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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절대 의식과 유한 의식의 자기 이해와 자기 전개― 칸트와 헤겔 사유의 동일성과 차이성
 주제어  [칸트] [헤겔]
 자료출처  최소인  성경본문  
 내용

1. 들어가는 말

 

서양의 철학적 전통은 바로 철학이 근본 원리(arche)에 대한 사유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칸트와 헤겔의 철학도 근본 원리에 대한 사유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작업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근본 원리에 대한 사유란 나를 포함한 세계 전체, 즉 존재하는 것 일반의 있음의 방식과 본성 그리고 그 근거를 하나의 포괄적이고 통일적인 원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사유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계를 설명하는 최종 항인 근본 원리란 바로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자의 근본적인 세계상을 반영한다. 철학자들이 각기 제시했던 근본 원리가 다양하고 상이한 것처럼 이에 대응한 다양한 세계 이해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로부터 시작하여 헤겔로 이르는 독일 관념론 역시 그들이 그리고 있는 세계상의 배면에 하나의 동일한 근본 원리(arche)를 가지고 있는 철학적 사유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처럼 하나의 동일한 근본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동일한 사유의 지평,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이 내세운 근본 원리는 바로 정신(Geist), 의식(Bewu tsein) 혹은 자아(Ich)다.

 

독일 관념론이란 ―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 의식 혹은 정신 활동을 통해 세계 해명을 시도한 이론틀이다. 정신의 활동을 통해 세계를 해명한다는 것은 의식과 의식의 활동이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향의 철학적 성찰의 문을 열고 이를 기초지은 것이 바로 칸트의 사상이며 독일 관념론은 바로 이러한 칸트의 사상적 단초를 다시 발전적으로 전개했다고 자부하는 이론의 집단을 의미한다. 특히 헤겔은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로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칸트로부터 출발한 의식을 통한 세계 해명의 시도는 헤겔에 의해 완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사상사적 흐름에 대한 표현이 칸트로부터 출발한 의식이라는 근본 원리를 통한 관념론적 세계 해명이 그 근본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며 발전되어 헤겔에 의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와 헤겔의 사상적 연관성이 문제시될 때 우리는 실제로 '칸트로부터 헤겔로'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칸트 대 헤겔' 혹은 '칸트냐 헤겔이냐'라는 대립적ㆍ선택적 구도 속에서 그 관계를 파악하곤 한다. 이것은 칸트와 헤겔의 철학이 세계를 의식을 통해 해명하려는 철학적 정신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의식을 근본 원리로 하여 전개될 수 있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상이한 세계 해명의 사유 체계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모두 의식을 세계 해명의 근본 원리로 가진다는 점에서 관념론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이 선험적 관념론의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혹은 절대 관념론의 외양을 띠고 드러나는가에 따라 완충지 없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 속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칸트와 헤겔철학 사이의 갈등은 무엇보다도 절대 의식과 유한 의식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들 모두 의식을 세계 해명의 근본 원리로 삼고 있지만 헤겔은 절대 의식을, 칸트는 유한 의식을 근거로 하여 세계 해명을 시도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이들의 철학적 반성의 시원과 지향점은 서로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칸트와 헤겔의 철학에서 확인하는 유한 의식에서 절대 의식으로의 근본 원리의 변형은 철학의 근본 원리의 단계적 수정이나 철저화가 아니라 바로 근본 원리의 성격 자체의 변화를 수반하며 따라서 철학적 반성이 출발하는 시원적 물음의 차이로 인한 결과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유한 의식 대 절대 정신의 대립은 바로 세계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는 철학자의 근본 태도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칸트와 헤겔이 세계 해명의 근본 원리를 절대 의식으로 설정하느냐 유한 의식으로 설정하느냐는 세계에 대해 이들이 근본적으로 상이한 접근 방식과 이해 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칸트와 헤겔의 철학이 가지는 사상사적 연속성과 구체적인 철학적 사유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철학을 아무런 주저 없이 '칸트냐 헤겔이냐'의 대립 구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의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칸트와 헤겔의 철학을 출발시킨 근본적인 질문이 무엇이며 이들의 질문이 어떤 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칸트와 헤겔이 넓은 의미에서 독일 관념론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작업하면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화해 불가능한 대립점이 무엇인지를 다시 추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칸트와 헤겔철학의 동일성과 차이를 그려 보이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근거에 대한 물음

 

 유한 의식 대 절대 의식 독일 관념론은 바로 의식 대 사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의식의 사물에 대한 우위를 확고하게 확보한 철학 체계라 할 수 있다. 독일 관념론이란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철학적 사유의 근본 원리(arche)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론적 사유 체계에서 의식(자아, 정신)이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에 대해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념론자(Idealismus)와 독단론자(Dogmatismus) 사이의 논쟁은 실은 자아(Ich)의 자립성(Selbst ndigkeit)을 위해 사물(Ding)의 자립성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사물의 자립성을 위해 자아의 자립성이 희생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에 관한 논쟁이다. 피히테는 관념론과 독단론(실재론)을 대립적인 세계 해명의 틀로서 바라보면서 실재론과 관념론이 대립하는 지점을 자아(의식)의 자립성 대 사물의 자립성 사이의 갈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세계가 의식에 대해 자립성을 가진다면, 의식은 사물에 의존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참된 세계 해명의 근거는 반드시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 사물의 세계로부터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에 대해 의식이 자립성을 가진다면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는 의식 의존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의식이 그리고 의식의 자립적인 활동이 세계를 설명하는 근본적인 설명력을 담지하는 최종 항이 될 것이다. 피히테는 관념론이란 다름 아닌 객관적 실재의 세계에 대한 의식의 절대적 자립성을 주장하는 이론틀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피히테는 칸트의 선험적ㆍ형식적 관념론을 온전한 의미의 관념론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물론 칸트는 의식 혹은 자아의 선천적인(a priori) 활동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경험 대상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념론자이지만, 이와 대등하게 혹은 그 배면에서 물 자체(즉 사물)의 자립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관념론의 원칙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칸트는 사물의 자립성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세계 해명의 근거 혹은 경험 및 경험 대상(자연 세계)의 가능성의 근거를 궁극적으로는 의식과 물 자체 양측에 놓을 수밖에 없는 반쪽의 관념론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는 하나의 궁극 원리로서 의식을 설정하는 온전한 의미의 관념론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독일 관념론자들은 칸트의 이러한 불철저성을 깨닫고 이를 밀고 나가 관념론적 사유 체계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 역시 관념론자로서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요청한 철학자다. 사물의 자립성 대 의식의 자립성이 문제시될 때 칸트는 주저 없이 사물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주장한다. 세계를 해명하는 근본 원리는 다름 아닌 의식과 의식의 선천적인 ― 대상으로부터 독립한, 의식의 자기 근원적인 ― 자립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자연 세계의 근거에 대한 물음을 경험과 경험 대상의 가능성을 근거 짓는 작업을 통해 해명하고자 하였다. {순수이성비판}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 상황은 의식 대 사물의 대립 관계에서 의식의 ― 사물로부터 독립적인 ― 자기 근원적인 자립적 원리와 활동 방식들이 어떻게 객관적인 실재를 구성하는 원리들로서 타당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의식의 자립성이 사물에 대해 가지는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의식의 선천적인 원리들을 뽑아내고 그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의식의 선천적 원리들은 사물에 대한 의식의 자립성을, 이 원리들의 객관적 타당성은 실재하는 자연 세계의 근본적인 구성 원리가 바로 이 자립적 의식임을 확증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선천적인 원리들이 자연적 세계에 대한 경험과 자연적 세계 안의 대상들의 가능성의 근본 원리로서 작동하는 한에서 세계 해명의 최종적 근거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선험적 의식 혹은 선험적 자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칸트의 철학이 세계 해명의 중심에 선험적 자아를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칸트는 관념론자와 동일한 사유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피히테 등의 독일 관념론자들의 비판처럼 칸트의 관념론은 형식적 관념론이며 따라서 사물에 대한 의식의 자립성은 형식적인 측면에 제한되어 있다. 질료적 근원은 언제나 사물의 편에 혹은 (대상 의존적인) 지각의 편에 놓여 있다. 그런 한에서 칸트의 철학 체계는 선천적인(의식 자립적인) 요소와 후험적인(사물 의존적인) 요소의 두 극점을 통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칸트는 이원론자며 칸트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에서 선험적 자아에 대치하는 물 자체의 실재성과 자립성을 인정한다. 물 자체는 사물 의존적인, 후험적인 요소의 근원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한 칸트 해석이다. 물론 칸트는 자신의 선험적(형식적) 관념론의 체계에서 물 자체를 인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에 의존적이 아닌, 의식에 대해 자립적인 사물의 세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식에 대해 자립적인 사물인 물 자체가 자연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근거 짓는 적극적인 원리로서 설정된 것은 아니다. 물 자체는 자연적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원리도 아니며, 세계 해명을 위한 근본 원리인 의식에 대립하는 또 다른 원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판}에서 칸트가 물 자체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은 언제나 부정적이다. 칸트는 물 자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마치 하나의 세계 원리인 것처럼) 언명하지 않는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적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사물들이란 의식에 의존적인 것,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 세계 안에서 의식에 대해 절대 독립적인 물 자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체계 내적 모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 자체는 단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야기될 수 있다. 물 자체는 의식 의존적인 사물의 세계(현상의 세계)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물 자체는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 아닌 것", 현상이 아닌 것으로 설정된다. 현상이란 우리에 대하여 있는 것(etwas f r uns)이다. 즉, 자연적 세계란 현상하는 것이며 현상이란 대타적인 것이다. 현상이 이처럼 대타적인 것(자기와 구분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 이면에 바로 타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것(즉, 현상이 아닌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현상하는 무엇이 없으면서 현상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현상과 물 자체는 현상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하다. 이처럼 {비판}에서의 물 자체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 자체는 의식에 대해 자립적인 것이지만 이처럼 의식에 대해 자립적인 것은 의식에 의존적인 자연적인 세계의 그림자며 배면일 뿐이다.

 

물 자체란 그 자체로는 결코 규정될 수 없는 것,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도대체 그런 점에서 우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물 자체란 단지 의식의 자발적인 객관 세계의 구성 활동을 부정함으로써 도달한 개념으로서 의식의 규정성과 활동성의 부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현상 개념의 부정을 통해 생각된 추상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칸트는 물 자체를 단순한 사유물(ens rationis)이라고 이야기한다. 물 자체는 현상 개념의 부정태로서 현상으로부터 추출된 것이므로 현상의 존립을 위한 근거로서 현상에 앞서서 현상에 선행하는 ― 적극적인 의미에서 ― (의식의 선천적인 원리들과 마찬가지의) 현상 세계의 설명 근거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비판적 체계 안에서 의식 의존적인 현상적 세계의 부정태인, 의식에 대해 자립적인 물 자체는 단지 사유물로서 가정될 뿐 아니라 그 실재성이 의심될 수 없는 것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물 자체의 실재성이 이야기될 때도 물 자체의 존립은 언제나 현상의 존립에 의거해서만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즉, 물 자체의 실재성 역시 자연적인 현상 세계의 실재성의 이면에 불과할 뿐이며, 물 자체가 현상에 앞선, 현상의 실재성의 도출 근거로서 정립되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우리가 자연적 세계를 현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곧 물 자체의 현존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세계는 오성에 의해 구성된, 오성이 정립한 세계다. 그러나 오성에 의해 정립된 세계는 현상적인 세계, 즉 대타적인 세계, 제약되고 한계를 가진 세계에 불과하다. 이처럼 오성에 의거한 세계가 제약된 세계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제약된 세계가 아닌 무제약적인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오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제약된 세계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성에 의거한 자연적 세계가 현상적 세계라는 것은 그 세계가 제약된 세계, 의식에 대한 세계며, 이러한 세계 이해는 바로 그 이면의 제약되지 않은, 오성에 의존적이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세계의 현존을 본래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에서 의식에 자립적인 물 자체의 존립은 의식 의존적인 자연적 세계의 존재론적 위치(자연적 세계의 제약성과 한계)를 확인하는 도구며 그런 한에서 한계 개념(Grenzbegriff)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자연적 세계와 이 세계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원리일 수 없다. 자연적 세계의 존립과 경험 가능성은 오직 의식의 선천적인 원리들에 대한 연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는 경험과 경험 대상의 가능성을 의식과 의식의 자립적인 활동(Apriorit t)을 통해 설명하는 관념론의 체계며 물 자체란 이러한 의식의 자립적인 활동이 가지는 제약과 한계를 표현하는 한계 개념이다. 그런 한에서 물 자체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안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물 자체란 자연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에 대한 경험의 한계를 지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이러한 세계와 세계 경험을 지정하는 근본 원리인 자아 혹은 의식이 가지는 한계와 제약을 표시해주는 자리에 불과하다. 칸트는 경험 및 경험 대상의 궁극적인 근거를 바로 의식과 의식 활동에 두었다. 의식의 원리로부터 경험과 경험 대상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는 한 그는 관념론자다. 칸트가 자신의 관념론의 체계 안에서 물 자체를 인정하고 물 자체에 자리를 내주었던 것은 그가 관념론의 공식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칸트가 자신의 관념론적 체계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던 근거의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칸트가 자신의 체계를 출발시키면서 궁극적으로 대답하고자 했던 것은 칸트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성의 능력과 무능력"에 대한 검사다. 칸트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대상의 세계를 해명하고자 하였지만, 칸트가 세계 해명의 시원적 원리로 삼은 의식은 절대 의식이 아니라 능력과 함께 무능력을 지닌 의식이다. 즉, 그것은 제한된, 유한한 의식이다. 칸트는 이처럼 제한된 의식의 활동을 통해 자연적 세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제한된, 유한한 의식이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근본 원리일 수 없는 것이다. 세계가 그곳으로부터 기원하는 근본 원리란 세계를 온전한 의미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세계 안의 사물들처럼 제약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세계의 근본 원리는 또 다른 설명 항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충족적인 근원으로서 근본 원리란 무제약적인 원리, 절대적인 원리여야 한다. 이때에만 이 세계와 이 세계 안의 사물들은 그 원리로부터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세계의 근원을 제약된 의식, 유한 의식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유한 의식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는 본래적인 세계, 그 자체의 사물이 아니라 의식에 대한 세계, 대타적인 세계며 따라서 제약된 유한한 세계다. 칸트는 유한 의식에 자연적 세계의 가능성을 정초함으로써 의식의 한계와 자연적 세계 안의 사물의 한계를 함께 해명해낸다. 칸트가 해명하고자 했던 의식과 의식에 의해 정초된 세계는 바로 이처럼 유한한 의식과 유한한 의식에 의거한 세계의 유한성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근본 과제인 이성의 능력과 무능력에 대한 검사는 바로 유한 의식으로부터의 세계 해명이며, 유한 의식의 자기 해명의 체계가 바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다. 이에 반해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는 칸트의 그것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의 칸트 비판을 공유하면서 피히테의 관념론적 체계마저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피히테는 칸트의 관념론이 자아에 대립하는 사물의 자립성을 인정한 철학 체계라고 비판하면서, 의식에 자립적인 대상적 계기(물 자체)를 의식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제 대상과 의식의 대립은 의식 내재적인 대립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피히테는 이러한 의식 내재적인 대립의 근저에, 이러한 대립의 통일체인 절대 자아를 설정한다. 피히테의 절대 자아는 자아 대 비아, 의식 대 대상의 분열과 대립의 통일적 근거가 되는 자아다. 의식 내재적인 의식 대 사물의 대립은 의식에 의해 다시 통일되고 매개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이를 통해 피히테는 칸트에 의해 노출된 의식과 사물의 대립상을 극복한 관념론적 체계를 정립한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피히테의 관념론 체계마저 불충분한 것으로 비판한다. 비판의 핵심은 피히테의 절대 자아란 여전히 의식 대 사물의 대립 구도를 근본적으로 지양하지 못한 채, 비록 의식 안에서이지만 대립과 분열에 노출되어 있는 자아라는 점에 놓여 있다. 왜냐 하면 피히테의 절대 자아란 그것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의식과 사물의 대립이 해소되고 지양되는 본래적 근거가 아니라 언제나 자아 대 비아의 대립과 갈등을 자체 안에 포함한 자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 자아는 그 자체로 객관의 세계, 사물의 세계의 절대적 근원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이 절대 자아와 구분되는 물 자체로부터의 충격을 기다리는 자아라고 비판한다.

 

피히테의 이론은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칸트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헤겔의 절대 관념론 체계는 의식에 자립적인 사물 자체를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들여 의식 내재적인 대립으로 해명한 피히테의 체계를 넘어서서, 의식 안의 대상적 계기마저 제거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의식 대 사물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관념론적 체계다. 헤겔은 모든 종류의 (의식 밖의 자립적 실재든 의식 안의 절대 자아로 해소되지 않는 대상적 계기든) 물 자체를 제거한다. 헤겔은 객관적인 사물의 세계, 대상의 세계와 정신 및 정신의 내용을 구별하지 않는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의 내용이 곧 사물의 내용이며 정신과 사물은 일치한다. 정신에 외재적인 혹은 정신에 대립하는 사물의 세계, 실재의 세계는 허구며 모든 종류의 실재성은 정신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대상과 정신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사라진다. 왜냐 하면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며 실재성 자체란 곧 정신적인 것, 정신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겔의 관념론의 체계는 정신의 내용이 곧 대상 세계이기 때문에,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이 곧 대상 세계의 해명으로 등장하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이다. 헤겔의 이러한 관념론 체계는 바로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의 체계다. 칸트의 보편적인 자아(인간적 자아, 유한한 자아)는 피히테에 의해 절대적 자아로 고양되며 헤겔에 이르러 절대 정신으로 확장된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모든 종류의 실재성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 모든 종류의 사물적인(대상적) 실재와 의식적인 실재의 세계를 자신으로부터 건설하는 신적인 정신이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의 활동이 곧 이 세계 안의 유한한 대상들과 유한한 의식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근원적인 원리다.

 

물론 헤겔의 절대 정신의 체계도 의식의 도정, 개념의 운동 과정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는 체계라는 점에서는 칸트의 체계와 근본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철학을 유한성을 벗어나지 못한 철학, 그런 한에서 대상성과 맞서 있는 단순한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의식의 철학이라고 비판한다. 헤겔에 의하면 유한성과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철학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적인 세계 해명을 수행할 수 없는 실패한 체계다. 유한한 인식 주관의 차원에서의 세계에 대한 해명이란 기껏해야 세계에 대한 일면적(주관적) 해명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유한한 의식의 눈에 비친 세계(오성적 차원의 세계)일 뿐, 세계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오성과 오성의 눈에 비친 세계는 모든 종류의 (의식과 사물, 주관과 객관, 선험적 의식(a priori)과 경험적 의식(a posteriori), 지각과 통각, 자유와 필연 등의) 대립과 갈등에 묶여 있는 세계며 이러한 대립이 절대화된 세계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대립의 이면에 이러한 대립지들의 통일적 원리가 있으며 이러한 통일적 원리를 통해서만 분열된 유한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 밝혀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지들을 매개하고 통일하는 원리를 제한되고 유한한 오성적 차원을 넘어선 절대 정신의 지평에서 찾았다. 이러한 절대성의 지평에서만이 대립지들의 절대적 통일을 설명할 수 있으며 이때만 참된 세계의 모습이 해명될 수 있다. 즉, "절대자만이 진리며 혹은 진리만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칸트의 유한 의식과 유한 의식의 제한을 모든 철폐한 절대 의식으로부터 자신의 체계를 출발시키며,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의 도정을 그려 보임으로써 세계의 모습을 해명한다. 모든 대립과 분열을 극복한 절대 정신의 체계, 이것이 헤겔 관념론의 모습이다.

 

이러한 헤겔의 관념론은 칸트가 세계에 대한 물음의 궁극적인 답으로 제시한 유한 의식과 유한 의식에 의해 정초된 유한한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이러한 칸트적 체계의 더 나아간 근거를 제시한 관념론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해 제시된 유한한 의식과 이에 근거한 유한한 방식의 세계 해명은 더 나아간, 더 근원적인 절대적 원천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절대적 근원을 통해서만 비로소 온전하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이 이러한 근원으로 설정한 모든 종류의 대립과 갈등을 지양한 절대 지평은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 밖의 것이다. 칸트는 절대 지평을 미처 구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칸트의 체계는 이러한 절대 지평의 불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 지평의 배제는 칸트철학의 한계가 아니라 칸트철학의 적극적인 전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칸트는 절대 지평을 부정적으로 설정함에 의해 유한 의식의 체계를 확립하였지만 헤겔은 유한 의식의 제한성과 한계성의 부정을 통해 절대 정신으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와 헤겔은 같은 관념론의 체계이지만 서로를 부정하고 서로를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관념론의 체계며, 이러한 대립은 유한 의식 대 절대 정신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대립은 다음과 같이 서로 맞서 있는 질문을 낳는다. 유한한 의식과 유한한 세계의 근거는 절대 정신이며 절대 정신을 통해서만 세계의 유한성이 올바른 방식으로 해명될 수 있는가? 아니면 유한한 세계는 오직 유한 의식을 통해서만 조명되고 밝혀질 수 있으며, 절대 지평이란 세계의 유한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확증해주는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한 것인가?

 

3. 의식에서 대상으로

 

의식의 자기부정성과   자기타자성 의식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려는 모든 종류의 관념론의 관건은 의식이 어떻게 이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지닌, 세계의 존립의 궁극적 근거일 수 있는지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관념론의 과제는 칸트에게는 {비판}을 관통하고 있는 근본 질문인 "어떻게 선천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 (Wie sind synthetische S tze a priori m glich?)"라는 질문으로 표현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칸트는 의식이 지닌 대상 세계에 대한 지배력의 범위와 한계를 확정한다. 선천적 종합 판단이란 유한한 의식의 자립적이고 자발적인 계기들이 의식에 대립하고 있는 세계를 건축하고 파악하는 틀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관념론의 체계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의 체계라 할 수 있다. 의식의 자립적인 계기들이 의식에 대립하여 있는, 의식과 구분되는 대상적인 세계의 구성 원리가 된다는 것은 의식의 자체적인 계기들이 곧 의식과 구분되는 것, 의식에 대립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의 원리인 선험적 의식의 활동이란 그 자체로 자립적인 의식이 자기 자신을 의식 아닌 것, 자신과 구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만드는 활동이다.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선험적 연역의 기본적인 문제 상황은 "어떻게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느냐"는 물음에 대한 해명이며 이 물음은 어떻게 의식의 자체적인 원리가 자신의 자체성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립하여 있는 대상적인 것의 근거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오성의 선천적 원리란 바로 의식의 자기 동일적 원리가 의식의 자기동일성에 머물지 않고 자체성을 넘어서서 자신과 구분되고 대립되는 것의 원리, 즉 타자적 원리(종합의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험적 의식의 종합적 활동이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자기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활동이다. 칸트의 선험적 의식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유한한 자연적 세계의 본래적 근거일 수 있다. 의식의 자기동일성이 자체성에 머물지 않고 타자적인 것이 되는 활동을 통해서만 이 세계의 근거일 수 있는 것은 선험적 의식의 본성에 기인한다.

 

선험적 의식은 유한한 의식이다. 유한한 의식은 마치 전통 형이상학자들이 주장해온 근본 원리처럼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자기 충족적인 근거일 수 없다. 전통 형이상학자들이 주장해온 근본 원리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무제약적인 근거들이다. 이러한 무제약적 근거는 자기 자체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제약된 세계와 존재자들의 근거일 수 있다.

플라톤의 자기 동일적, 불변적 이데아는 그것이 운동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자체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현상적 세계의 근거로서 정립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자신과 구분되는 것을 요구하지도 자신과 구분되고 대립되는 것(타자적인 것)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자기 충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제약된 현상의 무제약적 근거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자연적 세계의 근거가 되는 칸트의 선험적 의식은 자신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나아가고 스스로를 자신과 대립되는 것으로 만듦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 세계의 근원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선험적 의식은 무제약적 의식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타자적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기 폐쇄적인 의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적 의식은 한계와 제한을 가진 의식이다. 그것은 질료적 계기를 그 자체에 가지고 있지 못한 공허한 형식적 근거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한을 가지는 의식이 그 자체에 머물러 있을 경우 그것은 도무지 현상적 세계의 근거일 수 없다. 의식의 분석적 활동(혹은 선천적인 분석 판단)은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의식의 공허한 자기 울림에 불과하다. 칸트의 선험적 의식에는 근본적으로 자기 타자에 대한 요청이 놓여 있다. 의식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지배권은 의식이 스스로를 타자적인 것으로 전회시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의식의 (분석적이 아닌) 선천적 종합의 활동은 선험적 의식이 바로 자신을 타자적인 것으로 실현하는 활동이며, 선천적 종합 판단이란 그러한 활동의 결과다. 그러므로 선천적인 종합 판단이란 다름 아닌 의식의 자기타자태다.

 

만일 선험적 의식이 직접적으로 자신과 구분되는 것(즉, 절대적 타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전제하고 요청함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 세계의 근거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의식 그 자체적인 것(절대적 자기성)과 의식에 본래적으로 대립된 것(절대적 타자성)과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세계의 근거일 수 있다면, 세계 해명의 근본 원리는 의식과 의식과는 전적으로 구분된 것(즉, 의식에 대해 자립적인, 질료적 근원으로서의 물 자체)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될 것이며, 이들 상호간의 관계가 자연적 세계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세계 해명을 위해 물 자체를 적극적인 설명 항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칸트의 세계 해명은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수행되며, 이 물음은 의식의 자발적이며 자기 근원적인 계기들이 동시에 어떻게 자신과 구분되는 것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의식과 사물 자체의 매개가 아니라 의식의 자기 전개, 자기타자화의 결과다. 그러므로 칸트는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말해 세계의 근본 원리로서 의식이 가지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의식의 지평 밖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선험적 의식의 지평 안에서 이를 해명한다. 의식의 선천적 종합 활동의 과정은 의식 안에서 의식의 타자태를 근거 짓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의식적인 것(자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타자적인 것)의 구분과 매개는 결코 절대적 자기성과 절대적 타자성 사이의 매개가 아니라, 의식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체성과 타자성 사이의 매개며, 이러한 매개를 통해 실재하는 자연적 세계의 문제를 해명하는 관념론의 체계다.

 

그러나 칸트의 유한 의식과는 달리 헤겔의 절대 정신은 무제약적인 것, 무한한 것으로서 모든 종류와 제한과 한계가 철폐된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전통 형이상학의 전략에 따르면 자체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정신이다. 만일 절대 정신이 자신의 밖으로 나아가고 자신과 구분되는 것을 필요로 하거나 자신을 자기 아닌 것으로 만드는 활동이라면 그것은 무제약자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절대 정신은 부정성을 그 근본 원리로 가지는 활동이다. 즉,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자신 아닌 것으로 만드는 활동이 절대 정신의 본성이다. 그리고 절대 정신의 이러한 부정성은 바로 절대 정신이 가지는 무제약성을 단적으로 밝혀주는 것이라고 본다. 헤겔은 플라톤에 의해 정식화된 전통적 무한자의 개념인 자체 내에 머물러 있는 단순한 자기 동일적 무제약자는 단지 악무한(schlechte Unendlichkeit)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진무한(wahrhafte Unendlichkeit)인 자신의 절대 정신과 단적으로 구분하고, 이러한 악무한은 진정한 의미에서 유한적 세계의 근거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순전한 자기 동일적 무한자란 모든 타자적 계기를 자신으로부터 배제한 무한자며, 그런 한에서 자기타자태(유한자)를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지 못한 무한자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한자는 자신의 밖에 타자태(유한자)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외부에 있는 이러한 타자태에 의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무한자다. 그러나 이처럼 타자적인 것에 의해 한계지어진 무한자는 자신을 제한하고 한계 짓는 타자를 가지고 있는 것, 즉 다름 아닌 유한자일뿐이다. 이처럼 자기동일성과 자체성에 유폐된 무한자는 유한자의 근거이기 이전에 유한자에 의해 규정된, 유한자와의 대립과 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또 하나의 유한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헤겔의 절대 정신은 모든 타자적 계기(유한자)들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무한자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오직 절대 정신뿐이며, 절대 정신의 밖에, 절대 정신과 구분되는 타자란 더 이상 없다. 절대 정신의 부정태, 타자태인 유한자들은 절대 정신의 자기 내적 계기들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처럼 절대 정신이란 자신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는 정신이며 그런 한에서 어떠한 자기 제한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 정신은 모든 종류의 제한과 대립을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진정한 무한자다. 이 점에서 헤겔은 자신의 절대 정신은 순전한 자기동일성을 넘어선 차이와 동일을 자체 내에 포함한 동일성(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성)이며 그 자체로 즉자적인 것이면서 대자적인 것(즉자-대자태. An und f r sich)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체 내에 타자태를 자기 타자로서 포함하고 있는 절대 정신은 그 자체로는 불가해한 것이다. 자체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타자적인 것, 즉자적이면서도 동시에 대자적인 것이란 그 자체로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 문제를 절대 정신의 운동성, 절대 정신의 부정성을 통해 해결한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자기동일성에 머물러 있는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도 스스로를 자기 타자로 만드는 활동이다. 만일 자체성과 타자성을 함께 가지는 절대 정신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자신의 타자로 만드는 활동이라면, 그러한 절대 정신은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모순에 의해 활동하는 정신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절대 정신의 외견상 모순된 규정은 오히려 절대 정신이 운동하고 활동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하며, 절대 정신의 필연적인 자기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내적 동인이 되는 것이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모든 종류의 절대적인 의미의 대립과 모순을 지양한, 모든 제약을 벗어난 무제약적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다시 이러한 대립과 모순지들을 통해 자신을 전개한다. 절대 정신은 스스로를 자신의 타자로서 구성하며 이러한 자신의 외화된 자기 타자로부터 다시금 자신의 대립지를 지양하여 자신으로 복귀해가는 활동이며, 이러한 활동성을 통해서만 절대 정신은 비로소 절대 정신일 수 있다. 이러한 절대 정신의 활동은 자신의 자체성(자기동일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타자태를 자체에서 산출하고 다시 자신의 대립지인 타자태를 지양하여 자신의 자체성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그려보인다. 그렇다면 자체적, 자기 동일적 존재는 왜 자신의 타자태를 산출하기 위해 자신을 외화하고 부정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헤겔은 단순한 자기동일성은 실상은 자기동일성일 수 없음을 지적한다. 자기동일성이란 자기 타자로부터의 구별을 전제한다. 타자적 요소의 배제와 구별이 없다면 자기동일성은 자기동일성으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동일률은 모순율을 통해서 확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동일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타자와의 부정적인 관계가 요구되고 전제된다. 그러므로 절대 정신은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외화시키며, 이처럼 외화된 자기 타자를 부정함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정신이다. 절대 정신의 자기동일성은 이처럼 자기 동일과 비동일이라는 모순을 통해 성립하는 동일성이며, 이러한 자기 모순을 자체 내에 지닌 동일성은 그것이 하나의 활동, 하나의 운동 과정으로 파악될 때만 설명 가능한 동일성이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부정적 활동을 통해 자신을 타자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자체적인 것과 매개하여 자기동일성을 확보해가는 과정 자체며 이것이 곧 세계의 전개 과정이다. 그러므로 절대 정신이란 자신 안에 타자적인 것과 자체적인 것을 포함한 정신이며 자기동일자와 자기 타자를 대립시키고 이를 다시 매개하는 정신이다. 헤겔은 절대 정신이 혹은 절대 이념으로서 개념이 이처럼 자기를 전개시켜나가는 과정을 세계의 전개 과정으로 제시한다. 유한한 세계는 절대 정신의 자기 외화, 자기 전개의 계기들이며, 이러한 계기들이 유한한 것은 절대 정신이 자기를 전개하는 도상에서 스스로를 자신에 대해 타자적인 것으로, 그런 한에서 절대적인 것의 자기부정태(즉, 제약된 것)로 드러난 계기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겔의 절대 정신은 모든 유한자를 자신의 계기로서 포함하고 이를 전개시키는 활동이기 때문에 유한자의 존립의 근거가 되는 무제약자다. 그러므로 절대 정신의 자기 외화, 자기 전개 과정 자체가 곧 유한한 세계에 대한 설명이면서 또한 절대 정신의 무한성을 확보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4. 대상에서 다시 의식으로

 

의식의 논리적   동일성과 절대 동일성 우리는 앞서의 논의로부터 구체적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칸트와 헤겔철학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칸트의 유한 의식도 헤겔의 절대 정신도 그것이 유한한 세계의 근거인 한 부정성으로서의 활동성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유한 의식과 헤겔의 절대 정신 모두 자신을 자신의 타자태로 만드는 활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이러한 자기타자화의 활동을 통해서만 그것은 비로소 유한한 세계의 존립 근거가 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자기타자화의 활동은 완전히 동일한 활동인가? 그렇지 않다. 유한 의식과 무한 의식의 자기타자화의 활동은 근본적인 차이를 지닌 활동이다. 이러한 차이는 자기타자화의 활동, 자기부정성의 결과물의 상이성에 놓여 있다.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의식은 자기동일성에 머물러 있는 한 의식이 아니다. 즉, 그것은 세계의 근거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험적 의식은 자기타자화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활동 자체이기도 하다. 선험적 의식의 자기타자화의 활동은 바로 선천적인 종합적 통일(synthetische Einheit a priori)의 활동이다. 이러한 자기타자화의 활동은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선험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것은 칸트에게도 마찬가지다. 선험적 의식은 그 자체로는 자기동일성(분석적, 논리적 동일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적 논리적 동일성은 이러한 동일성을 넘어선 활동, 즉 종합적 활동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것,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자기 동일적인 의식은 자기타자화 활동을 필요로 하며 자기타자적 계기를 통한 매개를 전제한다. 선험적 의식은 그러므로 그 근원에서 자기타자화의 활동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칸트에게서 대타적 의식, 타자적인 것으로 나아간 의식은 다시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지만, 이러한 대타적 계기들을 다시 자신 안으로 복귀시키지는 못한다.

 

선천적인 종합적 통일이라는 자기타자화의 논리적 선행지인 선험적 의식의 분석적 통일(자기동일성)은 자체 내에 타자적 계기들을 가지지 못한 논리적 동일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기타자화의 활동을 수행하는 선험적 의식은 그 자체로는 종합적 계기(타자적 계기)를 자신 안에 담고 있지 못한 한갓 분석적, 논리적 통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헤겔의 자기타자화의 과정을 통해 자신으로 복귀하고 귀환한 절대 정신은 이러한 자기타자태의 계기를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즉,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성)이며, 즉자적이면서 동시에 대타적인 것(즉자대자태. An und f r sich)이다. 헤겔의 그것은 추상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무한자, 즉 구체적 보편자다. 그리고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구체적 보편성을 획득한 절대 정신이 모든 종류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한 유한한 세계의 무제약적 근거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은 칸트의 근원적 자기동일성의 의식은 대타적 의식(대상 의식)과 대립되고 분리되어 있는 추상적 동일성에 머물러 있는 의식이며 그런 한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기동일성 밖에 자신의 타자(대타성)를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이러한 칸트의 선험적 의식은 궁극적으로는 타자를 자신의 외부에 가지고 있는 유한 의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신을 타자로 만들어도 결코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없으며 무한히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타자화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기의 동일성으로 다시 복귀하지 못하는 유한한 의식은 영원히 대립과 갈등에 고착된 의식이며 대립과 분열에 고착된 의식은 모든 종류의 현실적 대립과 분열의 가능 근거일 수 없다고 헤겔은 비판한다.

 

이처럼 헤겔의 절대 정신이 대립과 분열을 그 자체에 포섭하고 이를 다시 지양하는 의식이라면 칸트의 그것은 대립과 분열에 노출된 의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대립과 분열을 지양한, 자신의 타자적 계기들을 통해 자신을 회복한 헤겔의 절대 정신은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 t)이라 할 수 있다. 대립과 분열을 자신 안에 지양한 절대자란 근본적으로 양자의 절대적 동일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대립과 분열에 앞서는 양자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칸트의 타자적 의식과의 끝없는 대립과 분열 속에 노출된 선험적 의식의 동일성은 대립과 분열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대립과 분열의 그림자로서의 동일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칸트의 선험적 자기 의식(분석적 의식)은 대상의 세계, 존재의 세계를 자신 안에 포섭하지 못한 의식이기 때문에 언제나 타자(대상의 세계, 존재의 세계)로 나아간 대타적(종합적) 의식과의 분리에 고착된 의식이며 그런 한에서 결국은 의식과 대상, 존재와 사유의 대립에 노출된 의식에 불과하다는 헤겔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세계의 근원인 선험적 의식이 유한하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존재와 대상의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유한한 선험적 의식은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타자로 나아가고 자신을 타자적인 것에 동화시키려 하지만, 이러한 타자적인 것을 통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즉, 타자적인 것과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자적인 것과의 다름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즉, 종합적 통일과 분석적 통일 사이의 분열) 의식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헤겔의 절대 정신은 칸트의 선험적 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을 형성(Bildung)하기 위해 자신을 타자적인 것으로 만드는 정신이다. 그러나 절대 정신은 자신이 자신의 타자가 됨에 의해 자신을 확인하는 정신이다. 절대 정신은 자신이 아닌 것이 됨으로써, 이러한 자신의 타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확인해가는 정신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는 정신이다.

 

즉, 절대 정신의 타자는 결국 절대 정신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절대 정신에게는 진정한 타자가 없으며 실제로는 어떠한 대립과 분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절대 정신은 대립과 분열 이전에 대립지의 통일체며 양자의 절대동일성이기 때문이다. 절대 정신이 자신을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는 과정의 근저에 절대적인 통일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분열과 대립의 과정(계기)들이 매개되고 극복될 수 없다. 이러한 절대 동일은 그것은 정신의 자기 전개의 근거가 되는 시원적 절대자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전개 과정으로부터 복귀한, 대립지를 자신 안에 매개하고 통일시킨 절대 정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절대 정신의 자기 활동의 시원과 이 시원으로 다시 복귀한 정신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것, 절대동일성이다. 이러한 절대 동일로서의 절대 정신은 전통 형이상학자들이 가정한 절대적 자기동일자인 무제약자와 동일한 것이다. 물론 헤겔은 전통 형이상학적 무제약자에 운동과 활동의 계기를 부여하며 이를 통해 무제약자로부터 제약자에게로 나아가는, 근거에서 근거지어진 것으로의 유출의 과정과 다시 이로부터 근거로 되돌아가는 상승의 과정을 무제약자의 자기 전개의 활동을 통해 설명해내지만, 이러한 모든 설명의 근저에는 언제나 무제약적 동일성으로서의 절대동일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절대 정신에 내재한 대립과 분열의 장치, 자기 타자란 절대 정신이 가지는 절대동일성을 설명하는 보조 장치다. 즉, 이것은 유한한 세계에 대한 절대 정신의 완전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절대 정신의 내적 장치에 불과하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유한한 세계, 존재와 대상의 세계의 근원일 뿐 아니라 그 각각의 계기에 내재된 지배 원리며 각각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지도하는 원리다.

 

즉, 그것은 유한한 세계를 관리하는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이다. 종합적 통일의 의식인 대타적 의식과 구분되고 분리되는 칸트의 분석적 통일의 의식(자기성과 타자성 사이의 대립적 관계)와 대타적 계기를 자신 안에 포섭하는 헤겔의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의 의식이 칸트와 헤겔에 의해 설정된 세계 설명의 근본 원리다. 그러므로 이처럼 상이한 근본 원리에 의해 그려진 세계의 모습 역시 상이하다. 칸트의 유한 의식에 의해 그려진 세계의 모습은 유한한 세계의 모습 자체다. 세계의 유한성은 우리의 의식의 유한성이다. 유한 의식은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을 확보하기 위해 타자로 나아간다. 그러나 유한한 의식은 절대적인 타자 자체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유한한 의식은 자신의 타자태를 통해 타자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타자태는 자신은 아니다. 이를 통해 유한 의식은 자신을 확인한다. 즉, 자신의 타자(대타성)가 자기(자체성)는 아니라는 부정적 방식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한다. 이처럼 칸트에게서 물 자체든 의식 자체든 모든 절대적이고 자체적인 세계는 사라진다. 물 자체도 그것이 의식에 대한 세계(대타적인 것)가 아니라는 부정적 방식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한 무제약적 세계며, 의식 자체도 그것이 타자적인 것으로 나아간 의식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근거다.

 

칸트의 체계는 이 세계와 의식의 필연적인 제약의 과정을 통해 무제약적인 것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설정하는 체계며 이 체계 속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대립과 분열을 통해 드러난 제약된 것들이며 무제약적인 것은 제약된 것의 여변이며 제약된 것의 부정적 그림자일 뿐이다. 이러한 체계는 결국 존재와 사유, 의식과 대상이라는 대립적인 것들의 상호 제약된 관계가 이 세계의 모습임을 확인하는 의식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체계다. 물론 이에 반해 헤겔이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을 통해 그려보인 세계의 모습 역시 유한하다. 왜냐 하면 절대 정신이 자신을 전개시켜나가는 각각의 과정은 아직 절대 정신이 자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단계들이며 그런 한에서 타자적인 것이 아직 자기로 복귀하지 않은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각의 계기, 각각의 단계들이 유한한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 동일성의 부정태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무제약자의 제약된 계기들이기 때문에 유한하다. 그러므로 헤겔의 체계에서 전면에 나서는 것은 무제약자며 절대 지평이다. 절대 지평은, 무제약자는 유한한 세계의 적극적인 근거며, 유한한 세계는 그것의 과정이며 계기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세계는 무한한 것, 절대적인 것, 무제약적인 것에 의해서 자신의 본래적 위치와 의미를 확인한다. 혹은 유한한 단계와 계기들은 무제약자의 무제약성을 확인하기 위한 ― 비록 필연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 도구들이다. 이처럼 헤겔이 절대 정신이라는 세계의 근본 원리에 의해 그려낸 세계는 무한성을 축으로 하여 움직이는 세계며, 무제약적인 것이 자기를 비쳐보는 거울의 세계다. 이처럼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근본에서는 유사한 물음과 유사한 답변 방식의 테두리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고 목표로 하는 세계상은 상이하다. 칸트의 유한 의식과 유한성의 철학은 헤겔의 절대 정신과 무한성의 철학과는 그 반성의 방향에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의 그것이 헤겔의 체계를 근본에서 부정하듯이, 헤겔의 체계 역시 그러하다. '칸트냐 헤겔이냐'의 대립은 세계상의 대립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의 대립 관계다. 이러한 대립지는 우리에게 우리가 묻고 대답하려는 세계의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결정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칸트냐 헤겔이냐'의 대립은 이미 낡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태도의 결정을 강요하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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