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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7-16
 제목  콥틱교회(Coptic Church)
 주제어  콥틱어성경
 자료출처  구로교회  성경본문  
 내용

St. Anthony's monastery in Egypt maintains the 2000-year tradition of the Coptic Church.I.들어가는 말

이번 출애굽여정을 다녀오면서 콥틱 교회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아프리카 최초의 교회인 알렉산드리아의 성(聖) 마가교회를 방문하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그곳에서 마가교회의 안드류(Fr. Andrew) 주임 신부와 콥틱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이론가인 파로욱(Farouk)박사와의 교제는 매우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파로욱 박사로부터 콥틱교회에 관한 서적을 약 150여권을 선물로 받은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에 미력하나마 이집트의 콥틱교회에 대하여 몇 자 적어본다.

오늘날 우리가 이집트에 대해서 지극히 제한된 지식 이외에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대체로 우리가 종교와 관련하여 이집트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는 이슬람권의 나라이며, 나일강 문명의 발상지이고, 태양신을 최고의 신으로 하는 다신론자들이라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집트에는 일찍이 콥틱 교회라고 불리는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전체 인구의 약 10%나 되는 콥틱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교회사에 의하면, 비록 그들이 이단으로 정죄된 단성론(單性論子:예수님의 인성보다 신성을 존중한다)자들의 후예들이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집트의 콥틱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은 그들이 단성론자라는 이유 때문에 정통 기독교의 범주 내에서 축출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은 정통의 범주 내에 속하지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왔고, 또한 신앙의 유산도 남겼다. 실례로 필자가 오래 전부터 콥틱 교회에 관심을 두면서 그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을 단순히 정통 교회사에서 벗어나 ! 외인으로 취급하여 도외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함께 성서를 펼쳐놓고 서로의 주장과 이해를 비교하는 것이 학자로서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II.콥틱 교회의 역사

이집트에서의 교회의 기원은 1세기 바울과 함께 전도했던 마가가 이집트에 전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콥틱교회는 단성론으로 인해 동방교회와 분열되기 전까지는 클레멘트나 오리겐 등과 같은 유명한 교부들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를 배출한 출중한 교회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콥틱 교회는 칼케톤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디오스쿠르스(Dioscorus)가 정죄 당하고, 아울러 유배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서방지역이나 동방지역이나,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까지도 하나의 교회로 결합되어 있었다.

1. 로마 시대:박해기(60-313 A. D.)
4세기 경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 기록된 역사는 60년 경 마가가 이집트에 복음을 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마가가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 기독교가 존재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 신앙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2세기에 이집트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리 퍼져 살고 있었고, 알렉산드리아는 이들의 영적 중심지였다.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안디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대 기독교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에는 교리문답 학교가 있었는데, 이것은 판타이누스(Pantaenus)에 의해 설립된 공식적인 신학교육 기관이다. 세례의 예비 과정으로 기독교의 근본적인 내용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고도의 철학적, 신학적 가르침도 시행되었다. 이 학교는 판타이누스가 죽은 후 클레멘트가 계승하여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박해가 있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후에 오리겐은 새로운 교리문답학교를 설립하여 고도의 학문을 가르친 바 있었다. 판타이누스나 클레멘트, 오리겐 등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교부로,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자들이다.

콥틱 교회의 역사상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수도원 운동의 발흥과 빠른 성장에 있었다. 만일 교회가 수도원과 같은 영적 수도를 배제한 채, 국가의 승인에 의존하여 성장해 갔더라면 교회는 영적인 빈곤화를 초래했을 것이다. 초기 수도원 운동의 대표자로는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를 들 수 있다. 안토니우스는 최초의 수도자는 아니었을지라도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금욕과 은둔 생활을 하였다. 파코미우스는 공동 생활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을 실시했던 인물이었다. 파코미우스는 공동 규율을 제정하여 수도원 생활을 강화하였는데, 이같은 수도원 운동은 동방 지역으로 번져 나가고, 후에는 서방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집트에서의 교회의 조직은 2세기 후반 주교 데메트리우스(Demetrius)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는 3세기 초 셒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황제 때에 행정 구역 안에 처음으로 감독을 임명했다. 감독들의 권한을 통해 데메트리우스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 있는 분열 요소들과 맞서 점차적으로 통일된 교회를 옹호하며 그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데메트리우스의 후계자인 페테르(Peter) 시대(304년)는 콥틱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기였다. 박해는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에 의해 일어났으며, 특히 이집트에서 그 잔인성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는데, 후에 디오클레티안이 즉위한 해를 달력의 시발점으로 삼을 정도였다. 이런 연유는 콥틱 시대의 첫 해와 디오클레티안이 즉위한 해인 A. D. 284년이 일치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콥틱교도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박해를 받아 다수의 순교자가 나왔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한 284년을 콥틱 원년으로 하는 콥틱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태양력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순교력<殉敎曆>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2. 비잔틴 시대:협동기(313-451년)
교회에 대한 박해는 313년에 끝나고 밀라노 칙령으로 알려진 황제의 법령이 공식적으로 교회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로부터 교회와 국가는 연합하게 되었다. 5년 후에 교리 상의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사제인 아리우스는 공공연하게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그의 본성은 하나님과 유사하지만 같지는 않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교리는 교회의 많은 분파들에게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로마 제국 내에서의 불화를 피하기 위한 생각에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기독교 통일을 지지하는 회의를 처음으로 니케아에서 열었다.

아리우스의 가장 설득력있는 적수들 중의 하ご?아다나시우스라고 하는 젊은 신학자인데,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Alexander)의 보좌인이었다. 그 회의에서는 많은 논의 끝에 아리우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그 회의에서는 리비아에서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동쪽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대주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328년에 주교가 되었다. 물론 아리우스 파의 교리가 니케아의 결정으로 소멸된 것은 아니고 계속해서 번성했다. 특히 아리우스 파인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 고문으로 추대되면서 아다나시우스에 대한 공격이 가하여 지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그 후 계속해서 몇몇 제왕들이 자신의 정설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을 보자 열변을 토하며 삼위일체의 진실에 대해서 매우 명백한 사상들을 가지고 그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였다. 제왕들은 이것에 분개하여 그를 유배 보내곤 하였다. 그는 총 17년 동안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37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주교를 계속 맡고 있었다.

비록 기독교가 동부 지중해에서 빠르게 사회 구조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아 갔지만 우상숭배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나일 강변의 지역에는 고대 이집트의 신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종종 우상 숭배자들은 수도사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도들에게도 그들은 관대하지 않았다. 385년에 사원들을 폐쇄시키기 위해 특별한 입법 제정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로 전향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맞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주기적으로 자극시켰다. 391년에 주교 데오필루스(Theophilus)가 우상의 신전인 세라피움(Serapeum)을 파괴하도록 기독교 폭도들을 선동한 일이 일어났다. 실제로 신전의 파괴 뿐 아니라 4, 5세기에 걸쳐서 많은 이집트의 고대 신전이 수도원으로 개축되기도 했다. 테반 네크로폴리스(Theban necropolis)에 있는 Deir al Madina(마디나 수도원)과 Deir al Bahari(바하리 수도원)가 좋은 예이다.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의 적대 중 가장 부끄러웠던 것은 415년 대주교 시릴의 소망대로 행동하도록 사주를 받은 광신도들에 의해서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가 잔인하게 살해 된 일이라고 할 수 ! 있을 것이다.

3. 비잔틴 시대:분열기(451-641)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동정녀 마리와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공포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였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시릴은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의 신학을 비난했다. 시릴은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닌 한 본성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였다는 이론으로 연결되어 미묘한 신학적 고민을 갖게 하였다.

종교 회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20년 간격으로 소집되었다. 처음 회의는 에베소에서 열렸으며 시릴의 주장이 수용이 되었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는 유배되었으나 논쟁의 불씨는 계속 남아 있었다. 시릴의 후계자 디오스코루스는 황제의 재가 없이 2차 회의를 449년에 에베소에서 소집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회의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시릴처럼 능숙하지 못해 여러 주교들이 몸싸움을 겪는 혼란 가운데 끝났다. 디오스코루스는 시릴에 의해 공식화된 이집트 교회의 교리를 줄곧 강요했지만 그것은 황제가 3차 회의를 소집하지 않으면 안되는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451년 칼케톤에서 회의가 열렸다. 칼케톤의 종교 회의에서 시릴의 교회는 포괄적으로 거부되었다. 종교 회의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두 본성이 공존하는 것이지 서로 혼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했다.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은 이것이 예수를 사람으로 분리하고 그의 본질적인 연합을 파괴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논쟁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토론 중에 동반된 어휘-본성, 인격, 그리고 본체-들을 각기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은 동방 교회를 매우 명확하게 분파로 나뉘게 했다. 칼케톤 회의는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분열되었음을 드러냈다. 디오스코루스는 해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직책을 떠나지 않았고, 이 때 이집트의 지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제국의 황제는 멜키트(Melkite) 교도 중 한 사람을 대주교로 세워 알렉산드리아로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대주교를 따르고 있었다. 결국 이집트 안에는 제국에서 보낸 멜키트 교도와 알렉산드리아의 원 대주교였던 단성론자(Monophysite)가 함꼐 있게 되? 駭? 538년 上 이집트 출신인, 이전에는 단성론자 수도사였만庸??카톨릭적 신념을 가진 바울이 멜키트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 직위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외교적 기술이 부족했던 것 같다. 대화가 안될 때에는 그는 단성론 공동체 박해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집트의 세금이나, 곡식 중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제는 그를 급히 해직했다. 6세기 말쯤에 콘스탄티노플은 이집트에 대한 강제 정책을 그만 두기 시작했다. 단성론인 대주교 데오도시우스는 유배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의 부재 속에서 다양한 교리와 종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6세기말쯤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오는 회유적인 태도는 단성론 대주교 다미안(Damian)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체류하게 하였으며, 그 기간 동안 이집트 교회 내부의 분열 요소들을 조사했다.

7세기 초 멜키트의 대주교 요한은 구호금 분배로 명성을 얻고 성자로서 이집트인들을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다. 반면에 단성론 대주교들의 학식과 덕망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한편 페르시야의 이집트 점령은 이집트인들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었다. 최소한 600여개의 수도원 건물이 사산 왕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몇몇 주교들에게는 세속의 통치자인 비잔틴 세력을 버리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이 결과적으로 이집트를 다시 통치하게 되었을 때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에서 수용할 수 있는 교리를 공식화하고자 하였다.

4.이슬람 시대:고립기(641-1517년)
642년 이슬람의 침공은 수 십년 간 종교 분쟁으로 몹시 약화되었던 교회를 거의 파괴해 버렸다. 한 때 이슬람의 침공으로 이집트인들은 비잔틴의 압력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새로운 정복자 아므르 이반 알-아스(Amr Ibn Al-As)가 추방당했던 단성론 주교들을 일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오게 하였는데, 이것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콥틱의 교회가 어떠한 간섭없이 그들의 방식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반가운 징조였다. 그들은 다른 종교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종파 분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7세기 말까지는 이슬람과 콥틱 교회간의 긴장은 표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나쁜 결과를 가져 왔다. 외적으로는 정복자들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내적으로는 여러 위협들을 가하면서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려고 설득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이슬람 지도자는 주교들이 자기에게 충분한 경의를 표하지 않고 100,000디나르(dinars)를 벌금으로 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노했다. 결국 수도원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조치는 아랍의 국고 재정을 늘리려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깎아 내리려는 의도였다. 한편 7세기 초부터 행정상의 모든 공식 언어가 아랍어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정책에 공직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였다.

계속해서 자행되는 교회와 수도원의 파괴, 그리스도인의 학살은 십자군의 출정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11세기 중엽 패티미즈(Fatimids)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콥틱 교회의 주교를 이주시키기 위해 카이로(Cairo)라는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1100년경에 이르자 아랍인들은 콥틱어 대신 아랍어를 상용어로 바꾸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집트인들은 전통적인 교회법과 민간법에 따라 신실한 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321년 이집트 전역에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한 회교도들의 대집회가 있었으며, 이것은 기독교도들에게는 심리적 위축을 상당히 크게 했다. 1517년 투르크족의 지배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이로 인하여 1700년경에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되었다.

III.콥틱 교회의 유산

1. 콥틱어
콥틱어는 2세기 경부터 이집트에서 상용된 고대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언어이다. 초기의 이집트 문자는 상형문자나, 신판문자가 표기되었으나, 콥틱어는 민용문자(民用文字)에서 차용한 7개의 자모를 보충한 헬라문자로 표기 되었다. 콥틱어는 대개 여섯 개의 방언으로 나누는데, 上 이집트에서 네 개, 下 이집트에서 두 개가 사용되었다. 그 중에 '사히디 방언'(Sahidic)과 '보하이르 방언'(Bohairic)은 콥틱어의 대표적인 방언이다. 사히디 방언은 나일(Naile) 계곡의 일반적인 방언으로 많은 일반적인 문헌들이 이 방언으로 기록될 정도로 표준화된 방언이다. 70인 역을 비롯하여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문서의 대부분과 가장 원형적인 콥틱어 문학인 파코미우스(Pachomus), 쉐누테(Shenute) 등이 사히드 방언으로 기록되었다. 사히드 방언은 수도원과 비이원론적인 기독교의 주요하고, 공식적인 언어였다. 보하이르 방언은 11세기 경에 사히드 방언을 계승한 방언이다. 11세기 경에 콥틱어는 사어(死語)가 되어가고 있었다. 11세기 이전, 초기에는 서부 삼각주 지방과 니트리아의 사소한 방언이었다.

문헌상의 기록 수단으로 사용된 콥틱어는 14세기까지 전해졌으며, 이슬람의 침공 이후 소멸되었다. 콥틱어는 오늘날도 콥틱 교회에서 예배 의식문이나 찬송에서 사용하고 있다. 콥틱어가 체계화 된 것은 교회의 공이 컸다.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복잡하고 불완전한 이집트어 문자 대신에 단순한 알파벳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콥틱어 문헌은 성서인데, 정확한 기록 연대는 알 수 없다. 콥틱어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판독하는 수단으로, 특히 고대 문자의 발음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 콥틱 문헌
고대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인 콥틱어가 문자로 사용된 이래 2세기부터 7, 8세기 쇠퇴기까지 많은 기독교 유산들이 저술되었다. 대부분 종교적인 작품들로 헬라어를 번역한 저서를 비롯하여 교부 및 동방의 수도원 창시자들이 저술한 독창적인 작품들과 기독교의 초기 영지주의 문서들과 마니교에 관한 자료들까지도 저술되었다.

1) 콥틱어 성서 역본
콥틱문헌의 최초 형태는 성서의 번역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성 안토니우스(St. Anthonius)가 그의 마을 교회에서 마태복음이 낭독되는 것을 듣고 개종했다는 것으로 보아 A. D. 270년경이라 할 수 있으며, 같은 세기인 3세기 초(初)에 번역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헬라어를 알지 못했던 안토니우스는 콥틱어로 된 성경을 필요로 하였다. 파코미우스(Pachomius) 수도원에서는 성직 지망자들에게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능력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신약과 구약이 번역되었는데, 초기에는 사히디 방언으로 번역되었으며 후에 보하이르 방언과 중부 애굽의 아크밈 방언 등으로 재(再)번역되었다. 구약은 칠십인 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에 제 2 경전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현존하는 역본의 사본은 주로 보하이르 방언으로 된 것들이다. 콥틱어 역본은 연대 문제를 비롯하여 상호관계, 그리고 본문의 형태 등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많은 연구 과제를 남기고 있다.

2) 수도원 문서
콥틱어로 쓰여진 최초의 독창적인 문헌은 '사막 교부'로 알려진 성 안토니우스의 서신들이 있으며 3, 4세기 경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콥틱어로 글을 썼는데, 대표적인 것은 성 파코미우스(Pachomius)의 "규율서"(rule)를 들 수 있다.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원 '규율집'은 독자적인 수도 생활을 하다가 공동체를 이루게 된 수도사들을 위한 최초의 규칙서인데, 여기에는 특히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를 콥틱어로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3) 나그함마디 문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다른 문헌은 나그함마디 문서이다(나그함마디는 이집트의 상 이집트 지방, 나일강 서안에 있으며 룩소에서 64km 떨어진 키나주(州)의 도시로 나지함마디(Naj Hammadi)로도 불린다. 이 지역에서 1945년에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를 지명에 따라 나그함마디로 부른다). 이 문서는 4세기의 파코미우스 수도원 수도사들이 이 지역에서 카톨릭의 정통 신앙을 확립하고 있던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13편의 파피러스 사본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본들 가운데 10개는 콥틱어의 사히드 방언으로, 3개는 아크밈 방언과 인접 언어로 쓰여져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The Sophia of Jesus Christ)}, {섹스투스 금언집(The Sentences of Sextus)}, {요한 외경(The Apocryphon of John)} 등을 비롯한 나그함마디 문서의 대부분은 헬라어 원본을 번역한 것이다. 사본의 편집 방법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그함마디 코덱스 V의 네 개의 '묵시록'처럼 문학적 장르에 따라 편집하기도 하고, VI에 연속으로 실려 있는 세 개의 헤르메스 본문처럼 출처에 따라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 우 일반 원칙은 분명하게 밝혀 낼 수 없다.

콥틱어 애굽인 복음서는 나그함마디 코덱스 III과 IV에 걸쳐 두 사본에 포함되어 있는 영지주의 문서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셋"이 예수의 전형으로 간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셋"이 지고자(至高者) 아우토게네스의 뜻을 따라 다섯 개의 빛에서 구제자로서 이 세상에 보내져 세례를 행하여 그 기능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이 때 "셋"은 살아계신 예수를 옷 입고, 13의 에온 제력(諸力)이 예수를 못박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콥틱어 야고보 편지는 나그함마디 문서 코덱스 I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편지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550일째 승천을 앞두고서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전한 비교(秘敎)를 야고보가 한 성도에게 써 보냈다는 것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이 연구된 것은 [도마 복음서](The Gospel of Thomas)이다. 도마 복음서는 나그 함마디 코덱스 II에 포함되어 있으며, 공관복음와 평행하는 부분이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도마 복음서에는 설화나 이적 기사, 그리고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설명이 없고, 또한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이 복음서는 예수의 말씀들을 모아 놓은 어록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의 시릴은 일찍이 도마 복음서를 마니교의 문헌으로 일축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콥틱어 역본 도마 복음서가 완전히 발견되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근래의 학자들은 도마 복음서를 통해서 공관 복음서 이전의 초기의 복음 전승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밖에도 나그 함마디 문서에는 {복자 에우그노스의 편지}, {세계의 기원에 관하여}, {진리의 복음}, {운동가 도마서}, {아르콘의 본성}, {도마복음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나그함마디 사본은 카이로에 있는 콥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본 I의 일부가 쮜리히에 있는 {칼 융 연구소}(Carl Jung Institute)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부분은 '융 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나그 함마디 문서가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비기독교적 영지주의에서 기독교적 영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문헌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에는 기독교를 기원으로 하지 않거나, 적어도 외관상 기독교적 요소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몇 가지 기록이 실려 있다. [에우그노스토스의 편지](Eugnostos the Blessed)가 대표적인 예인데, 여기에는 명백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밖에도 [아담의 묵시록]이나 [셈의 석의], 그리고 [알로게네스](Allogenes) 등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나그 함마디 문서가 영지주의의 비기독교적 기원을 결정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4) 기타 문서
또한 신약성서에서 외경으로 분류된 [콥틱어 바울묵시록]이 있다. 콥틱어 바울묵시록은 카이로 코덱스 V에 속하는 콥틱어 영지주의 문서로, 어린이의 모습을 한 예수에 의해서 여리고에서 바울에게 준 묵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던 체험을 기록한 고린도후서 12장 2절을 부연한 것이다. 그 밖의 자료로는 사막 교부들의 서신과 금언집들이 있고, 초기 교회의 중요한 예배 자료인 전례 문헌 등과 설교, 논문, 교훈집 등이 있다.

5) 성탄절
콥틱 교회는 정교파와 신파로 나누어지는데, 정교파는 동방교회에 따라 신파는 서방교회에 따라 성탄절을 따로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 정교파의 성탄절을 1월 7일로, 신파는 12월25일로 간주하고 있다.

6) 부활절
콥틱교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부활절로서 40일 동안 단식을 한다. 이 때 그들은 고기와 달걀류는 먹지 않고 생선과 야채를 먹으며 식사는 평상시와 같이 한다. 부활절 직전의 일요일에는 어린이들이 야자 잎의 표피를 벗겨내어 그것으로 열심히 장신구를 짜서 완성된 십자가나 물고기, 집 모양의 세공품을 교회로 가져가서 서로를 위하여 축복을 한다. 이 장신구들은 이듬해 부활절까지 각 가정에 장식된다.

7) 장례식
장례식은 교회에서 거행되나 매장 절차 등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내려온 관습을 다르고 있다. 시신에 방부제를 주입시킨 뒤에 미이라처럼 백색붕대로 칭칭 감아서 관에 넣는다.

8) 종교의식
콥틱교도는 일생에 통과하여야 할 몇 가지 독특한 의식이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유아 세례를 주고 콥틱 계통의 이름을 지어준다(이집트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콥틱교도인지, 모슬렘인지를 알 수 있다). 다음에는 콥틱교도라는 증거로 한쪽 팔목 안쪽에 십자가 모양을 새겨 넣는다. 이것은 산양 젖에 담궈 놓았던 바늘로 피부에 십자가 모양을 문신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겪었던 고통을 직접 느끼면서 콥틱교도임을 더욱 자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2-3일이 지나면 십자가 모양을 문신한 부분은 양젖과 피의 혼합작용으로 검푸르게 되며 아픔도 멈춘다고 한다. 그밖에 위생상의 이유로 할례를 실시하고 있으나 현재 종교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

9) 교황선출
콥틱교의 교황선출은 최초에 모든 콥틱교도가 투표를 하여 교황 후보 10명을 정한다. 두 번째에는 5,000명의 콥틱교도가 투표에 참가하여 후보를 2명으로 좁힌다. 다음으로 최종 결정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린이에게 제비뽑기를 시켜서 결정한다.

IV.나가는 말
본 글은 콥틱 교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그 유산들을 단순한 이해하는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콥틱 교회는 정죄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서 고독하게 기독교 신앙을 고수해 왔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돌리지 않았던 많은 부분에서 독특한 유산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는 과제로 남긴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연구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890년 이후 동방교회가 콥틱교회와 많은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단성론 문제로 인하여 여전히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상호간의 여러 교리 문제에 대해서 합의를 이루기 시작하였으며, 콥틱교회가 1959년에는 WCC의 위원회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한국교회에서 콥틱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상호 교류와 이해에 대한 폭을 넓히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마친다.


主 참고 문헌
Cairo, the Coptic Museum Old Churches(Gawdat Gabra, Cairo:The Egyptian International Pub. Co., 1995). Coptic Egypt, (Jill Kamil, Cairo:The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1990).

 

>> 참고고리 : 콥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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