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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칸트 윤리학의 정언명법론
 주제어  [칸트] [윤리학]
 자료출처  문성학(경북대)  성경본문  
 내용

<한글요약>

 

사람들은 흔히 칸트가 정언명법론에서 말하는 보편화 가능성을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가 정언명법론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어떤 행위 규칙이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면, 그 규칙은 도덕법칙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규칙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은 도덕법칙의 필요충분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통속적인 이해에 근거해서 혹자는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한 것들 중에서 도저히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례들을 찾아낸 뒤에, 칸트의 정언명법론에 대해 비판하였다. 다시 말해서 칸트가 도덕법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간주했던 보편화 가능성은 도덕법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비판을 해 왔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왼손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라'는 것과 같은 규칙은 얼마든지 보편화 가능하지만, 따라서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이 규칙은 도덕법칙으로 채택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듯이. 이런 규칙은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비판자들에 의하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 도덕법칙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비판자들이 칸트에 대해 가하고 있는 비판의 내용 바로 그것을 칸트가 주장하고 있다. 비판자는 칸트의 정언명법론을 오해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왼손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라'는 것과 같은 규칙은 원래부터 도덕과 무관한 영역의 규칙이다. 칸트 자신도 규칙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을 어떤 준칙이 도덕법칙이 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필요조건으로만 간주했다. 칸트에 의하면 준칙이 도덕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도덕법칙은 첫째로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해야 하고, 둘째로 자의적이어서는 안 되고,

셋째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넷째로 행위자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규칙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실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주제분야 : 윤리학 주제어 : 정언명법, 형식주의, 실질

 


I. 서 론

 

사람들은 '칸트 윤리학'을 여러 가지로 특징지운다. '형식주의 윤리학', '의무론적 윤리학', '법칙주의 윤리학', '엄숙주의 윤리학', '동기주의 윤리학' 등등의 용어들이 칸트 윤리학을 특징지우기 위해 동원되곤 한다. 칸트 윤리학에 대한 이런 규정의 한 복판에 '정언명법'의 개념이 있다. 칸트 윤리학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정언명법의 윤리'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쉽사리 칸트의 정언명법을 무조건적 명령, 도덕적 의무를 위해 의무를 행하기를 명하는 명령, 혹은 보편화 가능한 명령 등의 방식으로 설명하고서는 마치 칸트의 정언명법론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명료하게 이해된 듯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언명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물어들어 가기 시작하면 정언명법과 관련된 칸트의 논의는 어느 것 하나 애매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칸트 윤리학은 그 핵심에서부터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러한 애매성으로 인하여 칸트의 정언명법론은 부분적으로 오해되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본고에서 첫째로 칸트의 정언명법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제거하면서, 둘째로 칸트의 정언명법론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칸트 윤리학에는 의무론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목적론적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 정언명법론의 몇 가지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법칙과 준칙

 

칸트는 윤리학을 개연성이 높은 처세훈의 집적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철두철미 법칙들의 체계로 간주하였다. 마치 자연법칙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필연의 법칙이듯이, 윤리적 명령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무차별적으로 명령되어야 하는 당위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윤리학을 엄밀한 학으로 간주했고, 엄밀한 학으로서의 윤리학을 건설하려 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칸트 이후의 인물인 벤담은 윤리학을 단지 일종의 기술(art) 정도로 이해했다. 윤리학이란 대체로 말해서 가능한 최대의 행복의 양을 산출하기 위해 이해가 걸려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지도하는 기술이다. 윤리학을 엄밀한 학으로 간주했던 칸트의 의도에서 볼 때, 칸트는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인 자연법칙과는 다른,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도덕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칸트의 임무가 된다. 이런 이유에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제1편 [순수한 실천이성의 분석론]

 

첫머리에서 정당하게도 준칙과 법칙을 구분한다. 실천원칙(praktische Grundsaetze)들은 자기 아래에 많은 실천 규칙(praktische Regeln)들을 갖고 있는, 의지의 보편적 규정을 포함하는 명제들이다. 실천원칙들은, 주관이 제약을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주관적이다. 즉 준칙(Maximen)들이다. 그러나 주관이 제약을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다시 말하면 모든 이성 존재자의 의지에 대해서 타당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실천원칙들은 객관적이다. 즉 실천법칙(praktische Gesetze)들이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는 준칙과 법칙을 다음처럼 구분하여 설명한다. 준칙은 행위의 주관적인 원리이며, 따라서 객관적인 원리 즉 실천법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준칙은, 이성이 주관적 제약에 응해서(종종 주관의 무지와 경향성에도 응해서) 규정하는 실천규칙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주관이 행위 할 때 의거하는 원칙이다. 그러나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타당한, 객관적 원리요,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원칙, 즉 명법이다. 칸트는 위의 구절들에서 준칙과 법칙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데, 준칙은 개인적 차원에서 채택된 행위 규칙이라면,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행위 규칙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 '나는 매일 아침에 30분씩 조깅을 하겠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 이 규칙에 따라 조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칙을 모든 인간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리의 골절상을 입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누군가가 '나는 이제부터 담배를 사서 피우는 대신에 항상 얻어 피우겠다'는 규칙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규칙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담배를 얻어 피우기 위해서는 담배를 주는 사람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는 데, 모든 사람들이 담배를 얻어 피우려고만 한다면 담배를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한 개인 차원에서 혹은 한 민족이나 국가 차원에서는 채택될 수 있으나, 전체 인류 차원에서는 채택될 수 없는 행위 규칙은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체 인류 차원에서 채택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지구상에 살아 있는 60억 인구가 채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인간이 채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체 인류 차원에서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의 이성(실천이성)의 관점에서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III. 정언명법의 종류

 

앞에서 밝혔듯이 칸트는 법칙과 준칙을 구분한다. 준칙은 개인적 차원에서 채택된 행위규칙이요 법칙은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채택할 수 있는 행위원칙이다. 그런데 모든 행위 원칙은 그것이 준칙이건 법칙이건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개인이 채택하는 것이다. 가령 3+4=7이라는 수학적 판단은 보편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받지만, 그렇게 판단하는 주체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개인인 '나'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규칙을 채택했다고 하자. '내'가 채택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준칙이다. 그러나 실천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이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동시에 법칙이기도 하다. 칸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언명법을 표현하고 있다.

 

첫째로, '보편적 법칙의 법식'(Formula of Universal Law) :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그대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로 표현된다.

둘째로, '자연법칙의 법식'(Formula of the Law of Nature) : "그대 행위의 준칙이 그대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듯이 행위하라"로 표현된다.

셋째로, '목적 자체의 법식'(Formular of the End in Itself) :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로 표현된다.

넷째로, '자율의 법식'(Formula of Autonomy) : "보편적 법칙 수립적 의지로서의 모든 이성적 존재로서의 의지라는 이념"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가 보편적 법칙을 자율적으로 수립하는 의지인 듯이 행위 하라'는 것이 될 것이다.

다섯째로, '목적의 왕국의 법식'(Formula of the Kingdom of Ends) : "의지가 자신의 준칙을 통해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을 수립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로 표현된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이렇게 정언명법의 다섯 가지 법식들을 소개해 놓고는, 마치 자신이 세 개의 정언명법에 대해서만 언급한 듯이 말하고 있다.

 

롤린(Rollin)은 하나의 정언명법만이, 케어드(Caird)와 브로드(Broad)는 세 개의 정언명법이(비록 그들 사이에 세 번째 정언명법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지만), 던칸(Duncan)은 네 개의 정언명법이, 그리고 로쓰(Ross), 페이톤(Paton) 그리고 윌리암스(Williams)는 다섯 개의 정언명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너(H. Saner)는 칸트가 정언명법을 10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법이 세 가지이든 다섯 가지이든, 이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정언명법을 복수의 형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칸트는 실천이성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세 가지 혹은 다섯 가지의 상이한 정언명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도덕성의 원리를 제시하는,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단지 동일한 법칙의 다양한 법식들일 뿐이며, 그들 각각의 법식은 나머지 다른 두 법식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 칸트의 이 말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칸트는 '보편적 법칙의 법식'을 '의지 형식의 단일성'의 범주와 연결시키고, '목적 자체의 법식'은 '의지 목적(실질)의 수다성의 범주'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두 법식이 관계하는 범주가 다르다는 말인데, 어떻게 해서 두 법식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법식인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다. 그러면 세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정언명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근본적인가? 통상 사람들은 '보편적 법칙의 법식'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정언명법들은 이에서 도출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 역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정언명법은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동시에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분명히 '보편적 법칙의 법식'이 나머지 모든 정언명법의 근본임을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이것을 정언명법의 첫 번째 법식과 동일시하며, 이 법식을 "순수한 실천이성의 근본 법칙"으로 부른다. 이 법칙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어떤 구체적 행위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단지 마치 기하학자가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을 발견해내듯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행위의 공식을 발견하려 했다. 칸트는 자신이 하는 작업이 수학자가 하는 작업과의 유사성을 다음처럼 말한다. {도덕형이상학정초}에 대해 뭔가를 비난하려던 어떤 비평가가 그 책에 대해 그 책에는 도덕성의 새 원리가 아니라 오직 새로운 공식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실제로 그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 … (중략) … 수학자들에게는 헷갈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공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의무에 대해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중요하지 않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칸트는 이 법칙에 대한 의식을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로 간주한다. 도덕적 명령은 그것의 내용이 어떤 것이건 그 형식은 [너는 마땅히 X 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 형식을 달리 풀어서 말하면,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것이요, 이는 곧 내가 하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기 위해서는, 동시에 그 행위를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행위의 보편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가 순수한 실천이성의 근본법칙 즉 근본형식에 대한 의식이 이성의 사실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이 사실은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을 때, 실천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은 자의적 기준을 갖고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시험장에서 나는 부정행위를 해도 되지만 너는 해서는 안 된다'고 혹은 '나는 거짓말을 해도 되지만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하에서 칸트의 정언명법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세 가지 의문점을 살펴볼 것이다. 첫 번째 의문은 칸트는 정언명령이 무조건적인 명령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조건적인 명령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정언명령은 너무나 형식적이어서 우리가 삶의 구체적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때 아무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의문은 정언명법이 도덕성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IV. 정언명법은 무조건적 명령이 아니라 조건적인 명령이다

 

모든 도덕적 규범은 우리에게 명령의 형식으로 부과된다. '너는 마땅히 공부해야만 한다',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등등 수많은 명령이 있다. 명령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명령은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 즉 '너는 마땅히 X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명령들을 세심히 살펴보면 명령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즉 '너는 마땅히 X 해야 한다'는 명령의 배후에 모종의 조건을 숨기고 있는 경우와 아무런 조건도 숨기지 않고 있는 경우이다. '너는 마땅히 공부해야 한다'는 명령의 경우, 우리가 공부 그 자체를 위해 공부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명령이 된다. 거짓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 그 자체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 말기를 명령한다면, 그 명령은 무조건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공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명령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신용을 얻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의도에서 명령된다면, 이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된다.

 

이처럼 명령되는 행위가 바로 그 행위 자체를 위해서 명령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명령되는 모든 명령은 조건적인 명령이다. 'A는 x를 행해야 한다'(A ought to do x) - 이런 형식의 문장을 칸트는 '명법'이라 부른다 - 는 정언명법이 될 수도 있고 가언명법이 될 수도 있다. 그 명법의 당위성이 A의 욕구나 어떤 목적(이 욕구나 목적이 명시적으로 표현되었건 표현되지 않았건 간에)이 기초해 있다면, 그것은 가언명법이다. 이 경우 'A는 x를 행해야 한다'는 말은 '만약 A가 y를 욕구한다면, 그는 x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 'A는 x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A가 갖고 있는 어떤 욕구나 목적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언명법이다. 그러므로 정언명법은 도덕상의 명법이라면, 가언명법은 '영리(怜悧)의 명법'(Imperative der Klugheit, Imperative of Prudence)이다. 칸트는 무조건적인 명령을 정언명법(kategorische Imperative)으로 부르고, 조건적인 명령을 가언명법(hypotetische Imperative)으로 부른다. 모든 명법들은 가언적으로 명령하거나 정언적으로 명령한다. 가언적 명법은 어떤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원하는(또는 원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둔다. 정언적 명법은 어떤 행위를 다른 어떤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행위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즉 객관적으로 필연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칸트는 가언명법은 도덕적 명령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언명법의 경우에 도덕은 항상 도덕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도덕은 도덕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런 한 정언명법만이 도덕적 명령이 될 수 있다. 칸트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목적론적 윤리설들은 이런 가언명법의 체계들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에 있어서 중용의 덕을 강조하지만, 중용의 덕은 그 자체로서 명령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eudaimonia)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명령된다. 벤담이나 밀의 공리주의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행복이, 공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최대다수의 최대쾌락이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며, 이것들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쾌락이라든지 행복은 너무나 경험적인 것들이어서, 사람에 따라 행복과 쾌락에 대한 기준이 상이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런 것들을 윤리적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은 뒤, 이 대상의 실현을 위해 존재 여러 규범들을 만들며, 이렇게 만들어진 규범들에다 체계를 주는 방식으로 건설된 윤리 체계는 엄밀한 학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이런 노선에서 칸트는 행복주의 윤리학을 다음처럼 비판한다. 비록 사람들이 보편적인 행복을 대상으로 삼을 때라도, 행복의 원리는 확실히 준칙들을 줄 수 있으나, 의지의 법칙들로서 쓰이는 준칙들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복에 관한 인식은 단순히 경험적인 소여에 의존하기에, 또 행복에 관한 모든 판단이 각인의 사견에 - 더군다나 이 사견은 한 개인에 있어서도 대단히 잘 변한다 - 의존하기에, 행복의 원리는 일반적인 규칙들을 줄 수는 있으되, 보편적인 규칙들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평균적으로 적합한 규칙들을 줄 수는 있으나, 항구적·필연적으로 타당한 규칙들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떠한 실천법칙들도 행복의 원리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칸트는 아무런 조건 없이 도덕적 명령에 따르기를 요구한다. 스피노자도 이와 유사하게 '유덕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말라. 유덕한 행위 그 자체가 그대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 '보답을 받기 위해 주인을 섬기듯이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보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주인을 섬기는 하인의 방식으로 신을 섬겨라'는 말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무조건적인 명령 혹은 정언명령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령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빈민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위도 사후의 천당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봉사의 삶을 산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죽어서 보상받는다는 생각도 없이 목숨을 걸고 정직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내세라는 것이 없고 우리들의 삶은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설령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규범 그 자체를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 - 이 사람은 천당이나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 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행위는 현명한 행위인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모든 도덕 규범은 조건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순교를 택한 역사상의 많은 종교적 순교자들도 정언명법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고 가언명법에 따라 행동한 것이 될 것이다. 만약 기독교 도덕에서 말하는 사랑과 희생을 실천한 삶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에 부합하는 삶이 아니라면, 모든 기독교 성인들은 도덕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게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세의 행복을 위한 조건적인 삶을 산 것이다. 과연 칸트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물론 칸트는 기독교 도덕이 타율의 도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선이고 그것에 거역하는 것은 악이라는 기독교적 신명령론(Divine Command Theory)은, 위력과 복수라는 무서운 관념과 결합한 명예이나 지배욕과 같은 성질들을 재료로 해서 도덕성과는 정반대의 도덕체계를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칸트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도덕성을 끄집어내는 대신에 오히려 완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으로부터 도덕성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런 작업을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이성에 의해 정화된 기독교 신앙, 칸트 자신의 표현으로는 도덕신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 역시 <실천이성의 변증론>에서 도덕과 행복의 일치를 위해, 다시 말해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불행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요청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되며,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는 도덕적인 삶도 조건적인 삶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해 칸트는 다음처럼 대답한다.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규범의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 실천이성의 임무다. 우리가 이처럼 도덕규범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천적으로 추적해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최고선의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이 때의 최고선은 행위 주체 외부에 있으면서 주체가 추구해야할 질료적인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과 같은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최고선은 실천이성의 내적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란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 인간은 최고선을 추구하고 또 실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가 있다는 것은 그 의무를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최고선이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금 실천이성의 내적 필연성 - 이 필연성은 실천적 필연성이다 - 에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가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실천이성에서 유래한 도덕법칙에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행위 한다는 것은, 그 도덕법칙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내세를 염두에 두고 신을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법에 대한 존경에서 행동하고, 도덕법을 위해 도덕법에 따른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죽어서 천당(도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내세)가기 위해 도덕법을 따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식의 답변에 대해 사람들은 또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도덕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행위라면 정말로 조건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실천이성의 내적 필연성에서 도출된 목표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 모든 것은 조건적이라고. 예컨대 어떤 사람 정직하게 행동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에게 왜 정직하게 행동했느냐고 물어 볼 수 있다. 이에 그는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로 정직하게 행동한 이유는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함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 경우 그는 실천이성의 내적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을 목표로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무조건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행동함으로써 신용을 얻고, 신용을 얻어 장사함으로써 돈을 많이 벌려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돈이 많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하자. 이 경우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실천이성의 내적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기에, 그는 조건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칸트에 있어서 모든 도덕적 명령들은 궁극적으로 최고선의 실현을 위한 것이므로, 정언명법의 한 사례로서의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법도 문법적으로는 얼마든지 조건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만약 실천이성의 내적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최고선을 실현하기를 원한다면,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조건적인 명령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최고선'이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것(문제약자)이기 때문이다.

 

 

V. 정언명법은 순전히 형식적이어서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제 우리는 정언명법을 공허하고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 살펴보자. '형식주의'라는 말은 애매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형식주의자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동기 혹은 내용보다는 포장, 틀, 절차, 혹은 껍데기를 더 중시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칸트는 이런 의미에서의 형식주의자는 아니다. 칸트는 도덕에 있어서 선천적인 것은 모두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막스 셀러(M. Scheler)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선천적 실질'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식주의자로 간주될 수가 있다. 그러나 칸트가 이런 의미에서 형식주의자라는 것이 앞서 말한 의미에서의 형식주의라는 말과 뒤 썩여 사용되거나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전자의 형식주의라는 말에는 비난조의 정의적 의미(emotive meaning)가 들어 있지만, 후자의 형식주의에는 그런 정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는 두 번째 의미에서는 자신이 형식주의자임을 앞서 살펴보았듯이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도덕법칙의 역할을 수학에 있어서의 공식의 역할에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칸트를 형식주의자라고 비난할 때, 사람들은 칸트를 '공허한 형식주의자'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제시한 도덕 법칙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인 행위규범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래시달은 정언명법이 아무런 경험의 도움도 없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 것은 칸트의 잘못임을 주장하고 있다. 로쓰 역시 칸트를 다음처럼 비판한다. 칸트의 보편성 테스트를 적용하는 확실한 방법은 오로지 행위를 그것이 지난 모든 구체적인 특수성과 관련시켜 상상하고 난 후, 다음으로 '엄밀하게 유사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하는 거짓말과 거의 똑 같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바랄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보편화 가능성은 무엇이 옳은가를 알기 위한 지름길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하려는 행위가 옳은가를 확인하는 일이 그렇듯이 어떤 사람에 의해 행해진 유사한 행위가 그것의 모든 구체적인 특수한 상황과 관련하여 옳은가를 확인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과 {도덕형이상학정초}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칸트가 후자의 의미에서의 형식주의자로 보일 수 있지만, '공허한 형식주의자'는 아니다. 칸트가 단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론철학의 영역이건 실천철학의 영역에서건 우리가 선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형식뿐이라는 것이지, 내용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대한 이런 식의 변호에 대해 물론 로쓰는 이렇게 응수할 가능성이 크다 칸트에 대한 내 비판의 요점은 칸트가 내용을 무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형식적 기준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칸트가 의도한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과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가려내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은 구체적인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라는 행위공식은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칸트의 입장에서는 다음처럼 대답할 수 있다. 내가 제시한 행위의 공식을 갖고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행위 지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히 내가 제시한 행위공식의 유용성이 증명된 것이 아닌가? 당신이 내가 제시한 행위공식이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경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당신은 예컨대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말한 행위공식으로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지를 가려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 내가 제시한 행위공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제시한 행위공식은 거짓말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칸트가 윤리적 형식주의자인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로 칸트가 정언명법의 첫 번째 형식에서 주어진 보편화 가능성의 개념이 도덕적 의무의 충분조건으로 간주했다는 점,

둘째로 칸트가 도덕법칙을 법칙이 갖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선천적 보편성과 필연성에 관한 고찰을 통해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

셋째로 칸트가 도덕을 근본적으로 실천이성을 가진 존재자들 사이에 성립하는 추상적인 관계로 보았다는 점에서 칸트가 윤리적 형식주의자라는 것이다.

 


VI. 정언명법은 도덕성의 필요충분한 기준이 될 수 없다.

 

보편화가능성만을 도덕성의 필요충분한 기준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비판에 대해 살펴보자.

김영철 교수는 다음처럼 비판한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행위 하는 상태를 가정해보았을 때, 그것이 모순 없이 성립될 수 있는 행위가 보편타당한 행위이며, 따라서 그것이 도덕법칙에 일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타당성은 도덕법칙의 필요조건인 동시에 충분조건인 것이다. … (중략) … 그러나 칸트의 주장처럼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은 모두 의무라고 할 수 있을까? '비가 올 때는 언제나 우산을 받치고 가라' 라는 명법은 보편적 법칙으로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이다. 그러나 이것을 도덕적 의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선 '비가 올 때는 언제나 우산을 받치고 가라' 라는 것이 보편적 법칙으로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인지가 의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부러 비를 맞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설령 그것이 보편적으로 의욕 할 수 있는 준칙이라 하더라도, 칸트 역시 그 준칙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비가 올 때 모든 사람이 우산을 받쳐드는 것은 '우산을 받쳐드는 것' 그 자체를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감기에 들지 않기 위해서거나 옷을 적시지 않기 위해서이다. 비가 올 때 모든 사람이 우산을 들거나, 추울 때 모든 사람이 두꺼운 옷을 입거나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도덕과 무관한 영역의 일이다. 그것은 칸트가 말하는 '숙달의 명법'에 속하는 것들이다. 칸트는 '숙달의 명법'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모든 학문은, 어떠한 목적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하는 과제와 어떻게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가 하는 명법으로 구성된 실천적 부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법을 숙달의 명법(Imperativ der Geschicklichkeit)으로 부를 수 있다. 숙달의 명법에서는 목적이 합리적이냐 그리고 선한 것이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비에 옷이 젖지 않는 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비가 올 때 예외 없이 우산을 써야 한다.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날씨가 추울 때, 예외 없이 옷을 두텁게 입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도덕의 문제에 속하는 것들이 아니다. 김영철 교수는 또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편화할 수 있지만 보편화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준칙이 있다. 내가 만일 타인이 곤궁할 때, 결코 돕지 않는 것을 결심하고, '타인이 나를 돌보지 않는다면 나도 타인을 돌보지 않는다'는 (준칙을 세운다면, 이) 준칙은 보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곤궁한 사람을 도와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역시 당신이 곤궁할 때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규칙도 역시 보편화 가능하다. 양자는 택일이 가능하다. 그런데 정언명법은 이들 두 가지 규칙 가운데서 어느 쪽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지시해주지 않는다. 어떤 규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바람직한 규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횡령죄의 처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면, 비록 그것의 적용범위가 보편적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히 좋은 규칙은 아니다. 인 인용문에서 우리는 우선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횡령죄의 처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규칙이 정언명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검토해보고자 한다. 왜 하필이면 김씨 성을 가진 사람만이 횡령죄의 처벌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앞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칸트가 순수한 실천이성의 근본법칙 즉 근본형식에 대한 의식이 이성의 사실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이 사실은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을 때, 실천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은 자의적 기준을 갖고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시험장에서 나는 부정행위를 해도 되지만 너는 해서는 안 된다'고 혹은 '나는 거짓말을 해도 되지만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횡령죄의 처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규칙이 정언명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칸트 윤리학의 근본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난 터무니없이 잘못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돕는 문제와 연관해서 만들어 질 수 있는, 보편화 가능한 두 가지 준칙은 어떤가? 김영철 교수에게서 볼 수 있듯이 종종 사람들은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의 제1법식을 규칙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을 강조한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이해하는 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 간에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을 준칙으로 택했을 경우, 그 준칙도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고, 그가 '서로 돕지 않고 각자는 각자의 소유에 의존해서만 살아가는 것'을 준칙으로 택했을 때, 그 준칙도 논리적으로는 보편화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그 두 가지 준칙은 보편화되었을 때, 아무런 논리적 자기모순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가 정언명법의 제1법식으로써 규칙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만을 주장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그가 '자율의 법식'과 '목적 자체의 법식' 그리고 '보편적 법칙의 법식'으로 불려지는 정언명법들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정언명법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보편법칙의 법식과 자율의 법식과 목적의 법식이 동일한 사상의 세 가지 다른 표현이라면, 어떤 행위규칙이 도덕법칙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규칙이 이 세 가지 법식의 테스트를 모두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돕지 않고 각자는 각자의 소유에 의존해서만 살아가는 것'은 보편화 시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준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준칙은 타인의 인격이나 생명을 수단시하는 것을 허용하는 준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단지 손만 내밀어 주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이웃이 바로 옆에서 구조를 요청할 때, 어떤 사람이 그 준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타인의 구조 요청에 무관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라 하겠다. 칸트 자신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만사가 잘 풀리는 어떤 사람이 커다란 곤경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인을 보면서,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각각의 사람은 하늘이 뜻하는 만큼 혹은 자력으로 노력하는 만큼 행복하도록 내버려두자. 나는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빼앗은 것이 없고 심지어 질투한 적도 없다. 오직 나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나 그들의 곤경에 처한 그를 돕기 위해서 기여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이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이라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종족이 존속할 수가 있음은 확실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의심할 바 없이 동정과 선의를 말하면서 종종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남을 속이고 배신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인권을 침해하는 것보다 한층 더 났다. 그렇지만 비록 이러한 준칙에 부합하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칙이 모든 곳에서 자연법칙으로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기를 의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결단하는 의지는 자기 모순을 범하기 때문이다. 왜 자기 모순을 범하게 되느냐 하면, 그가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동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그는 자신의 의지로부터 생겨 나온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의해,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희망을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승계호는 '남을 돕지도 말고, 나도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라'는 준칙과, '가능하다면 남을 돕고, 나도 곤경에 처했을 때 남의 도움을 받아라'는 두 가지 준칙 중에서, 후자의 준칙만이 보편화될 수 있다는 칸트의 이런 입장에 대해 다음처럼 비평한다. 요약하기가 곤란한 관계로 길지만 인용하겠다.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의 도덕성에 대해서 다음 두 준칙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준칙 7 : 비록 준칙 7이 보편적인 자연법으로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합리적인 존재는 준칙 7이 보편적인 법이 되기를 의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한 보편법은 합리적인 행위자들에게서 그들이 남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경우에, 타인들의 사랑과 동정을 빼앗아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칸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구에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할 경우가 있으므로, 우리는 준칙 7을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준칙 8을 선택하는 것은 그 준칙은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타인의 도움에 대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합리적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반면에 준칙 7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 준칙은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그와 같은 미래욕구를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결정적이지 못하다. 이 논증은 정반대로 전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준칙 8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준칙은 타인의 곤궁으로 말미암아 귀찮아지지 않으려는 나의 미래 욕구를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준칙 7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준칙은 그와 같은 나의 미래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상충하는 욕구에 대한 사안이다. 두 가지 준칙 가운데 어느 것도 두 가지 욕구 가운데 하나만 충족시키지만 다른 하나는 좌절시킨다. 칸트는 기껏해야,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욕구가 남의 괴로운 처지에 무관심하려는 욕구보다 더 낫기 때문에 준칙 7보다는 준칙 8이 더 낫다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준칙 8을 지지하는 이러한 논증은 욕구의 질이나 강도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형식적인 실천원리를 위배하는 것이다. 욕구의 가치와 강도는 선의 질료적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칸트는 다음처럼 응수할 수 있다. 당신은 내가 준칙 7을 버리고 준칙 8을 취하기 위해 욕구의 가치와 강도라는 질료 개념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순전히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서는 이 두 준칙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나는 두 준칙 중에 어느 준칙을 택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결코 욕구의 강도라는 실질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두 가지 준칙 가운데 어느 것도 두 가지 욕구 가운데 하나만 충족시키지만 다른 하나는 좌절시킨다"는 사실은 바로 내가 주장하는 것, 즉 어떤 준칙이 도덕규칙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인간성 실현과 무관하게 실질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내가 준칙 7을 버리고 준칙 8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을 때, 나는 '보편법칙의 법식'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이며, 보편법칙의 법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또 다른 법식인 '목적 자체의 법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인간성을 목적 자체로 대하라는 명령의 관점에서 보면,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이 받아들여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칸트는 우리가 앞서 따온 인용문에서 '나도 남을 돕지 않고 남도 나를 돕지 않는 것'이라는 준칙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지만, 그 준칙을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음을 말하고 있다. 보편화 가능성의 개념을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 규칙의 보편적 적용가능성, 마지막으로 규칙의 보편적 수용가능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폴 테일러는 "칸트의 윤리설에는 비록 그 의미들이 서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칸트에 있어서 준칙이 도덕법칙으로 승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준칙이 자율의 원칙(자유 실현의 원칙)과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원칙 둘 다에 그리고 동시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또한 규칙의 자의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기억해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칸트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정언명법들이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임을 주장한 이상, 참다운 도덕법칙은 자율의 원칙, 인간성 목적의 원칙, 자의성 배제의 원칙 그리고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고 추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칸트가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만을 도덕성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간주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칸트 윤리학은 형식주의 윤리학이라는 선입견을 갖고서 보편적 법칙의 법식을 이해하려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 법칙의 법식을 형식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그 법식은 도덕법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을 강조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칸트 윤리학이 비록 형식주의 윤리학이라 하더라도, 인간성을 목적 그 자체로 대접하기를 요구하는 형식주의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이 학자들에 의해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칸트는 "도덕성의 원리를 제시하는,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단지 동일한 법칙의 다양한 법식들일 뿐이며, 그들 각각의 법식은 나머지 다른 두 법식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 뒤, 다음처럼 말한다.


모든 준칙들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1) 형식 : 이 형식은 보편성 중에 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 명법의 법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준칙은 마치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타당해야 하는 듯이 선택되어야 한다.'

 

2)실질 : 즉 목적을 갖는다. 이 법식은 '이성적 존재자는 성질상 목적으로서, 그렇기에 목적 자체로서, 모든 준칙에 대해 일체의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되어야 한다'로 표현된다.

 

3) 다음의 법식에 의한 모든 준칙의 완전한 규정 : '모든 준칙은 자기 입법에 의해 자연의 왕국으로서의 가능적인 목적의 왕국과 조화하여야한다'는 법식이다. 이 경우의 진행은 의지 형식의 단일성(의지의 보편성)의 범주, 실질(의지의 대상 즉 의지의 목적)의 수다성의 범주, 그리고 이 양자의 종합인 전체성 즉 총체성의 범주라는 순서로 진행한다. 도덕적 평가에 있어서는 항상 엄격한 방법에 따르고, 또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는 정언명법의 보편적 법식을 근본에 두는 것이 좋다. 그러나 도덕법칙들을 널리 보급시키기를 원한다면, 동일한 행위를 상술한 세 가지 개념을 통과하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도덕법칙들을 가능한 한 직관에 근접시키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위 인용문에서의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 정언명법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즉 '형식'과 '실질'과 이 양자의 종합인 '완전한 규정'이 그것이다.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 정언명법이 어떻게 정식화되든 '보편적 법칙의 법식'은 그 명법을 형식적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며, '목적 자체의 법식'은 그 명법을 실질의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목적 왕국의 법식'은 그 명법을 완전하게 규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 정언명법이 어떻게 정식화되든, 그것은 실질의 요소를 갖고 있다. 물론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인 인간이다. 그리고 목적 그 자체인 인간은 일체의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왜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보편화 될 수 있는 수많은 행위규칙들이 도덕법칙이 될 수 없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의 준칙은 도덕법칙으로 인정될 수 없는가? 인종차별은 이성의 사실이 아닌 경험의 사실인 피부색에 기초하고 있기에, 그 준칙은 자의적이다. 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횡령죄의 처벌에서 면제되어야 한다'는 준칙은 도덕법칙이 될 수 없는가? 이 역시 준칙에 내포된 자의성 때문이다. 그리고 예컨대 '흑인은 영화 배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지만 자의적이기에 도덕법칙으로 채택될 수 없다.

 

그러면 '성적인 욕구가 발생할 때마다 그 욕구를 충족시켜라'는 명령은 어떤가? 이 명령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며 또한 자의적이지도 않지만, 그 명령은 행위자로 하여금 경향성의 유혹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기에, 행위자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된 상황일 경우, 제비뽑기를 해서 뽑힌 사람의 인육을 먹어서 인간 종족을 보존하라'는 명령은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 명령이기에 도덕법칙이 될 수가 없다. 폴 테일러는 다음처럼 말한다.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은 목적론적 윤리체계를 지지하지 않는 것 못지 않게 의무론적 윤리체계도 지지하지 않는다. "상황 S에서 사람들에게 최대의 쾌락을 가져다 줄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라는 판단은 "상황 S에서 비록 정직함이 부정직에 비해 다소 적은 쾌락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정직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다"라는 판단과 마찬가지로 보편화 가능하다.

 

그러면 왜 칸트는 쾌락주의적 준칙은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고 말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쾌락주의적 준칙은 설령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다 하더라도 실천이성의 본성에서 유래한 준칙이 아니어서 자율의 법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 준칙은 의무를 경향성에 대립시킨 뒤, 경향성에 따르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필연의 자연법칙에 종속시키는 것이 되고 의무에 따르는 것은 이성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칸트의 입장에서는 결코 도덕법칙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또한, 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겠다는 준칙이나,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준칙 둘 다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도덕법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후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후자의 준칙은 정언명법의 형식적 측면은 충족시키지만 실질적 측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승계호가 지적했듯이 전자의 준칙이나 후자의 준칙이나 어떤 욕구(행위의 목표 혹은 실질)는 충족시키지만 다른 욕구는 좌절시킨다. 그런 한에서 두 준칙은 등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자의 준칙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준칙에 대해 일체의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인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인간성의 실현에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승계호가 주장하듯이 칸트의 "형식적인 실천원리는 너무도 공허하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하여 형식적인 실천원리를 적용할 때에 칸트는 실질 내용을 비밀리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매우 공개적으로 정언명법의 실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가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그를 윤리학의 영역에서 순전히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형식주의자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해야 한다면,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인간성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른 모든 상대적인 목적(실질)들도 그 체계 내에서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칸트가 정언명법의

 

제1 법식으로써 규칙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 그 자체만으로서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말이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 그 자체만으로서는 의무론적 윤리체계에 있어서 모든 도덕적 의무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의무에 대한 필요조건으로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물론 칸트가 보편화 가능성을 도덕성의 필요충분 조건으로 제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프레드 펠드맨은 '보편적 법칙의 법식'을 (가) 어떤 행위는 그 격률이 보편화 가능할 때에만, 그리고 오로지 그 때에만 도덕적으로 옳다고 풀이하거나, (나) 어떤 행위는 그 준칙이 보편화 가능할 때에만 도덕적으로 옳다고 풀이할 수 있다고 말한 뒤, (가)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만약 (나)처럼 풀이한다면, 정언명법은 행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해주지만 다시 말해서 정언명법은 보편화 될 수 없는 격률에 의거한 행동을 피할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지만 우리가 행해야 할 행위들의 특징을 말해주지는 않게 되는 데, 이는 '보편적 법식의 법식'이 "도덕성의 최상 원칙"이라고 확언하고 있는 칸트의 말로 볼 때, 잘못이라는 것이 펠드맨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준칙의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은 그 준칙이 도덕법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될 수가 없다. 만약 칸트가 보편화 가능성을 도덕성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행위의 참된 기준이 될 법칙을 제시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을 도덕성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참다운 도덕법은 실천이성의 본성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런 한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에 잠재된 본성인 이성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인간을 목적으로 대접할 수 있고 또 자의적이지 않게 되며, 결국 보편적으로 즉 실천이성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준칙만이 법칙이 될 수 있음을 칸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VII. 결론 및 남는 문제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의 보편화 가능성이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만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면서도 도덕법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명령들을 만들 수 있기에, 보편화 가능성은 어떤 법칙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칸트는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한 모든 것은 도덕법칙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은 도덕법칙의 필요조건이다. 이 필요조건을 충족시킨 위에 도덕법칙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로, 도덕법칙은 자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도덕법칙은 행위자의 자율성(자유)을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도덕법칙은 인간성을 수단시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지금까지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의 보편화 가능성 개념을, 칸트의 의도에서 옹호하였다. 칸트는 '목적 자체의 법식'이나 '자율의 법식'은 '보편적 법칙의 법식'의 다른 표현이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을 펴는 칸트의 의도에서 볼 때, 도덕법칙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해야 하고, 자의적이어서는 안되고,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행위자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칸트의 정언명법론의 첫 번째 중요한 문제점은 만약 '보편적 법칙의 법식'이 '자율의 법식'이나 '목적 자체의 법식'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도덕성의 근본원칙을 세우려했던 칸트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성의 원리를 제시하는,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단지 동일한 법칙의 다양한 법식들일 뿐이며, 그들 각각의 법식은 나머지 다른 두 법식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들 각각의 법식은 나머지 다른 두 법식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말에서 생겨난다. 그 말에 의하면, '보편적 법칙의 법식' 안에는 '목적 자체의 법식'과 '목적 왕국의 법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하나인 정언명법을 그 형식의 측면에서 표현한 '보편적 법칙의 법식' 안에는 근본적으로 하나인 정언명법을 그 실질의 측면에서 표현한 '목적 자체의 법식'이 들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형식과 실질의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한,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말이다. 예컨대 브로드는 이 세 가지 법식이 논리적으로 동치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세 가지 법식의 근본에 놓여 있는 하나인 정언명법을 '행위의 준칙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해야 하고, 자의적이어서는 안되고,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행위자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언명법의 보편화 가능성을 순전히 형식적·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으로만 간주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들 - 보편화 가능성이 도덕법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문제점과 칸트가 도덕적 실질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제점-을 피해갈 수 있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세 가지 법식의 근본에 놓여 있는 하나인 정언명법에 부합하는 도덕법칙이다. 그러한 그 법칙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며, 또 그 법칙에 따르는 것은 자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의 인간성을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하는 것이며, 행위자의 자유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친구의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칸트 자신 [인간애를 핑계삼아 거짓말하는 권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이런 사례를 다루고 있다. 그 논문에서 칸트는 친구의 생명을 포기하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칸트 정언명법론의 세 번째 문제점은, 도덕적 명령 중에는 설령 상황에 관계 없이 무조건 타당한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만 타당한 도덕적 명령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생겨난다. 예컨대 결혼제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일부일처제를 택할 수도 있고,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택할 수도 있다. 혹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처럼 일부일처제를 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여러 유형의 결혼제도 중에 어느 것이 칸트가 말하는 하나인 정언명법에 부합하는 것인가?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남자들이 죽어버린 상황이라면 일부다처제가 합리적일 수도 있다.

 

혹은 상황에 따라서는 일처다부제가 옳을 수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일부다처제이든 아니면 일처다부제이든 이 두 가지 결혼제도는 공히, 자의적이지 않아야 하고 행위자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듯이 보인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1 : 3으로 크게 불균형을 보이는 지역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일부다처제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게 된다. 만약 이 경우 채택된 결혼제도는 그 지역 내에서만 보편화 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법론은 모든 도덕법칙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제한된 보편성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러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결함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Kantian Categorial Imperative Reconsidered Moon Sung-Hak (Kyungpook National Univ.) Kantian ethics is characterized in various ways. Formalism, deontological ethics, legalism, motivism and rigorism are mentioned to describe Kant's ethics. In the center of those determinations is the concept of 'categorical imperative'. In sum, it may be possible to call Kant's ethics as an 'ethics of categorical imperative.' If so, what is a categorical imperative? To this question an answer could be as follows: it is universalizable unconditioned imperative which asks man to perform his duty for duty's sake. As might be expected, does this answer fully explain categorical imperative? To our surprise, a full-fledged study will reveal that Kant's arguments with regard to the categorical imperative are very ambiguous. In other words, there is not a little confusion in the core part of Kantian ethics as an 'ethics of categorical imperative. Such a confusion makes Kantian ethics misleading to many people.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hree-fold. First, an attempt is made to remove some of general misunderstandings from Kantian categorical imperative for a better understanding of Kantian ethics. Second, some teleological (materialistic) aspects of Kantian ethics, which is generally thought of as a purely formal ethics, are revealed. Third, an investigation is made into several problems that are hidden in Kant's theory of categorial impe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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