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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08
 제목  서용문(1905. 4.20~1950.10.11)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장로교]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평북 강계에서 1905년 4월 20일 출생했다. 만주봉천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장포동 교회를 시무하고 있을 때 한국전쟁을 만나 1950년 10월 11일 한밤중에 공산당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살해되어, 시체가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영실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입학
兩江, 渭原, 楚山 개척
평양신학교중퇴 후 봉천신학교(만주) 입학 및 졸업
후창교회 부임
1946년 목사안수(산서노회) 후창교회 목회 중 안수
보령교회(평양) 부임

 

“목사님. 목회자 지망생이 사업에만 전념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참회하는 서용문의 말에 선교사 감부열(Campbal)은 껄껄걸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의 후예라고 하겠오. 그렇게 괴로워한다면 이 참에 교역을 다시 하지 뭐” 감부열선교사의 말에 서용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은 감격으로 빛이 일었다. 감목사님 “길이 있을까요? 목사님.” “길이야 언제던지 있지요 마음이 문제가 아니겠오.” “목사님 저 장사 때려치우고 목회 길로 들어서겠습니다. 저에게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서용문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감부열목사도 서용문의 갸륵한 용단과 강한 열성을 보고 만주지역으로 교민선교사업을 위해 그의 길을 주선해 주었다. 1940년 교단 폐쇄령이 내려지기 1년전이었다.


서용문은 1905년 4월20일 함경북도 어느 산골에서 이조 마지막 무관이었던 아버지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용문의 아버지는 국가가 일본에 병합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의병을 모아 일본에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장군의 아내는 비통한 나머지 자식들과 동반 자결을 하면서 어린 핏덩어리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주변의 이웃들은 장례를 치러주고 그와 가까운 친척을 찾아 아이를 맡기게 되어 서용문은 강계의 두메 산골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공부도 못하고 어려서부터 산에가서 나무나 하면서 고생고생 성장했다. 그때 마침 길을 잃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용문은 그 아주머니를 길 인도를 해주었는데 이분이 여자 賣書人(성경을 파는 사람)이었다. 그 여인은 어린 용문이가 불쌍했던지 몇권의 쪽복음을 주고갔다. 그는 그 쪽복음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용문은 나이 15세 장군의 아들답게 뼈대가 굵고 키가 큰 그는 친척의 집을 떠나 강계로 나왔다. 생각에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돈도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 英實학교 앞에서 서성이다 교장인 감부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왜 학교 앞에서 서성이느냐.”하고 관심을 보였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누구를 만나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리로 들어오거라” 교장은 어린 서용문을 교장실로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너무 가련하여 그를 공부 시키게 되었다.

 

교장 사택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생활을 하며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도 당시 다른 학생들도 그랬던것 처럼 한학기 공부하고 몇학기 쉬는 그런 공부였다. 그러기 위해서 압록강 연변의 산간벽지를 그의 아내와 더불어 떠돌며 개척을했다. 兩江, 渭原, 楚山 , 등지에서 몇개 교회를 개척해 건축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너무 극심하여 그는 중도에서 신학교를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압록강 국경도시인 만포진으로 이사하여 작은 잡화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근면 성실했던 두 부부는 장사에 성공했다. 먹을 것에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용문은 괴로웠다. 가야될 니느웨를 떠나 다시스로 가버린 요나의 심경이 되어 마음속으로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괴로움을 가지고 아버지 같은 선교사 감부열목사를 만나 용기를 얻은 후 다시 만주땅 통화현 快多帽子라는 소도시로 들어가 한인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가 재직하고 있는 봉천신학교에 편입학해 졸업을 했다. 박형용박사와 박윤선목사는 모두 학자이면서 후에 신학교 총장이 된분이다)

1945년 8월 15일 그리도 소망하던 광복이 찾아들고 서용문전도사는 가족을 이끌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주로 압록강 연변에서 목회를 했다. 백두산이 바라다 보이는 하늘아래 첫 동리라고 하는 후창에서 목회하던 1946년 강계지역 산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맏았다. 해방이되자 그는 이어 압록강변 후창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시내 보통강 옆 보령교회에서 청빙해 부임했다. 그러나 평양은 연변 후창교회에 비해 교역자를 턱없이 괴롭혔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조선기독교연맹이었다. 조선기독교연맹은 동료, 선배 교역자들을 동원해 연맹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놓았고 심하게는 내무서에서까지 은근히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독교도연맹은 서용문목사가 보기에는 조선기독교연맹은 가룟 유다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는 월남하라는 권유도 없지 않았다. 그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목자가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삯꾼 양치기나 하는 노릇이다“ 그는 끝내 평양을 떠나지 않고 주일날이면 손수 교회 종줄을 당기며 종을 쳐서 교인들을 손짓해 불렀다. 병합의 울분을 품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다가 종신형을 받은 부친의 혈통을 받아 솔직 담백한 성격에 불의를 참지 못하던 서용문목사는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해 당회와 제직들을 당황하게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비단결같이 단순했고 예술과 문학을 사랑해 공부하는 교역자상을 보였는가 하면 교인들에 앞서 솔선수범함으로 교인들이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교역을 했던 그였다는 것이 그를 아는 이들의 후평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할 때도 평양을 한발자욱도 떠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 그해 10월 11일 내무서원들에게 연행되어 행방을 몰랐다가 대동강 하류 강기슭에 시체들이 표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여러명 목사 장로들의 시체들과 함께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이 뒤로 묶여진채 끄집어내진 서용문 목사의 몸은 성한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었고 온 몸과 얼굴에 따발총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서목사는 후에 서울에 무학교회 담임으로 목회하신 문창권목사의 집례로 장포동교회의 뒷산에 장례되었다.

 

순교자 서용문 목사의 유족으로는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서광선박사와 부인 함선영교수와 2남 2녀가 있다. 아들 서광선 목사의 아내 함선영 교수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김활란 총장과 김옥길 총장의비서실장으로 1956년에서 1979년 까지 봉직했다. 김옥길 총장이 1979년 최규하 정부의 문교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문교부 장관 비서실장으로 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그 이후 이화여대 비서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가 1996년 서광선 박사와 함께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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