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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08
 제목  배덕영(1901.12.?~1950.10.?)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감리교]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01년 12월 곽선병 목사의 아들로 경기도 차주에서 출생했으며, 연희전문과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스카렛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북한 공산 치하 성화신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강당에 김일성의 사진을 못 걸게 하였고, 기독
교도연맹 위원장 수락을 거절하여 1946년 12월 16일 연행되었고, 1950년 10월 평양감옥에서 총살되었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1925 연희전문학교 졸업
1929 혀성신학교 졸업 안수
고량포교회 전도사
개성중앙전도회관 총무
1929 총리원 교육국 간사 겸 주일학교전국연합회 간사
미국 깨릿신학교 종교귝학 석사 취득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장 성화여자성경학교로 개명하고 교장
선화신학교 창설 교장

 

배덕영은 1901년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죽원리에서 목사 배선범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27년에는 협성신학교를 진학했다. 재학중에는 교량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총리원 간사 및 주일학교 전국연합회 간사일까지 겸직해 보았다. 그러나 배목사는 더 공부해야 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깨릿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배목사가 종교교육을 전공한 것은 커나가는 소년들을 예수 정신으로 교육하여 인간 개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꾼이 없는 조선에 들어와 주일학교운동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구연 동화로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교육할 때 배목사는 벌써 시청각교육을 끌고 들어왔고 주입식 교육의 풍토에 경험적 교육을 역설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전국을 돌아치며 교사 강습회를 인도했다. 교사들을 통해 조선교회에 주일학교 교육을 활성화 시킨다는 계획에서였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배목사가 주일학교 운동만 하도록 버려두지는 않았다. 일제가 신사참배의 덫을 놓고 조선교회를 극도로 탄압할 때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는 그를 교장으로 초빙한 것이다. 그는 기꺼히 교장에 취임했다. 고등성경학교라면 농촌교회 여교역자양성소였고 그들을 통해 교육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949년 12월 16일 성화신학교는 600명의 학생들이 채풀에 모여 2학기 종강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배덕영교장이 사도행전 20:25절을 봉독할 때 교수와 학생들은 깜짝 놀랐고 모두 울었다. 공산당의 신학교 탄압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배교장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예견대로 그해 성탄절에 남산현감리교회에서 성탄설교를 마치고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돼 끌려갔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문학교 졸업. 협성신학교 졸업한 그는 총리원 교육국 간사 및 주일학교 전국연합회 간사일까지 겸직하다가 도미 깨릿신학교 종교교육학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종교교육을 전공한 것은 커나가는 소년들을 예수 정신으로 교육하여 인간 개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대에 벌써 시청각교육을 도입했고 주입식교육에서 경험적 교육을 역설해 주목을 끌었다.
조선교회는 배목사가 주일학교 운동만 하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일제가 신사참배의 덧을 놓고 조선교회를 극도로 탄압할 때 농촌교회 여교역자양성소인 영양여자고등성경학교는 그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1941년 교장으로 취임한 해방될때까지 5년간 교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그 학교를 성화여자성경학교로 개명을 한것은 장로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와 구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해방 후 남과북이 갈라지자 남북교회의 교류가 끊어지자 서울성화신학교만 믿고 신학교육을 중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에 박대선 송정근 목사와 3인은 머리를 맏대고 숙의하고 평양에 성화신학교를 세워 배목사가 교장직을 맡았다 시련이 많으면 은혜도 많다고 학생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와 한학년 200명씩 강의실은 빽빽히 찼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 은 강양욱의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강압적으로 가입하라는 압력이었다. 기맹의 사이비성을 눈으로 보면서 그의 손을 들어줄 배목사는 아니었다. 결국 1949년 12월 25일 그는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폐교를 강요받았지만 거절하고 숱하게 고문을 당하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돼 얼마나 얻어맞으며 고문을 당했던지 언어 능력까지 상실했다.


이듬해 1950년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는 날 평양형무소 뜰에서 공산군의 총탄에 쓰러져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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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고리 : 대한민국, 한국전쟁, 감리교, 목사,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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