님께로 완전히 복귀되고 사탄은 무저갱에 갇혀 다시 활동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물론 길목사의 신령한 신앙 체험이 밑받침하는 신앙관이지만 (4)천년시대와 (5)영원한 안식 세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길목사의 염원은 교회를 구속의 진리 위에 튼튼히 세우는데 있었다.
그리고 시대적인 요청에 응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교회의 모든 조직을 재정비했다. 시대성을 띠어야 한다고 해서 외래 문물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릴 것이 아니라 민족의 얼이 담긴 고유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가면서 정신면에서 교회의 권위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악을 교회 음악으로 도입한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였다. 길목사는 사택에 악사 한 분을 초빙하여 그의 도움으로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을 고르게 하여 교회 절기나 특별 행사 때에 연주하였다. 외국 음조로 찬송을 부르기보다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률을 대체하면 민족 정서로 종교적인 효과를 더욱 올릴 수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연극과 성화(聖畵)에도 관심을 기울여, 교회 절기 때는 “성극의 밤”을 열어 성경에 나오는 설화를 연극으로 상연하고 성화로 무대 배경을 장식했다. 이것은 음악가나 화가, 배우 등을 천대하던 당시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용단이었다고 하겠다.
예술의 진수는 영계와 접해 있으며, 따라서 예술을 알지 못하면 종교의 심오한 진리를 체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민족의 메마른 정서를 기름지게 할 수 있는 예술을 도외시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어떤 소리가 그이름을 이처럼 떨치는가)
(과연 영계가 콸콸 흘러 내리는 구나)
(바위에 부딪친 장한 기세가 청산을 울리고)
(달빛 어린 화평한 마음은 만리까지 맑고나)
(증기는 하늘에 올라 구름을 띄우니)
(인간의 갈증과 수심을 쓸어버리네)
(물고기가 뛰고 갈매기 나는 그 넓은 가슴에)
(나느 춘풍에 낚싯대를 띄우고 싶어라)
이것은 한상호(韓相鎬) 목사가 길목사를 두고 읊은 시이다.

한국을 손에 넣은 군국주의 일본은 한국의 인재를 제거하기 위해, 데라우찌 총독의 암살 음모라는 맹랑한 조작극에 의해 105명에 이르는 인재들을 구금하고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길목사의 장남 진형(鎭亨)도 여기 걸려들었다. 그는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선천읍에서 선교사가 경영하는 신성중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다가 저들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저들의 고문은 악날하기 그지 없었는데, 그 중에는 이른바 “학춤”이라는 잔인한 고문도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두팔을 뒤로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가죽채찍과 몽둥이로 후려갈기거나 담뱃불로 생살을 지지는 것이었다. 진형은 저들에게 호되게 당하여 늑골이 부러지고, 전신의 피부가 짓이겨져 목숨이 위독하게 되었다. 그는 반 송장이 되어 출감하여 선천에 있는 처가에서 정양을 했으나 고문으로 부러진 늑골이 폐와 심장 사이에 끼어 있어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그는 미국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귀국한 지 사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나라의 사직이 쓰러지자 애국지사들은 미국, 시베리아, 만주, 중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독립운동과 반일 투쟁을 계속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애국투사들이 옥고를 치루거나 저들의 이른바 부정선인(不)으로서 요시찰 대상이 되어 기를 펴지 못했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참전국들 사이에 전후 처리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미국 대통령 윌슨씨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약소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으며, 강대국들의 식민정책에 일대 전환이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세계 식민지 약소민족의 시선은 강화회의에 집중되었으며, 이때부터 우리나라 독립투사들과 우국지사들의 마음은 설래기 시작했다.
상해에 있는 동지들은 김규식 박사를 프랑스에 파견하고, 여운형시를 러시아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게 하는 한편, 성병호, 선우혁, 백남규등을 국내에 파송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했다. 이리하여 폭발한 3.1독립 운동은 거족적인 일대 항일 레지스탕스로 번졌던 것이다.
길목사는 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이 항일 투쟁에 참가하였다.
<피고는 대정(大正) 8년(1918년) 1월 하순부터 손병희(孫秉熙)와 공모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 한 독립국을 형성케 하려고 기도(企圖)하여, 그 수단으로서 우선 동지를 규합하고 조선민족 대표자로서 손병희 등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조선 각도에 배부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조선 독립의 시위운동을 일으킴으로서 조선 민족이 얼마나 독립을 열망하는 가를 보여주는 한편, 제국정부, 위.중 양의원(爲衆兩議院), 조선 총독부, 및 강화회의의 열국 위원에게 조선독립의 의견서를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 독립에 관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발송하려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하고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족임을 선언하고...

이것은 길목사에 대한 일제의 3.1사건 공판 기록의 서두이다. 길목사는 함태영(咸台永) 목사와 이승훈(李昇薰)씨 등과 미리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다.
한편, 평양에서는 그의 생일 축하라는 명목으로 숭의대학교 기숙사생 100여명을 그의 집으로 초대하여 이들이 장대현교회 구역을 분담해서 선언서를 뿌리고 서문 거리, 종로, 신창리등 각 구역에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부르며 남문 거리에서 합류하여 법원앞까지 가두 시위를 하기로 계획을 짜놓았다.
길 목사는 2월 20일 가정 예배를 마치고 부인에게 자식을 부탁한 다음 예정된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떠났다. 그는 성황리에 사경회를 마치고 사리원을 거쳐 서울로 향했으나 3월 1일에야 겨우 서울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서울역에서 관헌에게 자기 정체를 밝혀 곧장 투옥되었다.
한편 평양에서는 12시 정각에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예정대로 장대현교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시위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체포 구금되었으며, 목사의 아들 진경(鎭京)은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펴내다가 체포되어, 18세의 어린 나이에 심한 고문을 당해 세 차례나 실신하고 징역 1년 반의 선고를 받았다.
길 목사의 부인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었다. 큰아들을 잃은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은 서울 감옥에, 둘째 아들은 평양감옥에 각각 갇혀 있고 어린 두 남매까지 도피시켜 그들의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서 부인은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우곤 하였다.
한편 길목사는 옥중에서 낮에는 주로 성경을 읽고 시력이 여의치 않은 밤에는 기도와 계시록 암송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과의 영적교제는 날로 깊어졌다.
그는 때때로 금식기도를 하고 교회와 부인에게 자주 서신을 띄웠다. 환란 중에도 굴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고 교회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면 민족의 장래에는 반드시 서광이 비칠 것이라는 격려와 당부의 서신이었다.
이 서신을 받은 교우들은 저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전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들 전도대원은 각 가정에 파고들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다. 길목사는 2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 이 운동을 가리켜 인가귀도(人家歸道) 운동이라고 하여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는 출감한 후 한동안 자택에서 휴양하고 나서 순회 전도를 다시 시작했다. 1923년 11월 14일부터 20일에 걸친 평북 강계읍 사경회의 인도를 시발로하여 각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고 안동교회에서는 계시록의 말세론을 펴서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1927년 원산 석우동(石偊洞)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였다. 회당은 은혜를 사모하는 신도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꺼지더니 우당탕 쿵쾅하고 괴한 30여명이 단상에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장내는 금새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길 목사는 “주여 제가 주먹으로 치면 사상자가 나겠사오니, 저의 주먹을 쓰지 않게 해 주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에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자 와 교회의 처음 대결로 이들의 우두머리는 바로 믿음이 독실한 김애신의 남편이었다.
김애신은 원산 마르다 신학교를 거쳐 요꼬하마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 몸바쳐 봉사하는 일꾼이었으며, 그녀의 남편은 공산당 과격분자였다. 강단에는 여신도들이 급히 뛰어 올라가 치마 자락으로 길목사를 가리고 강단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간신히 위험을 모면했다.
1932년 길목사가 기독교에 입신하여 목사로 시무한지 25주년이 되는 해에, 평양에서 불한당의 중국인 살해 난동 사건이 일어나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길목사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이 죄악의 도성으로 추락된 현실을 개탄하여 마지않았다. 며칠이 지나 그는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한국 교회에 일대 시련의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 기도하지 낳으면 앞으로 닥칠 무서운 환란을 극복할 수 없고, 비탄 가운데 빠져 있는 민족의 선두에 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크게 회개할 때입니다.”하고 길목사는 외쳤다.
“평양에서 일어난 중국인 살해 난동사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륜과 도덕을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극악 무도한 만행이 빚어지고 있는 이현실에 대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리고 믿음을 잃은 오늘의 교회가 먼저 해야할 일은 통회입니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가, 만일 그리스도가 이 자리에 나타나 사랑의 계명을 받은 너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1934년 초부터 7월 말까지 길목사는 북간도와 함경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했다. 북간도 용정 중앙교회를 위시하여 시내 남녀 중학교와 중국인 교회에서 설교하고, 연길에서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연합 부흥회를 인도하고 함경도 일대를 누비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듬해 길 목사는 평북 선천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뇌일혈을 일으켜 단상에 쓰러졌다. 그는 즉시 선천기독병원에 입원하여 두 주일 동안 치료를 받고 몸이 어느 전도 회복되자 집에 돌아와 정양을 했다. 그런데 이 해 11월에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사경회를 해 달라는 초청이 왔다. 주위의 사람들이 무리해서는 안된다고 말리자 “내가 비록 병중에 있지만 어찌 성회의 사경을 폐하겠느냐 내가 강당에서 주의 복음을 외치다가 가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하고 강서로 떠나 집회를 인도하다가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졋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아들 진경에게 길목사는 입을 열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뭐라고 글을 썼으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마지막 유언은 영원히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1935년 11월 26일 오전 9시 10분 친지와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7세로 파란 많은 생애를 조용히 마쳤다.
12월 4일 장례식은 평소에 길목사가 즐겨 부르던 찬송가 162장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를 합창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영구는 장대현 북문 언덕에서 신창리 네거리를 거쳐 종로로 해서 서문 거리를 지나 숭실대학 강당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연로에는 조위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순사들은 교통이 차단된 거리를 정리하기에 분주했다. 영구의 뒤를 따르는 조위객의 수는 약 10만이 가까웠다. 영결식을 거행하기 위해 잠시 멈췄던 행렬은 이윽고 교회 묘지인 서장대에 도착했다. 10리길이나 뻗은 조위객의 행렬은 아직도 길목사의 본집에까지 이어져 그들이 모두 장지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므로 그대로 하관식을 거행했다. 찬송가 “달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길목사의 유해는 조용히 흙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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