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07
 제목  박동춘(1918. 5.22~1950. 9.28) 집사
 주제어  [대한민국] [집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18년 5월 22일(음) 전북 정읍군 태인면에서 박찬국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박현철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일제 탄압으로 인하여 공직을 사직하고 신앙생활에 몰입하였으며 고등성경학교를 거쳐 매서로 활약하며 전도인의 사명을수행하던 중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어 정읍경찰서유치장에서 옥고중 불에 타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하문서당
태인공립국민학교 졸업
김제노회 겨울 성경학교 5년 주료
면사무소 주사
태인면 보안순서장

 

박동춘은 1918년 5월 22일(음) 아버지 박찬국과 어머니 손보국의 장남으로 전북 정읍군 태인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그의 나이 5세부터 한문서당에 입학해 글을 읽었다. 증조부가 훈장으로 글을 가르쳤기에 손자에게 혹독하게 교육했지만 어찌나 영특했던지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 정도였다.그렇기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5세때부터 벌써 논어 맹자까지를 읽을 정도였다. 그의 부친은 개항이 되어 과거 제도가 없어진 마당에 아들을 진서에만 매달리게 할 수가 없다고 하여 태인공립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는 소학교에서도 6년을 내리 우등을 했고 개근상까지 받았다. 박동춘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학교에서는 상급학교 진학을 적극 권면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를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정일을 돌보다 김제군에 소재한 금구 광산에 취직을 했다.그는 을종화약류 취급반장이 되어 광산에서 화약류를 취급하게 되었다. 당시 전북에는 화약류 취급 면허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박동춘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광산근무를 하며 독학으로 보통고시 준비를 했고 1935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태인면 사무소에 발령을 받아 주사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동료직원 박헌철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출석하였고 성경책장이 패일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1939년 결혼해서 아내도 예수교 신자로 만들어 온 가족이 신앙에 열심을 가졌고 가훈은 "정직, 화목, 부활"이었다. 일제하에 교회당을 징발했고 집사들로 하여금 교회를 배반하고 교역자들을 반역자로 몰아 붙이는 반인륜적 행위를 서슴치 않을 때 이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1943년 속으로부터 갈등을 이기지 못해 공직을 사직하고 어려운 가운데 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해 3년학제를  1949년 5년만에 마쳤다.
태안교회 박봉래 장로의 주선으로 전주 조요셉선교사에게 자전거를 기증받아 전서노회 매서로 활동하게 되는데 일제의 악랄한 사주를 받은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두들겨 맞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팥 넣은 찹살밥을 좋아하는 조요셉선교사를 위해 찹쌀밥을 공들여 대접하곤했다.
봄이와서 연합예배가 모일때면 박집사는 소년처럼 즐거웠고 1년에 한번씩 외부강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하면 박집사는 맨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 이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큰 소리로 울며 기도하기를 즐겼다.
 박집사는 해방 이후에도 꾸준히 매서인 생활을 하다가 1950년 6.25를 맞았다. 기독교인은 어차피 공산당과는 적이었다. 박 집사는 다들 피난가는데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동리에 남았다가 반동으로 몰려 공산군에 체포돼 내무서에구금되었다. 죄라면 예수믿은 죄 뿐이다. 이 때는 태인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그의 모친 손집사는 10리길을 멀다 않으시고 아침 저녁으로 조석을 지어다 아들을 먹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어찌된 영문인지 1차 구금에서 풀어놔 주어 잠시 박집사는 집에 돌아와 쉬게 되었다. 그의 아들 일원씨의 회고는 눈물겹다 “ 어느날인가 사과를 한 광주리 사다가 식구들이 먹게 되었는데 어린 제가 작은 사과를 부친께 갖다 드렸죠. 이것이 저와 부친과의 마지막이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박집사는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8월 어느날 재차 내무서로 끌려갔는데 이번에는 태인지서가 아닌 정읍경찰서로 이송해 버린 것이다. 정읍경찰서까지는 거리가 멀어 조석조차 해 나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정읍경찰서에는 박집사를 전도했던 박헌철 집사도 함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박헌철집사의 부인 박순정 집사가 밥을 해 날라 두 사람은 굶지 않고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수감생활도 잠시였다. 국군에 의해 9.28수복이 이루어지며 다급한 공산군은 정읍경찰서 유치장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버렸다. 1호실 - 3호실에는 150여명의 기독교인이 수감돼 있었는데 박헌철집사같은 한두 사람만 제외하곤 모조리 타 죽었다. 박동춘 집사도 정읍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교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유족으로는 아들 박일원씨를 위시하여 2남2녀가 있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대한민국 > 순교자

>> 연결고리 : 대한민국, 한국전쟁집사, 순교자

 



   


A-Z




  인기검색어
kcm  377167
설교  190931
교회  140303
아시아  113126
선교  101255
세계  91139
예수  87697
선교회  79712
바울  75318
사랑  75119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