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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8-29
 제목  몰트만의 신론
 주제어  [몰트만] [신론]
 자료출처  박찬희  성경본문  
 내용

1. 몰트만 신학의 기원과 배경
2. 희망과 종말  
    1) 희망의 의미  
    2) 희망의 종말론
3. 희망의 하나님  
    1) 오시는 하나님  
    2) 삼위일체로서의 하나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미래  
    1) 부활 사건의 이해   
        (1) 몰트만의 역사이해 방법   
        (2) 미래의 지평을 묻는 종말론적 질문  
    2) 부활과 십자가의 의미  
    3)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1) 하나님의 의   
        (2) 부활   
        (3) 하나님 약속
결론
참고문헌

 


1. 몰트만 신학의 기원과 배경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탄생케 된 계기는 2차 대전에서의 그의 포로 생활의 체험에 의해서다. 몰트만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공군 보조원으로서 군문에 파견 되었다가 영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3년 이상 벨지움, 스코틀렌드, 잉글랜드 등지의 수용소들에 전전하다가, 본국으로 귀환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그의 체험이 바로 그의 신학의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모든 희망을 단념하고 희망 없음으로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자신도 비참과 버림 받음과 또 매일의 굴욕의 경험을 겪었다. 이 경험은 차츰 하나님 경험으로 변하였고,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1)

 

그리고 희망을 보았다.   몰트만의 변증법적 사고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몰트만의 신학적 스승인 이반트(Hans J. Iwand) 교수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화란의 신학자 룰러(Arnold von Ruler)에 의해서도 종말론의 지반을 알게 되었다.2) 이 외에도 신학적으로 많은 신학자들이 몰트만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는데, 바르트(K. Barth), 이반트(Hans J. Iwand), 볼프(Ernst Wolf), 폰라드(G. von Rad), 베버(Otto Weber)등은 대표적인 학자들이며,3) 60년대 말에 메쯔(J. B. Metz)는 몰트만이 정치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같이 일한 신학자였다.4)   이와같은 철학과 신학의 배경에 의해 몰트만은 희망의 개념에서 종말론 그리고 종말으로부터 현실을 파악하여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희망의 신학을 탄생시켰다.  

 


2. 희망과 종말  

 

1) 희망의 의미 
 
몰트만의 종말론 신학을 가능케 한 근거는 '희망'이다. 희망으로 인해 그의 신학은 시작된다. 몰트만은 희망을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로 파악한다.   희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약속의 희망의 진술들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서 모순 속에 있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것들은 경험들에서 결과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경험들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다. 그것들은 현재의 현실을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고 있는 현실을 해명하려고 한다.5) 따라서 희망은 현재의 현실을 약속된 변화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에서 희망은 그 힘을 증명한다.6)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희망의 미래를 예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앙은 희망을 확신으로 만들고 이 희망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넓게 하고 신앙을 삶 속으로 이끌어 기대적인 희망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 무너진 한계들을 넘어가게 한다. 또한 희망은 현실 모순에 대한 위로와 반항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있어서는 유혹과 불안 속에, 그리고 죽음의 선고를 받은 삶에 대한 하나의 위로일 뿐 아니라, 또한 고난과 죽음, 굴욕과 모욕, 악의 사악성에 대한 하나님의 반항이기도 하다.7)  

 

2) 희망의 종말론  

 

몰트만은 하나님의 계시는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이라는 희랍적 사고의 개념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noch nicht)것을 현재화시키고 미래를 제시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재 존재하게금 하는데 있다고 본다.8)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은 십자가에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이다.9) 따라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진리의 약속된 미래의 묵시로 이해되며,10) '약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내용들은 종말론적이며 변증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몰트만의 계시에 대한 주장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신학은 부활한 자의 부활절 현현들의 근거 위에서 부활한 자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동일성을 인식하고 선포하는 때, 계시를 말한다.11) 여기서 계시는 부활한 자의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예기하며, 그 예기된 미래는 그의 영광과 주권의 나타남과 약속으로 이해된다. 이속에서 하나님의 진실의 행동으로 이해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의 약속과 모순된 세계에서 신앙을 유지해 나가는 희망이 정초된다.  

 

둘째, 계시는 본질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12) 약속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진리의 미래로부터 오는 현실을 선포한다.13) 즉 약속의 미래는 약속이 충족되고 실현되는 현실이다.14)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현실과는 모순 속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속에서 역사적으로 가능한 것 또는 실제로 불가능한 것을 넘어서서, 무로부터의 새로운 창조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서 선포되는 사건에서 비로소 그것에 부합하고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한 현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성이 계시되는 것은 전적으로 약속의 현실적인 성취에 의한다.15) 약속의 역할은 현존하는 현실과의 모순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미래로 향한 그 자체의 과정을 열어주고, 그 미래는 희망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결국 약속으로 인식되고 희망으로 파악된 계시는 역사 활동의 장소를 확증하고 열어준다. 이 장소는 선교의 사명과 희망의 책임성에 의해서, 그리고 현실의 모순에 포함된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약속된 미래를 향해서 출발함으로써 성취된다.16)  

 

세째, 그리스도의 미래의 계시는 '감취어져' 있다.


그리스도는 감취어 있는 주요, 감취어 있는 구원자이다. 그러나 미래의 나타남을 향해 있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그곳을 향하여 돌진하는 그러한 감취임 안에 있다.17) 즉, 그리스도의 미래의 계시는 '감취어진 계시'지만, 미래의 드러남을 향해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그의 미래는 오신 분의 계시이며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그의 미래는 감추인 것의 드러남 뿐 아니라 약속된 것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18) 그것은 그의 부활에서 약속되고 보증된 것이다.  

 

네째, 약속으로서의 계시는 약속된 미래로 출발하는 보냄의 역사이다. 몰트만은 역사의 의식은 사명의 의식이다. 그리고 '역사에 관한 지식은 변혁의 지식이다'라고 말한다.19) 즉 계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시고 약속하신 미래를 위하여 역사적으로 헌신하도록 보내시는 일과 언제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의 사건 속에 있는 이 계시는 인간의 실제적인 세계 경험과 실존 경험의 관계에서만 진술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학은 고립된 특수 지역으로 추방되고 인간이 관계하고 있는 현실은 무신의 상태로 넘기워 버려진다.  
인간은 현실에서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만날 때, 희망 속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기로부터 나와서 하나님 앞에 서는 능력' 속에 있게 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시고 죽은 것을 살게 하시는 영 안에서 사랑과 자기 부정의 고통을 기쁨으로 질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종의 형태를 취해 자유를 얻게 되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미리 지시하는 진리에 의해 세계 자체가 모든 가능성에 차 있음을 보게되고, 희망에 의해 역사적 현실이 가능한 것의 미리 열려있는 미래를 향해 열려있게 된다.   기독교 희망은 이 희망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계가 변화될 수 있고, 이와같이 희망이 바라는 것에 대해서 열려 있는 때, 그것이 모든 가능한 것으로 가득차고 죽은 자의 부활을 향해서 열려있는 그 때에만 중요하다.20)  

 

마지막으로, 계시 개념은 '희망의 지식'으로 이해된다.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약속된 미래에서 세계는 역사로서 경험되어진다. 그리스도 부활이라는 약속 사건의 종말론적 의미는 기억과 기대 속에서 역사를 향한 의미를 연다. 세계를 자체 안에 완결된 우주나 역사는 신적 진리를 자체 안에 가져오고 자체로부터 지시하는 우주로서 이해하려는 모든 견해는 깨어지고 종말론적인 '아직 아닌 것'은 다가오는 희망의 목표이다. 따라서 계시의 개념은 '희망의 지식'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의 사건의 근거에서 하나님과 역사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세계를 하나님께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열려있는 역사로서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21) 이와같은 몰트만의 계시론은 인간 실존의 문제성과 현실의 문제성을 전체로서 받아들고 약속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 존재와 세계의 종말론적 문제성으로 처리하는 그런 방식에서 인간 현실과 인간에 관한 세계의 현실에 관해서 그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22)  


3. 희망의 하나님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선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 정의는 출애굽기 3장 14절의 하나님의 '자기 정의'를 볼 수 있다. 모세의 물음에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라고 답변한다. '나는 곧 나다'라는 명명은 사실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님의 자기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는 분이며, '언제나 존재하고자 하는 대로 존재하는 분'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며, 초월적인 분임을 알게 한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자신을 어떠한 출현 형태로 고정시키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로운 분, 초월적인 분으로 인식된다. 이를 가르켜 현대 신학자들은 '전적타자' '자유로운 분', '우월한 분' 등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상황이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출현 형태에 자기 자신을 계시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과 만나셨고 관계하셨다. 따라서 인간과 그의 세계에 대하여 초월하고, 우월하고, 거룩하고, 자유로운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과 관계하고자 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이야기될 수 없는 분', 즉 전적 타자인 동시에 우리 가까이 계신 분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관계성은 서로 모순되어 있다. 이 세계 위에 계신 분이 어떻게 이 세계 안에 계실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념은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다.23) 이 개념은 판넨베르크, 한스 퀑(H. Kung), 몰트만 등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오시는 하나님'은 '종말론적으로 미래적인 분'으로 이해 된다.   몰트만은 '그는 미래를 그의 존재의 성격으로 삼고 있다'24)고 정의하고, '오시는 하나님'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오셨음과 그의 현재적 오심과 그의 미래적 올 것임을 논증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몰트만의 하나님 이해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피안의 어느 곳에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오시고 있으며 오시는 분으로서 현존한다. 그는 포괄적인 삶과 의와 진리의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며, 이 약속과 함께 이 세계를 항상 문제화 시킨다. 그것은 이 세계가 희망하는 사람에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가 희망하는 바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와 그리고 이 세계에 묶여 있는 인간의 존재가 문제화 됨으로써 그들은 '역사적으로'된다.25)  

몰트만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계시의 사건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속에 자신의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 인식에 대해서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정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진실의 역사적 행위에서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게 되는 곳에 있다. 하나님의 인식을 위한 전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되는 것이다. 그 한도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과정에 이르기까지도 항상 주체이며 주로서 계속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응답하는 인식이다.26)  

 

만일 하나님의 계시가 약속들이라면, 하나님이 '계약과 진실을 영원히 지키는'(시 146:6) 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계시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에서 하나님 자신이 동일시 되고 인식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초월적인 '개체'에 대한 성찰로 이해되기 보다, 그의 약속들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게 그의 동일성으로 이해된다. 그의 진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성은 역사와 관계 없는 그의 절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서 자유하게 선택된 그의 피조물들과의 관계의 불변성에, 그의 선택하는 사랑과 진실의 불변성에 있기 때문이다.27)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식은 하나님의 약속들의 지평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행동들에 직면함으로써 성취된다. 즉 하나님의 인식은 약속에 대한 그의 신실한 역사 행동에서의 인식이고, 이것을 몰트만은 하나님의 재인식이라고 한다.28)  

 

둘째, 하나님의 인식은 약속과 계약을 통해서 시작되고 기대되는 역사는,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서 그 약속에 대해서 진실을 지키는 자에 대해서 또 그 한도에서 하나님의 진실을 계시되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종말에서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열려있고 약속들의 행위에 따라서 역사 한 가운데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 인식은 항상 선포된 약속들과 일어난 사건이 된 하나님의 진실을 계속 기억해야 하며, 동시에 특수한 희망의 지식이어야 한다.29)   따라서 하나님의 인식은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는 지식이요, 하나님의 약속들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들에 의해서 확증되는 하나님의 진실의 인식이다. 이점에서 하나님의 인식은 하나님의 선택, 계약,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이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한 부단한 회상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미래를 예기할 것이다. 그것은 약속의 회상과 기대의 영역 안에 있는 한계를 넘어가는 인식이다.30)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약속에 의해서 열려진 기억과 기대의 지평 안에서 움직이는 인식이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항상 동시에 하나님을 통한 자신의 역사적 소명에 관해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은 사물과 이해의 불일치에서 그 진리를 증명하기 때문에, 역사적 현실의 모순 속에서, 그 진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현존하는 현실에 항거하게 된다. 그것은 변화를 기대하게 하며, 존재의 비판력을 자유케하여 새로운 앞을 향해서 현실의 미래로 현실에 이르게 하는 인식이다.   세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은 오시는 하나님을 인식케 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은 그의 미래의 진실로부터 약속된 것의 성취를 대망한다. 따라서 희망은 하나님의 진실의 도래를 희망한다. 그것은 약속된 미래를 하나님 자신의 오심에서 만물을 속량하고 회복하는 그의 주권을 기대한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바라는 것 만이 아니고 또한 실천적으로 하나님의 땅 위에서의 지배와 평화 그리고 의를 바란다.31  이는 '오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가능하다. 그의 오심은 역사안에 언제나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기 때문이다.32)  

 

희망의 확실성은 약속의 하나님의 신빙성과 진실에서 일어난다. 희망의 지식은 역사 속에 있는 이 하나님의 진실을 회상하고 많은 예상들, 예컨대 현실주의적 유토피아에서 현실적인 성취를 예기한다. 따라서 그의 약속들 속에 현재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하나의 대상이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하고, '매우 좋다'고 불리워질 수 있는 현실이 창조되고 인식되는 때까지 그가 인간의 정신에 대결해 서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희망이 경험들을 만들고 인간의 정신을 항상 새롭고 끊임없는 자기 초월에로 인도한다33).     

 

2)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오시는 하나님은 역사와 종말에 관계되어 있다. 역사와 종말을 논하게 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이야기 될 수 밖에 없다.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경험과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에서, 또한 성령의 역사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경험에서는 하나님이 고난 당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고난 당할 수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진행되며34) 또한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실천적 진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진행된다.35) 몰트만은 하나님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고난당하는 자로 이해한다. 십자가 죽음의 밤에,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음과 저주의 형태 하에서 희생을 경험한다.36) 또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실천의 모습을 갖게 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해석은 전통적인 '파송의 삼위일체론'과 '내적 삼위일체론'의 결합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기독교적 전승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삼위일체론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또한 성서를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개방된 삼위일체의 사귐의 관계의 역사에 대한 증거로 이해하는 한에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고자 시도한다.37)   파송의 삼위일체론은 예수의 메시야적인 역사로 그의 신적인 파송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파송하시는 아버지요, 또 파송받은 아들로서 역사 속에 나타나신다. 따라서 그 속에 하나님 자신이 그런 분으로 계시되며, 파송자와 피 파송자의 관계는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성에 이르게 된다.38) 이 파송의 삼위일체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인간 자신의 역사에 대한 경험에 근거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앙의 경험이요, 인간에로 향한 예수의 파송이 실현되고, 예수를 통하여 이 파송이 하나님과 연합되는 경험을 말한다. 이 경험은 성령의 경험이다. 이점에서 성령도 파송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의 파송은 인간과 세계와 시간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다. 이는 삼위일체성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에 대하여 말할 때 원초론적으로 또 종말론적으로 고찰하여 파악할 수 있다.39)  

원초론적으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파송을, 종말론적으로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원초론적으로 볼 때 그의 파송이 가진 아버지로부터의 기원이 언급될 수 있고, 종말론적으로 볼 때, 아버지에게서 일어난 아들의 미래를 향한 부활이 언급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과 메시야적 파송의 면에서 관찰할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부활과 종말론적 미래의 면에서 관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40) 이 두가지 면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  
종말론적으로 예수의 미래, 그의 파송의 목적, 그의 역사의 종점은 무엇인가? 여기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역사의 종말론적 목적에 이르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과 종말론적 통일성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성에까지 소급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일성에 있어서는 먼저 성령에 대해 언급된다. 이점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을 먼저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다음에 아들에 대해 언급하며, 끝으로 성령을 통하여 아들과 하나가 되는 아버지에 대해 언급된다.  

 

모든 활동은 성령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창조의 역사도 성령과 함께 출발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역시 성령과 함께 시작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  
그리스도의 역사를 '그의 부활의 빛 아래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역사를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로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영광의 이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의 역사의 목적과 미래로 스스로 참여하는 경험에 근거되어 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그의 파송과 고난에 참여함을 의미할 뿐 만 아니라, 또한 그의 부활과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파송은 믿는 사람들과 창조가 영광스럽게 되는 데에서 성취되고,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영광에 도달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결합되므로써 이루어지는 인간의 영광을 확실하게 하고 또 성취하여 나가는 힘이 곧 성령을 말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영광이 현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작용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현재의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지닌 숨은 영광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완전한 결합에 있는 미래의 영광에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영광 속에서 영화롭게 된 새로운 창조를 이미 지금 계시하고 선취한다. 계시되고 선취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해방과 믿음과 기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성령은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연합시키는 것처럼 또한 우리와 또 피조물의 세계를 아들 및 아버지와 결합시킨다.41)   몰트만의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이해는 성령 안에서 우리와 예수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삼위일체와 인간의 결합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파송하였듯이, 우리를 파송시키고자 한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 종말적 희망으로 선취된 그의 미래를 향해, 모순된 현실에 항거하며 선취된 미래를 현실에 옮기게 한다. 성령적-사회적-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파송하는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그의 미래의 약속의 희망으로 성령을 통해 현실에 항거하며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미래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약속의 형태로 나타났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것은 약속의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예수가 누구시냐 하는 것은 세계 전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약속의 역사가 말해주며, 오직 그의 약속의 회상과 다시 말해주는 것으로써만 가능하다.42)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약속과 율법의 갈등이라는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 약속의 하나님으로 이해될 때, 무에서 존재를 창조하신 야훼를 통하여 구체적이고 단 한번으로 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이 그것이 던져놓은 보편적 종말론적 지평을 통하여 일반화 되는 그런 진리다.43) 이 진리에 의해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인류의 구원이 된다.   약속과 율법이라는 갈등 관계는 예수의 죽음에서 첨예화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능력을 갖기 때문에 또 없던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그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율법과 결부시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력하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때 약속은 벌써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사람의 힘에 달려 있게 되기 때문이다.44)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으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이다. 이제 약속에 의해 복음을 이해해야 하며, 그래야 만이 복음이 땅 위에서,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의 미래의 약속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 질 수 있다.  


1) 부활 사건의 이해  

 

몰트만은 부활을 그의 신학에 중심으로 삼았다. 부활사건은 그에게 있어 없어서는 알될 중요한 사건이다. ... 부활을 통해 비로소 십자가에 감취어진 비밀과 예수의 삶의 선포를 하나님의 약속의 선취로 이해되며, 그의 미래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실존적 질문과 또 내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하는 종말론적 질문 속에서 부활의 현실이 밝히 드러난다.45)  

 

(1) 몰트만의 역사이해 방법  
몰트만의 역사 이해는 역사적 회상 방법으로 제시된다. 부활의 사건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 한번의 사건을 회상함으로써 회상된다. 그 때 그리스도의 부활은 언제나 다른 때에도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유비로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결국 일어나야 하는 것에 대한 유비로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발생한 일을 기다리는 것은 선험적 체험과 현실성이 되어야 하며, 그 체험과 현실성은 종말론적 유비의 안내를 받아 미래적인 것의 그림자나 기대로 전개되는 역사적 이해를 시도한다. 그때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래의 사건에 길을 열어주는 한 사람이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하는 그 역사를 확립시켜 주기 때문에 역사적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미래를 열어주기 때문에 역사적이다.46)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은 오직 약속이란 양태에서만 이해되는 사건이며, 그 사건은 독특한 시간 가운데 있으며 그가 역사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미래가 오직 그의 미래에 관련 지음으로써만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되며 또 인식하는 자에게 매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부활의 보고를 거듭 종말론적으로 내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하는 주도적 질문 아래서 읽어야 한다.47)  

 

(2) 미래의 지평을 묻는 종말론적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보고는 약속의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지평 가운데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올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부활한 자의 나타남에 무엇이 밝히 드러났는가 하는 질문이 발생한다.48)  
부활적 나타남에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체험 방식과 매개 형식은 후기 유대교 전통에서 얻은 묵시문학적 표상과 희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부활 보고는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의 틀을 뚫고 나간다. 왜냐하면 부활적 보고에 의하면,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또 위에 있는 하늘 세계의 신비를, 또 장래에 있을 세계 심판의 절차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베풀어 놓은 미래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49)  
부활한 자의 나타남에서 무엇이 밝히 드러났는가 하는 질문은 기독교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게 하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나타남을 받아들이는데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솟아난다. 희망의 신학적 지식은 부활 사건이 세워주는 미래의 지평을 특정하려고 할 때 인식되며, 그 인식은 부활 사건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의 활동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이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제시하는 미래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의 지평을 묻는 종말론적 질문에서 얻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적 지평에서 서 있으며, 부활의 나타남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귐을 통한 이 세상으로의 파견과 희망을 얻고 그의 미래를 향하게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물음이 발생한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몰트만은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통하여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이 요구되는 곳에서 발생되는 질문이라고 한다.50)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미래에 의해 답변된다. 참된 인간 존재는 인간 실존이 세계에로 또 미래에로 향하여 열어 놓은 존재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공개성에 의하여 근거를 얻고 열려지고 또 생명을 유지한다. 그 계시의 공개성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통고되며 그 부활에서 이 사건은 자신을 넘어 만물의 완성인 종말로 향하게 된다.51)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과 새로운 존재의 전체성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인간은 불안한 약속에 있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에서 생겨나는 희망으로 인해 세계의 무성과 모순성과 고통을 변화시킨다.  

 

2) 부활과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의미한다. 이 둘은 서로 모순 속에 있다. 버림받았던 자가 어떻게 가까이 함께 할 수 있을까? 버림 받은 자와 살아난 자는 서로 동일한 분인가?  
몰트만은 예수의 동일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초월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되는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하고 그러므로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법과 결부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때 십자가와 부활의 모순은 그의 동일성에 속하는 것이다고 말한다.52) 십자가와 부활에서의 예수의 동일성의 근거는 부활절의 나타남에서의 소명을 받는 환상과 나타난 이의 말씀에서 찾아진다. 이 말씀 가운데 어떤 자기 통일화의 통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때 약속된 신적 생명의 영광 가운데 나타난 자와 십자가에서 죽은 자와의 자기 동일화의 통고를 예수의 자기 계시의 행위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의 나타남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있어서 예수의 동일성과 계속성이 계시된다.53) 이는 모순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변증법적 동일성이며 동일성 가운데 성립하는 변증법이다.  


이 동일성은 하나님에 의해 죽으시고,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하신, 무 가운데서 생명과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데 그 요점이 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신성의 계시와 하나님의 진실성의 계시가 예수의 나타나심에 실현된 그의 자기 계시에 깃들게 된다. 그때 십자가 처형과 부활절 나타남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 사건 가운데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고백하고 그의 진실성이 밝혀진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54) 십자가 처형과 부활절의 나타나심에서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그의 진실성은 하나님이 함께 함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도 함께 죽음을 당하셨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 종말론적 미래를 지시하게 된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해되며, 부활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실의 사건으로 이해 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의 약속의 종말론적 보증으로 또 완성의 출현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절의 나타남 사이에 일어난 것은 그 때 미래적인 계시와 보편적인 완성에 놓여 있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자기 자신을 넘고 또 예수를 넘어서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시를 지시한다.55)

 

그때 예수는 자신을 장차 오실 자로서 나타내고 또한 장차 일어날 사건에 방향과 길을 마련해 준다. 이점에서 새 단계로 진전된 종합을 이루는 변증법으로 발전된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에서의 예수의 동일성은 사람에게 있어 파견과 약속으로 향하게 한다. 부활하신 이의 계시는 그것을 만난 자들에게 예수의 파견과의 동일화를 지어주고 그들을 예수의 파견으로 열리는 미래 또 부활의 빛으로 나타나고 바랄 수 있게 된 그의 미래에 의하여 열리는 역사로 들어가게 된다.5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칭호에서 역사의식이 사명의식으로 이해되며, 그의 동일성은 종말론적 동일성으로 이해되며, 그의 칭호는 또한 약속으로 통고하는 앞으로 열려 있고 옮겨 갈 수 있는 칭호가 된다. 즉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향하게 하려는 파견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은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고, 그의 미래를 선취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몰트만은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이끌어 들인다.57) 부활절의 나타남으로 제자들은 그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의 영', '다시 살리는 영'(롬 8:11)을 이미 그들 자신 속에서 인식하였으며, 부활의 힘(빌 3:10)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현현을 기다렸다.58)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고, 성령의 힘으로 파견된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주시고 그의 미래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고, 그 내적인 진행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59)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함과 그리스도의 미래를 향하게 한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파견했듯이 우리도 파견함과 동시에 그의 미래의 약속에 대한 희망으로 그의 미래를 향하게 하는데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는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한다. 재림은 현실적으로는 떠나간 분의 다시 옴이 아니고 '임박한 내림'이다. 내림은 내일이면 지나가 버릴 현재가 아니고 오늘과 내일, 사람이 기다려야 할 현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내림하는 현재 곧 다가오는 미래'이다. 그것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립해서 어떤 새 것을 가져온다.60)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는 약속의 언어로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기대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과 고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정해졌다. 그래서 약속에 의해 자극된 미래에 대한 지식인 희망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관해서 알기를 질문한다. 그래서 그것은 그가 누구며 그 안에 제공되고 감취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성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로 인식이 된다.61) 또한 우리가 십자가 밑에 감취어 있음을 잠재라 하고 부활에서 계시된 것을 경향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예수의 파견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묻게 된다. 이 물음은 앞서 약속된 것에 부딪치게 되고, 예수의 선교는 오직 약속에서 이해됨을 말해준다.62)   그리스도의 미래는 새 것으로의 하나님의 의,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되는 생, 존재의 새로운 전체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의 모습으로 앞서서 비취어 진다.  

 

(1)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선포된다.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건을 선포하며 또 이 죽음에다 자기의 몸을 바친 사건 또 그 부활과 생명을 불의한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오신 사실로서 선포하면서 이 복음이 그 의를 나타낸다. 죄인을 위한 한 새로운 하나님의 의의 실현과 계시가 그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된다. 하나님의 의는 그 근거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뿐 아니라 그의 죽으심과 그의 사심에서 얻는다. 그가 죽으셨다는 것은 그가 죄 때문에 단 한번 죽으셨다는 것이고 그가 사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 때문에 죽었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살았다는 것을 아시오(롬 6:10-11).여기서 밝히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것이 용서해 주는 죄에서 그 척도를 얻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약속하고 지시하는 부활하시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의 지배 속에서의 새로운 생에서 찾는 것이다.63)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그것은 화해의 선고에서 또 생명으로 살리라는 약속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과 세례 가운데 현재하고 또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비로서 완성되는 한 과정 가운데서 파악된다. 이 과정 가운데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언제나 약속되고 공격받고 입증하는 은혜의 선물로서 받으며 따라서 약속과 기대됨이라는 표징에서 얻는다. 하나님의 의는 단지 밝혀진 은혜의 선물이 아니고, 믿음의 생에서 활동하는 은혜 주는 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곧 그가 육체적으로 연대관계에 들어 있는 세상의 모순 가운데서 의롭게 인정받은 자는 고난받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자기 몸에 또 지상에 또 모든 피조물에게서 찾으려고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64)   그리스도 사건에 감취어 있는 하나님의 의는 새로운 존재의 전체성에 이르는 내적 경향을 갖는다. 의롭다 인정 받은 자는 육체적 순종으로써 이 경향을 따른다. 순종해 보려는 그의 분투와 세상의 하나님 없음에서 겪는 그의 고난은 전체의 의가 성립될 미래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 투쟁은 장차 올 하나님의 의의 단편이요 전주곡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이미 자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에 대하여 의롭다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65)  

 

(2) 부활  
예수의 죽음은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메시야의 죽음으로서 경험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죽으심'도 포함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고, 심판과 저주로 약속되고 찬양받은 생의 배제로서, 포기와 멸망으로서 경험되며 선포된다. 이 생의 기대와 관련하여 그의 부활은 생 일반에 도로 돌아옴이 아니라, 죽음의 죽이는 힘을 극복함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의 극복으로서, 심판과 저주의 극복으로서, 약속되고 찬양 받은 생의 완성의 시작으로서, 그러므로 죽음속에 죽어버린 것의 극복으로서, 부정의 부정으로써(Hegel), 또 하나님의 부정의 부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66)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생의 원천으로서 또 모든 것에서 완성되고 죽음의 죽이는 힘에서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는 확고한 약속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인정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자의 살아나심과 버림받은 자의 높임 받음에서 하나님 찬양에로 이끌려 올려진 영원한 생의 잠재를 이 사건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과 부활의 기대에서 고난과 죽음의 변증법으로서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다. 이것은 거룩한 영의 활동으로 기술할 수 있다. 바울에 의하면 '영'은 '살리는 영'이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를 용납하며 그들의 '죽을 몸이 살게 되는 자들이 그 안에 거주하는 영'이다(롬 8:11).67)  

 

여기서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으로부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미래의 광채와 담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은 미래적인 힘이다.68) 영은 그리스도의 회상으로서의 그의 미래의 약속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공동체' 안으로 그의 죽음을 본받아 죽음에 폭로된 사랑으로 이끌어 간다. 그래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파견과 사랑에 참여함으로 받는 고난의 힘이며, 여기에서 생과 자유와 부활의 미래가 가진 가능한 것, 장차 올 것, 약속된 것을 위해서 갖는 정열이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약속된 미래와 육체적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과 순종도 육체적 부활의 미래를 향한 씨 뿌림이다. 순종 가운데 영으로 살려진 것들이 죽을 몸이 살려지는 과정에 있다.69)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화해를 받고 완성된 생이 세계와 인간의 현재의 또 체험될 만한 현실에 부딪쳐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데서 사람과 세계, 영과 몸, 이스라엘과 이방민족들을 위해 희망된 미래라는 적극적인 것이 부정의 부정으로 표현된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죽음이 다시없고 고난도 고통도 부르짖음도 다시 없으리라(계 21:4)는 약속,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난 얼굴과 부활의 영으로 변화받은 육체성(고전 15:35), 이 표상들 안에는 미래가 부정적 현재 전에 미리 표상되고 미리 일컬어져 있다.70)  

 

(3) 하나님의 약속  
종말론의 진정한 중심과 근본 개념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지배'로 약속되고 기대된 것에 있다.  
그리스도 부활 발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망각할 수 없는 근거로 작용하며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미래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사의 여러 경향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며 무를 존재에로 부르며,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선택하고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는데서 존립한다고 몰트만은 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활과 새로운 창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 새 나라에 대한 희망은 전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를 향해 갖는 불안의 연대성에로 이끈다(롬 8:22). 하나님의 나라는 만물의 미래의 지평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서 현재하고 그의 현재는 미래적인 것과 가능한 것과 약속된 것의 적나라한 현실과의 모순을 통하여 방향 정해진다.71)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안에서 해방하는 통치로서 현재한다면 이러한 해방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약속과 복음의 선포 속에서 분명해진다. 약속은 사람들이 정주하고 있던 환경으로부터 그들을 불러내고 성취에 이르는 도정에 세우고, 백성들을 지상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하고 자유에의 길로 부른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역사 속에 현재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말씀과 신앙, 복종과 친교를 통해 파악된 가능성 속에서 그리고 세계의 생존을 위한 자유로운 협동 속에서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을 죄와 율법 그리고 죽음의 노예 상태로부터 불러내고 의와 영생의 자유에 이르는 도정에 세운다. 이러한 도정은 공격 속에서 이룩되는 구원, 죽음의 권세에 대한 투쟁 속에서 획득되는 삶의 승리, 추종에의 저항 속에서 얻어지는 궁극적 자유다.72)   결국 몰트만은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의미와 그의 미래를 해석하고 있으며 그 빛에서 약속되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앞을 향하여 종말론적 희망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결  론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된 형이상학적이거나 도덕적인 神개념의 테두리와 이름 속에서 해석하지 않고, 신의 개념 아래 이해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전개한다. 神은 여기서 다른 자연이나, 天上의 인격이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 사건은 하나의 이웃인간성의 사건이 아니라, 아들의 사랑과 아버지의 고통, 미래를 열고 삶을 창조하는 성령의 사건, 즉 골고다의 사건이다. 따라서 몰트만의 십자가 신학은 전통적으로 구분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內在的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역사 속에서 구속 사건으로 전개되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그리스도 십자가의 역사적 구체적 사건 속에서 통일 시킨 점에 있어서 신학적인 공헌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하나님의 어떤 영원한 內的 存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경륜적 삼위일체 되심에 단 한 번 계시된다. 십자가의 역사는 '역사의 역사'요, '역사의 전부'이며,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라고 말 할 수 있다.73)  

 

또한 몰트만은 부활을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만 확정시키는 역사적 증명의 시도를 넘어서서 부활한 구주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지는 미래의 약속,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存在의 약속에 대한 豫期요, 선취로써 파악한다. (부활은) 역사적 범주로 증명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것이다. 이 새로운 것은 따라서 역사 속에서 과거에 대한 유추로 존재하지 않고, 오는 것에 대한 유추로만 생각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정초하는 사건이 된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 사건은 몰트만에 있어서 미래의 약속의 고나점에서 다가오면서 그 창조적 능력을 수행하는 세계 실존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해된다.74)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몰트만의 신학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신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 소지가 남아있다.   몰트만에게 있어 관심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그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해석으로 일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발현으로 이해된다. 이점에서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의미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반면에 예수의 부활이 몰트만에게 있어서 상당한 의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의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부활에 의해 희망이 생성되고, 부활의 빛에서 모든 것을 해석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의 신학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김균진 교수는 십자가의 사건이 부활을 통하여 비로소 구원의 사건으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몰트만에 대해 비판한다.75)  

 

몰트만은 부활에 너무 관심을 집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약화시켰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그의 미래에 대한 선취이며 새 창조의 출발의 근거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부활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한 보고로 본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그에게 있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는 십자가 사건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부활절 믿음에 의한 부활 사건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학적 약점에도 우리는 그의 신학적 작업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에서 생성되는데, 그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예기하며, 예기된 그 미래는 그의 영광과 주권의 나타남과 약속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실된 행동이고, 그의 미래에 대한 약속과 모순된 세계에서 신앙을 유지해 나가는 희망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약속이므로 약속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진리의 미래로부터 오는 현실을 현실에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은 현실의 모순 속에서 세계와 인간을 그리스도의 미래로 향하게 하며, 그 미래는 희망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확신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건이다. 다시 사심에서 희망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부활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 하는 사실을 밝히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사건에서 세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베풀어 놓은 미래를 보게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1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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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oltmann. Gottes-erfahrungen. 전경연 편. 「하나님 체험」.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2.
 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Munchen : Chr.Kaiser Verlag. 1965.
전경연, 박봉랑 역. 「희망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3.  

 

2차 자료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I 」. 서울 :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II 」. 서울 : 연세대학교출판부. 1987.
김균진. 「헤겔철학과 현대신학」.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김영환.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김용복,  '성령과 역사', 기독교사상,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1.
4), P.145. 각주/미주 1)
J. Moltmann, Gottes-erfahrungen, 전경연 편, 하나님 체험(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2), PP.13-14.
2) Ibid.
3) 김균진, 헤겔철학과 현대신학(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0), PP.217-220.
4) 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Munchen:Chr.Kaiser Verlag,1965), 전경연 박봉랑 공역. 희망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3), P.20. (앞으로 희망의 신학으로 약함)
5) Ibid., P.17.
6) Ibid., P.19.
7) Ibid., P.22.
8) J. Moltmann, Perspektiven der Theologie, 전경연 편, 신학의 미래 I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0), P.29.
9) Ibid.
10) 희망의 신학, P.101.
11) Ibid.
12) Ibid., P.102.
13) Ibid.
14) 김영환,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348.
15) 희망의 신학, P.103.
16) Ibid.
17) Ibid., P.105.
18) Ibid.
19) Ibid., P.107.
20) Ibid., P.112.
21) Ibid., PP.112-113.
22) Ibid., P.114.
23)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I, P.222.
24) 희망의 신학, P.192.
25) Ibid., p. 149
26) Ibid.
27) Ibid.
28) Ibid., P.155.
29) Ibid., P.156.
30) Ibid.
31) Ibid., P.158.
32) 몰트만, 희망의 실험과 정치, P.20.
33) 희망의 신학, PP.158-159.
34)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t Gottes, (Munchen:Chr.Kaiser Verlag,1980), 김균진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17.
35) Ibid., P.18.
36) J. 몰트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김균진 역. 신학사상, 1977년 가을호, P 546.
37)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PP.32-33.
38) 몰트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P.534.
39)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4) PP.118-120.
40) 몰트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PP.538-539.
41) Ibid., P.545.
42) 희망의 신학, PP.192-193.
43) Ibid., P.193.
44) Ibid., P.197.
45) Ibid., P.222.
46) Ibid., P.241.
47) Ibid., P.253.
48) Ibid., P.254.
49) Ibid., P.256.
50) J. Moltmann, Mensch:Christliche Anthropologie in den knoflikten der Gegenwart, 전경연 김고광 역. 인간 (서울:한신대학출판부, 1973), P.28.
51) 희망의 신학, P.260.
52) Ibid., P.265.
53) Ibid., P.263.
54) Ibid., PP.265-266.
55) Ibid., P.266.
56) Ibid., P.267.
57)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P.113.
58)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P.185.
59)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P.113.
60) 희망의 신학, P.297.
61) Ibid., P.269.
62) Ibid.
63) Ibid., P.272.
64) Ibid., P.273.
65) Ibid., P.274.
66) Ibid., P.278.
67) Ibid., P.239.
68)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ontes, P.331.
69) 희망의 신학, PP.280-281.
70) Ibid., P.282.
71) Ibid., P.292.
72) J. Moltmann. Der Kirche in der Karft des Geistes. Eine Beitrag zur messianischen; Ekklesiologie, Chr. Kaiser Verlag, Munchen, 1975. 박봉랑 외 4인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0), P.212.
73) 김영한, op. cit., pp. 371-372.
74) Ibid., p.353.
75)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II(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1987),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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