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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김유순(金裕淳, 1882.12.17~1950. 8.23)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평양 남산현교회, 서울 만리현교회, 북아현교회를 시무하였고, 1948년 감리교 감독이 되어 교단을 위해 헌신하다가 1950년 8월 23일 공산당에게 연행, 납북되었다.

 

황해도 신천 출생

서당. 소학교 졸업.
1904. 숭실중학교 졸업
1912. 남가주 성경전문학교 졸업
1917. 마테솔 감리교신학교 졸업
1920. 애리논신학교 박사

감리교 목사, 평양 흥성,해주,서울 등지에서 목회
감리교 9대 감독역임.
6.25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납치 행방불명됨.

1. 순회부흥목사로 복음을 외침

김유순은 1882년 12월 17일에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였다. 일찌기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질에 글 공부하기를 좋아하며 한문을 수학하면서 성장해왔다. 더큰 뜻을 품고 평양으로 나가서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에 열을 쏟으면서 그의 스물 세살 되던 해인 1904년에 학교를 졸업하였다.미국으로 건너가서 1912년에 남가주 성경전문학교에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해9월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에는 역시 미국의 뉴지시마테솔감리교신학교를 마쳤으며, 1920년에는 미국애리는신학교를 졸업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체재하는 가운데 목회임지가 생겼고 또한 초빙하는 교회의 청원과 강한 권유를 뿌리치고 수난의 연속적 형극의 한국교회로 돌아왔다. 늘 외국에 유학하면서도 고난받는 민족교회를 잠시라도 잊지 못하였다.

1912년까지 전국을 상대로 방방곡곡 순회 부흥목사가 되어 복음을 외쳤다. 이와 같이 눈부신 활동을 하다가 1922년에 평양에 있는 남산현교회를 맡아서 1946년까지 무려 한 세대나 가까운 25년간의 목회를 하루같이 사랑받고 존경을 온 몸에 받으면서 목회에 대성한, 문자 그대로 선한 목사로서 거룩한 사역을 이룩해냈다. 그 후로도 충남의 흥성교회에 전임하여 교회를 섬기다가 고향인 황해도 해주교회를 거쳐 다시 충남 천안읍교회와 백천교회를 담임했고, 서울 만리현교회와 북아현교회도 시무하였다.

2. 해방과 교단의 분열

해방후인 1948년에는 감리교의 제9대 감독으로 피선이 되어 다시 말하겠지만 감리교의 분열의 격동기를 소위 재건파와 부흥파가 대립되어 각각 따로 길을 걷던 교단을 합동시키고 하나로 이끌어 나갔다. 감리교회 분파의 내막과 합동의 사연은 이렇다.

1945년 8월 한국교회는 민족과 함께 일제의제2차대전에서 패망으로 36년의 압제하에서 해방을 맞았다. 조국광복의 그 들뜬 기쁨도 잠시,비단 감리교 뿐만 아니라 모든 교단이 다 그러했지만 해방이 되자 그동안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저들의 사상에 협력 또는 동조하면서 오히려 괴롭혀 온 소위 부일협력자와 이에 적극 반대하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저들의 요구에 비협조적일 뿐만 아니라 거부하고 반대하던 이들과의 분열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내분은 혼란기에 있는 민족 구원은 커녕 일반사회 민족에게 외면당하고 조소거리가 되고 말았다.

감리교단에서의 재건파는 일제 탄압에 항거하다가 투옥되거나 기독교 일본화정책에서 밀려 나가나 아예 쫓겨나서 강단과 일제 기독교 단체에서 고 권이 박탈당했던 교역자들이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자 교회를다시 세워야 한다고 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한데서 비롯되었다. 또 부흥파는 일제 치하에서 어차피 그들의 강압적인 탄압에 의하여 연회를 해산하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함께 통회자복할 일이요, 조선감리회가 탄생(1930) 한 당시의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및 조선(한국)적 교회를 다시 일으켜 보자고 '부흥준비위원회'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3. 교단 통합에 크게 기여

부흥파 측에서 1946년 9월 특별총회를 열어 강태희 목사를 감독으로 재건파 측에서는 1948년 1월 장석영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여 두 분파로 대립되어 선출하여 두분파로 대립되어 교회도 두 갈래로 분립되었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감리교회의 이승만 장로가 대통령에 취임하여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자, 감리교회 안의 평신도가 중심이 되어 합동운동이 진행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자극을 받고 점차 합동운동이 무르익어 갈라졌던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이를위해 양파에게 다같이 호응을 받으면서 이 운동을 전개하는데 큰공을 세운 김목사가 있었다.

1949년 4월 26일에 서울 정동교회에서 통일전권위원장 전진규 목사의 사회로 오래간만에 합석한 연회를 개최하고 29일 총회에서 김유순 감독이 당선되었고 교단 명칭도 "기독교대한감리회"로 제정하여 통합된 감리교단을 이끌어나갔다.

4. 6.25와 순교

김목사가 감독으로 재임시인 1950년 6.25가 터졌다. 교인들의 간곡한 권유를 물리치고 "감독의 위치에 있는 자가 어찌 교회를 두고 나 하나 살자고 피난을 떠날 수 있겠느냐?"면서 남았다. 서울에 진입한 공산군들이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구내에 있는 총리원 본부를 점검하고 사용하였기 때문에 김감독은 교단을 지키고 교인들을 돌본다는 의지아래 총리원을 폐쇄치 않고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중앙교회를 빌어 임시본부로 사용하고 매일 같이 북아현동 자택에서 도보로 출퇴근하였다. 그러나 8월 23일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내린 교역자 납치 및 사살령에 의하여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까지 간 것을 아는 사람 외에는 70노인의 소식을 지금까지도 아는 이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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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고리 : 대한민국, 한국전쟁목사,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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