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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10-26
 제목  존 낙스(John Knox, 1513~1572)
 주제어  [존낙스] [청교도]
 자료출처  청교도 신앙의 선구자들  성경본문  
 내용

존 낙스는 1513년경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딩톤(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앤드류(St. Andrews) 대학에서 교육받고, 이어 신부로 서품되었다. 30세쯤에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설복당했고,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위샤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였고, 1546년 성 앤드류의 화형장에서 순교했던 인물이다.

 

향후 13년 동안 낙스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패로 끝나 버린 앤드류 성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노예가 되어 프랑스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에 19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에드워드(Edward) 2세 치하 말기에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크랜머의 1552년판 '공중기도서'(Book of Commom prayer)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에 참여하여 일익을 담당했다.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독일로 건너갔다. 한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있는 영국의 망명자 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낙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보다 철저한 개혁파 예배 의식을 소개함으로써 '공중 기도서'를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망명온 보다 보수적인 자들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고, 낙스를 즉시 몰아내려고 리차드 콕스(Richard Cox)와 그이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낙스에게 항의하며 "그대들은 영국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낙스는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런 충돌은 엘리자베드 1세 치세시 '공중 기도서'를 견지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이 지니는 노선에 서서 보다 충실한 종교개혁을 요구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청교도(Puritan) 논쟁의 전조가 되었다. 콕스는 사람들에게 (낙스의 급진적인 교회 정치관을 환기시킴으로써)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낙스를 추방시켜야 한다고 조종하자, 그는 제네바로 건너갔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를 열렬히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곳에 머물면서 그의 유명한 '괴물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1차 나팔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저술했다. 이러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비난은 영국의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에게 향해진 것이었다. 1558년에 엘리자베드가 즉위했고 그녀는 낙스의 그런 저서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그 곳에서 교회 개혁을 도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권징 조례'(Book of Discipline, 1561)와 '일반 예식서'(Book of Common Order, 1564)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또한 1560년 8월 중 4일에 걸쳐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Scots Confession)를 작성했던 '여섯 사람의 존'이라는 인물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중추 인물이었다. 이 신앙 고백은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얻게 되엇고,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2차 낙스의 항거는 1568년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가 영국으로 쫓겨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그의 주저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로서, 164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낙스는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


A. 존 낙스의 성장

낙스의 생년월일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대체적으로 1513년에서 1515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생지도 정확하지 않으나 제네바에 거주할 때 스스로 핫딩톤 (Haddington) 출신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존 낙스는 핫딩톤에서 세인트 앤드류스로 진학하였다.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에는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 사상 및 급진적인 독일, 스위스 프로테스탄트들의 사상이 만연해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낙스는 대학교육을 받았다. 그의 졸업일자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그가 언제 대학을 떠났는가를 알 수는 없다. 그런데 1540년에 이미 "존 낙스 경" (Sir John Knox)으로 불리는 교황 휘하의 공증인으로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이미 학업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가 교황 휘하의 공증인 (papalnotary)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기성 교회체제'안에서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당시 공증인은 마치 변호사와 비슷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각 교구 (parish)내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절은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 못했으니 그가 공증한 서류들 중 이제까지 남아 있는 것들 가운데 나중의 것인 1543년 3월 27일자의 문서를 보면 "그리스도를 통한 신실한 증인,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라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이때쯤 이미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비록 정확한 시일은 알 수 없으나 낙스는 1543년 롱니드리가의 더글라스의 두 아들 프란시스와 죠오지, 그리고 오르미스톤의 존 콕크번의 아들인 알렉산더 등을 가르치기 위해 사무엘 스톤가를 떠나 리이스에서 핫딩톤사이의 해안도로상에 있는 롱니드리에 가정교사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를 통해 친영(親英) 프로테스탄트파의 한 가운데에 위치할 수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낙스가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던가 ? 그는 이러한 입장의 변경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남겨놓지 않고 있다. 그의 시종 리차드 반나타인 (Richard Bannatyne)은 낙스가 임종자리에서 읽어주기 원하는 성경 귀절들 가운데 하나로서 요한복음서 17장을 지적하면서 이곳에 "최초로 나의 닻을 던졌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의미로 볼 수 있는데 낙스의 회심이 이럭저럭 하다보니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요한복음 17장을 읽은 결과 내린 결단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어쨌든 그의 회심사건을 통해 그의 전생애가 급격한 변화를 이룬 것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죠지 위샤트 (George Wishart)가 무대에 등장하여 전국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 친영파의 생각을 뚜렷히 보여주었다. 위샤트는 생전에 서로 떨어져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을 합류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그의 순교를 통해 이들을 더욱 단결시켰다.


위샤트는 1532년 루우벵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후 스코틀랜드로 귀환하여 몬트로즈 (Montrose)에 있는 던의 어스킨 학원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의 입장이 교회와 충돌되어 문제가 생기자 그는 영국으로 피신했었는데 거기서도 브리스톨 (Bristol)에서 각종 로마교회의 모습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다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일단 자기의 행위를 철회한 후 다시 대륙으로 가서 독일과 스위스에서 한동안 머물렀는데 스위스에서는 [제 1 헬비틱 신앙고백] (First Helvitic Confession)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534년에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캠브리지의 코르푸스 크리스티 (Corpus Christie)대학의 일원이 되었다가 곧 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왕자의 혼인을 추진하러 가는 영국대사들 틈에 끼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위샤트가 로티안에 머무는 5주 동안 낙스는 두 손으로 큰 칼을 들고 그를 경호하였다. 그러나 위샤트는 보스웰 백작의 농간으로 인하여 체포되어 에딘버러로 이송되었다. 1545년 2월 말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3월 1일 비이톤 추기경이 내려다 보고 있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 후 다시 태워졌다.
이와같은 위샤트의 처형은 낙스의 마음속에 영원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겨우 5시간 차이로 낙스가 위샤트와 함께 체포당하는 것을 모면했다는 사실도 그에게는 더 큰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어쨌든 위샤트와 함께 보낸 5주간이 낙스로 하여금 개혁가의 길을 걷게 하는데 가장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B. 존 낙스의 초기사역

위샤트의 죽음은 낙스로 하여금 비이톤 추기경과 비이톤 추기경이 대표하는 모든 것들을 깊이 증오하게 만들었다. 비이톤 추기경은 제임스 5세가 급서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중심인물로서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세인트 앤드류스의 대주교였으며 스코틀랜드 정계에서 로마 카톨릭과 친불파를 이끄는 인물이었다.
그와 밀접한 동맹관계를 맺었던 것은 여왕의 어머니요, 태후였던 기이즈의 메리 (Mary of Guise)였는데 일각에서는 그녀가 비이톤의 정부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각종 교회소유의 봉록직들을 좌우하던 그는 스코틀랜드 제일의 부자 가운데 하나였는데, 비이톤은 자기측근의 인물들을 이용하여 스코틀랜드를 완전 장악하고자 획책하고 있었으며 기회만 있으면 반대파 인물들을 협박하여 그들의 가족 중 일부를 인질로 제공하도록 하는 방법을 능사로 여겼다. 한 가지 예로써 알란 총독에게까지 장남을 자기에게 맡기도록 하였는데 명목은 맡아서 교육시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협조를 강요하기 위한 인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에는 조용한 가운데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프로테스탄트들이 위샤트의 처형을 계기로 여러 지방에서 반항을 노골화 시켰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도대체 박해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에 대해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같은 불안과 당혹은 결국 무력에 의한 추기경의 제거라는 계획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살해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들은 노오만 레슬리와 로테스 백작 아들인 로테스 지사였는데 로테스는 비이톤으로 말미암아 자기 재산 일부를 잃었다고 앙심을 품고 있었다. 레슬리 및 기타 이 음모에 가담한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볼 때에 단순히 '위샤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한 분노의 폭발' 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거사동기는 복합적이었고 씨족적인 요소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다수가 비이톤 체제를 통해 빼앗긴 경제적 재산 때문에 증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비이톤은 카안비의 멜빌(Melville of Carnbee)의 칼끝에 숨을 거두었다.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일단 살해가 끝나자 음모자들은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일국의 수상을 죽인 꼴이었다. 아울러 교회의 추기경이자 대주교를 암살한 것이었다. 따라서 세속정부와 교회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이승과 저승의 처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충분한 보급품들이 비축되어 있고, 견고하게 방비되어 있던 성을 점령한 채 수비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마침내 성내에 인질로 머물고 있던 총독의 아들을 확보하였으니, 값진 협상조건을 발견한 셈이었다.
만일 이들이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몇몇 안되는 숫자로서 그다지 오래 못 버텼으련만 사건 발생일날 이미 그렌지의 커크칼디경이 식객들과 자식들을 거느리고 입성하여 수성에 참여하여 단결을 과시하였고,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란 총독 밑에서 프로테스탄트 상담목사를 했던 존 러프가 입성하여 단기간 동안에 총 인원은 120내지 150명에 이르게 되었다.
양측 모두가 시간이 흐르기를 고대하였다. 총독은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식량이 떨어지기 만을 고대하고 있었고 성을 차지한 자들은 영국측이 자기들을 구원하던가 혹은 성을 아예 점령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1547년 10월 윌리암 커크칼디를 원조 요청차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영국을 설복하여 한 함대 분의 보급품을 얻어 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보급품들은 난관끝에 성에 전달되었다. 이 함대는 11월 20일 성을 떠나면서 두 명의 사절, 노오만 레슬리와 할힐의 헨리 발네이브즈를 함께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카스틸리안들(Castillians) 로터 헨리 8세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발네이브즈와 레슬리가 영국에 가 있는 동안 기이즈의 메리와 그녀의 프랑스인 고문이던 도이젤의 압력을 받은 총독은 카스틸리안들을 설복시키기 위한 회담을 시작하였다. 12월초에 시작된 협상은 17일 일단 합의점에 도달하였으니 총독은 추기경 살해자들에 대한 교황의 사면령을 얻기 위해 로마로 사절들을 파견하고, 그동안 카스틸리안들은 약속 이행에 대한 담보로써 계속 총독의 아들을 인질로 붙잡아둔다는 것이었다. 일단 교황으로부터 사면령이 전달되면 그들은 성을 총독에게 넘겨주고 총독은 그들의 재산과 관직을 다시 복원시켜 준다는 조건이었다. 이 타협을 통해 세인트 앤드류스에는 일시적이나마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카스틸리안들의 문제는 그들 지도층 안에서 내부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일이었다. 일단 협상이 체결되자 오직 개인적 영리만을 추구하여 추기경의 암살에 참여했던 자들은 전형적인 용병의 모습을 드러내어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온전히 종교적 이유로 이에 참여했던 이들은 깨끗한 자세를 계속 유지하였으니, 헨리 발네이브즈와 카안비의 멜빌, 또한 성직록을 몰수당한 후 이들과 운명을 같이 했던 몇몇 성직자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단계에서 낙스는 1547년 4월 10일 세인트 앤드류스 성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해밀턴 대주교의 추종자들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다녀야 하는 생활에 지친 낙스는 한때 독일에 가서 학문을 탐구할 생각도 하였으나 영국에 대해서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이 교황을 대치했을 뿐 진정한 개혁이 못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낙스가 자기 고용주들에게 위급한 신세를 토로하자 롱니드리의 더글라스, 오르미스톤의 콕크번등은 낙스에게 세인트 앤드류스로 피신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곳에는 교회의 박해와 핍박을 피할 수 있고 영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낙스가 성내에 들어간 뒤 발네이브즈가 1180파운드의 원조와 응원군의 파견 약속을 받아가지고 영국에서 귀환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농성군의 지도자들은 총독의 아들을 영국에게 인도할 것과 에드워드 6세와 메리사이의 결혼을 추진하겠다는 서약문에 서명하였다. 낙스가 이곳에 도착했을 즈음 발생한 이 서약조인 직후에 발네이브즈, 보스윅, 존 레슬리등은 영국과의 동맹을 재확인하고, 이들 농성군들을 위한 모종의 행동이 즉각 취해질 수 있도록 촉구하기 위해 다시 떠났다.


발네이브즈가 영국에 가 있는 동안 존 러프가 그 지방 교구의 설교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존 안난드 사제장의 거센 반발을 받고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낙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낙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앙양시키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논설을 작성하여 주었다. 그 결과 발네이브즈가 도착하자, 발네이브즈와 러프는 낙스가 러프의 동역자로서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결정에 도달하였다. 그 직후 러프가 영국을 향해 떠나버린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두 사람은 조용히 낙스를 방문하여 농성군의 영적생활을 지도해 주기를 청하였다. 낙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은 곳에서는 달음질할 수 없었으므로, 즉 합법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이 요청을 묵살하였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은 다시 데이빗 린제이 경, 리온 킹 경등과 이 문제를 의논하였고 이들은 결국 공식적으로 낙스를 목회자로 청빙하여, 그가 양심 문제를 들어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자는데 합의하였다. 이렇게 하면 낙스는 이를 수락하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사라지던가 둘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이에 따라 러프는 아마 4월 말 경 목회자들의 선출에 관한 설교를 행한 후 회중들이 부르는 목회에서의 소명을 받도록 낙스를 호출하였다. 이와 함께 회중들은 열렬한 동의를 표현하였다.


낙스는 그 자리에서 즉시 결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낙스의 이론을 이용한 러프가 공개논쟁 석상에서 안난드를 궁지에 몰아넣어 "교회의 권위는 최종적이며 교회가 모든 루터란들과 이단들을 정죄하였으므로 더 이상 토론할 필요조차 없다" 라는 발언을 하도록 만든 직후에 왔다. 이 예배에 참석했던 낙스는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발언을 공박하였다. 즉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의 교회가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의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보다도 오히려 더욱 사도들의 교회로부터 타락하였음" 을 증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낙스의 주장을 듣던 교인들은 곧 그에게 말씀을 전파하도록 강권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이제 회중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는 인간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상관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다니엘서 7장 24절, 25절을 본문으로 삼았다.


낙스의 설교와 이에 대한 반응은 과연 낙스가 어떤 인간이었는가에 관해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선 첫째로 그는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써 스스로 진실을 외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성경의 예언에 의해 당시의 상황들을 해석한 것은 그가 뚜렷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또한 둘째로 그는 오직 "믿음에 의한 의롭다하심"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 중 하나로서 외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니, 이러한 자신감은 앞으로의 모든 박해를 이겨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이 두가지 요소를 전 생애를 통해 그의 사상속에 간직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청중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에 불러 주셨음을 확인시켜주셨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었다. 다른 많은 설교가들이 겨우 나뭇가지를 흔들었다면, 그는 교황제의 근본 뿌리를 파헤친 셈이었다. 그는 그날 세인트 앤드류스 교구의 교회 문을 나서면서 자기가 진실로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되었다.


이즈음 카스틸리안들에 대한 교황사면령이 1547년 4월 2일 이전에 세인트 앤드류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부당국은 이를 즉각 전달하지 않았다. 양측 모두가 외국의 도움만을 고대하며 날짜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11월 초순경 총독은 카스틸리안들에게 교황의 사면령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면령 가운데 "용서받지 못할 자들을 사면한다"는 구절이 있음을 발견한 이들은 이를 수락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곧 영국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칠 것이므로 강경노선을 고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7월 중순경,.레온 스트로찌의 지휘 아래 도착한 약 2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는 카스틸리안들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영국으로 부터 원군이 도착할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프랑스군들은 드디어 대포로 성내의 한복판 광장을 포격하였다. 이에 따라 농성군들은 윌리암 커크칼디를 보내어 프랑스 사령관과 회담을 열고 7월 31일 항복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교황과 총독의 뜻에 따라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니 신사계급들은 여러 성에, 이보다 낮은 신분 출신들은 갤리선에 수용되었다. 낙스 및 같은 신분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배 노틀담호에 승선하여 프랑스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뒤 1548년 프랑스측에서는 영국의 침입을 막아내는 총독을 돕기 위해 보다 많은 군대를 파견했으므로, 이 편에 낙스는 2번이나 모국을 방문하였다. 2번째 항해중에는 중병에 걸려 그의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였다고 한다.


갤리선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인들은 미사 참여가 강요될 때마다 그냥 드러누워 버림으로써 승복할 수 없음을 표시하였다. "내가 갤리선에서 당한 고통들은 나의 심장으로부터 울음을 자아내게 했다"는 낙스의 고백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낙스는 신앙과 유머로써 스코틀랜드인들의 지도자적 위치를 유지하였다. 일례로 프랑스인들이 동정녀 마리아의 초상화에 입을 맞추라고 강요했을 때, 그림을 보는 체 하다가 강물속에 집어 던져버리고 "그녀보고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하자. 그녀는 몸이 가벼우니까 헤엄치기를 배우라고 해보자" 라고 하였다. 낙스다운 행동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더 이상 프랑스인들은 우상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낙스는 전한다.


낙스가 노예로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 영국, 프랑스 등에서 사태의 변화가 일어나 결국 낙스 및 그의 동료 알렉산더 클러크 등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일단 자유를 얻은 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결정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틀림없이 이단 죄목으로 기소될 것이며, 화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상황 또한 불안하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가장 적당한 것은 영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크렌머 대주교가 영국교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기를 도와 줄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개혁가들을 모으고 있었다.
낙스는 갤리선의 복역기간 동안 세인트 앤드류스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가운데 지도자로서 부상해 있었다. 지난 19개월 간 각종 문제들에 대해 낙스가 문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곧 그 후 오랜 동안 계속 될 낙스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노예감독의 채찍 아래서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이야말로 우상숭배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확신을 얻었기에 이를 증오하고 적대하게 되었다. 이런 그의 정열과 뚜렷한 목적의식은 그를 종교혁명의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C. 종교개혁 직전의 존 낙스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영국의 의회는 낙스의 개신교 신앙을 높이 평가하여 낙스의 영국 도착 직후 버윅 (Berwick) 교회의 설교가로 임명하였다. 1551년에는 추밀원 (privy council)에 의해 낙스는 궁중목사 6명 중의 한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낙스는 영국국교내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로마교회의 유풍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노스움버랜드 공작 (The Duke of Northumberland)의 추천으로 로체스터 교구의 주교로 추천을 받았으나 이런 이유로 해서 거절하였다.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스페인으로 출가했던 에드워드의 이복누나인 메리 (Mary Tudor)가 즉위하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신앙인 로마 카톨릭의 복귀선언과 동시에 박해를 시작하여 스미스필드 (Smithfield)의 형장을 피로 물들였다. 이로 인해 그녀는 피의 메리 (Bloody Mary)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낙스는 6개월간 사태를 관망하다가, 1554년 3월 프랑스의 디엡페(Dieppe)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하였다가 스위스의 제네바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종교개혁의 지도자 캘빈을 만나서 캘빈이 10년 후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었다. 1554년 11월 낙스는 영국에서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피난온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의 초빙으로 캘빈의 권유로 인해 윗팅함 (Whittingham)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기도서 (Book of Common Prayer)의 사용문제로 회중 사이에 불평이 생겨 캘빈의 권유로 양자 절충의 예배의식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온 콕스 박사 (Dr. Richard Cox) 일행이 합류하면서 그들은 공동기도서의 예배의식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대해 낙스가 공동기도서에 대해 정면공격을 가하자 그들은 당시에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낙스의 저술인 [영국을 향한 신실한 권면] (Faithful Admonition to England)으로부터 발췌한 구절들을 증거 삼아서 낙스가 영국의 메리 여왕과 스페인의 황제 찰스 1세등에 대한 반역자라고 시의회에 고발하였다. 당시의 프랑크푸르트는 황제 치하의 도시인만큼 시의회는 충격을 받고 낙스가 즉시 그곳을 떠나도록 지시하였다.
낙스는 1555년 4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의 제네바 도착시 이미 위팅함이 캘빈에게 사건 전말을 설명한 후였다. 그 후 콕스와 그의 일파들의 편지도 도착하였으나 캘빈은 프랑크푸르트 교회에 대해 "낙스 선생은 전혀 형제의 우애로서 경건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 이라고 답장을 보내므로 낙스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낙스는 이후 약 6개월 동안 제네바에 있는 영국의 난민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등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록크 부인(Anne Locke)에게 편지를 띄워 제네바를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 라고 표현하였다.

저는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이곳이야말로 사도들의 시대 이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들에서도 그리스도는 진실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과 종교가 이처럼 신실하게 개혁되어 가는 모습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수 없습니다.

그해 9월 그는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였다. 1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성도들을 격려한 후 낙스는 때가 무르익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1556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낙스의 생애 중 이때가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였으며 돌아와서는 제네바 개혁교회의 회중을 상대로 목회생활을 하였다.
1557년 낙스는 4명의 스코틀랜드 귀족들로부터 박해가 완화되었으니, 귀국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낙스는 여러 형편상 귀국할 시기가 아니었으나 1557년 10월 24일 제네바를 떠나 디엡페 (Dieppe)에 도착했다. 그러나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귀족들의 편지를 받고 디엡페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예상외로 많은 성과를 거둔 후, 1558년 봄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낙스는 이후 1558년과 1559년 초에 걸쳐 방대한 양의 팜플렛을 발표했으며 특히, 제네바 성경 (Geneva Bible)의 번역과 주석 사업에 참여했고 계속 서신을 교환하여 영국 난민 교회를 이끌었다.
또한 낙스의 지도아래 제네바에서 작성된 공중 예배 규정서 (The Book of Common Order)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공중 예배지침이 되었다. 그러던 중 1558년 영국의 메리 여왕이 죽고 이복 여동생 엘리자벳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이 유럽에서 여왕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영국으로 대부분 돌아가게 되었다. 제네바에서도 난민들의 요청에 따라 1559년 1월 24일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와같은 급격한 상황의 변화로 말미암아 낙스는 구태여 제네바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크리스토퍼 굳맨의 손에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을 맡기고 영국을 통해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였다. 드디어 종교개혁의 산 역사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시점이었다.

V. 종교개혁의 성취

A. 개혁의 진행과정

1559년 5월 2일 낙스가 돌아와서 발견한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국토가 갈래갈래 분열되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와중으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스코틀랜드 국내에서의 프랑스와 영국의 알력은 프랑스의 우세로 말미암아 전반적 정치 기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찌기 1551년 의회는 종교를 어지럽히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징벌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1550년 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추종자들을 흡수하였다. 따라서 메리는 무엇인가 스코틀랜드 교회내부의 자체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 이를 위하여 1559년 지방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녀는 이를 통해 국내를 통일시켜서 보다 효과적으로 영국과 이단들에 대항하고자 했다. 주교들은 3월 초에 모였다. 그러나 모임을 통하여 성직자들의 도덕적, 지적 상태가 형편없다는 사실만이 드러났다. 이 상황에서 메리는 프로테스탄트 설교가들에게 1559년 5월 10일 스터링으로 출두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귀족들이 무장만은 하지 않은 채 다수가 퍼어스에 모여 설교가들을 옹호하는 의미에서 스터링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에 약간 겁을 먹은 메리는 던의 어스킨을 회유하여 보다 나은 방도가 마련될 때까지 군중들이 퍼어스에 머물든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꾀하였다.
퍼어스에 모였던 군중들은 이에 동의 하였으나 5월 10일까지도 설교자들이 출두하지 않자 메리는 이들을 드디어 정체가 드러난 '반란자'들로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그 다음날 낙스가 미사의 우상숭배성에 대해 설교한 후에는 청중들의 감정이 격앙되어 신교도들의 예배에 뒤이어 곧 한 신부가 미사를 거행하고자 했을 때 성당내의 성상들을 부수기 시작하여 곧 근처의 수도원들을 향해서까지 파급되었다.
낙스는 이 난동이 근처의 도미닉파와 프란시스칸 수도회, 카투신 수도회의 수도원을 노략하여 재산을 약탈하고자 했던 악당들의 소행이라고 못박고 있다. 태후는 곧 귀족들에게 전력을 다해 퍼어스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낙스가 작성한 것이 거의 확실한 편지를 준비하였으니 수신인은 태후, 프랑스 군사령관 도이젤, 일부 프로테스탄트가 섞여 있던 프랑스 군병사들, 스코틀랜드 귀족층 등이었다. 이 편지의 요지는 만약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평화스럽게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충심으로 합법적인 정부의 권력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만약 태후가 계속 이들을 박해하는 경우, 내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협박을 잊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다시 스코틀랜드내에 있는 적 그리스도의 집단, 사악한 고위성직자들과 그의 졸개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발송되었으니 이 내용은 핍박을 계속할 경우에 비롯될 수 밖에 없는 참담한 결과를 지적한 것이었다. 이러한 편지들은 곧 퍼어스 주위의 5,000내지 6,000명에 달하는 프로테스탄트 후원자들을 집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서부지방의 귀족들은 글렌카이른 백작의 지도 아래 응원군을 조직 하였다. 이와 같은 세력의 집결을 인지한 메리는 곧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던 제임스 스튜어트 경과 아르길 백작을 파견하여 사태를 파악하는 한편 이러한 '반란군'들에게 귀향을 종용하였다. 이들이 두 명의 사절들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요, 단지 종교의 개혁을 희망할 따름이라고 하자, 양 사절들은 태후와 어떤 타결책을 찾아보겠으며, 만약 그녀가 거부할 경우에는 자기들도 이들에 합류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협상의 결과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퍼어스에서 철수한다면 태후측에서는 시내에 프랑스군 수비대를 배치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신도들은 퍼어스에서 철수하여 동쪽 세인트 앤드류스로 옮겨갔으나 그 이전에 종교의 개혁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합심하여 운명을 함께 한다는 상호계약, 혹은 맹약을 체결하였다.
일단 퍼어스를 점거하게 된 태후는 이제 세인트 앤드류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몰아내기로 작정하고 병사들을 그곳으로 진군시켰다. 태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에 실망한 제임스 스튜어트 경, 아르길 백작, 루스벤 경 및 기타 여러 인사들은 조용히 프로테스탄트에 합류하였고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회중지도자들은 대항하기로 결정하고 6월 12일 저녁 진영을 배치하였다. 장소는 쿠파르 무우르였다. 이러한 이들의 각오가 전해지자 다음날 정오 경에는 로티안 지경으로 부터 오르미스톤, 칼더, 기타 영주들이 이끄는 병사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그 결과 태후와 또 다른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그녀는 파이프 지경에서 모든 프랑스인들을 철수시키고 프로테스탄트 회중과의 영속적 평화를 이룩할 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몇몇 귀족들을 지명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협상 대표들을 지명하지 않고 계속 병사들을 퍼어스 지경에 주둔시키자 회중들은 파이프, 앙구스, 메어른, 스트랫헤른 지경의 형제들이 6월 24일 시내에 모이도록 소집하였다. 동시에 제임스와 아르길 경등은 메리에게 이미 약속한 두가지 조건을 시행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자 전체 회중들은 다시 퍼어스까지 이동하여 6월 24일 그곳에 도착하였다. 왕당파 수비대들은 수적으로는 도저히 대항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항복하였으며 다음 날로 그곳을 떠나라는 메리의 명령을 받았다.
한편 낙스는 앞서 스터링에로 소환된 설교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퍼어스에 회중들이 모였을 때,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이들과 운명을 함께 하고자 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6월 4일 회중들이 세인트 앤드류스로 후퇴했을 때도 낙스는 이들과 함께 행동했다. 지금까지의 각종 사건들을 계획, 조직, 진행시킨 인물들은 귀족들, 영주들, 시민들로서 이들이 바로 회중들 즉, 프로테스탄트의 실질적인 물리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스가 세인트 앤드류스에 도착하면서 그의 활동은 또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가 원래 복음에로 부름을 받았던 바로 그 도시에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에 따라 바로 다음 주일날 설교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설교하겠다는 선언에 해밀턴 대주교는 "12개의 화포로 낙스를 영접하겠노라" 고 협박하였고 동시에 신도의 지도자들은 필요없는 분쟁만을 야기시키니 취소하라고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뜻을 꺽지 않고 그리스도가 성전을 깨끗이 하신 이야기로 효과적인 설교를 완수해 내었다. 이 결과 시장이던 데이지의 리어먼스가 이끄는 시 당국자들은 곧 성당안의 성상들을 비롯하여 모든 우상숭배의 잔재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가져다가 월터 밀른이 일찌기 처형당한 바 있었던 그 장소에서 불을 질렀다. 바로 이러한 입장을 통해 낙스는 비록 개혁운동의 정치적 지도자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도덕적, 영적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6월 24일 퍼어스를 탈환한 회중들은 이제 "에딘버러에로의 진군을 !" 하고 부르짖었다. 메리는 에딘버러의 시민들로 하여금 막도록 요청하였으나 시민들은 "사람들이 노략물, 자유, 새로운 형태의 삶을 추구하여 날뛸 때에는 이들을 강제로 무력을 사용하여 막기는 불가능하다" 라 이유로 거절하였다. 태후는 던바아로 후퇴하여 프랑스군의 보호하에 있게 되었다. 반면 에딘버러에 진출한 프로테스탄트들은 무언가 타협책을 강구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에딘버러성의 수비대장이던 어스킨 경이 만약 회중들이 프랑스군들에 대항하여 시를 수호하고자 할 때에는 대포의 포문을 돌려 대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협상은 메리와 회중들의 양측 대표들이 7월 24일 리이스 링크스에서 만나 협약에 조인함으로써 성립되었다. 회중들은 프로테스탄트 및 설교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줄 것과, 이미 로마 카톨릭이 붕괴된 지역에서는 다시 이를 복고시키고자 시도하지 말것, 프랑스인들은 스코틀랜드로부터 철수할 것등의 조건들을 내세웠다. 이에따라 회중들은 이러한 조약에 조인한 다음 날 아침 시장 한 복판에서 그들이 내세웠던 4개의 조항을 선언한 뒤 스터링으로 철수하였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회중들이 에딘버러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에딘버러에 거주하던 다수의 자유시민들이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 결과 그들은 7월 7일 톨부스에서 가진 회합에서 낙스를 공개적으로 세인트 가일스 교회의 목사로서 청빙하였다. 낙스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곳 교인들에게 목회하였으며 그곳 교구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담당하였다.
회중들은 스터링으로 철수해 갈때에 낙스를 함께 데려갔으며 그 자리에 보다 외교적이던 존 윌록을 남겨두었다가, 후에 평화롭게 귀환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그를 다시 돌려 보내었다. 이러한 조처를 행하게 된 또 한가지 이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낙스가 전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위해 중요한 자문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에 귀환한 즉시 회중 지도자들에게 메리와 그녀의 프랑스 군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도록 하라고 강력하게 충고한 바 있었다.
낙스는 이를 위하여 영국의 세실 경에게 6월 28일에, 7월 1일 경에는 헨리 퍼어시 경에게 각각 서한을 띄웠다. 그 내용은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결코 정치혁명을 의도하고 있지는 않으며, 단지 종교적인 개혁을 이룩하게만 되어도 양국간에는 항구적 우의관계가 존속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저는 이미 오랜동안 양국 사이의 영속적인 동맹관계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귀하들의 심정을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주시기만 한다면 바로 지금이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입니다.

낙스는 영국의 고위 당국자와 앞으로의 사태를 의논하기를 원하였다. 이처럼 회중들을 위해 영국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는 낙스의 입장을 후원하기 위해 그렌지의 윌리암 커크칼디 경도 세실과 퍼어시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영국측은 매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세실은 퍼어시에게 지시하기를 커크칼디가 제안한 바대로 양국간의 영속적인 평화를 바라고 있다 하고, 만약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에 침입할 때에는 이들을 격퇴하는데 영국이 도울 의사가 있음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역시 한가지 난제는 낙스와 커크칼디 양자가 모두 아무런 공식적인 직함이 없는 개인들이었으므로 공개적인 조약을 승인하거나, 공약을 선언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세실과 추밀원에서는 7월 28일 회중들의 지도자들에게 서한을 띄워, 회중들은 공식적인 기구가 아니므로 정식으로 어떤 관계를 맺기가 곤란하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만약 더욱 많은 이들이 이들에게 가담한다면, 특히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문 출신인 샤텔헤랄트 공등이 포함된다면 회중들은 국가최고의회 (the Great Council of the Realm)의 명칭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며, 이 기관과는 영국측이 온전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리라고 통지했다.
낙스 및 귀족들은 이런 소식에 접하여 실망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들을 영국정부에 띄웠다. 낙스는 계속 세실 및 영국 정부의 요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즉시 도움을 보내지 않을 경우 프랑스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영국측은 8월 8일 랄프 새들러 (Ralph Sadler)경을 통해 3,000파운드를 보내 주었다. 이중 일부는 발네이브즈가 운반하였으며,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낙스가 자금을 분배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르미스톤의 콕크번이 10월말 제 2차 분 천파운드를 운반하는 도중 보스웰 백작에게 들켜서 돈을 압류당하고 말았다. 보스웰은 이를 곧 메리에게 전달하였으니, 메리는 재정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영국측에서 비밀리에 회중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귀족과 평민을 막론하고 일이 틀려졌다고 속단한 자들이 침몰해 가는 배를 버리듯 이탈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금 스터링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낙스는 세인트 가일스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슬픔과 혼란과 공포가 기쁨과 명예와 용기로서 변화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벤쟈민 지파를 이기게 하셨듯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이 아무리 험악하더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리는 다시 한번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의 효과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귀족들은 즉시 모임을 갖고 낙스의 기도후에 최근 태후를 떠나 회중측에 합류했던 레팅톤의 윌리암 메잇랜드 (William Maitland of Lethington)를 런던에 보내 영국의 원조를 청원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때, 메리가 회중들을 잘못 인도한 책임을 져야 할 발네이브즈, 레팅톤, 오르미스톤 등만을 제외하고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모든 귀족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재정적으로 한창 곤경에 처해 있던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속한 인사들 가운데, 그 가담 동기가 신앙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이었던 인사들은 태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낙스가 계속 영국에 원조를 요청하는 동안 회중 지도자들은 상당한 곤경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1560년 1월초 스터링을 점령하고 알란, 제임스 경, 그렌지의 커크칼디 등의 맹렬한 습격전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향해 진군해 왔다. 기이즈의 메리는 프랑스군이 킹혼 (Kinghorn)에서 승리를 거두자, "도대체 존 낙스의 하나님은 어디 있단 말이냐 ? 이제 파이프 지방에서 조차 나의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보다 강하다 !"라고 낙스를 비웃었다.
그러나 레팅톤의 메잇랜드가 주도한 협상의 결과 영국의 엘리자벳 여왕은 1560년 1월초 윈터 제독 (Admiral Winter)이 지휘하는 8척의 소함대를 보내 프랑스군을 세인트 앤드류성에서 겨우 6마일 밖에 안되는 지점에서 멈추게 하였다. 동시에 영국의 노포크 공작 (Duke of Norfork)이 회중 지도자들과 회담할 목적으로 버윅까지 왔다.
1560년 2월 27일 영국과 스코틀랜드 귀족들간에 조약이 성립되었다. 측은 공동의 적에 대해 서로를 도우기로 동의하였으며, 특히 영국측은 스코틀랜드 국토 자체를 정복하는 일없이 이곳에서 프랑스군을 축출하는 것을 돕기로 하였다.
이러한 합의를 준수하기 위해 일단의 영국군이 4월 2일 국경을 건너 3개월동안 프랑스군 숙사가 있던 리이스를 점령하고자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영국군, 스코틀랜드군을 막론하고 일반 보병 병사들은 그 전투능력이 형편없었으며, 장교들 역시 별로 나은 점이 없었다. 반면 프랑스군은 포위상태에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6월말 프랑스 정부는 수비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영국과 협상을 개시하였다.
이러는 동안 기이즈의 메리가 임종을 맞았다. 그녀는 영국의 원정대가 도착했을 때쯤에 병으로 에딘버러성에 은거하였는데, 이 성에서는 어스킨 경이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리이스를 공략하던 영국군들이 참패하는 모습을 기쁨에 차서 바라보았으며, 프랑스군들이 진지 위에 널어놓은 적군들의 벌거벗은 시체들을 보고는 "평생 이처럼 아름다운 융단은 처음 본다"고 외쳤다고 한다.
6월 16일 부터 프랑스를 대표하는 샤를드 르 로쉬푸코 (Charles de Rocheforcault), 쉬르 드 랜단 (Sieur de Randan), 바렌스의 주교 쟝 뜨 몽룩 (Jean de Monluc) 등과 영국을 대표하는 캔터베리와 요오크의 부감독 니콜라스 옷톤 (Nicholas Wotton) 박사, 윌리암 세실 경 (Sir William Cecil) 등 사이에 회담이 개시되었다. 조약의 최종안은 1560년 7월 6일에 조인되어 세 나라에 평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종교에 관한 문제는 계속 숙제로 남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파아커 대주교가 언급했듯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시도하였던 종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영국식에 비슷한 교회의 모습을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낙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 양식을 받아들일 태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물론 양쪽 다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종교에 관한 문제는 의회 (Estates)에서 지명한 대표들이 메리와 프란시스와 이에 대한 의논을 마칠 때까지 그 해결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1560년 8월 1일 의회가 소집되었다.
낙스와 그의 친구들은 교회전체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문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한 찬.반 이론이 한창 진행된 이후, 의회는 낙스 및 다른 다섯명의 목사들에게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이들은 4일만에 이를 상임위원회 (Lords of the Articles)에 제출하였으며 상임위원들은 이를 인준하는 즉시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낙스와 동료들은 이 신앙고백서를 설명, 수호하기 위해 8월 15일 출석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수많은 로마 카톨릭 신도들이 참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대를 받지 않았다. 표결에서도 겨우 한 두 표가 이를 법률화시키는데 반대했을 뿐이었다. 고백서는 8월 17일 채택되어 1주 후에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다른 두개의 법안에 의해 스코틀랜드 영토 안에서는 미사가 폐지되고, 교황은 그 권리를 온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주의의 승리는 국내에 종교적, 정치적 통일을 가져오는 대신 자기의 신앙 양심을 쫒아 개혁을 추진한 인사들과, 단지 부귀와 명예를 쫒아 개혁운동에 합류한 작자들 사이에 균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전자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중산층, 즉 자유시민들과 소귀족, 소영주 계급 출신이었던 듯하며 후자는 높은 계급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60년대에 낙스와 중산층들이 서로 합류한 것이 결국은 사태의 중대한 발전을 가져오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니 낙스는 우선 소규모의 농부 출신으로서 그의 집안은 특히 로티안 지방의 향사 계급들과 항상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민중들을 상대하는 공증인, 교사, 설교가로서 생애의 첫발을 내디딘 바 있었다.
또한 1559년 귀국했을 때, 그를 지지해준 인물들은 대부분이 던디, 퍼어스, 에딘버러, 어바인등의 출신인 향사들과 자유시민들이었다. 따라서 회중 지도자들의 분열시 소영주들과 자유시민들이 낙스와 한편을 이루고, 대귀족들이 다른 한편을 구성한 것은 당연하였다.
신앙고백 채택을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당시 프랑스에 있던 메리와의 협상이 끝나기 이전에는 종교문제의 취급을 보류하기로 했던 에딘버러 조약을 근거로 하여 의회가 권한외의 행동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으나 실상 이때의 의회야 말로 1488-1603년간 중에서 가장 국민들의 의사가 골고루 대변된 의회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법정수호의 백작들, 의회의원들, 주교들, 수도원의 원장들, 또는 평신도 대표들이 참석하였을 뿐 아니라, 85명의 영주들과 2개 촌락, 도시의 대표들까지 참석하고 있었다. 그 이전의 의사록을 살펴볼 것 같으면 이러한 규모의 향사들과 자유시민들이 참석한 것은 일찌기 그 전례가 없었음을 곧 알 수 있다.
이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표들을 뽑아 상임 위원회에 보내고, 또한 자기들의 의사에 따라 투표케 함으로써 의회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레잇 (R. S. Rait)이 말한 바대로 소지주들과 시민들은 '전국의 여론을 구성하는 중대하고도 입김이 거센 부분의 대표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고백서가 의회에서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인 듯하다.
그러나 낙스 및 기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바가 의회의 확인을 거쳤으므로 이제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서 프랑스에 있던 메리와 프란시스는 또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즉 에딘버러 조약에 의해 이러한 행동들은 금지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 샌디랜드 ( James Sandiland), 세인트 존 경등이 의회의 결정사항을 비준 받기 위해 프랑스에 왔을 때, 메리와 프란시스는 의회행동의 합법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1561년 8월 19일 메리가 귀국한 뒤, 1563년 부활절날 해밀턴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은 아이르샤이어 (Ayrshire)에서 미사를 거행했는데 이를 보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이들을 1560년 법령위반으로 체포해 버렸다. 메리는 분노하여 그녀가 사냥하고 있던 로크레벤 (Lochleven)으로 낙스를 불러 압력을 넣었다. 낙스는 이에 대해 통치자들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대신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후로 낙스는 4번씩이나 왕궁에 불려다니는 서러움을 겪었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황제를 수복하기 위해서 고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부도덕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녀는 1567년 7월 24일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강제로 물려주게 되었다.
제임스 6세의 섭정이던 모레이 백작의 주도 아래 12월초에 의회가 열렸다. 메리가 비준하지 않았던 교회에 관한 법령들이 제출되어 섭정의 동의와 함께 통과되었다. 또한 목회자들의 생활을 항구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각종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의회가 폐회하였을 때, 드디어 개혁교회는 법에 의해 그 지위가 보장되어 스코틀랜드 위에 굳건히 서 있었다.
1563년 낙스는 오칠트리 (Ochiltree)경의 딸인 방년 17세된 마가렛트 스튜어트 (Magaret Stewart)와 재혼함으로 전국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메리 여왕은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녀와는 먼 친척이 되기에 격분하였다. 마가렛트는 세 딸을 낳았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세상을 떴다. 이 후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6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메리 여왕을 복위시키려는 여왕파간에 불꽃 튀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간의 내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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