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목사이며 순교자인 배영석 목사는 1905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했다. 그가 출생했던 1905년은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나라의 숨통이 조여지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 상황속에서 그는 자연 소년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된 그는 청년이 되면서 더욱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 사람의 신앙의 형제요 동지인 김재옥과 김원섭을 만났다. 이들과 더불어 신학공부를 하면서 그는 막연히 꿈을 꾸었던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서로의 꿈을 실현하기로 하고 1932년 9월 27일 고향을 떠나 강진으로 이사했다. 강진에서 그들은 셋이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3.1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진, 시계, 양복점을 분담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장사는 거짓말처럼 잘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헛된 생각을 품지 않고 오직 그들의 공동목표를 위해 열심히 근검절약하여 저축하였다. 신학공부를 위한 장학금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들은 우선 수입이 모아지는 대로 한 사람씩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하고 뜻을 모았다. 이들의 계획은 뜻대로 순탄하게 잘 진행되어 배영석이 먼저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2. 혼신의 힘을 기울여 목회자 길을 가다.
그는 1942년 조선신학교(현한국신학대학)을 입학하여 목사의 꿈을 이루었다. 그를 뒤는 이어서 김재옥이 목사가 되엄아다.
배영석 목사의 처음 부임지는 강진군 향톤에 소재한 중앙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불타는 소명감으로 혼신의 노력과 정열을 바쳐 충성을 다하여 제단을 섬겼다. 그는 이후 만덕교회, 운동교회 학장 교회, 해남군의 미야교회를 거쳐 나주군에 있는 파남교회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해 그는 강짐읍교회로부터 간곡한 청빙을 받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목회에 헌신했다. 그 결과 교회는 날로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군민들의 요청에 의해 강진국민회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3. 한국전쟁과 순교
그러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동란을 맞이했다. 공산군이 차차 남으로 내려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배영석 목사는 주위 사람들의 피해야 한다고 강권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떠나기를 거절했다.
해남이 무너지고 강진읍이 무너지자 많은 우익인사들과 종교관계자들이 공산군에게 잡혀갔다.
배영석 목사도 이때 같이 체포되어 예수교 목사이고, 미국선교사와 같이 일한 미제국주의의 앞장이고 국민회 회장이라는 이유 등으로 반동분자로 몰려 강진읍 장터에서 총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공산군이 후퇴한 후 교회옆에 안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의 성역과 순교의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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