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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8-04-11
 제목  현대설교학
 주제어  
 자료출처  한세대 신대원 정인교 교수  성경본문  
 내용

               ... 目 次 ...

             1.[현대설교학]의 유용성
             2.[현대설교학]의 주요 질문들
             3.[현대설교학]의 개요

 

1.[현대설교학]의 유용성

 

프리드리히 빈처 박사의 글은 30년 전에 독일어권 개신교의 설교학 역사를 다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우리 한국 실천학계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큰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우리 설교학계가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설교관련 쟁점들을 그의 글이 넓고도 깊게 분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슐라이에르마허부터 초기 변증법적 신학에 이르기까지 서구 강단의 관심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 하는 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서구 실천신학계의 설교이론이 어떤 궤적을 그려며 변해 왔는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글에 나타난 서구교회의 다양하고 종합적인 설교이론을 고찰함으로써 우리 한국강단의 편향적이고 협소한 설교이론을 교정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빈처 교수의 지적대로 설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단순화를 방지하고 미래에 전개될 설교의 경향성을 드러내 준다. 또한 이러한 고찰은 기존의 설교이론들이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의 윤곽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실 성경본문, 회중, 설교자 등 설교의 3요소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창출되는 설교는 어느 하나의 이론만으로 충분히 설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며 설교의 다양한 전개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새롭게 부각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빈처 교수의 글은 우리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된다고 본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신학과 설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학은 설교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설교는 계속해서 신학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글에서 우리는 설교가 신학적으로 적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된다. 올바른 설교라면 신학작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교회와 세계 사이의 대화를 내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빈처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설교관련 질문들은 아래의 10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란 무엇인가?", "올바른 설교란 어떤 것인가?", "왜 설교하는가?", "어디서 설교하는가?", "설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무엇을 설교하는가?", "누구에게 설교하는가?", "어떻게 설교하는가?", "설교는 무엇으로 짜여지는가?", "설교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2.[현대설교학]의 주요 질문들
 
①설교의 정의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설교의 정의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설교란 관념화된 경건한 자의식의 전달 또는 내적인 삶의 설명행위"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설교란 형제에게 친근하게 설명하는 연설과도 같은 것이다. 바우어에게 있어서도 설교란 회중의 기독교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니츠에게 있어 설교란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의 봉사이다. 하르낙에 따르면 설교란 신앙인들을 향한 연설행위이다. 테레민에게 있어서도 설교란 하나의 행위요, 회중과의 대화이다. 함스에 따르면 설교란 현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어야 한다. 크레메에게 있어 설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설교란 하나님 말씀의 설교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늘 날 설교의 말해지는 말씀 가운데 행동하신다.

 

②설교의 방향성

"올바른 설교란 어떤 것인가?"라는 설교의 방향성에 있어, 바르트는 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를 거의 동일시한다. 그에 따르면 올바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이야기되는 연설이다. 그에게 있어 설교의 방법론과 회중의 삶은 뒤처지고 만다. 그에 따르면 설교는 인간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신앙과 경외를 요구한다. 투르나이젠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다"는 칼빈의 명제에서 올바른 설교의 실체를 찾는다. 그에 따르면 올바른 설교의 기준은 본문접합성에 있다.
고가르텐에게 있어 참된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관한 말씀을 통해 친히 임재하시는 그러한 설교이다. 트릴하스는 순수 복음설교라면 세계와 그 질서를 다룬다고 본다. 사실 올바른 설교란 신학적이면서도 실제적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설교라면 본문적합성, 시대부합성, 연설적 특성 등을 골고루 조화롭게 갖춰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

 

③설교의 목적

"왜 설교하는가?"라는 설교의 목적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설명으로서의 설교가 지닌 특징을 교화에서 찾는다. 그는 회중의 종교의식을 깨우는 교화에 언제나 설교의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바우어도 설교의 궁극적 목적을 교화에서 찾는다. 슈타인마이어는 각성이 아닌 촉진에 설교의 과제가 있다고 말한다. 바서만은 기독교 의식을 강화하고 촉진시키는 교화를 회중설교의 목적으로 본다. 말하이네케 역시 설교와 예배의 목적을 교화에서 찾는다. 19세기 설교학에 있어 교화는 설교의 목적으로 자리잡는다.
스티어에 따르면 설교를 단지 교리에 대한 회중신앙의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설교는 회중신앙의 촉진수단이어야 한다. 니버갈의 설교학에 있어 설교의 목적은 회중양육과 삶의 지원에 있다. 그에게 있어 설교란 하나의 충격이요, 공격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 설교의 과제는 결단으로 촉구하는 것이다.

 

④설교의 맥락

"어디서 설교하는가?"라는 설교의 맥락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본적으로 설교를 예배의 한 요소로 파악한다. 슈바이처도 설교를 예배에 복속시킨다. 그에 따르면 설교적인 것은 제의적인 뿌리로부터 파생되어 목회적인 것을 거쳐 선교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말하이네케도 설교의 개념을 예배의 개념에서 연역한다. 하르낙의 설교학도 예배적인 맥락에 집중해 있다. 바우어의 설교학 역시 예배에서 행해지는 회중설교에 대한 이론이다. 슈타인마이어도 예배적 맥락에서 설교를 논한다.
그러나 리거는 예배적 설교교의에 대한 반제로 실천적 설교를 내세운다. 그는 예배와 설교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설교의 탈의식화를 주장한다. 반면 스멘드는 예배와 설교의 부조화성을 지적하면서 제의와 설교의 모순관계를 부각시킨다. 그는 기독교 예배에서의 설교의 독재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배학에서는 제의축제가 중심이 된다. 피커는 보다 체계적으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파악한다. 그의 설교학에 있어 설교를 제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관심밖으로 밀려난다. 바르트는 예배가 로마 카톨릭에서 제단성례의 장소였다면 기독교에서는 설교의 장소여야 함을 상키시킨다.

 

⑤설교의 유형

"설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라는 설교의 유형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전제가 말하는 설교는 회중설교이다. 그에 따르면 예배 속의 회중설교는 선교적 과제를 갖고 있지 않다. 슈바이처의 이론설교학이 추구하는 대상도 회중설교와 제의설교이다. 그에 따르면 설교는 제의적인 뿌리로서의 공동신앙을 진술하는 것으로부터 적용적인 권고와 선교적인 각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슈타인마이어에에 있어 예배설교는 회중설교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스티어는 회중설교와 선교설교를 동일시한다. 그는 회중설교에도 선교적 과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양자 사이의 차이를 강압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다. 크리스트리브도 회중설교의 선교적 목적을 언급한다. 회중설교가 본질적으로 전도설교와 구분돼야 한다고 해도 회중설교에는 전도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클라인에르트도 설교가 예배 속에 있다 해도 전도적 요소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독일에서나 한국에서나 예배설교, 회중설교에 전도적 성격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르낙에게 있어 설교는 말씀의 선포라는 의미에서 케리그마이며 회중의 신앙생활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호밀리아이다. 뢰플러는 회중을 지루하게 만드는 통상적인 설교를 비판하면서 각 설교는 상황에 따른 설교여야 한다고 말한다. 라인하르트도 설교가 그때그때의 회중과 특수상황에 확고한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드레브스는 주일설교에도 특수설교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⑥설교의 내용

"무엇을 설교하는가?"라는 설교의 내용에 있어, 슈바이처는 개개의 설교가 본문중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수사학의 기교들을 수용하면서도 설교재료가 설교형식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설교는 본문적합적이어야 하면서도 본문과 구별되는 주제를 가질 수 있다. 하르낙도 설교의 내용을 설교의 형식에 앞세운다. 스티어는 각 설교의 과제를 本文詳論으로 국한시킨다.
슈타인마이어도 설교란 반드시 본문설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중의 원하는 대로 설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경본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경본문을 설교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는 설교에서 시사적인 현실문제보다는 초시간적인 주제를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그도 재료가 형식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피커에 있어 설교는 본문 혹은 본문 주제설교이다. 설교의 주제는 본문에서 나와야지 설교자의 상상력으로부터 나와서는 안된다. 크레머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우어는 본문설교에 있어서도 회중의 삶과 설교자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다. 고가르텐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공표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⑦설교의 대상

"누구에게 설교하는가?"라는 설교의 대상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예배 속의 회중에게, 교회 속의 형제에게 설교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설교대상은 예배 속의 회중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점차 확산된다. 스티어는 슐라이에르마허의 회중설교 이론에 반대한다. 그에게 있어 회중설교는 선교설교와 동일한 방식으로 선포적 성격을 갖는다. 팔머는 회중을 정치적, 학문적 회중으로 보지 말고 그냥 회중으로 보아야 한다며 설교의 대중성을 강조한다. 니버갈도 설교의 대중성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그는 설교가 쉬운 언어로 설명돼야 한다고 말한다.

 

⑧설교의 방법

"어떻게 설교하는가?"라는 설교의 방법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설교학을 하나의 기예론으로 이해한다. 그는 설교자와 성경본문의 대화, 설교자와 회중의 대화로 설교방식을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설교에 있어 최초로 심리학적인 관찰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인물이다. 니츠의 설교학도 기예학의 한 범례에 속한다. 하르낙의 설교학 역시 하나의 기예론이다. 바서만은 설교학을 수사학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그는 웅변적, 심리적 요소를 중시하는 수사학을 수용한다. 그의 설교학은 설교의 주관적, 심리적 요소를 폭넓게 다룬다.
시켈은 각 설교가 구체적인 상황과 밀접해야 하기에 대화적인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팔머는 이론과 실제의 조화를 주장한다. 그의 설교학은 현장을 위한 봉사를 강조한다. 클라인에르트는 회중에게 제대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지식과 사회학적인 지식에 정통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는 설교의 합회중성을 강조한다. 바우어는 설교가 짧게, 보다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버갈은 설교에서 상투적인 말을 제거해야 한다고 밝힌다.
롭스는 본문접합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설교의 시대부합성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고 옳게 지적한다. 툴록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렌토르프는 종자와 토양이라는 비유를 통해 설교에서 회중의 마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설교에서의 심리학적 기능을 주장한다. 니버갈은 설교실행에 있어 비상투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심리학적인 지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귀납적인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바르트에게 있어 회중의 특수한 상황은 이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일차적 관심이다. 트릴하스는 설교에 있어 심리화 추구와 시대부합적인 노력을 반대한다. 그는 본문접합적인 설교를 부각시킨다.

 

⑨설교의 요소

"설교는 무엇으로 짜여지는가?"라는 설교의 요소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성경본문의 내용, 회중의 요구, 설교자의 신앙의식을 설교의 3요소로 본다. 하르낙의 예배학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교회회중의 신앙, 설교자의 개성 등을 설교의 주요 요소로 파악한다. 말하이네케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자의 주관적인 확신, 회중에 관한 관심 등을 설교수행의 3대 요소로 이해한다. 바우어의 설교이론에도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설교의 3요소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⑩설교자의 특성

"설교자는 누구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설교자의 특성에 있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설교자를 회중의 대표자로, 신앙의식의 전달자요, 수호자로 이해한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에의 봉사자로 머물러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군림하거나 말씀을 변경해서도 안된다. 그렇지만 설교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설교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팔머도 모든 설교자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설교방식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테레민은 설교자가 회중과 접촉해야 하며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교류감정이 충만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설교란 교리의 언명이 아닌 증언적 연설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개성과 특별한 재능을 포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비움가르텐과 더불어 니버갈은 설교자의 설득력과 개인적인 신뢰성을 중시한다. 트릴하스에 따르면 설교자는 항상 자신을 하나님이 말씀을 걸어오시는 대상으로, 말씀에 부딪힌 자로서 설교해야 한다. 그의 설교학에서 설교자의 개성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에 따르면 설교자는 설교단 위에서는 신학자여야 하나 신학적으로 설교해서는 안된다.


3.[현대설교학]의 개요

 

(1)슐라이에르마허 이래 19세기 설교학

19세기 들어 설교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설교학의 학문적, 신학적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서 추구하던, 설교학을 '영적인 수사학'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이 시기에 포기되었다. 이제 설교학은 근본적인 원리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설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설교되어야  하는가? 라는 보편적인 질문이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데 모두가 인식을 같이 했던 것이다.
독일어권 개신교의 설교학은 '설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다. 독일교회 설교학은 슐라이에르마허, 니츠, 하르낙으로 이어지면서 학문적, 신학적 성격을 확실하게 갖게 된다. 이 시기에 설교학은 종전까지 헤어나오지 못하던 수사학의 포로에서 해방되었다. 설교학적 이론의 문제, 이론과 실제의 문제는 설교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슈바이처는 설교학을 이론설교학, 재료설교학, 형식설교학으로 나누는 한편 각각의 신학적, 학문적 설교학의 기저를 이루는 일련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늦어도 슈바이처 이래 설교의 이론적 문제가 학문적인 설교학 지평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이외에 설교학의 구성과 관련하여 재료적, 형식적 문제들이 계속해서 풍부하게 다루어졌다. 특별한 주제 가운데는 어떻게 설교가 설교자 개인의 재능에 의해 좌우되는가 하는 문제와 설교의 합회중성 등 설교의 개개형식의 적법성과 한계를 둘러싼 문제들이 특히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핵심주제와 개별적인 주제들의 내용이나 강조점은 매우 다양했다. 이런 다양성은 설교학의 구성에도 역시 다양성을 가져 왔다.
설교학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설교학을 서술해 나가는 원리가 그 자체로 집중적이고 상세한 그리고 지루한 숙고의 대상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처음으로 과연 설교학이 설교이론으로서 예증될 수 있는지, 된다면 어느 정도인지 하는 문제가 확연히 대두되었다. 설교학의 설명은 슈바이처와 특히 말하이네케의 다소간 추상적인 이론에서 실천에 대한 팔머의 강력한 소개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하르낙과 클라인에르트의 설교학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동시대의 신학과 설교학을 신학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매우 다양했다. 가장 전면에 돌출되었던 것은 설교에 대한 예배적, 회중적 이해였는데 이것의 발단은 무엇보다도 슐라이에르마허의 근본입장, 즉 공동의 신앙을 근거로 '형제가 형제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려던 설교이해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술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은 정반대의 또 다른 신학적 견해들에 의해 해석되고 또 교정되었다. 설교의 전달적 요소와 '설명'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은 그 어떤 신학적인 영역으로 볼 수 없고 단지 19세기 설교학의 한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설교학들은 하나님 말씀에의 봉사 혹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로서의 설교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현실적, 성령론적으로 이해되었으며 다른 한편을으로는 교회에 기초한 복음 혹은 교리적인 언명에 대한 설교학적인 설명과 동일시되었다. 설교학과 실제 실행 사이의 상호영향이라는 문제는 대략 1830년이 지나면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설교학은 한편으로 그 당시의 유명한 몇몇 설교자들의 설교로부터 많은 동기를 부여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이론들이 본질적으로 설교현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설교학의 새로운 경향(1890-1920)

1890년부터 1920년까지의 시기는 설교학이 요동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앞장섰던 대표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이 고난의 인간현실 속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교회와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다수의 물결을 중지시키고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가는 사람들을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기독교의 설교야말로 가장 시급한 교회의 활동과 실천적, 신학적 이론의 목표로 인식되었다.
설교는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독교인됨을 촉진시켜야 했으며 동시에 '유랑자들'에게도 말을 걸어야 했다. 비록 제시된 실제방식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이런 목표설정에 있어서는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대표자들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졌다. 초기에 여기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리츨학파였다. 대략 1900년부터 종교학적 방식이 설교학에 사용됐으며 니버갈의 저작들은 소위 '현대적' 설교학의 두 번째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설교학을 총체적으로 다룬 것은 당시 변혁의 시대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관심이 모아진 것은 개개의 문제들이었다. 특수설교, 회중과의 커뮤니케이션 의지, 설교에 대한 심리학적인 실행, '윤리적' 설교, 시대적으로 규정되어지는 성경의 내용과 관련된 성경해석의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실성에 대한 요구 등이 그 당시 설교학이 주로 제기했던 문제들이며 또 해결목표이기도 했다.
선포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향을 몰고 왔던 배경으로는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어가는 세계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자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소위 현대적 설교는 설교자의 책임을 강조하므로 설교자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소위 현대적 설교이론 역시 그 자체로 자아비판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이론은 일단의 주도적 개념들, 가령 예를 들어 설교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특수화와 차별화 등을 지향한다.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개개의 설교가 하나의 '창조적 행위'여야 한다는 원칙을 획일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설교와 설교학에서 나타나는 일단의 새로운 경향들을 이론적으로 수용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교회의 선포가 그 목적에 가까이 도달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 질문은 1890년에서 191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 새로운 설교개혁의 전성기가 지나가면서 더욱 강하게 부각됐다. 당시 지식층이 교회에 나오는 수치는 매우 낮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은 교회에 대해 거부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리텔마이어는 그 근거의 하나를 '현대신학'의 '종교적인 무능'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그는 설교의 문제를 신학의 문제라는 보다 폭넓은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에 따르면 현대신학의 하나님 신앙은 많은 경우 기독론이 몰락한 이후에 남은 것들이다.
신학적 깊이의 상실에 대한 리텔마이어의 이러한 날카로운 진단은 처음으로 지극히 미미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호응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무게의 중심이 지엽적인 데서 설교의 중심적인 문제로 옮겨 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텔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그것,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과 문화를 우리가 화해시킨 것으로 아마도 그 표어 자체는 우리가 부인했을 것이지만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그 작업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화해시킨 것 그리고 일치화한 것은 약하게 만들 뿐이다. 오직 강하게 서로 대치하는 것만이 강하게 만든다."

 

(3)설교의 과제에 대한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새로운 자각

1차 세계대전 이후 10년간에 나타난 복음적 설교의 과제에 대한 새로운 의식은 오늘 날의 설교학과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지평에 서 있다. 바르트, 고가르텐 그리고 불트만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보여주었던 공동대항이라는 초기 단계 이후,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했을 때, 그들이 제각기 다른 길을 갔지만 이런 설교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서는 크게 변한 게 없다. 따라서 '변증법적 신학'의 기본 주제들에 대한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 오늘 날의 신학적 상황은 변증법적 신학의 초창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장한다. 오늘 날의 설교학 역시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어떤 조항들이 다시 새롭게 수용되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설교학은 새로운 신학의 이론적 성격에 상응하게 무엇보다도 설교의 의미문제에 전적으로 관심을 돌렸다. 현대적 설교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소위 회중과의 소통에 대한 노력을 초기 변증법적 신학은 다른 문제제기를 통해 우선적으로 대치시켜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트릴하스는 자신의 설교이론을 통해 설교자는 강단 위에서 교회와 세계 사이의 대화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던 것이다. 특히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것은 설교에 관한 초기 바르트의 원리적이고 또 부분적으로 편향된 질문들, 설교에 대한 깊은 숙고 그리고 기존 설교학에 의해 제기됐던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신학적인 새 인식들과 연결시켰던 트릴하스의 설교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해 설교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킨 것은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절대적인 공로이다. 바르트와 투르나이젠은 말씀이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말씀의 능력으로 산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들에 따르면 회중은 설교들에는 피곤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설교에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변증법적 신학은 그 어떤 완성된 설교학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으며 트릴하스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완성된 설교학이 나왔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려 하였으며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진지하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혹 혹은 조언 불능성이 바르트와 투르나이젠, 고가르텐과 불트만의 선포의 문제에 대한 초기 입장표명의 보편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런 위기와 관련하여 그들에게는 설교자의 다양한 문제들이 두 번째의 차선적인 항목들로 나타났다. 이러한 위기의 탈출구로 바르트는 성경의 사신과 사신이 주는 '새로운 세계'라는 약속을 다시금 새롭게 또 편견없이 경청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가 모든 설교의 성경본문과의 접맥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모든 올바른 신학은 계시와 연관돼 있다는 신학적인 공리로부터 그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둔성, 접맥될 수 없는 그리고 말을 걸어오는 말씀 가운데 그분이 오심 등에 대한 강조는 변증법적 신학의 초기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하나님의 구두 말씀의 형태 속에서 선취된다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투르나이젠은 설교를 계시의 '도구'로 기술했다. 바르트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세 번째 형식을 보았다. 하나님은 설교 가운데 스스로 말씀하신다는 약속에 대한 신앙의 표지 속에서 바르트는 설교의 상황과 과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이 스스로 반복해서 당신의 말씀을 말씀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로서 인간의 말을 말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의 봉사의 한계와 과제가 주어진다."

 

 

>> 목차고리 : 신학 >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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