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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28
 제목  한국교회 이단이란 무엇인가
 주제어  [이단] 통일교
 자료출처  김흥수 박사  성경본문  
 내용

’20년대 계시체험과 김장호 목사의 성서해석 문제로 이단 단정 시작 '원산파와 새주파’의 신비주의 종교체험 재림주 종파운동으로 발전 김성도의 ‘인간타락론’ 김백문이 체계화되고 통일교 신학에서 심화 한국전쟁으로 사회 혼란과 현실 불안에서 탈출 위한 메시아를 기대일부 신도들 김백문을 비롯한 종말론적 신비주의 그룹에 몰려 들어 문선명과 박태선 등 ‘자신을 메시아로 암시’ 기성교회로 부터 이단시 돼 예장총회 교리, 예배모법 등 지침 공표 교계 비정상적인 신앙운동 경계 ‘통일교와 전도관’외에도 새로운 이단들이 계속 등장 사회 혼란 일 으켰다.

 

머리말

 

한국교회에서 이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단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인 데다 남용된 경우도 있었고, 신흥종교나 종파의 범주 속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 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앙 고백이나 신학적 주장이 이단으로 규정되고 정죄 되었는가, 이단적 신앙과 신학으로 규정된 것들이 어떻게 후대로 전달되고 확산되어 왔는가 등의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것들이 이단으로 보였는지 또 어떻게 계보를 형성해 왔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인물과 그룹은 다양하나 1920년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유명화와 김성도만큼 이단의 발생과 확산에 큰 영향을 끼친 경우는 드물다. 1930년대 초반 참담한 식민지 생활 속에서 자칭 재림주를 주장하는 종파운동으로 발전한 그들의 종교체험은 1950년 대에는 다수의 추종자를 동반한 문선명과 박태선을 통해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다.유명화, 김 성도로부터 김백문으로 이어지고 다시 문선명과 박태선으로 연결되는 종파가 오늘날까지도 가장 뿌리 깊은 이단종파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그 외에도 새로운 이단들이 등장했으며, 기성 교회의 교역자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이단 혐의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1920-30년대의 원산파와 새주파

 

한국교회에서 이단 단정은 1920년대에 처음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신비주의적 종교체험과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이 문제가 되었다. 전자가 소위 원산파와 새주파에 의해서 대변되는 계시 체험의 문제라면 후자는 김장호 목사의 성서해석의 문제였다.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김장호 목사는 황해도 지역에서 목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 도하를 바닷물의 간조현상으로 해 석하는 등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서해석을 그대로 채용하여 설교하였다. 이 일로 그는 1916년 황해노회로부터 성경해석이 불합(不合)하다는 이유로 총회 총대자격을 정지당했고, 1918년에는 휴직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이단 정죄 사건이었다.

 

1920년 대에는 김장호 목사 외에도 이만집(1923)이나 박승명 목사(1928)처럼 제도권 교회의 교권적 횡포에 저항하다가 교회로부터 정직이나 사직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단적 신앙이나 신학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 이후 자유주의적 신조나 신학의 문제로 이단 시비나 교회 퇴출 문제가 생긴 것은1930년대 중반 장로교회에서 일어난 적극신앙단 정죄, 김춘배 목사의 여권 문제 필화사건,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사건, 아빙돈 성경주석 사건이었다. 장로교회는 적극신앙단의 신앙선언을 장로교회의 신조에 위반되는 것이므로 적극신앙단을 장로교회에서 용납하지 않기로 하면서 여기 가입한 인사들이 복귀하는 조건으로 “적극신앙단이 이단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했다. 김춘배 목사와 김영주 목사의 글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삼이요 신앙과 본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는 장로교회 신조를 위반하는 것임으로 총회에 목사 제명까지도 염두에 둔 연구위원들의 건의문이 제출되었다. 아빙돈 성경 주석에 대해서도 장로교총회는 장로회의 도리에 불합하는 책으로 단죄했으며, 길선주 목사는 이 책을 이단서로 정죄하였다.

 

이처럼 한국교회에서의 이단논쟁은 주로 초기 장로교회의 복음이해의 경직성과 폐쇄성에서 나온 것으로 단순히 신학적 이견으로 볼 수 있는 것까지도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시기 이단 시비는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이나 신학에서 발생하기도 했지만, 신비주의적 종교 체험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적 신앙운동은 1920년대 후 반에 등장해 이북 지역에서 활동한 여신도 유명화(柳明化)와 김성도(金聖道),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남한교회에 전파한 김백문(金白文)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1927년경부터 원산의 감리교회에 유명화라는 여신도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에게 예수가 친림했다고 말했으며, 그녀를 에워싼 그룹이 형성되는데, 1930년경 평양신학교 졸업생 백남주가 여기에 가담하고, 감리 교 목사 이호빈, 이용도 등도 원산파의 일원이 되었다. 이용도 외에도 원산파 가담자들은 곧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에서 활동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들의 종교체험은 ‘이단사상의 기 반이 되는 거짓계시’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1931년 황해노회가 이용도에게 금족령을 내린 것을 필두로 1932년에는 평양노회가 한준명, 이용도, 백남주, 황국주, 김경삼 등을 조사 치리 할 것을 결의했다. 결국 이용도는 1933년 4월부터는 원산 신비주의 집단에서 도피처를 찾았으며 이 집단은 6월 예수교회를 창립하고 이용도 목사를 대표로 선임했다. 예수교회가 창립될 무렵 교회는 평양과 안산 원산 등에 10여 개가 있었으며 교인 수는 1000여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1933년 9월 장로교총회는 ‘각 노회 지경 내 이단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단체’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 호빈, 황국주)에 미혹되지 말 것을 가결함으로서 이용도와 예수교회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처럼 이용도는 장로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렸지만,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용도가 이단의 주창자는 아닌 듯하며, 비상식적이고 비성경적인 원산 예언자들에게 미혹된 것 같다고 보고 있 다. 그후 원산 신비주의자들의 신앙의 한 흐름을 후세에 전해준 인물은 김백문(1917-1990)이었다.

그는 1930년대 초·중반 무렵 세력을 형성한 백남주, 김성도 등의 신비주의적 신앙을 이어받 아 오다가 해방 후에는 그것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선명, 박태선 등의 종교집단에 전승시킨 인물이다. 김백문은 1934년 예수교회의 수도원 겸 신학교인 원산 신학산에서 백남주 목 사를 처음 만난 후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 해 백남주가 한 여신도와의 동거로 원산의 신비주의 그룹에서 축출된 후 평안북도 철산의 신령파 지도자인 ‘새 주(主)’김성도를 찾아갈 때에 도 따라가게 된다.

 

새주파는 새로운 주님을 믿는 파(派)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살고있던 장로교회 권사 김성도(1882-1944)라는 여인을 구세주로 믿던 사람들을 항간에서 일컫던 호칭이었다. 김성도는 1923년 입신하여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때 예수님과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 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신비체험에 대한 소문이 돌자 급기야 1925년 장로교회의 출교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녀가 새 주님으로 고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서였다. 1931년 2월 그녀의 딸 석현에게“새 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탁이 내렸고, 가족들은 이 때부터 새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무렵부터 항간에서는 김성도의 추종자들을 ‘새주파’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1933년에는 새주파가 예수교회에 합류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으나 예수교회의 이호빈측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김성도측에서는 ‘새 주’ 모티 브를 완전히 떨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결국 김성도 측은 1935년 10월 성주교회(聖主敎會)를 창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 현재 성주교의 현황은 교당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에 18개가 있 었으며 교인수는 120여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 무렵 김백문은 신령파 집단의 분위기에 깊이 빠졌던 것 같다. 여기서 얼마 후 백남주는 종교단체들과의 접촉을 삼가기 시작하여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가 1940년대 후반 공주 에서 사망하였다. 김백문은 1930년대 후반까지 성주교회에 머물러 있다가 1940년대 초 거주지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로 옮기는데,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이곳을 근거지로 해서 야 소교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우며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서는 상도동에 집회소를 마련했다. 수도원과 집회소를 통해 김백문은 서울과 경기 일원의 신령파 동지들 수십 명을 끌어 모 았다.

 

수도원 창설 직후 약 2개월 후 1945년 후반 20대 중반의 문선명이 찾아와 김백문을 받들면서 주로 서울 상도동 집회소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4월경 문선명은 김백문을 떠나 해방 후 성 주교단 평양교회 신도들을 찾아 평양으로 갔다. 후일 문선명은 한학자라는 여인과 재혼하는데 그녀의 어머니도 이 교회 신자였다. 1947년 초반 정득은 이라는 여인이 김백문을 찾아왔다.그녀는 평양에 거주하던 신령파였는데,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한 후 서울역 앞에서 20여 명의 신도와 함께 집회를 가지면서 김백문의 집회에도 가끔 참석하곤 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그녀가 독방에서 기도하는데, “손을 잘라 그 피를 김선생에게 먹여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녀는 면도칼을 구하여 김백문의 방으로 가 서 그 계시 내용을 이야기하고 막 손가락을 자르려고 하였는데,김백문이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한사회에서는 이른바 성혈 전수(피가름)의 의례가 이렇게 전수되고 있었는데, 이 의례를 일종의 구원의례로 여긴 사람 중 하나가 훗일 전도관을 창교하는 박태선이었다. 박태선이 피가름 행위에 참여한 것은 1949년이었다.

 

김백문의 수도원 활동은 6.25 전쟁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 6월2일 그는 몇몇 수도생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듯이 그들도 선생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고 대답하였다. 김백문은 이들의 답변을 묵묵히 수긍하는 태도로 듣고 있었다고 한다. 김백문은 전쟁이 나자 경남 동래에서 피난해 있다가 1953년 가을 상경하여 종로 6가에서 다시 집회를 시작하였다. 그는 1958년 ‘기독교 근본원리’를 출간하여 그의 신학체계를 공개하였 는데, 타락원리에서 그는 에덴동산에서 인간 시조가 최초로 저지른 범죄는 루스벨이란 천사의 개입으로 인한 타락이었다고 기술하면서 선악과를 식물성 과수로만 생각하고는 결코 인류 타 락의 문제가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먹음이란 인간 육체상 혈육에 영향을 가지게 하는 생리적 본능이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악화된 그 결과는 정욕의 죄악성 발생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인간을 타락케 하는데, 그리스도의 성체를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종교의식에서는 성부시대의 할례, 성자시대의 세례로 대표되었다면, 20세기에는 체례(體禮)가 그렇다면서 사탄의 피를 거룩한 피로 교환하는 체례, 즉 일종의 피가름 행위를 신학 화하였다. 김성도의 인간 타락론이 김백문을 통해서 체계화되고 그것이 다시 문선명의 통일교 신학에서 심화되고 있는 셈이다.

 

1950년대의 통일교와 전도관

 

통일교 문선명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 신흥종교의 발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의 혼란상황이 민중의 종교적 욕구를 증대시키지만 기성종교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을 때 신흥종 교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입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조건들이 부합한 시기가 바로 해방 후 50년 대까지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살상, 납치와 가족의 이산, 주택을 비롯한 각종 산업 시설의 파괴와 함께 1950년대 거의 해마다 계속된 가뭄과 홍수(1954, 1956, 1957), 태풍(1952, 1957, 1959) 같은 재난, 결핵이나 나병, 뇌염 같은 전염병의 만연, 그리고 엄청난 통 화팽창은 극도의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는 전쟁 외에도 재난이 잇달아 발생하고 그로 인해 사회불안이 끊이질 않았으나 기존의 종교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사회적 혼란에 같이 휩쓸려 표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도들 중에는 이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언적인 교리와 가시적인 희망을 전하는 카리스마적 인물이나 메시아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교회사에서 신비주의 그룹은 1930년을 전후해서 조직화되지만, 분단과 전쟁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의 후예들은 그전보다 더 정교한 메시지와 더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추고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전쟁 후의 절박한 현실의 위기 속에서 일부 신도들은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문선명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1954)박태선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1955) 등으로 대표되는 종말론적 신비주의 그룹에 몰려들었다.

 

이 시기 신비주의자들의 계보와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김백문(1917-1990)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30년대 초 · 중반 무렵 세력을 형성한 이용도, 백남주, 김성도 등의 신비주의 적 신앙을 이어받아 오다가 해방 후에는 그것을 문선명, 박태선 등의 종교집단에 전승시킨 인물이다. 김백문은 1934년 평양신학교 졸업생 백남주가 세운 수도원 겸 사설 신학교 원산 신학 산에서 백남주 목사를 처음 만난 후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 해 백남주가 한 여신도와의 동거로 원산의 신비주의 그룹에서 축출된 후 평안북도 철산의 신령파 지도자인 새 주(主) 김성도 를 찾아갈 때에도 따라가게 된다. 1940년대 초반 김백문은 거주지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로 옮기는데,1945년 해방 직후 이곳을 근거지로 해서 야소교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우며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서는 서울 상도동에 집회소를 마련했다. 수도원과 집회소를 통해 김백문은 서울과 경기 지역의 신령파 신도들을 끌어 모으는데, 수도원 창설 직후인 1945년 후반 20대 중반의 문선명이 찾아와 반년 가까이 김백문을 받들다 1946년 4월경 문선명은 김백문을 떠난다.

 

문선명은 김백문을 통해 1930년대 초중반에 세력을 형성한 신비주의적 신앙을 전수 받지만, 문선명이 신비주의 계열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감화를 받은 것은 1940년을 전후한 시기 서울 흑석동의 경성상공실무학교에 다니면서 이용도 계열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명수대교회에서 예수교회의 간부들인 이호빈, 박재봉 목사 등이 와서 설교 하는 것을 들었으며 나름대로 ‘신앙의 오의(奧義)를 터득’하게 된다. 김백문의 문하를 벗어난 문선명은 1946년 6월초 평양에 도착해 그곳에 남아 있던 신령파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개 척했다. 신도들의 대부분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몽시를 보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교회’였다. 1951년 1월초 부산에 도착한 문선명은 자신을 추종하던 사람들을 규합해 1954년 5월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즉 통일교를 설립했다. 1953년 11월 중순에는 동래에 피난 가 있던 김백문도 상경하였다. 이같이 전쟁 중에 또는 그 직후에 신비주의자들이 기존 모임을 다시 시작하거나 조직을 재정비하자 다수의 사람들이 이 집단들에 몰려들었다. 박태선과 나운몽이 자 신들이 다니던 교회 밖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나운몽은 한국전쟁 시기에 입신, 방언, 신유 등의 신비 체험을 한 후 용문산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에 나섰다.

 

김백문이 종로 6가에서 다시 야소교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내걸고 집회를 재개했을 때 30여 명의 신도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교세는 그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는 1950년대 통일교의 경우도 비슷했다. 통일교의 교세는 1952년 대구집회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을 누비며 심령부흥회의 불길 을 일으키고 다니던 용문산기도원의 나운몽 세력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며, 박태선 추종자들과의 차이는 더욱 현격하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비체험을 강조하 면서도 새로운 성서 해석을 제시하고 그것의 체계화에 열중하고 있던 김백문이나 문선명의 교회보다는 대중적인 부흥집회를 이끌고 있던 나운몽이나 박태선의 집회에 훨씬 더 많이 몰려갔 다. 통일교에 의하면, 6. 25의 동란을 거친 한민족은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남은 길은 통일교가 제시하는 길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이처럼 전쟁의 상처가 깊어서 의지할 곳 에 없는 좌절의 틈을,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구원과 안위를 약속하는 신종교 집단이 타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문선명과 박태선 같은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은 불안이 없는 이상사회의 실현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은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지상천국’이나 ‘천년성’이 바로 그런 사회였다.

 

이처럼 그들이 전하는 희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문선명은 피난 중인 부산에서 신앙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믿고 죽어 천당 가자던 식의 개연적인 종래의 관념신앙’ 대신 “먼저 인간의 책임분담인 지상천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몇 해 후 간행된 ‘원리강론’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성 취되는 지상천국을 핵심적인 메시지로 전했다. 전도관은 통일교보다 더 가시적인 희망을 전했다. 천년성을 기대하는 신도들을 모아 1957년부터 신앙촌을 형성하고 활발한 산업 활동을 벌임으로써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회의 비전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들은 기성 교회 교인들과는 달리 전쟁 후 미국 교회들에서 보내 준 구호물자의 혜택을 덜 받았거나 받지 못했으므로 이 같은 경제활동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통일교 회는 초기 구성원들이 다수의 엘리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은 신비주의적 신앙에 더많이 심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도관 추종자들보다 종교적인 동기가 더 강했다. 그러나 통일 교 역시 경제활동을 지상천국 건설의 기초 작업으로 여기고 1959년부터 경제활동에 뛰어들었다.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박태선이나 문선명은 인간의 책임과 분담을 강조하였다. 박태선은 장로교 장로 출신이면서도 설교에서 칼빈주의의 예정론이나 이신득의의 구원관을 자주 비난했 다. 그들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상사회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천년왕국이나 천년성을 구현시켜 줄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를 암시했다.

 

이 과정에서 1930년대 신비적 메시아 집단의 신앙을 전수 받은 문선명은 예수를 영적 구원만을 성취한 자로 규정하고 자신을 육적 구원을 성취할 재림주 또는 메시아로 암시했고, 전도관의 박태선은 자신을 주의 보혈을 받은 ‘동 방의 의인’ 또는 ‘감람나무’로 호칭하면서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이 세상은 끝이라고 예언 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관심사는 메시아의 도래였으나 자신들을 메시아로 암시함으로써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시되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박태선과 전도관 운동, 여호와의 증인, 문선명 일파의 통일교, 나운몽 장로의 용문산 신앙운동, 함석헌을 중심한 무교회주의, 그리고 입신, 방언, 안찰 등이 전후에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교회 일각에서 방언과 병 치료, 감정적인 예배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고 신종파가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교회들은 이런 현상들에 대해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55년 8월 ‘특수부흥’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정치, 교리, 예배모법, 신앙운동 영역에서 지침을 공표하였다.

 

신자 중에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탈선할 우려가 있 으며 계시와 영감은 다르다는 것, 예배는 단정, 엄숙, 경건하게 할 것, 피가름, 악취, 향기 등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다는 것, 신앙운동은 복음전파에 목적이 있으므로 헌금과 박수와 병 고치는데 치중하지 말 것 등이 중요한 지침이었다.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도 통일교와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사설과 이단설이 유포되고 도처에서 비정상 적인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였다. 통일교는 ‘기독교의 명칭만을 딴 단체’로 제3의 경전을 창작하고 가정과 사회의 윤리도덕을 파손시키는 ‘사교’요, 전도관은 성신과 죄악을 물질화하여 군중에게 향기와 악취를 맡으라 고 강조하는 ‘신앙도리에 합치되지 않는’ 운동으로 단정하였다. 따라서 이것들은 역대의 교회가 신봉하는 교리와 집회의식으로부터 이탈된 ‘사설운동’에 불과한 것으로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이단운동에 대한 비판은 장로교총회나 기독교연합회가 앞장섰지만,1957년에는 김경래가 전도관을, 신사훈이 전도관,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무교회주의 등의 이단성 을 소개하는 책을 펴냈다. 여기서 우리는 1930년대의 참담한 식민지 생활 속에서 교회 일각에서 전개되어 온 신인합일의 신비주의 운동과 자칭 메시아들이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1950년대에는 다수의 추종자를 동반한 통일교와 전도관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음을 본다.

 

1960년대 이후의 다양한 이단종파

 

1950년대 이후 한국사회와 교회의 결렬한 비판과 경멸의 포화를 맞은 것은 통일교와 전도관이었다. 이단의 화살은 김재준과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에게도 날아들었다. 장로교는 성경관과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이유로 김재준을 정죄했다. 1956년 4월 성결교총회는 나운몽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도 41회 총회에서 박태선, 나운몽, 엄애경, 노광공 등을 비성서적 교훈을 가르치고 교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로 규정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신흥종교들은 부정적인 여론에 밀려 활동이 위축되었고, 활동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극심한 피해의식 속에서 활동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9년 현재 약 241개의 신흥종교 중 기독교계 신흥종교는 25개 정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대부분 ‘기성교회에 불평불만이 많은 반동적 종교집단’으로 정도교(1917)나 용문산기도원(1946)을 제외하고는 6.25전쟁 이후의 혼란기에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 통일교(1954)와 전도관(1955) 외에도, 동방교(1956), 예수님개혁 그리스도교회(1955), 구원신생원(1956),천국직통파(1960) 등 8개 단체가 발생하였다.

 

1960년대에는 세계일가공회(1964),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교회(1964), 새일수도원(1965), 예수의 영교회(1965), 귀일원(1965), 장막성전(1966), 호생기 도원(1966), 세계복음선교회(1968), 삼광수도원(1968), 하나님의 성회(1969) 등 새로 등장하였다. 이 단체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은 1956년대구에서 조직된 노광공의 동방교, 성결교 목사였던 양도천이 1964년에 세운 세계일가공회, 1965년 이유성이 계룡산에 세운 새일수도원, 1966년 18세의 유재열을 중심으로 과천에 세워진 장막성전 등이었다. 1970년 현재 동 방교의 후신인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는 전국에 51개의 교회와 51명의 교역자, 8천여 명의 신도를 두고 있었으나 세계일가공회의 교세는 5개처의 교회에 235명의 추종자가 있을 뿐이었다. 장막성전의 경우 말세론을 강조했는데, 21세의 유재열이 1만여 명의 신도를 거느렸고, 전국에 40여개의 지교회를 가지고 있는 새일수도원은 여호와새일교단으로 그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다. 주로 말세론을 강조한 이유성은 계시에 의해 받아썼다는 ‘말세비밀’ 등 몇 권의 저서를 내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종파들 중에서 특이한 것은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 이유성의 새 일수도원, 김성국의 일원산기도원처럼 수도원이나 기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을 활동의 중심지로 삼은 점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가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증산도, 구통도가 같은 한국신종교 운동이 활기를 띠고, 일부 신종교들이 민족종교라는 이름으로 사이비 종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되자 사이비 종교하면 기독교 이단종파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신종교의 활기에 힘입어 통일교의 원리연구회, 정명석의 애천교회 동아리들도 대학생들 사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기독교계 이단종파들은 기성교회들과 갈등을 빚었다. 1973년 동방교 사건, 1974년 전도관 사건이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면,통일교는 1979년 다시 기독교계로부터 사이비종교로 규정당해야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9년 “통일교는 기 독교가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 이유로 성서의 불완전성 주장, 기독교와 상이한 삼위일체론, 인간의 타락을 천사와 하와의 행음에서 찾는 원죄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과 부활의 불완전성 주장, 문선명이 메시야임을 암시하는 점 등을 들었다. 이 무렵 통일교의 '원리강론’과 전도관의 문제점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에 의해서 분석되어 ‘신학사 상’(1975년 가을)과 ‘신학지남’(1975년 여름)에 발표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는 외국의 신종교와 이단종파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신흥종교가 급증하고 기독교계 이단도 증가할 때 이 현상에 관심을 보인 연 구자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의 문상희 교수와 기독교 신문 기자 출신의 탁명환이었다. 탁명환은 1973년에 ‘한국의 신흥종교: 기독교편’(상, 중)을 자신이 1970년 1월에 설립한 신흥종교 문제연구소에서 펴냈다. 이 연구소는 국내외 신흥종교와 이단 사이비 종교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80년 국제종교문제연구소로 개칭하고 조직과 기구를 확대하였다. 1976년 현재 기독교계 이단종파는 무려 40여 개나 되었는데, 모두 문상희와 탁명환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것들은 대체로 현실교회 비판, 재림사상, 선민사상, 독선적 구원관, 교주숭배, 샤머니즘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 다고 비판당했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 외에도 방수원의 종교법왕청, 김종규의 호생기도원, 구인회의 천국복음전도관, 전병조의 팔영산기도원, 박종기의 시온산교회, 김인영의 순금등대교 회, 이경천의 붕어명당, 김동헌의 영생천국 등이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의 신종교인 창가학회, 천리교가 활동을 강화했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은 입영 및 수혈 거부 문제로 논란 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이단종파들에서 파생되었거나 새로운 교리를 내세운 종파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여 한국교회의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다. 탁명환의 조사에 의 하면, 1983년 2월 현재 한국에 현존하는 각종 신종교는 345개에 이르고 그 중에 기독교계 이단종파는 96개에 이르렀다. 1986년 현재 신도의 수는 18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이 시기에 도 통일교에서 분파된 통일교계가 생령교회, 청수교회, 생수교회, 구세영우회, 통일원리파, 우주신령학회 등 7파나 되었다. 같은 시기 박태선의 전도관 계통의 이단종파는 한국기독교에 덴성회, 대한기독교전도관, 호생기도원, 대한기독교장막성전, 천국복음전도회, 한국증상교회, 재창조교회, 동방교, 영생교 하나님성회 등 무려 20여 개로 분파하였다. 통일교와 전도관 계통에 이어 역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은 계룡산 신도안에 본거지를 둔 이유성의 여호와 새일교단과 워치만 니의 주장을 따르는 구원파 계통이었다.

 

탁명환에 따르면, 그 외에도 40여개에 달하는 이단 종파가 있었는데, 정도교총본부, 하나님 어린양 예수그리스도교, 세계일가공회, 신권도학연구소, 팔영산기도원, 일월산기도원, 호생기도원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경제성장과 국민의식 수준의 향상으로 그간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던 동방교, 섹스교, 일원산기도원, 팔영산기도원 등 전체 신흥종교의 10-20%가 자취를 감추 거나 소멸해 버렸는데,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와 영생교 승리재단은 새로 생긴 것들이었다. 1987년 8월에는 경기도 용인에서 임박한 심판을 주장하며 기업체를 경영하던 신도가 집단 자살하게 되는 오대양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980년대에도 개인적 차원의 이단 연구가 계속되었다. 탁명환은 1982년 8월 ‘현대종교’를 창간하여 사이비종교를 알리고 고발하였다. 1989년 2월에는 기독교사상이 ‘한국교회와 사이비종교’ 특집을 다루면서 통일교를 해부하는 글과 통일교 관련 참고문헌을 소개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개인적 차원의 연구를 넘어서서 교단 차원에서 이단 여부를 논의하거나 대책위원회가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이단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온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81년 4월 특별총회에서‘이단 종파 관련 교인과 교 직자를 일괄 소급하여 조사처리’하기 위한 ‘이단종파 관련자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통일교와 관련된 목사 6명과 장로 8명이 출교, 교직 정지, 회원권 정지 등의 처벌을 받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은 1984년 총회에서 권신찬을 이단사상을 가진 자로 규정하고, 1988년 총회에서는 김기동의 귀신론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1989년에 열린 총회에서는 ‘사이비 신앙운동 및 기독교이단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기독교 이단이란 무엇인가’(문상희 교수) 외에도‘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최삼경), ‘종말론에 나타난 이단’(황승룡)에 대한 강의도 들었는데, 이 주제들은 당시 기독론 과 종말론의 영역에서 이단적인 주장이 대두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위원회는 1990년 총회에 제출한 밤빌리아 추수꾼 집단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 밤빌리아 추수꾼집단을 이단 으로 규정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1991년에도 계속 되었다. 이 위원회는 1991년 총회에 반기독교적인 서적으로 일레인 페이젤의 ‘성서 밖의 예수’, 라즈니쉬의 ‘나를 따르라’등 16 권의 책을 선정 보고하였다. 1991년 총회는 또 대성교회의 박윤식, 엘리야복음선교원의 박명호,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지방교회, 한국예루살렘교회의 이초석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 위원회는, 박윤식은 무엇보다도 타락론에서 이단성이 명백하고, 박명호는 구원관에서, 이장림은 종말론에서, 이초석은 귀신론에서 이단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총회 사이비 신앙운동 및 기독교이단 대책위원회는 신구약 성경, 니케아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 콘스탄티노플신조의 성령론, 칼세돈신조의 기독론 및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 전통과 대 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앙고백서(1986)에 근거해서 위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 외에도 이 위원회는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몰몬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는데, 이 집단들 역시 위의 공의회들의 표준과 WCC 문서들, 즉 칼세돈의 기독론 전통과 니케아의 삼위일체 전통과 오직 성경만으로의 전통을 암시하는 WCC 헌장 그리고 복음, 은혜, 구원, 교회, 성경과 전통, 세례, 성만찬, 직제에 대한 신학적 수렴을 시도하고 있는 신앙과 직제의 신학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이단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1990년대는 이단 문제로 한국교회와 사회가 떠들썩했던 디케이드였다. 시한부 종말론의 급격한 확산, 이단 시비로 감리교신학대학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의 감리교회로부터의 축출,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 탁명환의 피살 사건 등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큰 우려와 충격을 주었다. 특히 휴거와 예수 재림을 내세운 다미선교회의 종말론은 큰 휴유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사이비 이단종교에 대한 논쟁을 가열시키기도 하였다.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면서 교회를 혼란시킨 집단은 1992년 8월 현재 다미선교회를 비롯하여 무려 50여 개에 달했으며 여기 속한 교회와 단체를 합하면 전국에 250여 개나 되었다. 이 무 렵 한국복음주의 신학회는 ‘한국교회와 이단’을 주제로 논문 발표회를 갖고 이를 ‘성경과 신학’ 12권(1992)에 게재했다. 시한부 종말론이 전교계로 확산될 무렵 감리교회에서는 변선 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홍정수 교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이 1991년 10월 특별총회에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에 위배된다’고 결의하였다. 그 후 1992년 5월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변 선환과 홍정수 두 목사에 대해 출교 판결을 내렸다. 1994년에는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 피살사건의 배후에 대성교회 관계자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는가 하면, 김계화의 할렐루야기도원,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 애 천교회의 또 다른 명칭인 국제크리스천연합 등이 기성교회 및 언론과 격렬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맺는 말

 

지금까지 1920년대 이후 최근까지 교회에서 이단으로 단정되었거나 이단 혐의를 받은 인물과 단체를 살펴보았다. 1920-30년대에 걸쳐 이단으로 규정된 인물과 그룹이 나타났는데, 성서무 오설에 도전하는 자유주의적 성서해석과 신령파들의 계시 주장이 이단 시비의 주요한 발단이 되었다. 이단 시비는 주로 장로교회에서 벌어졌으며, 장로교 신조 제1조, 즉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조항과 계시의 진위에 근거해서 이단이 가려졌다. 1930년대의 원산파와 새주파의 메시아 대망 신앙은 김백문을 거쳐 1950년대에는 통일 교와 전도관으로 이어졌다. 이 때에는 교단 차원 외에도 한국기독교연합회가 이들의 이단성을 비난하였는데, 사설(邪說)과 이단설, 부흥운동의 불미한 행동과 광신상태가 공격을 받았다. 1960년대에는 신흥종교가 급증하는 가운데 기독교계 종파도 증가했다. 동방교, 세계일가공회, 새일수도원, 장막성전 등이 새로운 이단으로 규정되고 1970년대에는 무려 40여 개로 증가하면 서 기성교회들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이것들은 대부분 신흥종교 연구가 탁명환의 개인적 판단에 의해서 이단 시비가 가려졌으나 1980년대에는 교파별로 이단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교회가 직접 이단의 시비에 나섰다. 1980년대에 권신찬의 구원파, 김기동의 귀신론 등이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1990년대에는 밤빌리아 추수꾼 집단, 박윤식의 대성교회, 박명호의 엘리야복음선교원, 이장림의 다미선교회, 지 방교회, 이초석의 한국예루살렘교회 등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을 강의하던 교수들이 감리교로부터 축출된 것도 1990년대였다. 이단의 신학적 주장 이 다양함에 따라 성경은 물론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론 , 기독론, 성령론, 종교개혁 전통, 그리고 각 교파의 신조 등이 이단 판단의 근거로 등장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 이단 판단의 근거가 더 분명해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단 시비를 가릴 때에는 적어도 사실과 한국교회가 동의할 수 있는 역사적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성서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한국 교회가 이단 단정을 남용하고 있다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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