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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10-07-06
 제목  낮선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한국 기독교 초기 토착화 과정)
 주제어  [선교] [선교전략회의]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선교대회] [NCOWE V] [세계선교전략회의]
 자료출처  KWMA-이덕주(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  성경본문  
 내용

낮선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

-한국 기독교 초기 토착화 과정-

From the alien to the familiar: Process of Indigenization of Christianity in Korea

 

 

 

1. 머릿글

 

 1960년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토착화 신학은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적 있는 신학을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등에 의해 전개된 토착화 신학은 한국의 종교·문화 전통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한실존적고민과 관심을 담고 진행되어 왔다. 토착화 신학자들은 서구 기독교 신학적 개념과 관점에서 한국의 전통 종교 사상을 해석하여 그유사점차이점을 확인함으로 동·서양의 서로 다른 두 전통의 대화와 만남을 추구하였다. 토착화신학은 신학적 탐구의 대상과 내용을 한국 전통에서 찾음으로 종래 서구 신학의 모방과 답습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 신학 연구의 방향을우리 것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신학계의독립 선언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토착화신학을 이끈 학자들이 대부분 조직신학자와 종교철학자, 문화신학자였던 관계로 신학 방법론에 있어 서구 기독교 신학 사상과 한국(혹은 동양) 종교 사상을병렬적’(parallel)으로 비교·분석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토착화신학 연구는비교종교적’(comparative religious) 해석에 머물고 말았고 토착화 신학은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변적 학문으로 진행되어 신학이 위하여 봉사해야 할 교회의 현실적 상황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토착화신학은 개념과 방법론에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토착화신학은 형질과 성격이 다른 이질적인 두 개의 종교와 문화를 통합하려는 인위적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역사신학은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인위적 개념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미토착화된’(indigenized) 역사적, 종교적 상황에 주목한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만나 자연스런 과정으로 융합되어 형성된토착적(indigenous) 신앙양태를 분석함으로 한국이란 종교·문화 상황에서 형성된 한국 특유의토착교회신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았던 시대와 환경이 전혀 달랐던 동·서양의 사상가들이 단지 학자의 상상 세계 속에서 만나 서로 비교하여 추출되는 이론적 결과물이 아니라, 한국인의 구체적 삶과 종교 현장에서 기독교 복음 전통과 우리 문화 전통이 만나 갈등과 조화, 배척과 융합의 과정을 거쳐 역사적 산물로 생성된토착적종교 체험과 신앙고백을 분석함으로 한층 우리 삶과 관련된한국적신학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은 개화기(1880-1910) 한국 기독교(개신교)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토착화 시도와 그 결과로 나타난 토착적 종교(기독교) 문화의 구체적인 양태를 살펴볼 것이다. 신학적인 해석보다는 해석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복음 수용기 성경 번역과 토착적 신앙 표현

 

 천주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는 주체적 복음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형성으로 특징 질 수 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모험적구도자들이 만주나 일본에 나가 그곳에서 선교사를 접촉하여 복음을 수용한 후 세례를 받고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후 그것을 국내로 반입하여 전도한 결과, 의주와 장연, 서울 등지에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생성되었고, 개종을 결심한 상당수 세례 지원자들이 생긴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내한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적극적인 복음 수용 의지와 노력은 자연스럽게 복음의 토착화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성경의 번역과 반포 사업을 매개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초기 개종자들은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로 결심하였고, 성경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 강령을 찾아냈다. 예배나 설교 이전에 성경이 있었고 그만큼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은성경 중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경 번역과 실천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 여기서도토착화노력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2.1 성경 번역과말씀의 토착화·

 

 성경의 한글 번역은 만주에서 1876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cIntyre)와 의주 출신 이응찬 · 백홍준 · 김진기 · 이성하 · 최성균 · 서상륜 등이 의주 출신들이 참여하여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인쇄한 후 1887년 신약 전체가 인쇄되어 나왔다. 이렇게 해외에서 인쇄된 한글 성경은 은밀히 국내에 반입되어 읽혔다. [1]

 

 복음의 토착화는 이미 성경 번역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성경을 번역할 때 선교사들은 영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참조하였고 한국인들은 한문 성경을 참조하였는데 성경 번역 과정에서 기독교 고유의 신앙과 신학을 표현하는 새로운토박이언어들이 탄생했다. [2] 즉 한국어에는 없는 어휘들은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어휘를 만들어 냈는데무교절’(無酵節)누룩 금하는 절’, ‘유월절’(踰越節)넘넌 절이라 한 것이 그 예다.

 

마즘한번사밧일에예수 밀밧디내넌데자밀이삭을따손으로써비비여먹으니바리새인이닐너갈으되너의엇디사밧일에법안인일을하너냐예수 대답하여갈으되너의다빗과좃넌쟈배곱풀때여한배깨지오이디못하엿너냐하느님의 뎐에들어가딘셜한떡을취하여먹고또그좃넌쟈를주워시니다못제사외여는먹디못하넌법이라하고또갈으되인자도사밧일의쥬인이라 하더라”(누가 6:1-5)

 

 우리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는 선교사가 영어로 발음하는 것을 그대로 표기하여 사용하였는데 안식일(安息日, Sabbath)사밧일’, 세례(洗禮, Baptism)밥팀례’, 이스라엘(Israel)이살앨이라 한 것이 그 예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이 때 인쇄된 성경 본문은 현대식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유독예수’, ‘하느님같은 단어 다음에는 한 칸씩 띄어 인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인쇄문화에 나타나는 대두법(擡頭法)을 채용한 결과다. [3] 만주에서 성경을 번역하면서 바로 이 같은 예법을 살려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신적인 명사를 한 칸씩 띄어 인쇄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동양 예법은 선교사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번역 작업에 참가한 한국인 번역자들의 기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언어 문화권이 만났으며 둘 사이에는 통하는 면도 있었으나 막히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논쟁이 빚어졌다. 한 예로 누가복음 18장을 번역할 때의 일이다. 예수님께서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문제는바늘귀란 단어였다. 선교사들이 대본으로 삼고 있는 영어 성경에는 ‘eye of needle'로 되어 있었다. 영어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축자적 번역을 하며직역원칙을 고수했다. 직역하면바늘 눈이다. 그러자 한국인 번역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한동안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바늘 눈바늘 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한국어 성경은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야 한다는의미 상통’(意味相通) 번역 원칙에 축자적 직역 원칙이 자리를 양보하였다. [4] 그리하여 완성된 본문은 다음과 같다.

 

약대바늘귀여나가미부쟈하느님의 나라에나아가넌것보담오이러쉽다

 

 문제는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이었다. '구멍이란 뜻의 헬라어트레마’(τρημα)가 영국에 가서이 되었듯 한국에 와서가 된 것이다. 이는 곧하느님께서 한국 문화와 전통 속에 들어오셔서우리말로 말씀하시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복음의 토착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 번역은 단순한 경전 번역으로 끝나지 않고 복음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는성육화’(incarnation) 사건이었다.

 

 

2.2 토착적 신앙고백: 이수정의 신앙고백

 

 만주에서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인쇄되어 국내 유입되었듯이 일본에서도 이수정(李樹庭)에 의해 1884년에 한문 성서 본문에 구결(口訣, 토 혹은 이두라고도 함)을 단 형태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인쇄되었고 1885년 초에는 마가복음 한글 번역본이 인쇄되어 나왔다. 이수정은 임오군란(1882) 와중에명성황후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였던 기독교인 츠다센(津田仙)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1883 4 29일 도쿄 로게츠죠(露月町)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 받은 지 보름만인 1883 5 8일 도쿄에서 제 3회 전일본 기독교도친목대회에 참석했다. 츠다센을 비롯하여 우치무라, 니지마, 우에무라, 에비나, 혼다 등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룬 이 대회에 귀빈으로 초청받은 이수정은 대회 기간 중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다. 한문 700여 자로 된 이 고백문은 현존하는 한국인의 신앙고백으로는 최초의 것이어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5] 그는 이 고백문에서 기독교 진리의 요체를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다는 말씀에서 찾고 있다.

 

 무릇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한 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를 가리킴이며,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하여 이르시기를내 아버지는 포도원 주인이요,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라하셨으니, 그 이치는 쉽게 곧바로 이해될 것이거늘 번거로이 천착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가 이제 무슨 말로 밝힐 수 있겠습니까?” [6]

 

 그는 신앙의 최고 경지를신인상감’(神人相感)의 이치’, ‘신과 인간의 합일’(神人合一)로 설명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자 믿음의 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제시하였던포도나무와 가지비유가 그 의미를 풀어주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포도나무와 가지는 극동 아시아 지역에서는 생소한 비유였다. 그래서 이수정은 포도나무라는팔레스틴적비유를조선적비유로 바꾸었다.

 

 대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이와 같습니다. 비유하면 등잔의 심지가 타지 않으면 빛이 없으니 등잔 심지는 도()를 가리킴이요, 도심(道心)이 타서 믿음이 되며 심화(心火)는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감동은 믿는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고는 얻을 수 없으며, 한갓 심지만 가지고는 등잔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불타지 않을 때는 끝내 빛을 볼 수 없고 믿지 않고서는 끝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7]

 

 등잔의 생명은 빛에 있다. 빛이 나려면 심지에 불이 당겨야 한다. 등잔에 당겨진 불과 그로 인해 비치는 빛은 우리의 믿음이니 이것이 하느님의 감동을 불러 일으켜 구원을 이룰 수 있다. 불붙지 않는 심지는 믿음 없는 행위이니맛을 잃은 소금처럼밟혀 부셔버릴 것이라 경계하였다. 그는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조선적비유를 들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심이 소리가 종()에 있는 것과 같아 치면 응하고 때리면 소리 나는 것이니, 종과 망치()가 구비되어 있더라도 각기 다른 곳에 달려 있다면 소리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심지로 등잔이 타면 빛이 크고 조그만 망치로 치면 소리가 적으니 곧 많이 구하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이룬다는 뜻이요 오직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이치입니다.” [8]

 

 종의 생명은 소리에 있고 소리가 나려면 망치로 때려야 한다. 종소리는 하늘의 하나님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등잔 속에 담긴 빛이 심지에 불을 댕김으로 나타나듯, 종 속에 담긴 소리도 망치로 때릴 때에 나타나는데 이 모두가 인간의 믿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믿음에 하느님의 감동이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이수정이 말한신인상감의 이치. 웨슬리 신학의 특징 중 하나인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종 속에 소리가 있고 등잔 속에 빛이 있듯 믿음과 구원의 가능성도 이미 사람 속에 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고자하면 마땅히 자신에게 믿음(信心)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볼 것이요, 스승에게도 묻지 말며 하느님께도 여쭙지 말 것입니다.” [9]

 

 사람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구원의 가능성으로서의 믿음, 이것은 웨슬리가 말한선행 은총’(先行恩寵, preliminary grace)에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이수정은 기독교 구원 교리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조선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 결과포도나무등잔이 되고이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언어 속에 토착화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한국적신학의 출발이다.

 

 

2.3 토착적 성경 신앙: 사경회와 성경 암송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대할 때 종교적 경외심을 갖고 최상의 예를 표하였다. 성경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종교적 경외와 예배 대상이었다. 한말 평양에서 활동하던마들린이란 한국인 전도부인이아이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반드시 선반 위에 모셔 놓아야 하고 성경을 옮길 때는 항상 두 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하면서 성경을 팔았다고 하는데 동양 특유의경전 문화’(經典文化)를 반영한 것이다. 성경은두 손으로받들어 모셔야 하는경전이었다.

 

 이런 한국식 경전 문화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사경회(査經會)이다. 초기 사경회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이었고 길면 한 달이었다. 선교사들은 농번기 때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수 백 리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 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경을 배웁니다. 이 같은 대규모 사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소규모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북부 지역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1년 동안 이 같은 소규모 사경회를 192회 실시해서 연인원 1만여 명을 기록하였습니다.” [10]

 

 평양 선교사 블레어는 한국 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유월절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생활을 접어 두고 오직 성경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합니다. 이같이 성경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 전체가 단합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 할 것입니다.” [11]

 

 한국 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었다. 사경회가 1907년 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대 교회 사경회는 형식에서도 달랐다. 그 방식이 서당에서 경전 배우는 것과 같았다. 훈장 앞에서 학동들이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과 중용을 배우듯 교인들은 인도자 앞에서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읽으며 배워 나갔다. 이것 또한 동양 특유의경전 문화흔적이다. 전통적으로 서당이나 사찰에서 글공부의 제1단계는 암송(暗誦)이었다. 뜻풀이는문리’(文理)가 깨친 후라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전까지는 그냥 줄줄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초기 사경회 공부도 성경 외우기로 시작되었다. 암송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다. 선교사들은 이런 한국 교회의 성경 암송 문화에 대해 경이로운 찬사를 보냈다. 일제시대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데밍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공부와 관련하여 다음 세 사람에 대한 사경회 보고가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그의 눈이 되어 복음서 전체를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서 전체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그는 말씀 공부에 전념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과 절까지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들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에서는 이곳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으로 성경을 배우는 깊은 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2]

 

 이 글에 나오는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교인은 개성의 전설적인맹인 전도자백사겸(白士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맹인이 되어 개종 전에는 명복(名卜)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였던 백사겸은 [13]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 동안 점쳐서 번 재산을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지팡이 하나 잡고 전도 길에 나서 고양·파주·장단·개성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는 아들(백남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외워 버린 것이다.

 

 성경 암송은 한국 교인들이 받은 특별한은사’(恩賜, charisma) 가운데 하나였다. ‘성경을 외우는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서양 선교사에게 경이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초기 교인들은 전통 종교의독송’, ‘암송문화를 성경 읽기에 적용하여 한국인 특유의토착신앙으로 성경 암송 신앙을 창출해 냈던 것이다.

 

 

3. 복음 정착기 부흥운동과 토착 기독교 문화 형성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 하디(R.A. Hardie)의 공개적 죄의 자백으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한국인 교인 대중에게 급속도로 확산되어 서울과 개성을 거쳐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4] 이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큰 폭의 성장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한국 교회의 신앙과 그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 부흥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시기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을종교적으로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즉 회개중생성결에 이르는 기독교 복음의 근본적인 내용을 체험적으로 수용하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통 종교와 구별되는기독교를 체득하게 되었다. 선교 초기에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혹은 정치 ·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에 나왔던 교인들이 부흥운동 체험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 요인이 될 것은 물론이다.

 

 둘째, 이 시기 부흥운동을 통해토착적신앙 양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한국에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진지 20-30년이 지난 시기로 기독교를 수용한 1세대들이 활동하던 때였다. 기독교 이전의 다른 종교에 익숙해 있던 1세대들은 서구와는 다른동양적시각에서 기독교를 보았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부흥운동을 통해 자연 발생적으로토착적신앙 양태가 형성되었으니 그것은 순수 서구적인 것과 순수 동양적인 것과 구별되면서도 그 둘을 아우르는 3신앙양태로 자리 잡았다.

 

 

3.1 토착적 기도 문화: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한국교회가 언제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초기 부흥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3-7년 어간에 한국 교회의 대표적 기도회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분명하다. 한국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하였다는 기록은 1904년 북장로회 평양선교부 보고에 처음으로 나온다. 즉 그해 연초에 평양에서 거행된 겨울 사경회 때 참석자들이 묶고 있는 집마다동틀 무렵 기도와 찬양”(sun-rise prayer and song service)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새벽기도회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보고는 1904 9월에 열렸던 이화학당 부흥회와 관련된 선교 보고에 나온다.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L.E. Frey)의 보고다.

 

 학교를 개학했을 때, 전에 다니던 학생 말고도 스무 명 정도가 새로 들어왔는데 대부분 교인 집안 출신입니다. 하디(R.A. Hardie) 박사께서 고맙게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을 위해 정동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회가 열리기 두 주일 전부터 매일 세 차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지막 주간 집회 때, 저는 페인(Paine) 양과 함께 저녁 집회에 참석했는데 학생들은 매일 밤 자정까지 자기 죄를 자백하며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학생들이 하나 둘 몰래 예배실로 들어 와 기도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언제, 어느 때 죄를 사함 받았느냐고 물으면 그들 중 대다수는어느 날 아침 예배실에서 혼자 기도하다가 확신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15]

 

 1904 9, 학교 개학을 맞아 배재학당과 연합으로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가 인도하는 학생 부흥회를 열렸는데 이 부흥회를 위해 준비 집회를 하던 중 이화학당 학생들이이른 아침에”(in the early morning) 예배실에 모여 기도하였다. 이 새벽기도회는 선교사나 교사들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새벽기도가 선교사의 지시나 권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인들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를 1905년 초에 열린 남감리회 개성지방 부인 사경회 보고에서 읽을 수 있다. 여선교사 캐롤(A. Carroll)의 증언이다.

 

 보통 한국 집 방은 작고 또 여성들에겐 내외하는 풍속이 있어서 방문객들이 숙식을 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다. 한 집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묶고 있는 방에도 휘장을 치고 건너편에 열 명에서 열 네 명 정도가 잠을 자야 했다. 처음 사흘 동안은 그런대로 잘 지냈다. 그런데 그 중 몇이 자기 집에서 찾아올 것을 걱정해 돌아간 후부터 고요함이 깨졌다. 아침 여섯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 에 있던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는 새로 몇 사람이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일찍부터 일어나 헌신할 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겨 어두울 때는 자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으면 낮에 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 말을 경청하였고 또 서로 대화를 나눈 다음부터는 다같이 세속적으로도 즐겁고 영적으로도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6]

 

 한국 교인들이 시도한 새벽 기도를 선교사가 오히려 만류한 경우였다. 비록 선교사의 만류로 중단되고 말았지만 한국 여성들의 신앙적 헌신이 새벽 기도로 연결된 좋은 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부터 새벽은 한국인들에게기도 시간이었다. 새벽 동트기 직전, 소위인시’(寅時, 새벽 3-5)를 가장신성한시간으로 여겨 그 시간에 신령과 통하기 위해 기도하는 전통이 동양 종교에 있었다. 불교 사찰에서 동트기 전에 드리는새벽 예불은 승려들과 불교 신도들의 하루 생활을 여는 중요한 종교 의식이었다. 도교(선도) 수행자들은 물론이고 무당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찬 물에 목욕하고 기도하는 신앙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정집 부인들도 길 떠난 가족의 안전과 자식의 출세를 위해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시간도 새벽 동트기 전이었다.

 

 이처럼 아침 일찍 일어 나 기도드리던 습관에 젖어 있던 한국 여인들이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그 습관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는데 다만 그 대상을천지신명이 아닌창조주 하나님으로 바꿈으로 신앙의 내용과 방향을 기독교쪽으로 분명하게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몸에 익숙한기독교 신앙 양태가 생성되었다. 이것이 바로토착화로 표현되는 주체적 복음 수용과 해석의 결과물이다. 이후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토착신앙 양태로 뿌리를 내렸다. [17]

 초기 부흥운동 기간 중에 나타난 또 다른 토착신앙으로통성기도’(通聲祈禱)가 있다. 말 그대로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함께 소리를 내어 드리는 기도다. 선교사들은통성기도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고심했다. 북장로회 선교사 리(G. Lee)소리 내서 하는 기도’(audible prayer)라고 했고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G.H. Jones)함께 소리 내서 하는 기도’(united audible prayer)라고 했으며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스캇(W. Scott)제창 기도’(prayer of unison)라고 번역했다. 그만큼 선교사들에게통성기도가 낯설고 어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통성기도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깊은 맛을 보았고 지금도 통성기도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기도 양태의 하나로서 집회 때마다 종종 실행되고 있다.

 

 이 같은 통성기도는 부흥운동 초기부터 나타났다.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공개적인 죄의 자백이었다. 이 같은통회 자복이 평양 부흥운동을 거치면서통성기도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예상하지 못했던돌발적인 현상이었다. 그날 현장을 목격했던 북장로회 선교사 매큔(G.S. McCune)의 증언이다.

 

 헌트 목사가 설교를 하고 리 목사가 몇 마디 광고를 한 후에우리 모두 기도 합시다라고 했더니 그 순간 갑자기 예배당 안에 가득 모여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내서 기도한 것이 분명했다. 그 경이로운 장면이란! 어느 한 사람도 혼자 목소리를 크게 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어서 귀를 기울여 들으면 각자의 기도소리를 분간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울면서,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죄목을 나열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렸다.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을 간구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소리를 내서 기도하였는데도 전혀 혼돈이 없었다. 아주 잘 절제되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나로서는 이루 말로 다·표현할 수 없다. 그 장면을 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흥적이거나 (종종 그런 식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감정적인 것은 전혀 없이 각자가 기도에 몰두하면서 이루어낸 강한 응집력을 느낄 수 있었다.” [18] ·

 

 한국에 나온 지 2년도 안된 30대 초반 선교사의 눈에 1천여 명에 달하는 교인들이 한꺼번에큰 소리’(loud voice)내서 드리는 기도회 모습을 보고 처음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전혀 혼돈 없이’(no confusion at all), ‘잘 절제되어 완벽한 조화’(subdued, perfect harmony)를 이루었고 각자 기도에 몰두하면서도강한 응집력’(perfect concentration)을 이루어내는 기도 장면에서경이로운’(wonderful)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통성기도는 선교사들이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겐돌발적으로 보였다. 통성기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던 캐나다 선교사 스캇은 통성기도가 가능했던 이유를한국적정서와 환경에서 찾고 있다.

 

 통성기도는 비록 소리의 바벨탑을 쌓는 측면이 있지만, 단체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속에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효과적이다. 본성적으로 자부심이 강하고 과묵한 사람들이라 이런 식이 아니고는 자기 속에 숨은 비밀을 털어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어려운 현실이었기에 이들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체면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절망과 좌절을 깨뜨리시고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영원한 안식으로 이들을 이끄셨다는 점이다.” [19]

 

 스캇은 통성기도를소리의 바벨탑’(a babel of sound)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도 형식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한말 시대적 상황에서나라 잃은한국인들이 통성기도를 통해 얻은 신앙적 효과만은 높이 평가하였다. 부흥운동 기간이 우리 민족에겐 일제침략으로 인해 가장 극심한 고난과 좌절을 경험했던 시기였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민족적인 것이든 좌절과 허무 상황에서 통성기도는 현실적 불안 상황을 극복하고 종교적 위안과 용기를 얻었던 효과적인 통로였다.

 

 결국 통성기도는 다수가 소리를 내면서도 혼돈이 없이 조화를 이루는 기도, 각자 개인적으로 하면서도 남과 함께 드리는 기도, 형식을 파괴하면서도 또 다른 형식을 만드는 기도였다. 이처럼 통성기도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이었다. 이는 불교나 유교, 민간 신앙에서 집단으로 소리 내어 경이나 주문을 외우는독경’(讀經) 혹은독송’(讀誦)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한 한말 한국의 독특한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창출된 토착적 신앙양태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같은 전통 종교의 형식을 빌려 통성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통하고 이웃과 연결되는 체험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성 기도였다.

 

 

3.2 토착적 헌신 문화: 날연보와 성미

 

 그런데 초대 교회 시절에 돈이나 물질이 아닌 시간을 바치는연보 행위가 있었다. 이를 일컬어날 연보’(日捐補, Day Offering)라 했다. ‘날 연보로 바친 시간은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세속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되고하나님의 일을 하였는데 주로 전도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헌신이 전도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날 연보는 주로 사경회나 부흥회 기간 중에 실시되었는데 1904 11월 북장로회 선교 구역인 평북 철산 사경회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1주일 후 선천 사경회에서도 실시되어 선천 교인들이 625, 의주 교인들이 524, 초산과 강계 교인들이 720일을 헌납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불과 2년 사이에 날 연보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1907년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전국에 걸쳐 초교파적으로 실시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같은 한국 교회의날 연보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무어(J.Z. Moore)의 증언이다.

 

 사경회와 부흥회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한국인들이날 연보라고 부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중 집회 마지막 날이 되면 각자가 헌금을 하듯이 종이 지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날 수를 적어 내는데 그 날에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몇몇 교회에서만 실시했는데 금년에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날 연보사항을 보고하였다.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보수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전도 일을 하는데 드는 비용을 본인이 부담함으로 시간도 물질도 바쳐서 감당한다. 한 교회에서는 총 1천 일이 헌납되었고 진남포에서는 어떤 부인이 1년 중 6개월을 전도하는데 쓰겠다고 서약했다.” [20]

 

 1909년에 시작된백만명구령운동에서는쪽복음 전도와 함께날 연보가 대표적인 전도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교인들은 집회 때마다 헌금하듯 하나님께 바칠 날 수를 적어 냈다. 백만명 구령운동 강사로 초빙 받아 왔던 미국인 부흥사 데이비스(G.T.B. Davies) 1909 12월 초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열린 남감리회 연합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놀라운 눈으로날 연보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회를 보던 콜리어씨가 지방에서 올라온 대표들에게, ‘앞으로 3개월 동안 불신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전적으로 바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참으로 감동적인 광경이 벌어졌다. 나로서는 이처럼 자원해서 하나님의 일에 시간을 바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놀라운 반응이 나타났다. 열에서 열다섯 명 가량이 즉각 일어서더니날 연보를 하였다. 상인 한 사람은오늘부터 이 일을·계속하겠습니다만 매달 한 주일에 하루씩 온전히 바치겠습니다하였다. 21일을 바친 것이다. 뱃일을 한다는 사람은 석 달 동안 60일을 주님께 바치겠노라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주일만 빼고 모든 날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주일은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바칠 수 없노라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은 3일 밖에는 바치지 못하지만 이후 석 달 동안 어디에 가든 기회있는대로 전도하겠노라 하였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길 가면서 전도하겠다고 하면서 특별히 6일을 바치겠다고 했다.” [21]

 

 날 연보를 한 사람은 무급 전도인으로 활약했다. 그런 점에서 선교사에게 일정액 보수를 받고 전도 일에 종사하던 매서인(혹은 권서인)이나 전도부인과 달랐다. 이들 무급 전도인들은 선교사나 유급 전도인들의 발이 미치지 않은 시골 구석구석땅 끝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다. 한국 교회가 선교 초기에 그토록 급속하게 복음이 확산된 배경에는 이 같은날 연보헌신자들의 무급·자원 전도가 있었다.

 

 이로써 초기 부흥운동 과정을 거치면서날 연보는 한국 교회 특유의 전도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시작될 때부터 선교사와 관계없이 한국인 교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런 의미에서자생적신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운동은 한국의 농경사회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던품앗이제도를 원용한 것으로 한국인들은 하나님의 일에품앗이하는 형태로 날 연보를 하였던 것이다.

 

 부흥운동과 백만명 구령운동 기간 중 나타난 또 다른 한국교회의 토착적헌신신앙을 보여주는 예가성미’(誠米)운동이다. 이것은 돈 대신 쌀을 교회에 바쳐 토착 전도인(혹은 전도부인)의 생활을 지원하는 제도로서 한국교회의자급’(self-support)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토착 전도인의 생활을 돕기 위해 교회에 쌀을 바친 예는 1904 선교 보고에서 확인된다. 1904 11월 평양에서 미감리회 북부지방 사경회가 열렸는데 이 사경회에서 당시 한국 선교 관리자였던 스크랜턴은 한국 교인들에게자급이란 주제를 제시하였고 이에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진지하게 그 방법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나 한국인들에게 한국 교회의 자립과 자급 문제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논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사경회에 참석했던 각 지역 교회 대표 1백여 명은 한국교회의 자급 대책을 논의하였고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쌀을 바쳐 전도인 생활비를 대는 것이었다. 이 사경회에 참석했던 영변지방 선교사 모리스(C.D. Morris)의 증언이다.

 

 “[사경회의] 특기할만한 현상은 자급정신이 한층 강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참석자들은 자기 교회 운영과 자기 교회 목회자 생활비만큼은 스스로 부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쓸 즈음에 그들은 지방내 전도인 아홉 명분 생활비를 전담하기로 결정을 내렸답니다.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희생이 따라야 할 것인데 그들은 결정한대로 밀고 나가기로 하였답니다. 어떤 교인은 자기 가족에 먹고 사는데 열 말이 필요하다면 그 중 아홉 말만 집에 들이고 한 말은 주님께 바치겠노라 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인은 자기는 좁쌀을 먹고 절약한 돈과 쌀은 주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22]

 

 토착 전도인의 생활비를 자급하기 위한 방편으로 토지와 돈을 바치는 중에 쌀이 주요 품목으로 등장한 것이다. 쌀은 양식이 될 뿐 아니라 화폐의 가치도 있어 토착 전도인들에게 효과적인 지원책이 되었다. 선교부의 재정 지원에만 의존하던 토착 교회 전도인의 생활비를 한국 교회가 전담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을 본 선교사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한국 교회에서밝은 미래‘(so hopeful for future)를 보았다.

 이같이 쌀을자급 헌금으로 바치는 행위가 교회 여성들에 의해 정례적인 헌납 행위로 이어졌으니 그것을 성미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형태의 성미운동에 대한 보고는 1905년 개성지방 선교 보고에서 처음 나타난다. 크램(W.G. Cram) 선교사의 보고다.

 

 “[1905] 1월 말 우리 구역[개성 북구역] 전도사들과 매서인들이 사업 보고를 하는 중에 한 매서인이 보고하기를 어떤 교회 부인들이 목사 생활비로 3달러 20센트 정도 헌금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 그만한 돈을 모았다는 것이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기에 그 연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교회 부인들은 과거 정성을 다해 귀신을 섬길 때 집안 식구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쌀 한 줌씩 따로 떼어 내서 모아 두었다가 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고 하면서 이제 교인이 되었으니 그 같은 정성을 주님께 바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역시 매 끼니때마다 쌀을 모아 자기네 구역 전도사 생활비로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23]

 

 같은 개성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콜리어(C.T. Collyer)의 보고에서도 확인된다.

 

 많은 가정 부엌에는주 항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끼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곡식을 한 줌씩 덜어 항아리 속에 넣어 두었다가 매달 말에 그 곡식을 팔아 토착 전도인 생활비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24]

 

 집안 귀신을 섬기는 일은 대대로 부인들의 몫이었다. 부인들은 정기적으로 지내는 고사와 제사를 위해 부엌에 작은 항아리를 놓고 매 끼마다 조금씩 쌀이나 다른 곡식을 덜어 두었다가 그것으로 떡을 하거나 제사 비용으로 충당하던 습관에 익숙해 있었다. 부인들이 대를 이어가며 섬기는 집안 귀신들이 많았는데 안방은 물론 사랑방과 부엌, 대문, 하다못해 뒷간에도 귀신이 있어 귀신을 노엽게 하지 않아야 집안이 평안하다고 믿었다. 그 중에도성주’(成造)라 불리는 집지킴이 귀신을 제일 두려워하여 그 귀신에게 바칠 쌀을 넣을 항아리를성주 단지’, 혹은신주 단지라 했다. 부인들은 매 끼니 식사를 준비하면서 먼저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갈씩 항아리에 넣으면서 가족의 건강과 출세를 위해성주님께 빌었던 것이다.

 

 예부터 동양 종교에서 쌀은 신앙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고대 도교 계통의우두미교’(五斗米敎)에서는 쌀 다섯 말을 바친 이들에게무병장수의 비법을 가르쳤다고 하며 19세기 들어 한국의 대표적인민족 토착종교로 뿌리를 내린 동학(천도교)에서도성미오관’(五款)의 하나로 정해 엄격하게 행할 것을 가르쳤다. [25] 그런데 기독교인이 된 부인들은 더 이상 귀신을 섬길 수 없었고성주 단지도 필요 없게 되었다. 교인들은 전에성주 단지라 부르던 항아리를주 단지’(Lord's Pot)로 바꾸어성주귀신 대신 그리스도를 위해 쌀을 모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쌀을성미라 하였고 성미는 토착 전도인 생활비, 혹은 가난한 교인의 구제비로 지급되었다.

 

 이처럼 개성에서 시작된 성미운동은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어 한국 교회 여성들의 대표적인 신앙 양태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운동 역시 선교사들의 지시나 권유에 따라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교회여성들의 자발적인 헌신의 신앙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런 의미에서 성미운동은 한국 교회의 주체적 복음 해석의 결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토착신앙이라 할 수 있다.

 

 

3.3 토착적 예배 문화: 성탄절 태극등

 

 어느 종교든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은 예배이다. 종교에서 중요시하는 체험과 신앙 고백,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 예배다. 그러기에 종교에 따라 독특한 예배 의식을 창출한다. 그런데 예배 역시 토착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 신앙 고백의 내용이 같다 할지라고 민족과 문화에 따라 그 표현의 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예배 의식의 정착 과정에서 외래적인 요소와 토착적인 요소가 융합되어 3형식을 취하기 마련이다. 초기 한국 교회 예배 의식에서도 그러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07년 한창 대부흥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한국에 처음 나온 선교사 남감리회 피어만(E.L. Peerman)이 개성에 가서 한국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자기 눈에는낯설게보이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교회 예배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토착 교인들은 모두 기도할 때 고개를 바닥을 향해 아래로 숙이는데 예배당을 출입할 때도 그렇게 한다. 축도가 끝난 후 미국 교회에서는 서둘러 짐을 싸들고 나가거나 옆의 교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곳에서는 축도 후에도 한동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기도를 드린다.” [26]

 

 서양 교회에서는 목사의 축도가 끝나자마자 회중들이 서로 악수하고, 대화를 하면서 예배당을 떠나는데 한국인들은 축도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조용한 기도를 드렸다. 한국에 갓 나온 선교사는 묵도(黙禱)로 시작해서 묵도로 끝나는 한국인들의 예배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자세를 강조하는한국적인현상도 기이했다. 고개를 숙이는 동양적예법은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예배당을 출입할 때도 적용되었다. 한국인들의 몸에 밴종교 예절이 기독교 예배 의식을 통해 재해석되어기독교 의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런토착 의식’(土着儀式)은 민족 감정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외세의 침략과 지배라는 사회 정치적 현실에서민족의식’(民族意識)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 결과 토착적 종교의식과 민족주의 정치의식이 결부된 새로운 형태의 종교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예를 1898 12, 강화 교산교회 교인들의 성탄절 축하 예배 광경에서 그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성탄일 경축에 형제가 삼십오인이오 자매가 칠십인인데 본토 전도 선생 김상림씨가 마태복음 이장 일절로 십이절까지 보니 애찬례를 베풀며 저녁예배에 태극등 삼십칠개를 달고 형제 자매와 외인까지 육칠십명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엿더라.” [27]

 

 성탄절 축하 예배는 (서구) 기독교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강화 교인들은 성탄절을 축하하면서 많은’()을 내걸었다. 이는 불교에서 석탄일마다 행하던연등’(燃燈)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강화 교인들은 예배당에태극등’(太極燈) 37개를 내걸었다. ‘태극등은 토착적인 의미와 민족주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더욱이 태극등 ‘37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나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28] 강화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축하 일에 나라 임금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겸하여 상기시켰던 것이다. 한말 민족운동의 대표적 개념인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29] 이런 의식을 통해 교회는나라 사랑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민족의식을 지닌 외인(外人)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4. 맺음글

 

 지금까지 개화기 한국 기독교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신학적토착화시도와 [30] 부흥운동 기간 중에 나타난토착적신앙 양태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국 교회의 토착화 노력은 이미 선교 초기, 복음을 수용하는 과정에서부터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그 결과토착적신앙과 신학을 창출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선교 초기 역사에서 나타나는 주체적 복음 수용과 해석의 과정에서 형성된 자연스런 결과였다.

 

 우선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휘 선택과 표기법 등을 통해 복음이 한국의 고유 언어와 문화의 옷을 입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경을 번역하며 절대자의 명칭을 번역할 때, 중국교회에서 사용하던 상제’(上帝)천주’(天主), 일본 교회에서 사용하던’()이란 개념을 채택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고래로 사용해 오던이란 고유 용어를 채택한 것에서 한국 기독교 특유의 토착적 신앙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성경 표기법에 대두법을 사용한 것이나바늘 귀’, ‘’, ‘예수씨같은 토착적 성경 어휘를 채택함으로 복음이 우리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화 작업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수정의 신앙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전통 생활 문화의 언어로 복음의 메시지를 표현하려는 신학적 토착화 시도였다. ‘포도나무라는 팔레스틴적 비유는 동양인들이 이해하기 쉬운등잔이라는 동양적 비유로 변환되었고,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라는 헬라 철학적 개념은신인상감의 이치라는 동양의 종교적 개념으로 변환되었다. 이 같은 토착적 신앙고백이 토착화 신학의 기본 자료가 되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사경회와 성경 암송 문화에서도 이러한토착적신앙 형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의 전통 경전문화에 바탕을 둔 성경 신앙이 사경회와 성경암송으로 표현되었고, 이 같은성경 중심의 신앙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1903-1907년 어간에 진행된 부흥운동을 통해 다양한 토착 신앙 양태가 형성되었다.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개종 ‘1세대들은 개종 이전에 오랜 세월 익숙해 있던 토착 종교·문화 전통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여 적극 수용함으로 자연발생적이고 토착적인 신앙 양태가 창출되었다. 부흥운동 기간 중에 집중적으로 나타난새벽기도회’, ‘통성기도’, ‘날연보’, ‘성미운동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신앙은 선교사들의 간섭이나 권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그런 면에서토착적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토착적신앙은 한국 교회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 예로 1890년대 주한 선교사들은 한국 토착교회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네비어스(Nevius) 선교정책을 고안하여 이를 선교 현장에 적용하였는데, 그 내용은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이 전도하게 한다.”는 의미의 종교적자전’(自傳, self-propagation), “한국 교회 운영은 한국인들이 책임지게 한다.”는 의미의 경제적자립’(自立, self-support),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이 치리하게 한다.”는 의미의 정치적자치’(自治, self-government)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3자 원칙이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의 자발적이고 토착적인 신앙운동으로 그대로 구현된 것이다. , ‘날연보자전, ‘성미자립을 가능케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1905독립 연회’(감리교) 1907독립 노회’(장로교)를 조직할 수 있었다. [31]

 

 그리고 초대 교회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실천한 예배 문화에서도 토착적이고 민족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토착적 예배 문화는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유교나 불교, 도교와 무교 등 토착 전통 종교에서 행하던 예배 문화적 요소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여 수용한 결과로 나타난 것들이다. 이런 토착적 예배 문화를 통해 기독교 의식은 보다한국적인것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고, 한말과 일제시대 외세의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교회는 (비록 서구화된 부분이 많기는 했지만) 민족 문화를 고수하는 종교 집단으로 남아 민족주의자들의 입교를 촉발시켰다.

 

 이러한 주체적 복음 수용과 해석, 그 과정에서 창출된 토착적 신앙 및 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토착교회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한국토착교회는 서구의 기독교 전통, 한국의 토착 종교 전통 사이에서 이들과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continuus et separatus) ‘ 3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3의 전통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린 한국토착기독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역사신학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첫 번째 과제이다. ‘토착기독교인들의 종교 체험과 그 고백적 표현으로 형성된토착적기독교 문화를 정리하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한국의토착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신학을 규명하는 것은 역사신학이 인근 신학과 함께 해야 할 두 번째 과제이다. ‘토착적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나타난토착적신앙고백과 문화적 표현 양식에서토착기독교인의 신론과 기독론, 교회론, 성서이해, 윤리의식 등을 도출해 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우리 것으로 신학함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으나 비교종교학적 방법론을 극복하지 못해사변 신학에 머물렀고 그 때문에 교회 공동체의 지지와 동의를 끌어내지 못했던 토착화신학 1세대 선배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1] 초기 한글 성서 번역 및 반포 사업에 대하여는 이덕주, “초기 한글 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한글 성서와 겨레문화』, 기독교문사, 1985, 416-438쪽 참조.

[2] 전택부, “기독교와 한글”, <나라사랑> 36, 외솔회, 1980, 142.

[3] ·대두법이란 정부에서 발행하는 문서 내용 중에이나왕후를 지칭하는 단어가 나올 때는 그 단어 앞뒤로 한 칸씩 띄거나 아예 줄을 바꾸어 새로 시작하도록 조판하여 한 눈에 그 단어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인쇄하는 방법이다. 어떨 땐 인쇄된 활자 위에 종이를 붙여 글자가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동양 문서에만 나오는 존칭 예법인 셈이다. 이응호, “최초의 한글 성경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국어교육>, 44·45 합병호, 1983.2, 432-435.

[4] 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s, Jul., 1882, 244;

[5]   <六合雜誌> 34, 1883.5; <七一雜誌>, 8 22, 1883.6.1; 이덕주·조이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한들출판사, 1997, 20-24.

[6]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天父在我我在父我在爾爾在我卽神人相感之理有信必成之確證耶蘇設譬曰我父爲圃人我乃眞葡萄樹爾爲此樹枝其理己直捷易解不煩穿鑿今僕更有何辭發明乎曰.”

[7] 원문은 다음과 같다. “盖神人相感之理如譬燈炷不燃卽無光燈炷是向道心燃然信心火爲神感故神感非由信心卽不可得徒有炷卽不成爲燈故不燈時終不見光不信時終不得救.”

[8] 원문은 다음과 같다. “神之在天如聲之在鐘擊卽響槌有聲鐘與槌雖具而各懸一處其有聲乎故燈以大炷燃卽光大鐘以小槌叩卽聲小卽多求多與小信小成之意惟無不成之理.”

[9] 원문은 다음과 같다. “故欲確知得救之成否只自省信心之有無莫問於師莫求質於神.”

[10]   H.G. Underwood, "Korea's Crisis Hour", The Korea Mission Field, Sep. 1908.

[11]   W.N. Blair, The Korean Pentecost and Other Experiences, 1907.

[12]   C.S. Deming, "The Korean Christian", The Korea Mission Field, Jun. 1906, 153.

[13] 박소천, 『숨은 보배』,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출판부, 1938; 이덕주, “점쟁이 출신 맹인전도자”, 『새로 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45-57.

[14] 이덕주, “초기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에 관한 연구”, <세계의 신학>,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가을.

[15]   L.E. Frey, "Ewa Haktang-Seoul",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5, 5; “Revival at Ewa", Korea Mission Field, May 1906, 133.

[16]   A. Carroll, "Songdo Woman's Class", The Korea Methodist, Jun. 1905, 103.

[17]   이덕주,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전통”, <세계의 신학>, 1998년 봄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07-119.

[18]   G.S. McCune, "The Holy Spirit in Pyeng Yang", Korea Mission Field, Jan., 1907, 1-2.

[19]   W. Scott, Canadians in Korea: A Brief Historical Sketches of Canadian Mission Work in Korea, United Church of Canada Archives, Toronto, 1976, 57.

[20]   J.Z. Moore, "Nal Yunbo", Korea Mission Field, Apr. 1908, 61.

[21]   G.T.B. Davies, Korea for Christ: the Story of Great Crusade to win One Million Souls from Heathenism to Christianity, Christian Workers Depot, London, 1910.

[22]   C.D. Morris, "Self Support and Self Sacrifice", Korea Methodist, Dec., 1904, 10.

[23]   W.G. Cram, "North Ward Circuit, Songdo", Annual Report of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Annual Report of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05, 35.

[24]   C.T. Collyer, "Report of Songdo South Circuit", Annual Report of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Annual Report of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05, 36.

[25] ·오관이란시일’(侍日), ‘청수’(淸水), ‘주문’(呪文), ‘기도’(祈禱), ‘성미’(誠米) 등 천도교인들이 행해야 할 기본 신앙 수행을 말하는데 그 중에성미수행은 부인들의 몫이었다. 즉 부인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씩 떠서성주 단지에 모아 두었다가 주기적으로 천도교당에 바쳤는데 월마다 내는 것을월성’(月誠), 1년에 두 번 내는 것을연성’(年誠)이라 하였다. 이처럼성주 단지는 조선 부인들의 세습 신앙이자 전통 문화였다. 吉川文太郞, 『朝鮮諸宗敎』, 朝鮮興文會, 1922, 345-346.

[26] E.L. Peerman, "First Impression of Korea", Korea Mission Field, Jul. 1907, 103.

[27] 강화 교항동교회 성탄일 경축”,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899.1.4.

[28] 고종 황제는 1852년에 출생했으니 1898년에 한국 나이로 37세에 해당한다.

[29] 이 무렵 다른 지역에서도 교인들이 성탄절 예식을 거행하면서 민족의식을 표출하였는데 인천 담방리교회에서는 예배당 정문에 십자기와 태극기를 게양하고 역시태극등’ 36개를 내걸었으며 부평 굴재교회에서도 태극기와 십자기를 게양하고 예배를 드렸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899.1.4.·

[30]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토착화 노력은 선교사와 한국인들의 토착종교와 기독교 비교 연구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주, “한국 기독교의 타종교 이해와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변선환의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 91-129쪽 참조.

[31]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14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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