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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정용현(鄭龍鉉, 1902. 2. 7~1950.10. ?)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성결교]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공산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 투옥, 순교

1902년 2월 7일 황해도에서 출생하였으며, 중학교를 거쳐 1934년 성서학원을 졸업하였다.
1941년부터 신천 동산교회와 온천교회에서 목회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공산당의 박해로 1947년 7월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수감되어 1950년 10월 살해되었다.

 

서당에서 한문수학
소학교 졸업
신성중학교 졸업
연동소하교 교사
유동교회 초빙 사리원교회 부임 동산교회 부임
1936년 경성성경학교 졸업  

1. 교육자로 활동하다 목회자의 부름 받음

정용현 목사는 1903년 2월 7일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하여 일찌기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신성학교는 철저한 기독교 교육과 개화자강(開花自强) 즉 종전의 패쇄적이고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사람의 지헤를 열어주었다. 정용현은 이곳에서 모든 사상 풍속의 발달을 도모하여 민족자존의 강력한 인재양성을 학교의 이념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것이 정용현의 신앙생활에 크나큰 힘이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무살이 넘어서자 황해도 은율군 남부면에 소재한 연송학교의 교사가 되어 많은 어린 학동들의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었다. 정목사의 출신교인 신성학교의 교육이념이기도 하지만 교사로서의 교육철학도 그러하였고 또,당시의 뜻있는 기독신자로서 젊은이들의 이상이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는 어린 가슴에 신앙과 애국애족의 혼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이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천부의 사명이라고 믿고 이 기회를 백분발휘하며 보람으로 교육에 정열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목회에 뜻을 두고 1932년 갖 서른살 나이에 목회를 시작하여 처음에는 성결교단에서 전도사로서 봉직하였다. 정전도사는 평양으로 그 소망하던 길이 열려서 부르심을 받고 유동교회(후에 교구정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부임하던 바로 이듬해인 1933년 경성신학원을 지망하고 목사가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지금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이었다. 이 학교로 말하면 1907년에 일본 토오쿄오 성서학원을 졸업한 정빈,김상준이 귀국하여 서울 무교동에서 복음전도관을 개설하므로 한국 성결교회가 비롯됐다. 이때 한국인의 전도자 양성이 필요해짐에 따라 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성서학원이 설립되었다.

성서학원은 1911년 3월에 서울 무교동 전도관 안에 임시로 개설하여 개교 1년 동안에 10여명의 남녀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1912년 3월에 현재 서울 충정로 3가 35번지 일대에 새 교사를 짓고 학원을 이전하였다. 이 해에 제1회 졸업생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후 1940년 구제 전문학교령에 의거 4년제 경성신학교로 발전하기까지의 성결교단의 신학교요 교역자 양성시관인 경성성서학원이었다. 정목사는 여기 입학하여 열심히 신학수업을 마치고 1936년에 성결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2. 목회자로 활동

그리고 그 이듬해 1937년에 다시 고향 땅인 황해도로 돌아와서 사리원교회에 시무하였다. 황해도에서의 사리원교회는 성결교회로서는 역사적 사연이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1926년 9월 12일에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북리에 설립된 성결교회다. 이곳 황해도교회 개척을 계획하던 성결교회에서 1926년 6월 이준수와 변남성을 파송하여 전도함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들이 성결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사리원에 [하나님의 교회]를 개척 설립하게 되자 공석 중인 이 자리를 정 목사가 부임하게 되어 그 뒤를 이어 사리원교회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말기 성결교단 강제해산으로 교회는 폐쇄의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때의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앙인의 이질화 경향으로 기울이다가 마침내 조선기독교연합회로 전교단은 결국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하나로 통폐합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반년 후인 1938년 4월 25일,장로교 총회의 비극적 신사참배가 가결되기 5개월 앞서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유형기, 최석모, 김응조, 장정심,박연서, 김유순, 김종우 등 여러 교파 대표들이 신사참배는 물론 기타 총후부국 강조주간 행사에 참가할 것 등을 결의를 거쳐 선언문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2년 성결교회가 일제의 의해 강제 해산되자 황해도 신천읍 동산교회당에서 목회하였는데 폐합되기 전 조선 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 소속의 장로교회였다. 여기에서 이 동산 교회를 섬기던 중에 해방은 왔고 일제는 패망하였다.

3. 공산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 투옥, 순교

해방 후에도 계속 선천에 머물면서 동산교회에서 그대로 시무하게 된 것이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후 공산정권의 박해 속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기도로 현실을 이기면서 언제나 순교라는 것이 이미 각오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른바 1946년 11월 3일의 주일선교라든가, 공산당의 어용기관인 [조선기독교도연맹]또는 그 밖에도 신학교의 폐교 등등 헤아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니,1943년 일제하에서 교단이 해산되고 그때도 각 교회당이 가마니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모아 소각하기도 하였으며 이때에 성결교회에서는 박봉진 목사, 정태희 장로, 김지봉 집사 등 3명이 일제 고문에 의해 순교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공산치하에서의 신앙생활이란 그 몇 배나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를 못했다. 이런 공산치하에서 1947년 7월에 저희에게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한번도 출옥하지 못한 채 6.25가 발발되었고 기세승등하게 남진했다가 1950년 10월 평양을 비우고 패주하면서 공산군의 반화로 그 와중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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