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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1908년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했다.
1926년 오치서숙 동학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이곳에서 한글·역사·산술·과학·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 〈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 있는데, 〈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 인간수업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으며, 〈농민의 앞길〉은 농민과 근로자 중심의 이상국가건설,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등 농민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1928년에는 증산운동·구매조합조직·토산품애용·부업장려·생활개선을 통해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조직했다. 또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도 개최했으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설립해 운영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시켰다. 1929년 2월에는 부흥원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야학아동 학예회에서 여우 같은 일본제국주의 당국을 규탄하는 풍자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공연 다음날 덕산주재소에 호출당했다. 1929년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했으며, 4월 23일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지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발족 당시 회원은 38명이었으며, 매월 10전씩을 회비로 거두어 야학회·강연회 개최, 농가부업 장려, 소비조합 창설, 위생보건사업 추진 및 청소년체육발전 도모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윤봉길은 1928년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중이던 이흑룡(李黑龍)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전선의 형세를 전해듣는 한편,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민족운동에 대한 방향전환을 모색하다가 김구의 명령을 받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병공창[上海兵工廠] 주임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전승축하기념식장에 던졌다. 이 의거로 상하이 파견군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이 즉사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타[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이 거사 직후 윤봉길은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를 거쳐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 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이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의 독립열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임시정부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정부의 후원 아래 항일연합전선을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 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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