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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리처드(Richards, Williams J. 한국명 : 이도식)는 1878년 영국 런던에서 윌담스토우 출신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열두 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Catherine)의 묘 앞에서 헌신을 다짐했다.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7년간 선교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09년 2월 8일 메리 킬로(Richards, Mary K.) 부관과 결혼하였으며 만국 본영의 문학부에서 봉직했다. 1913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선교사관으로 파송되어 지방장관과 청년부 서기관으로 봉직하였다.
1918년 6월 2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명령을 받아 내한하였다. 이 무렵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한국의 첫 인상과 예배의 모습을 그의 딸은 <선교사관 자녀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버지(리처드),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은 1918년 6월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만 보다가 한국에서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
눈도 많이 와서 겨울에는 난로를 피웠다.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 보자기에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그리고 책보를 풀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낸 뒤에는 그 책보를 착착 개어서 앞에 놓았다가 다시 싸가지고 가곤했다. 마루 바닥에 앉아 “찬송합시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어떤 할머니는 남이 다 부른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길게 여음을 끄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에 부임한 리처드 서기장관은 구세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선교자금을 조달하고 한국 여성사관을 양성하였으며 고아원(육아원)을 개원하여 구제사업에도 공헌했다.
그는 브래지(George French, 한국명 : 夫來智) 사령관이 갑자기 전근되어 사령관 직무 대리를 수행하면서 1918년 한국 구세군 개전 10주년 대회 준비에 과로하며 힘썼다.
구세군 고아원 운영 과정에 대하여 그의 딸 기록에는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서울의 고아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관학교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놀랬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결국 고아원 운영과정에서 퍼진 천연두 때문에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이 사망하고 리처드 자신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 무렵 구세공보와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여러 명이 희생 되었다.
리처드가 서울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거리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이미 천연두에 감염된 아이를 고아원에 수용하므로 인하여 천연두가 확산된 것으로 해석된다.
실베스터(설 보덕) 정령 집에도 천연두가 전염 되어 실베스터 선교사 두 아들이 앓아눕게 되었다. 이때까지 리처드는 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아니하여 그?매일같이 실베스터 가족의 심방을 비롯하여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월 19일 실베스터의 셋째 아들 더글러스 실베스터가 두 살의 어린나이로 천연두에 의하여 사망하였다. 뒤이어 같은 해 1월 28일 실베스터의 큰 아들 고던 실베스터도 사망하였다.
이때 리처드는 두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 하였으며, 눈 위로 먼 길을 걸으며 평동에서 양화진까지 왕래하게 되었다. 결국 리처드도 이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병에 걸렸으며 얼마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도 천연두로 인하여 1920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실베스터 가족에 뒤이어 양화진 제2묘역(나-22)에 안장되었다.
구세공보에 보도된 ‘한국에서 순직한 선교사관 리처드 부령의 감화’라는 제목에서 뿌람월 푸드는 리처드의 죽음에 대하여 “리처드 부령은 강직하고 열렬한 구세군 주의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헌신하여 그의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디든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봉사 순종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라 했다.
리처드는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 후 그의 부인과 4자녀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캐나다 사령관)와 캐나다 구세군의 헌금으로 아영 영문에 1922년 12월 8일 ‘리처드기념관’ 이 건립되었다. 묘비에는 "Duty done Victory Won" 이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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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고리 : 내한 선교사, 양화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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