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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8-08-21
 제목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10일생(음))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호는 정암이다. 개국공신 온()의 5대손이며 양절공(良節公) 조온(溫)의 현손이며 사헌 부 감찰 조원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광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광조는 1510년 2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 조지서사지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이후 1518년 11월에는 사헌부 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개혁 을 추진하다가 1419년 12월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

그는 여러 요직을 거치는 동안 중종에게 늘 간언하여 바른 정치를 펴는 데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현량과를 시행하여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중용하는 데에 힘썼으며, 여씨 향약을 도입하였다.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중종반정 공신 중 대다수가 거짓 공훈으로 공신에 올랐다 하여 이들의 거짓 공훈을 박탈하고자 하였으나, 자신들의 거짓 공훈이 삭제될 것을 두려워한 훈구파 신하들이 이에 반발하여 오히려 조광조를 모함하였다. 결국 남곤, 심정, 홍경주의 모함과 중종의 변심으로 조광조는 전남 능주(지금의 화순)에 유배되어 1519년(기묘년)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인종 원년에 복권되고, 선조대에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1610)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에 있으며 묘소 왼편에 심곡서원이 있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조광조 등장의 시대적 배경
1506년(연산군 12) 년에 성희안과 박원종은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에게 도움 을 청하여 호응을 얻어서 반정에 성공하여 대비(大妃: 成宗의 繼妃)의 윤허를 받아 연산 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사건이 중종반정인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후에 중종으로 불리게 되는 진성대군은 반정 전야까지도 자신이 왕으로 추대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 때문에 즉위 초반부터 왕으로서 정치권력을 장악하 기가 매우 어려워 결국 반정공신 세력에 의지하여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특히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의 삼인은 그 권력이 대단하였다.


조광조 출생 전후 조선 전기의 시대상황은 국가의 중심 권력이 흔들리고 있을 뿐만 아니 라 국가를 이끌어 가는 유교적 명분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종 반정의 주역들은 동시에 연산군대의 중신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반정 이후 정국공신에 책 봉되어 많은 특혜를 받고 중종 초의 정권을 독점하였다. 중종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의 주역들에 의하여 옹립된 왕이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를 것에 대한 준비를 갖출 여유가 없 었으며, 연산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정치적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배경이 전혀 없었으므로 중종의 왕권은 무력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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