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1993-03-19
 제목  이유택(1905. 1. 9~1949.12.28)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장로교] [목사] [순교자]
 자료출처  이유택, 목양신문  성경본문  
 내용

1905년 1월 9일 경북 안동군에서 출생했으며, 숭실전문을 거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구금되기도 했으며, 해방 후 신현교회를 담임하고 신학교에 출강하면서 북한 5도 연합노회를 조직하여 1949년12월 28일 공산당에게 납치되었다.

 

예안보통학교 졸업. 숭실중학교 졸업. 전문학교 졸업.
신현교회 전도사 겸 비서.
1937. 평양신학교 졸업(32회)

신현교회 당회장 부임.
1941년 남신의주교회 부임

 


1. 성장배경


이유택 목사는 1905년 경북 안동군 예안에서 이무락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나이 14살 되던해에 3살 연상인 이중수양과 결혼했다.

1922년 그는 예안에서 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한편 그는 어린시절 고향 예안에서 서양선교사가 나누어준 쪽복으가지를 읽고 감화를 받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한 초석을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고향 예안에서 일어났던 3.16만세 사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총격에 피흘리면서 민족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그는 나라없는 설움과 고통을 절감하며 후일 조국광복운동에 적극 나설 것을 결심했다.

2. 숭실학교 시절


예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후인 1924년 그의 나이 20세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부인과 딸과 같이 살면서 당시 민족주의자인 조만식 선생 밑에서 학문과 길과 신앙의 길을 동시에 추구하며 또한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로서 성장해 갔다.

4년간의 중학과정을 마치고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숭실중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면서 사생들에게 봉사와 규칙준수를 엄하게 지도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매쿤 박사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1933년 그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미하려던 차에 당시 교단에 대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가 그의 생애의 마지막 개척교회인 신현교회를 창립하고 전도사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인서 장로의 천거로 이유택은 유학의 기회를 포기하고 신현교회의 전도자로서 목회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3. 목회자로서의 민족주의자로서 활동


이유택 전도사는 그해 4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졸업(제 32회) 하였다. 같은 해 목사안수를 받고 평양신현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시무하던 중 평양신학교 교수도 겸임하였다.

한편 그는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를 형님으로 모시고 둘이서 투기투합하여 일사각오의 순교정신을 다지면서 기독교계의 최고의 지성이자 한국의 스펄전에라는 김화식 목사와 함께 평양의 3거물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시국을 염려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또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에 끝내 굴복하는 일부의 목회자를 보면서 이런 현실을 통찬하며 순교의 정신을 더욱 다져나갔다.

그는 1938년 발생했던 의성 농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유재기 목사나 다른 농우회 회원들은 다 석방되었으나 이유택 목사는 그 이듬해에야 석방되었다. 수감중에 그는 일경 무수한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모든 그래서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4.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선두에 섬


1938년 봄 평북노회를 비롯한 전국 17개 노회가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또 그의 모교인 숭실전문학교가 자진폐교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주기철 목사, 김화식 목사등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대열의 선두에 섰다.

그는 소위 도마다 목사 공박 사건과 의성 농우회 사건 등에서 신앙의 투사로서 그의 소임을 다하였다. 1944년-1946년까지는 일제의 강제 교회폐합으로 남신주의교회로 옮겼다가 1947년 본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5. 공산치하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투쟁


주기철 목사 등이 옥중에서 투쟁하면서 순교하는 동안 이유택 목사는 일제의 교묘한 함정속에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 나라는 남북으로 나눠어지게 되었다. 유물론적 무신론자인 북한 공산당은 기독교를 일제보다 더 심하게 감시하고 핍박했다. 교회에 짙은 먹구름이 덮쳐왔다. 공산당은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기독교인들을 연행 구금협박등 온갖 시련을 겪게 했다.
그러던 중 공산당이 사주에 의해 가입하라는 강요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으나 그들의 회유의 협박으로 하나 둘 목사들이 이에 동조했다. 이는 교회의 희생을 막아보자는 좋은 생각에서 했으나 일부 뜻있는 목사들은 대경실책하여 이에 맞서 이북 5도 연합노회를 조직했다. 이연합노회에 이유택목사도 가담했다.

6. 월남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교회와 교인을 지키다 순교


이런 환경속에서 공산당의 감시는 날로 더해가고 살벌한 현실이 되어 갔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둘씩 월남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공산치하에서 이 목사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월남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이목사는 "나는 내가 맡은 500명 교인을 죽음의 장막속에 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갈 수 없소 "또 "목자가 양을 두고 어디를 가겠느냐"며 단호히 거절하며 교회를 지켰다.

1949년 12월 28일 교역자 검거령에 의해 삼일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오다가 공산당 내무서원들에게 체포되어 작별인사도 못하고 순교하였다. 그는 중학과 전문학교 시절에 이매 복음선교의 봉화를 들고 나섰으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으며 미취학 불우아동을 위해서는 '개척구락부'를 운영하기도 했고, 숭실전문학교 재학중에는 숭실중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신학교 재학중에는 기도단을 조직하고 매주 은밀한 장소에서 교회의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부인 이중수 권사와의 사이에서 8남매를 두었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대한민국 > 순교자

>> 연결고리 : 대한민국장로교, 목사, 순교자

 



   


A-Z




  인기검색어
kcm  353623
설교  177437
교회  129756
아시아  103247
선교  98372
세계  88602
예수  85310
선교회  75386
사랑  71161
바울  70572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