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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10-05
 제목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니케아 공의회
 주제어  [교회사] [초대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논쟁들 중에서 기독론 논쟁(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중 예수님의 신성을 확립한 이 논쟁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야 공의회(Nicaea, 325년 5월)에서 일단락을 맺었는데, 이 회의는 318년 아리우스(Arius, 250-336)에 의해 발생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소집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256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일 뿐이라고 가르쳤던 안디옥의 루키안(Lucian)에게서 수학했다. 그러나 루키안은 후에 자신의 주장을 번복했다. 루키안은 아리우스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아리우스와 4세기의 거의 모든 아리우스주의자들이 그에게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리우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가르침을 통해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신성의 절대적 단일성만이 최고의 완전성을 의미한다는 입장에 서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이었다. 반면에 성자(聖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는 하나님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자는 무(無)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며, 성부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로인해 하나님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허락되었으며 본성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죄가 없고 불변하게 됨을 허락받았다고 생각했으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아버지를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지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그러한 사상과 관련한 서신을 주고받았고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도 동조적이었다. 323년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정죄되었으나 논쟁은 깊어만 갔다. 314년 8월 1일에 도나투스 논쟁을 중재한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324년 9월에 감독 코르도바의 오씨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하였다. 그는 325년초 안디옥을 거쳐 니코메디아에 이르는 과정에서 안디옥에 머물며 안디옥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아리우스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정죄되고 안디옥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근절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입지를 세워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리우스의 주장이 퍼지자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고 콘스탄틴 대제는 제국이 사상적으로 분열되는 것을 원치않았기에 논쟁 당사자들을 중재하고 정리하기를 원하였다.
  콘스탄틴 대제는 니케아에서 회의를 열었고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불리는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아리우스와 그의 교리가 정죄되었고,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nt Patri)이라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신조로 공표되었다. 니케아회의의 대적들은 추방되고 정죄되어 마르마리카의 테오나스(Theonas of Marmarica)와 프톨레마이스의 세쿤두스(Secundus of Ptolemais)를 중심으로 두 흐름으로 퇴조하였고 아리우스는 일리리아(Illyria)로 추방되고 그의 서적들은 불태워졌다. 그 후 소아시아에 있는 동료들과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딸 콘스탄티아의 영향력 있는 지지로 추방지에서 돌아와  타협신조에 동의한 뒤 교회로 다시 입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해를 하기 바로 직전 인 336년경 콘스탄티노플 거리를 걷다가 쓰러져 죽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장소는 처음 앙퀴라로 예정되었으나 후에 니케아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cursus publicus, 참석자들을 위한 편의)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6월 19일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는데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 간 계속되었다.
  회의에서는 ㉠부활절의 날자(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폴리갑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일로 주장) ㉡20개의 교회 계율제정(디오클레티안 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할권 획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성직자의 직위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분열자들과 이단자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본질(同一本質, homoousios)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니케아 공의회의 참석자는 대부분 동방지역(Asia, Syria, Palestine, Egypt, Greece, and Thrace:교회사에서 동방과 서방을 구분하는 것은 지역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했는지 라틴어를 사용했는지의 차이로 구분한다)의 감독과 사제, 부제들로서 대부분 헬라인들이었다. 라틴인들은 코르도바의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 카르타고의 세실리안(Cecilian of Carthage), 칼라브리아의 마가(Mark of Calabria), 디용의 니카시우스(Nicasius of Dijon), 파노니아(Pannonia) 지방 스트리돈의 돈누스(Donnus of Stridon)와 서방에서 참석한 두 명의 감독들이 참여하였다. 서방에서 참여한 두명의 감독은 빅토르(Victor)와 빈센티우스(Vincentius)로서 교황 실베스터(Sylvester)가 병이 들고 고령인 까닭에 참석치 못하고 대신에 교황 사절로 참석한 것이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중요 인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Alexander of Alexandria),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of Antioch), 예루살렘의 마카리우스(Macarius of Jerusalem),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미라의 니콜라스(Nicholas of Myra),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젊은 부제(deacon)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가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세력판도는 다음과 같았다.
아리우스 동조파(소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중재그룹(대다수)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오리겐의 제자들 아리우스 반대파 /  감독 알렉산더, 부제 아타나시우스, 황실감독 호시우스 참석자들의 수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easarea)는 참석자를 250명이라고 하였고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300명이라고 하였으나 후에는 318명이 정확하다고 하였다. 참석자가 318명이라는 기록은 358년 말-359년 초의 것으로 보이는 프와띠에의 힐라리 (Hilary of Poitier)의 글에서 처음 나타나며, 후기 아타나시오스의 글에서, 그리고 교부들의 글에서 보편적이며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n)도 이 입장을 취한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헬라어의 300을 가리키는 Τ는 십자가를 의미했고 18의 수 ΙΗ 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참석자의 수는 "주님의 수난의 표식과 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기에 주께서 회의에 계셨다고 하여 이 회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십자가의 표식과 예수의 이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단자들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제압하는 하나의 승리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것으로 창세기 14장 14절에 근거한 아브라함의 종들의 숫자였다.  현대의 학자들은 220명 정도로 추산한다.
  콘스탄틴 대제가 사망한 후 제국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양분되었다.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에 동조적이었던 콘스탄스(Constans)는 서로마 지역을, 반대입장이었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동로마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동로마 지역에서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에 동조적이었던 아타나시우스는 안디옥회의의 결정으로 면직되어 추방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자 그의 지배하에 니케아파는 박해를 받았고,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anomoios)고 선언했다. 이 '아노모이오스'주의자들은 357년 시르미움에서 자기들의 견해를 승인받는 데 성공했지만, 극단적인 그르의 주장은 성자가 성부와 '유사한 본질'(homoiousios)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온건론자들을 자극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처음에는 이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성자가 성부와 '유사하다'(homoios)고 주장한 아카키우스가 이끄는 유사본질론자들을 지지했다.
  359년에 콘스탄티우스는 두 번의 회의를 소집했다. 한번은 동방인 셀류키아(Seleucia)에서  다른 한번은 서방지역인 리미니(Rimini)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그는 유사본질적인 장정을 강요하였다. 이 회의는 아버지의 본질로부터라는 문장과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를 뺀 신조를 공표함으로써 니케아회의에 대립적인 회의가 되었다. 341년부터 360년 사이에 14번의 공의회가 열렸는데 이 시기에 아리우스파의 일부 혹은 반-아리안주의자(Semi-Arian)들이 유사본질(homoiousion)을 동조하였다. 유사본질이란 단어는 한 그룹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점을 다른 그룹에서는 유사성을 강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니케아의 결정을 누르고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 결정은 처음에 제국에서 호응을 받는 듯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가 361년에 사망하자 쇠퇴하였고, 동로마(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364-378)가 정통파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했지만, 동일본질론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unity of God)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 단일성은 핵심적인 본질에서 아들과 성령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가이사랴의 바질, 나지안쯔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Basil of Caesarea, Gregory Nazianzen and Gregory of Nyssa) 같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동일본질론자들(Homoiousians)이었다. 그들은 아타나시우스의 도움으로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의 세 위격을 가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동일본질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단일성를 부인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세 위격의 구분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교부들은 '세 위격(hypostaseis)안에서 하나의 본질(ousia)'이라는 삼위일체를 위한 카파도키안 장정(Cappadocian formula)을 도출해 내었다.


  362년에 있은 알렉산드리아 의회(Synod)에서 니케아 신조는 재선언되었고 본질(ousia)과 위격(hypostaseis)이 해설되고 때때로 성령의 종속적 개념을 가진 반-아리우스주의(Semi-Arianism)의 한 형태로 인식되는 마케도니안주의(Macedonianism)가 정죄되었다. 반-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가 성부와 '유사'(homoiousios)하지만 '동일 본질'(homoousios)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희랍어의 '요타'(ι)를 첨가하고 빼고하는 차이이지만 유사본질론은 정통 기독론에서는 먼 개념이다.


  서방에서는 밀란의 암브로스(Ambrose of Milan)가 니케아신조를 위한 전사였다. 378년 서방의 황제 그라티안의 지원하에 열린 시르미움(Sirmium) 공의회에서는 6명의 아리우스파 감독들이 면직되었다. 황제는 379년과 380년에 서방에서 아리우스주의를 금지하는 일련의 법령들을 선포했다.
  동방에서는 발렌스(Valens) 사후 그를 계승하였고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에 동조적이었던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발렌스 치하에서 추방되었던 모든 감독들을 교구로 복직시켰다. 그는 380년에 아리우스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325년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이로써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그리고 서방에서는 아퀼레이아(Aquileia) 공의회를 통하여 아리우스주의를 극복하고 승리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7세기말까지 일부 게르만족 내에 존속하였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만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음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언파가 아리우스주의의 후예들로 보여지며, '여호와의 증인'들도 아리우스파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한편, 니케아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일명 니케아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신 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존재하게 된,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고 성육신하셨으며, 인간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제3일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죽은자와 산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리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는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과 '그가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또다른 위격 혹은 본질로부터 나셨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변화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 목차고리 : 에큐메니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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