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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슐라이엘마허의 해석학적 신학
 주제어  [슐라이엘마허] [해석학]
 자료출처  조성노 박사(현대신학연구소 소장)  성경본문  
 내용

쉴라이에르마허는 1768년 브레슬라우(Breslau)에 있는 프로이센(Preussen) 군대의 육군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러시아는 18세기 초에 왕국을 형성한 나라로 독일을 통일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프러시아를 말함) 그의 아버지는 개혁교회의 목사였는데 대단히 엄격하고 보수적이어서 18세기를 풍미했던 경건주의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쉴라이에르마허도 자연히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초등교육도 모라비안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머허는 자기의 스승들과 아버지가 유럽 땅에서 당시 새롭게 일고 있던 지성의 기운을 백안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할레(Halle)대학으로 떠난다. 그는 할레대학에서 고대 희랍 철학과 Kant를 연구하며 17세기 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강의도 들으면서 1790년에는 별다른 감흥도 없이 목사시험도 치룬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개혁교회의 설교자와 할레에 있는 도나(Dohna)백작의 가정교사가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도나 백작의 집에서 대단히 교양 있는 상류사회 인사들과 더불어 지성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점차 사상적으로 성숙해 갔다. 그후 1793년에는 다시 베를린으로 일자리를 옮겨서 한 자선 병원의 설교자로 일하면서 계몽주의 운동의 총본부라 할 수 있는 베를린의 철학적·문학적 낭만주의의 자극을 깊이 받는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 당시에는 이미 그 운동이 쇠퇴기에 들어가고 이제는 낭만주의의 부드러운 곡조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때였다. 쉴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의 대표적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쉴레겔(F.Schlegel)과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과 친구가 되었고 마침내는 그 사교 모임의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된다. 바로 그 사교 모임에서 쉴레겔의 권면으로 1798년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 봄에 출간한 책이 저 유명한 '종교론'( ber die Religion)이다. 이 책은 종교를 멸시하는 문화인들에게 종교를 새롭게 변증하는 책이었는데 출판되자 마자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1800) 초에 '독백록'(Monologen)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종교론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윤리론을 다룬 저작이었다. 이 시절에 그는 쉴레겔과 함께 Platon의 전집을 공역하는 일에도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루노프(E.Grunow)라는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베를린의 생활은 우울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 일로 쉴라이에르마허는 교회를 사임하고 1802년에 조그마한 시골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낙관적이었던 그의 낭만주의적 사상이 급격히 약화된다. 다행히 그는 2년간 그 시골에 있으면서 시골교회를 돕는 한편, 조용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마침내 '지금까지의 윤리학에 대한 비평'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플라톤 전집 제 1권도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는데 이 플라톤 전집의 번역 출판은 독일 정신사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인 성과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생애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804년 쉴라이에르마허는 할레대학의 교수로 초빙이 된다. '지금까지의 윤리학에 대한 비평'이 학문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가 된 것이다. 할레대학에서 그는 철학적 윤리학, 해석학, 조직신학과 갈라디아서를 강의했다. 그리고 할레대학 교회의 설교자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할레대학에서의 그의 학문적인 노작은 대단히 다양하였는데, 이를테면 '신학연구 개론', '크리스마스 축제'(Die Weihnachtsfeier) 또 두 권의 설교집과 디모데 전서에 대한 논문집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저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불란서 군대가 독일 땅을 침공해서 할레대학의 인접한 도시까지 점령하는 바람에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1807년 겨울에 다시 베를린의 친구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자 마자 '성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이 된다. 매주 정규적으로 행한 초기의 그의 설교는 나폴레옹의 침략 행위를 격렬하게 규탄했고, 또 당시 독일의 정치적인 불안과 국가적 혼란의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을 하면서 베를린 시민의 자유의식을 고취시키는 정치적 설교였다. 그러므로 불란서 점령 당국에 여러 차례 연행되어 경고를 받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때그때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모든 문제에 관해 과감히 말하고 행동했다. 그는 그같은 자신의 행위가 윤리학적으로 타당하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윤리학적인 입장에 따르면 개인은 시민과 국가 모두를 위해 그들 사이에 건전한 균형을 이룩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공 생활의 제반 영역에 과감히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실라이에르마허의 상(象)은 정열에 불타는 애국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1809년 그러니까 그가 40세 되던 해, 가까운 친구의 젊은 미망인과 결혼을 하고 그 다음해에는 막 새롭게 건립된 베를린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183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베를린대학의 교수로서 그리고 마지막가지 성 삼위일체교회의 설교 강단을 지킨 설교자로서 헌신을 다하였다. 당시 대학에는 철학을 강의하던 동료 교수 헤겔이 있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윤리학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독일의 위대한 관념론자인 이 헤겔을 비판한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1821년과 1822년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흔히 '신앙론'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Der christliche Glaube)를 출판한다.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교의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다음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그는 무려 4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따라서 그는 공헌도 많았고 과오도 적지 않았지만 그러나 현대신학에서의 그의 위치는 마치 현대 생물학계에서의 찰스 다윈의 존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저작들을 떠나서는 현대신학의 계통적인 사상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19세기 개신교가 사상적으로 대단한 격동기였던 19세기에 대응한 첫번째 문제는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제기했던 물음들이었다. 이는 지성인들이 과연 그리스도교 진리를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당시의 지성인들은 모두가 18세기 합리주의를 상속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지식 분야가 점점 더 넓어짐에 따라 이제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메시지란 아득하고도 미개한 고대의 산물이어서 성숙한 19세기의 지성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성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전혀 바람직한 일이 못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독일 내에는 또다른 조류가 작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소위 낭만주의 운동인데,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이 낭만주의는 인간생활의 영역 중, 단순한 지적인 영역 이외의 다른 영역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운동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삶의 풍요란 지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상상력이라든지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 또 인격의 자유와 개성 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시와 노래와 연극 등의 예술을 선호하였고, 삶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보다는 오히려 삶의 삶의 신비성이라던가 기대 불가능성, 예측 불가능성 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낭만주의자들에게도 종교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삶의 진정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종교 역시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합리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종교란 그 속에 삶의 감정적이고도 경험적인 측면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그러니까 19세기의 그리스도교는 합리주의적인 지식인들로부터도 반지성적이라고 매도되었고, 낭만주의자들로부터도 지성에 호소하는 종교로 치부 당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그리스도교가 당했던 큰 위기적 상황이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그의 위대한 두 저작인 '종교론'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바로 합리주의와 낭만주의라고 하는 양대 사조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신학적으로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를 그 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해석학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1. 종교론( ber die Religion)

 

이 책은 종교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종교에 대한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오해를 일거에 해소하고자 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의 기본 명제는 종교는 신조나 교리 혹은 신학적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경험이요 깨달음의 감각이요 느낌이라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이 한 마디가 당시 상황에 파급시킨 영향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부정했던 합리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의 공통된 과오는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이 종교를 하나의 신조나 교리나 신학적인 체계로 오해했다는 데 있었다. 합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들 대로 그리스도교적 교리 체계를 반지성적이라고 외면했고 낭만주의자들은 또 낭만주의자들 대로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종교
라 하여 외면했으나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자신의 저작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은 대단히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언어들을 통해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개념은 비교적 분명하다. 종교는 도덕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라는 것이다.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신학적인 체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종교는 사변적인 철학 속에서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자들에게 종교를 설명하면서 그 종교의 진수는 만유(All)와의 조화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즉 종교는 각 사람들 속에서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해는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와 조화되어야 하고 또 세계와 이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세계와의 화해 속에서 인간은 자기가 이 세계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이 세계가 의존하고 있는 신께 절대 의존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체험은 다시 인간으로 하여금 '의존'이란 인간의 숙명적인 본질로서 누구도 예외 되지 않고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또한 절대의존의 조건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서로 연계되어 있고 일체성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도 된다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론에서 "경건한 사람의 체험이란 모든 유한한 존재들이 무한자 안에서 무한자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 의식이다. 종교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존재자 속에서 모든 성장과 변화 속에서 모든 행동과 수고 속에서 바로 이것을 찾고 발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신 안에서의 삶이며 신 안에서 모든 것을, 모든 것 안에서 신을 소유하는 삶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체험은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모든 존재가 신에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되어 있다는 일체성에 대한깨달음.
2) 모든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감독.
3) 모든 유한한 존재가 그 속에 존재하는 무한자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감독하는것 등이 종교의 본질이다.

 

이처럼 쉴라이에르마허는 어떤 신조나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종교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전혀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 역시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본질적인 종교적 감정, 곧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세계의 여러 종교들을 조사해 보면, 종교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이 분석이 얼마나 보편적인 진리인가 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모두가 그들 나름대로의 신조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종교가 단순히 이와 같은 신조의 형식을 지녀 왔다는 사실만으로 종교의 본질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신조라는 것은 본래 무한자에 대한 유한자의 의존의 인식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적으로 표현해 놓은 명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고 최초의 종교적 경험이 이제 성찰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이 교리적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원인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느낌, 체험이 일차적이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 교리나 신조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일차적인 느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기능으로서의 이차적인 것이다. 의존이라고 하는 인간 조건에 대한 체험적 감독, 체험적 느낌 바로 그것이 종교다. 믿음의 합리적인 표현인 신조나 교리체계는 그것의 결과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한 한은 그리스도교도 타종교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은 이러한 신에 대한 보편적인 의존의 느낌 외에도 그 경험
에 따르는 다른 두 가지 차원의 감각을 동일한 종교의 본질로 믿는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감각과 은총에 대한 감각이다.

 

2. 그리스도교 신앙(Der christiliche Glaube)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시켜 주는 이 두 가지 감각의 구체적인 내용을 그의 두번째 주요 저작인 '그리스도교 신앙'(1821-1822년 출간)이라는 신앙론에서 서술하고 있다.

 

1) 죄에 대한 감각에 관해서 말하면서 쉴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이 비록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고 또 그것을 인식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신의식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란 인간이 신께 대한 절대의존의 감각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해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죄란 고립이며 의존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형태이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의존을 공유하는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성과 일치성으로부터도 자신을 분리시키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같은 고립 상태는 마침내 인간의 삶에 엄청난 고독과 불행을 가져다 준다. 행복이란 오직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성을 인정하는데서 찾아져야 한다. 인간이 참된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절대의존의 느낌, 감정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체험을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그 때 비로소 인간은 소외와 고립을 극복하고 자기의 자아와 그리고 신과 이 세계와도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게 된다.

 

2) 쉴라이에르마허는 특히 그리스도교의 구속 관념을 다루면서 은총에 대한 감각이 그리스도인의 종교 경험의 중요한 일부임을 강조하고 있다.예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신의식을 상실하게 된 역사의 한 구체적인 시점에 하나님의 중보자로 보내졌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바로 그의 신의식에 대한 중보의 역할이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최상의 일체성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라고 표현한 예수 자신의 고백적인 언어 가운데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예수는 신을 인간에게 완전히 계시한 분이면서 인간이 신과 더불어 갖는 참다운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분이었다. 예수의 중보의 사명은 우선 그 자신의 완전한 현실 직관, 다음은 그 자신의 신의식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구속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절대의존의 감정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 그 참다운 본성으로부터 자아가 철저하게 소외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신의식과 신과의 일체성의 의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구속함을 받는 경험, 고립과 소외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속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충격적인 경험이다. 구속은 이성적 사고에 의하여 도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다. 그래서 구속은 인간의 삶으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은총 또한 하나의 신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신의식이 갱신되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이성은 은총에 대한 이런 감각을 신조로 표현하기 위해 정식화할 수 있고 또 정식화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은총은 경험이지 개념은 아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교회론도 다루고 있다.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교회의 의미란 교회의 본질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교회에 소속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험에 있다. 역사적 교회는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부터 교회에서 보존되고 생활화되고 선포된 예수의 삶과의 접촉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신의식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계속하여 증거해 왔다. 한마디로 말해 교회는 인류의 계속되는 그리스도 경험이다. 인간은 교회 안에서 교회가 제공하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체험을 갖게 되고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신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공동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의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도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설교, 곧 말씀의 선포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선포되는 그 말씀을 특정한 반응과 동의를 구하는 교리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예수 자신에게 유래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그 속에 계시는 예수의 의식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설교와 성례와 교제를 통해 그 의식이 다시 순환, 교류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그리스도의 의식과 일치되고 교회는 그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3)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에 나타나는 쉴라이에르마허 사상의 마지막 측면을 지적하기로 하자.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의 종교란 강력한 사회적·윤리적 성격을 띤다. 이것은 신에게 의존해 있다는 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런 의식을 공유한다는 연줄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식, 그리고 이런 의식들이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의 고립이나 자아의 선택이라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이고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불행만을 초래할 뿐이다. 인간 본연의 삶은 신과의 명백한 교제 속에서 그리고 동일 운명의 타인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이란 종교의 한 근본적인 측면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결론적으로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각 시대 시대의 문제들, 그 문화적 표현 양식들, 그 지적인 선입견들을 이해하지 않는 한 어떤 시대에 대해서도 그 시대가 귀 기울일 만한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쉴라이에르마허는 폴 틸리히(P.Tillich)의 상관방법의 원리를 가장 처음으로 도입한 근대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무시간성을 강조하는 입장과는 달리 시대 시대에 대한 적합성을 말하려고 했던 이러한 관심이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의 최대 강점이었다. 이처럼 쉴라이에르마허는 시대 정신과의 대결 필요성을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화의 초점이 무엇인지도 간파한 사람이었다. 19세기라고 하는 시대가 주로 관심한 것은 개별적인 인간 인격, 곧 자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의미성, 즉 본질도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것은 좁은 지성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이 아니라 경험, 체험이 종교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체계가 얼마만큼 참된 그리스도교적 노선 위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종교의 주관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극히 조심하지 않는 한 주관적인 요소는 언제든지 주관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란 결국 개인적인 주관적 경험이 각자에게 말해 주는 것 그 이상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가 객관적인 계시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피하기가 어렵다. 또한 그의 신학이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하나님 의식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비난도 변명되기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쉴라이에르마허가 부단히 탈피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이른바 심미주의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물론 아직까지도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에서 말하는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명쾌하지가 않다. 다만 주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정서적으로 착색한 것인가? 어쨌든 쉴라이에르마허에 대해 반발한 최초의 현대 신학자는 칼 바르트인데, 그는 그리스도교의 기초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정적 정서적 체험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라고 주장하면서 쉴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성서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바른 사상들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사상들이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또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르는 길을 찾고 발견하셨는가를... 우리가 그와 가져야 할 바른 관계가 아니라 그가 아브라함의 정신적인 자녀들이 된 모든 사람들과 맺으신 계약,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날인하신 계약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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