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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01
 제목  김인준(1886. 9.16~1947. 1.17)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26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톤신학교와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신학교에서 교수를 엮임하였다. 해방 후 신학교 교장의 중임을 맡아 북한 정권 교육성 등록을 거부하고, 교수학생의 기독교도 연맹 가입을 불허하는 등으로1947년 1월 17일 소련군 사령부에 연행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대성학교, 숭실중학교 졸업
숭실전문졸업.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제 19회)
미국시카고대학졸, 프린스턴 신학교 뤼취몬드대학졸, 유니온 신학교 박사학위 취득
숭실학교교사,평양숭인상업이자장, 숭실학교 교감, 숭덕학교이사장,숭실학교이사,구약성서개혁,평양서성리교회담임, 숭실전문학교이사,평양상교회 담임, 평양신학교 교장.
평양신학교 교수, 상흥교회 담임.

 

김인준은 1886년 9월 16일(음7월 27)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부농은 아니었으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4남매중 막내로 출생했으나 출생 두주 되던날 부친의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서 서당에서 공부했다. 16세에 논어,맹자, 4서 3경 등 한학은 있는대로 다 마치니 훈장께서 너는 이제 더 배울 것이 없으니 도시로 가 신학문을 공부하라고 평양에 가서 서양인 집에서 일을 하며 대성학교와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마음이 곧고 청렴하며 부지런하여 신용을 얻어 일감은 항상 떨어지지 않고 공부도 뛰어나고 운동도 뛰어나 넓이 뛰기에서 1등을 하여 메달도 타고 금시계도 상으로 받았다. 그는 숭실에서 1개월만에 월반하여 3개월만에 진급하여 5년과정을 3년에 마치고 본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서양인 한분이 남은 하나를 배워주면 열을 알수 있어도 천재라고 하는데 너는 백을 아니 어찌된 일이냐고 미국에 데려다가 공부시키겠다고 했지만 어린 아내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차마 못떠났다고 한다.
김인준목사는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1926년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고 1929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장학생으로 선발 시카고 대학, 프린스턴,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를 수행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6월 교수요원으로 귀국했다.


김목사는 1933년 6월에 귀국하여 신학교육은 물론 저술, 번역작업 등 3중고에 시달리면서도 평양부 외상흥리에 소재한 상흥교회를 맡아 해방이 되기까지 교역을 했다.
1945해방 후 김진수목사를 도와 이북5도연합회를 조직 총회없는 이북지역의 총회로 신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했고 이북5도연합노회는 만장일치로 김인준 목사를 학교장으로 승인했다. 공산정권과 기독교의 부디침은 1946년 첫번째 3.1운동 기념행사에서 부터였다. 공산정권은 3.1운동기념식을 자기들이 주관적으로 개최하려고 했다. 평양교회 교역자들은 공산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3.1운동 기념행사의 관주도를 반대하고 3.1운동의 진원지였던 장대현교회에 모여 행사를 치루었다. 신학생들은 교회로 파견되어 그 기념 \행사 준비를 독려하게 했다. 그해 3.1일 군중은 물밀듯이 장대현교회로 모여들었다. 389장 "믿는 사람들아 군병같으니----- 예수교회 영영 왕성하리라----"를 목이 터지게 찬송했다.


이같은 3.1운동 기념은 선언이었고 시위였다. 3.1절 기념 행사 사건이 있은 후 공산당은 기독교 신앙을 와해시키려고 악랄한 계획과 교회탄압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꾸몄다.
강양욱목사는 교회의 단결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기독교도연맹을 출범시키고 강권적으로 교역자들의 가입을 권유했다. 강양욱은 신학교에까지 침투해 공산주의에 협력할 것을 회유했지만 김인준목사는 거부했고 자신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교직원이 그들의 강압에 의하여 가입하면 "정치운동을 하려면 밖에 나가서 하시지요"하며 가차 없이 쫓아 버렸다.


교장 김인준목사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하기를 거절하자 공산당은 학교 교장실 복도에 내무성의 경찰을 상주 시켰다. 김목사는 1946년 겨울옷 솜바지 저고리에 솜버선까지 신고 출근을 했다. 끌어가면 미련없이 끌려가겠다는 자세였다.
공산군은 1946년 11월 19일 김목사를 1차 검속했다가 일단 돌려보낸 후 이듬해인 1947년 1월 17일 소련군 사령부 특무대 요원들을 보내 김목사를 연행하면서 그와 함께 이북5도연합노회 목사 전원이 연행되어 함께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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