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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8-17
 제목  본회퍼의 위임사상
 주제어  [본회퍼]
 자료출처  오양진  성경본문  
 내용

본회퍼Ⅰ. 서  론

    A. 문제 제기
    B. 연구범위 및 방법


Ⅱ. 질서개념의 역사적 고찰
    A. 자연법 사상
    B. 질서개념의 서론적 고찰
    C. 루터(Martin Luther)의 삼대권(三大權) 질서사상
    D. 브루너(Emil Brunner)의 창조질서

 

Ⅲ. 본회퍼(Dietrich Bohnhoffer)의 위임사상
    A. 위임의 개념
    B. 위임의 의미
       1. 존재의 관점에서 본 위임의 소여성(所與性)
       2. 위임의 성격
       3. 위임의 대리(代理)개념
       4. 위임의 유비론(類比論)적인 구조
       5. 각 위임의 동등성
    C. 위임의 권리 영역과 권위 문제
       1. 권리 영역
       2. 권위 문제
    D. 위임의 기능
       1. 노동
       2. 결혼
       3. 국가
       4. 교회
       5. 자유활동 영역

 

Ⅳ. 결  론
   A. 요약
   B. 평가


 * 참고문헌


Ⅰ. 서   론
 
A. 문제 제기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개인적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생활할 뿐 아니라 인간 사회 안에서 한 구성원으로 생활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동료 인간들과 불가분의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일찌기 그리이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한 바와 같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성은 인간 본질에 부수적으로 첨가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인간은 타인들과의 사회적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실현하며 인간으로서의 목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이기 때문에 자유가 있어야 하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질서 때문에 너무 제약되거나 또는 사회의 질서가 개인의 지나친 방종 때문에 무질서 내지는 혼란에 빠지거나 할 때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질서의 기본적 입장은 이 두 극단을 어떻게 잘 조절해 나가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니이버(Reinhold Neibuhr)의 사회 정의는 독재와 무질서의 양 극단을 피해서 어떻게 기술적으로 두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잘 항해해 나가느냐에 있다는 말은 이러한 각도에서 한 말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와 권리가 주장되고,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정의가 요청된다면, 자유와 정의가 잘 균형잡히느냐에 따라 올바른 질서가 방향잡히는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기독교의 올바른 질서는 자유, 평등, 정의 등의 기본적 가치에 그 기초를 둔다.
기독교인 역시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의.식.주를 영위해 나가야 하며 국세청의 과세의 대상이며 교회와 기독교 모든 단체 역시 사회의 정책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도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과 사회, 교회와 국가의 문제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더욱 복잡다단하다.  교회와 국가가 일치하고 통일되어 있었던 중세시대에는 신앙과 사회생활, 교회와 사회의 관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고 초자연적인 은총의 세계와 자연법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질서의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는 형이상학적 신학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가 갈라지고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현대에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모순 대립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종교와 사회,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다시금 새롭게 결정해야만 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사회적 유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인간 창조의 목적과 연결되며, 교회적 유대에 대한 질문은 인간 구속의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또한 하나님은 죄의 침입으로 붕괴된 인간 공동체를 회복시킴으로써 그의 창조 목적들을 완성시키기 위한 은혜로운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본 필자는 이러한 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인간의 제반 사회질서를 설명해 보고자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논제로 택하였다.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그리고 브루너는 창조질서란 개념으로 인간의 제반 사회제도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본래적으로 주어진 사회조직이라는 것이다.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그러한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변하지 않는 조직이요,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적인 구조는 창조에 의해 주어진 것이나 그 구체적인 양식은 인위적으로 인간이 택한다.
본회퍼는 이런 조직을 위임(Mandate)이라고 표현한다.
본 필자는 이상에서 제기된 문제점과 내용들을 본회퍼 자신의 저서 [기독교윤리]와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본회퍼의 사회윤리]를 교제로 서술하고자 한다.

 

 B. 연구범위 및 방법

 

본회퍼의 신학적 시기는 3기로 구분될 수 있다.  즉 제1기를 [성도의 교제]와 [행위와 존재]를 저술한 학문적 시기(1927-1931/32), 제2기를 [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생활]을 낸 교회투쟁기(1932/33 - 1939/40), 제3기를 [윤리학]과 [옥중서간]을 집필한 저항과 감금시기(1939/40 - 1945)로 구분된다.
본회퍼의 윤리학은 그의 생애 중 제3기 저항과 감금시기에 옥중에서 집필한 단편들을 모아서 베트게(Bethge)가 편집한 것이다.    책에서 그는 그의 위임사상을 두 번에 걸쳐 기술하였다.  하나는 위임의 기능에 관하여 다른 하나는 계명으로서의 위임과 위임개념이다.


몰트만은 [본회퍼의 사회윤리] 제3장에서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책은 독일 개신교회의 청탁으로 1949년 이후 가지게된 일련의 법신학적 대화로 말미암은 것이다.  거기서 일어난 문제는 법률의 신학적인 근거가 무엇이며 법률, 결혼, 국가 일반의 제도적 현상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몰트만은 본회퍼 위임사상의 사회윤리학적인 특색에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용전개를 위하여 본회퍼의 위임사상에 영향을 끼친 질서개념을 역사적으로 살펴본 후에 제 장에서 본 논고의 주제인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위임개념, 위임의 의미, 위임의 권리 영역과 권위 문제, 위임의 기능 네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 본고의 요약과 평가로 마무리 하였다.
이상에서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된 현실구조를 제시하려는 데에 그 중요성과 위치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된 현실의 삶 한가운데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화해된 현실 그리고 더 나아가 위임을 통한 하나님의 세계통치가 그의 윤리학의 중요한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
본 소고의 내용은 그의 윤리학에 나타난 위임사상을 이전 질서개념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고찰해 본 것이다.  그리고 내용전개에 있어서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며 결론에서는 그의 위임사상이 끼친 영향과 문제점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Ⅱ. 질서개념의 역사적 고찰
 
전술하였듯이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 앞서 원초적으로는 자연법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의 질서개념에 다소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서술하기에 앞서 그 이전의 질서개념을 검토하고자 한다.

 

A. 자연법 사상

 

인간은 역사 및 문화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고 또한 그것들에 의해서 제약받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윤리의 영역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동서고금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연속되는 윤리적 요소는 없는 것일까?  이를 윤리의 보편성이라 부르기로 하자.  시간과 장소가 달라져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 시인된다면 동서고금을 통하여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윤리성이 긍정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로부터 이러한 보편성을 자연법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표시해 온 것같다.  기본적이며 공통적인 윤리적 요소를 시인하여 창조의 질서개념에 연결시켜 기독교가 자연법을 이해해 온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롬2:14 - 15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도 인간 본성의 법과 양심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윤리의 보편적인 요소를 밝혔다.  윤리의 보편적인 요소에 대한 객관적인 측면이 자연법이라면 주관적인 측면은 양심일 것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의해 보면 자연법이란 인간성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인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을 발견하려는 윤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성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인간성을 윤리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하여 비관론을 펴는 개신교적 전통에서는 자연법을 등한시하거나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
그러나 카톨릭 전통에서는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 외에 존재하는 윤리적 지혜의 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연법을 가르치므로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울렌(Gustaf Aulen)은 그의 저서 [기독교 신앙]이라는 책에서 자연법을 창조질서의 이성적이고 세속화된 상위(相違)로 기술하고 있다.  자연법이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면 창조질서는 하나님과 관련 하에 생성되고 필히 창조자 하나님의 신앙과 연관된 종교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런고로 천주교가 철저히 자연법에 근거한 윤리 체계를 전통적으로 고수해 오고 있는 반면에 개신교가 자연법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온 것을 어쩔 수 없는 신학적 귀결이었다.
이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다루면서 자연법 사상의 발전을 고찰해 보자.
본래 자연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목적론적인 윤리(Telelological Ehtics)의 범주에서 출발했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자연법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냐는 질문에 반증되는 경험적인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은 인간에게 편재한다"고 확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 그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된 비젼으로 인도하는 행복(eudaimonia)에 대한 자연적 경향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인간의 목적이요 모든 인간에게 있는 도덕성에 대한 중요한 자극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자연법은 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일반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지만 이차적인 원칙은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처럼 아퀴나스는 구약성서의 근거 하에 하나님은 가끔 자연법을 대항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째로 자연법이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일반적인 윤리는 누구에게나 파괴될 수 없으나 이차적인 원리는 허물, 죄, 악습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파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자연법 사상에 대한 아퀴나스의 총괄적인 견해이다.


다음으로 루터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는 롬2:15에 기록된 바울의 진술에 기초하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며 또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세상에 출생한다고 한다.  루터는 이것을 '자연의 정의'(Natural Justice), '자연법'(Natural Law), 또는 '자연의 법'(Law of Nature)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 법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마음 속에 최선의 법전을 갖고 있다.  자연법은 인간, 즉 인간의 이성 속에 새겨져 있다.  이성이 이 자연법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법을 이성의 법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 자연법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성을 주셨고 그것을 자연법과 함께 인간들의 마음 속에 새겨 놓았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들의 이성 속에 새겨져 있는 법을 통하여 효과있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법은 매우 귀중한 유산이다.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경험 자체가 가르쳐 주고 있다.  루터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 규범(norm)을 감지한다고 말한다.
자연법과 실정법과의 비교에서 루터는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선하며 실정법은 변할 수 있으나 자연법은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루터의 베일(Veil)개념이다  자연적 계시를 말할 때 루터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탈(mask) 혹은 면사포(veil)로서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면사포는 모든 피조물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현세에 있어서 우리들을 다루실 때 우리에게 직면하시지 않고 다만 우리들에게 숨겨진 채 또는 그림자로 나타나신다."
그는 하나님이 자연 안에서 또는 자연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역사하신다고 믿었다.  만물은 곧 하나님의 베일이며 마스크이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며 그의 역사는 날마다 자연 안에서 창조의 활동을 계속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루터의 베일개념은 그의 삼대권 질서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자연법에 관한 그의 사상에 있어서 부정적이다.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바로 인식될 수 있는 데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는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연법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Suum Cuique'(각자에게 자기 몫을)개념도  애매하기 때문에 그 종국적인 해결은 하나님께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틸리케는 자연법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루터의 전통에 따라 'Coram Deo'와 'Coram Hominibus'로 나누고 'Coram Hominibus'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연법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는 루터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세속적 차원에서만 자연법의 타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다음으로 바르트(Karl Barth)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바르트에게 있어서 자연신학이나 자연법의 긍정적인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외에 일체의 어떠한 것도 그의 신학 중심에 놓을 수 없었던 바르트이었던 고로 그는 자연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천주교의 결의법(決疑法)을  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입각한 철저한 주체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34년 자연신학에 관한 바르트와 브루너의 논쟁은 고무적이다.


그리스도의 계시 밖에서도 신지식이 가능한가에 대하여 바르트는 'Nein'을 브루너는 'Ja'를 선언한 데서 비롯되었다.  바르트가 세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만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브루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계 안에서 창조주를 알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브루너에 의하면 창조물이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의 창조가 아닐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창조된 자연 속에는 신의 영광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비교해 보면 자연신학(혹은 자연법 사상)에 대해서 바르트는 부정적이고 브루너는 긍정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라인홀드 니이버에게서 암암리에 대두되고 있는 강력한 자연법의 경향성을 본다.  특히 도덕적 이상주의를 거절하고 윤리적 현실주의를 주장한 니이버이기 때문에 브루너의 계열을 따라 순수한 사랑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정의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자연법을 중요시한다.
이상에서 자연법에 관한 여러 견해를 검토해 보면 자연법은 꼭 긍정도 부정도 못한다.  큐란(Charles E.Curran)의 말과 같이 자연적인 상태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잘못이지만 반대로 자연이나 자연상태에 대해 그 뜻을 부여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와같이 자연상태에 있어서 인간의 도덕적인 지혜나 능력이 적극적으로 시인이 되든(카톨릭교회의 경우) 또는 소극적으로 긍정이 되든(개신교의 경우) 간에 일단 그와 같은 요소를 받아들이는 한에 있어서 모든 인간에 공통되는 도덕의 보편성을 타당화시킨 토대는 확정되었다고 판단된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도덕의 보편적인 토대를 긍정함에 있어서 자연법 개념이 큰 역할을  였다.
개신교에 있어서 자연법 사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에 있어서 자연법은 긍정되고 있으며 자연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계시와는 관계가 없는 어떤 윤리적인 지혜가 존재함이 시인되고 있음을 준다.
이러한 자연법 사상은 인간 사회질서 이전에 도덕적 윤리의 보편적 개념으로서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 브루너의 창조질서, 본회퍼의 위임사상으로 이어지는 사회질서 개념에 원초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B. 질서개념의 서론적 고찰

 

본 장에서는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 브루너의 창조질서로 이어지는 일반적 사회질서의 서론적 고찰로서의 질서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질료 자체는 창조된 것이므로 질서의 영역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6일 동안의 창조기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창조는 하나의 포괄적인 질서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질서개념은 신약성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수 자신은 구약으로부터 내려온 일정한 질서들을 전제했고 그것들을 결코 뒤엎으려고 하지 않았으나(마 5:17), 그것들을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막 2), 또 종말론적 한계에 맡겨버린다(마19의 이혼문제 등등).


바울은 예배에서의 질서들을 준수하고(고전 14:40), 또 직업상의 신분질서들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 기독교 신앙으로 회개한 후에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고(고전 7:20), 또 죽은 자들의 부활도 '질서에 따라', 즉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가르쳤다(고전 15:23).  물론 신약에서 질서개념은 어느 곳에서도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교부시대의 어거스틴은 선과 악의 문제에서 질서개념을 파악하고 있다.악은 규범, 즉 의무가 따르는 질서로부터의 이탈이며 질료는 창조에 의해 부과된 질서에 선행하기 때문에 질료를 하나의 무질서의 원죄로 보며, 때문에 악의 원리로 간주하는 희랍적 경향에 반대한다.  어거스틴의 초기 저작 [De Ordine]은 주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질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중세기 신학에서부터였다.
아퀴나스의 경우 질서개념은 기원개념과 목표개념의 이중적 관점에서 정의되었다.  우주의 질서는 이중적, 말하자면 피조계 내에서의 질서와 하나님을 지향하는 질서로 되어 있다.  인간은 삼중의 질서, 즉 이성의 질서, 세상적 통치의 질서 그리고 영적 질서에 종속된다.  따라서 질서에 어긋나면 양심의 가책, 세상적 형벌 그리고 신적 형벌의 삼중적 벌을 받는다.  아퀴나스는 사회구성의 세 요소를 말했다.  최상위에는 정치적 권력(Optimates), 그 다음에는 귀인(Honorabiles), 마지막에는 평민(Vulgus)이다.


루터도 인간의 신분을 통한 질서를 말했다.  즉 세 개의 신분론(Drei-Stände-Lehre), 영적 신분(Status Ecclesiasticus), 정치적 신분(Status Politicus), 가정 신분(Status Vecumenicus)이다.  그러나 그는 질서의 가변성으로써 한 신분에서 다른 신분으로 개인적 전환이 고려되었지 새로운 질서구조의 형성이나 질서구조 자체의 변화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현대적인 정의로서 질서개념을 고찰해보자.  브루너는 "질서에서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 갖는 소여들을 생각하는 데 그것들은 모든 역사적 삶에 불변하는 전제들로서 근거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그 형식들에 있어서 역사적으로는 가변적이나 그 근본 구조는 불변하며 또 이것들은 동시에 일정한 방식으로 인간들을 서로 만나게 하고 결속시킨다"고 한다.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원계시'(Ur-Offenbarung)라는 명제로 질서개념을 서술하고 있다.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성서 자체가 단 하나의 계시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 있고, 결국 말씀의 계시와 병행하여 사역의 계시,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원초적 자기증거' 혹은 '원계시'가 존재하는 것을 주장한다(롬 1:18이하, 2:15, 행 4:15-17, 17:23) 알 하우스는 하나님에 대한 자기증거, 그리스도 이전의 성서적 증언 없이도 하나님 이 인간에게 자기를 증거하신다는 사실에서시작한다.


그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취급함에 있어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비적 증거는 이중적이라고 한다.  첫째 인간과 세계의 현실성 안에서의 하나님의 창조계시 혹은 원계시이고 다음은 인간과 세게의 현실성 안에서의 하나님의 진노의 섭리이다.  때문에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죄인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고 그리스도 이외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증거를 원계시라고 부르는 데 이에 대해서는 성서가 증거한다고  한다.
질서개념에 있어서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은 역사란 인간존재의 원초적 파악인데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실재적 현존재와 행위에 날마다 움직여지고 확증되는 항구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성서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서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의 요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고가르텐의 경우 국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명령이 나오기 때문에 국가는 질서 수립에 있어서 하나의 큰 역할을 한다.


퀴네트(W.Künneth) 그의 정치적 윤리에서 창조의 질서와 보존의 질서에 대한 구별을 다루고 있다.

타락이후 우리들에게만 허락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존의  형식에서만  파악하고 있다.  보존의
 질서는 타락한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의 현재적 모습이다. ......  창조사상은 보존 질서의 이해를 통해서
 배제되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창조는 보존과  분리될 수 없고 또 바로 거기에 타락한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가 나타난다.

 

틸리케는 곤궁의 질서(Notordnungen)의 개념을 창조의 질서개념에 선행시킨다.  이는 또 보존의 질서(Erhaltungs Ordung, 유지의 질서)라는 개념에서 창조질서 신학을 극복하고 인간의 죄와 허위의 현실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본회퍼 역시 창조의 질서를 부정하는데 그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로부터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1 32년에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분리된 창조질서를 거부하고 유지질서를 말하였다.
그는 보존의 질서개념에 우선권을 둔다.  창조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있는 제도와 구조는 가치있고 본질적으로 매우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보존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 은혜와 진노 속에서 각 구조는 하나님에 의하여 보존되어 나가는 구조일 뿐이라고 그 차이점을 설명했다.
하나님의 보존 하에 있는 질서는 어떤 질서이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인도되고, 그 분을 위해서만 보존되어 나간다.  어떤 질서이든 그것이 복음 선포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한에서만 보존의 질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복음 선포를 향해 근본적으로 닫혀있는 질서는 그것이 비록 결혼이나 국가와 같이 가장 본질적인 질서라 해도 보존의 질서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세계를 보존하려는 적극적인 하나님의 위탁으로 정당화된다.  세상의 질서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와 십계명 아래 놓여질 때 비로소 그것들은 구체적인 세계를 위한 봉사에로 해방된다고 본회퍼는 주장한다.

이상의 모든 질서개념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이 개념에 있어서나 질서신학에 있어서나 그 진술들에 있어서 총괄적인 사상이 발전되기 이전으로서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신적 위탁을 도식화한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경우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구체적 현존재의 형성은 그냥 맡겨 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 각자는 그 자신으로서 세계 질서의 목표이며 따라서 인간을 통하여 세계의 궁극적인 질서가 되는 신(神) 지향적인 질서를 자기 자신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
자신 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실현하는 것은 인간의 과제이다.  이것은 "질서있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일이다 "라는 아퀴나스의 원리를 생각나게 한다.

 

C. 루터(Martin Luther)의


   삼대권(三大權) 질서사상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은 본회퍼의 위임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몰트만은 "본회퍼의 윤리학은 루터의 사회윤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루터의 사회윤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에 참신하고 밝은 전망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본회퍼는 위임의 개념에서 '삼대권'에 관한 루터의 근원적 교설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을 서술함으로 본회퍼의 위임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루터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설정하신 삼대 질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사회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기본적인 틀이 된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께서는 죄가 형벌되고 묵인되지 않도록 세 가지 사회적 지위와 계급(Drei Stände)을 설정하셨다.  첫째는 가정과 자녀들을 엄한 훈계로 양육하고 다스리는 부모이다.  둘째는 국가이다.  즉 불법을 행하는 자를 권력의 힘으로 다스리기 위해 칼을 가진 임금을 비롯한 관리들이다.  그리고 세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권위를 설정하셔서 인간들을 악마와 육욕과 세상적인 것에서부터 보호하고 범죄가 줄어들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 가정,국가,교회가 루터의 삼대권이다.  이제 이 삼대권을 하나씩 검토하기로 하자.
우선 가정의 질서이다.  가정의 영역에는 경제(經濟)도 포함된다.  루터는 경제의 제1차적인 의의를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으로보았다.


루터의 경제관은 사회관과 조화되는 것이며 또한 보수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한 선과 무상(無償)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그 대신 우리가 이웃에게 자기 이익의 추구나 보수 없이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으르거나 놀아서는 안된다.  이처럼 그는 공동사회 의식을 강조했다.
이윤 추구에 대하여 그는 장사나 노동으로 얻은 득리의 기준을 소요 시간과 바친 노동량에 두되 다른 직장의 일급(日給)노동의 임금과 비교해서 작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더구나 재력가나 국가가 물품을 독점하여 비싸게 파는 독점 상행위를 법으로 금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상업보다 농업을 더 건전한 직업으로 장려하고 농업과 축산업에서 부유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지기(知機)가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결코 부유를 금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루터는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 점이 재세례파의 공산주의적 사상과 대조적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자본 축적을 비난했는 데 홀(Karl Hall)은 루터가 자본주의의 나쁜 면만 보았다고 한다.
둘째 국가와 교회의 질서이다.  루터는 자신의 국가에 대한 질서 원리를 주장할 때 대개 교회와 가지는 관계에서 언급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 언급된 루터의 질서사상을 살펴보자.
루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서 두 왕국을 말하는 데 하나는 외부적 질서를 다스리는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국가개념은 질서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어거스틴처럼 국가와 정부는 인간 타락의 대책으로서 타락한 인간과 그 사회를 다스리기 위한 기구로 생각한다.  항상 나라는 칼을 사용하여 국가 안팎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그러므로써 통치자와 그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도구 노릇을 한다.


하나님은 날마다 세상의 정부를 통하여 지상에서 외적인 일시적 평화와 관용할 수 있는 삶을 유지하며, 영적인 정부를 통하여 하늘에 접근하는 것을 유지한다.  영적인 정부는 말씀을 통하여 통치되며 검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설교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이처럼 루터는 세속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복종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두 정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중적 표현이다.  이상적 정부와 영적 정부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을 선행과 신앙으로 인도한다.
이와같은 국가와 교회의 이중성을 주장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두 영역 사이의 구별을 둔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교회와 정치 사이에 이원론(二元論)을 발전시킨다.  이 이론은 훗날 루터교회의 두왕국설로 정착되었는데 큐란은 "이런 논제들은 특히 루터교회 전통에서 법과 복음, 두 영역 혹은 두왕국설 사이에 구별을 두는 윤리적 가르침으로 인도한다....... 두 영역 이론은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인간의 세상적 삶을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틸리케는 루터의 두 왕국설이 이중적 도덕의 위험성(공적 도덕과 개인적 도덕을 구별하는 것), 세속화의 위험성(세계를 자율의 유대관계로 만드는 것), 조화화의 위험성(두 왕국이 상호 조화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다음은 루터의 소명론이다.  루터의 소명론은 삼대권 질서사상과는 별개의 것으로 그의 직업관.노동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소명론은 본회퍼의 위임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본회퍼는 루터의 소명론 가운데 들어있는 직업의 개념을 별도로 취급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영역(Realm, Sphere)인 노동위임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므로 이런 근거에서 루터의 소명론(직업관, 노동개념)을 검토해 보자.
루터의 소명(Calling)의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행하는 마스크라는 개념은 피조물들의 직책(Vocation, Beruf)과 신분(Stand)개념과 연결되고 이 직책과 신분은 결국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며 또한 명령인 데 이것들로 그 이웃에 봉사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천직(天職)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명령(Command)으로보았다.
그리고 그는 성직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직책과 신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차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하여"(Von Abendmahl Christi, 1528년)라는 논문에서 루터는 인상적인 고백으로 이 이론을 요약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들은 성직, 결혼, 지상 정부 셋이다.  소명은 이러한 세 질서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
난다.  그리고 그 세 질서 위에 사랑이 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궁핍한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원수를 용
서하고 고난을 감수한다.  사랑은 소명으로 요구되는 모든 것을 행하고 참고 인내하게 하는 내적 자발성이다.

이런 뜻에서 소명은 이웃에 대한 봉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가면(veil)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한 종말론적 성취를 이룬다.


실로 루터의 소명관은 하나님의 계시와 이웃 사랑의 봉사라는 사회학적 의의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루터의 삼대권 질서는 하나님께서 창세(創世)에 이미 계획하신 것으로 창조의 질서이다.  그 근본 목적은 사회 속에서 죄악을 견제하며 동시에 봉사의 통로가 되기 위한 것이다.  죄를 범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자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질서들을 통하여 죄를 견제하신다는  이다.
루터의 이런 사상은 그의 두왕국설과 더불어 중요한 윤리적 체계를 이룬다.  하나님은 오른손을 가지고 사랑의 법으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다스리시고 왼손을 가지고 인간의 세속적인 삶을 다스리는데, 그 기틀이 되는 것이 삼대권 질서사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루터의 질서개념은 그의 두왕국설과 더불어 질서 절대화의 경향성에 빠지는 오류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는 농민 반란 때 루터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농민 반란 때 그는 서슴없이영주의 편을 들어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은 농민들을 처단하라고 권고한다.  루터의 질서개념에 의하면 질서가 죄를 견제하기 위하여 있기 때문에 농민 반란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루터의 공직미화 사상이다.  그는 모든 공직(특히 삼대권)은 하나님이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직위에 앉은 사람조차도 잘못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질서를 너무 강조해서 집권자들을 절대화시키는 경향성이 있었고 소위 두왕국설의 주장으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켜 어떤 정치적 부패나 독재에도 함구무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D. 브루너(Emil Brunner)의 창조질서

 

이런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을 현대에 받아들여 질서의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 브루너이다.
1930년대에 쓰여진 그의 유명한 책 [정의와 사회질서]는 나치독재 하에 신음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회의 올바른 질서는 진정한 정의의 개념에 기초를 두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질서나 법보다 앞서 있는 윤리적 가치로서의 정의개념 확립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책 [신적 명령]에서질서개념을 창조질서라는 말로 체계화하고 있다.  루터에게서 이어받은 브루너의 질서개념은 다섯 가지로 부연되었다.  즉 가정, 노동, 국가, 문화 그리고 교회이다.  이런 질서들은 창조에서부터 기인되는 인류의 자연적인 공동체 형식이다.
브루너는 본래 자연의 질서와 인간 공동체의 질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창조질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어떤 형태(Gestalt)를 주셨는데 이것이 곧 질서(Ordunun- gen)이며 만물은 이 질서 가운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창조의 질서는 자연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때는 현존질서라고 말하며 이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봉사를 추구하게 된다.
브루너는 제 공동체의 질서를 언급하기 전에 개인과 공동체의 관련성을 말한다.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이며 그러므로 공동사회를 떠나서 개인을 생각할 수 없고 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공동사회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에서 '사랑과 정의'가 논의되는데 사랑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궁극적인 원리이며 정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세계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의지요, 창조질서로서 현존질서를 받아들이고 윤리적 과업을 수행하는 기본적 규범이다.
이와같은 인식 하에 브루너는 [신적 명령] 제3권 첫 부분에서 하나님의 명령의 성격에서 현존하는 실재의 제 국면으로 관심을 바꾸고 있다.  그 현존실재의 제 국면이란 바로 그 명령이 수행되어야 할 장이다.  브루너는 "우리가 행동을 취해야 할 삶의 특정 국면"이란 것을 언급했으며, 그같은 국면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같은 사람의 각 국면에는 각기 질서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공동체적 삶의 일정한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컨대 사회조직의 형식이다"고 말한다.
이제 브루너가 제시한 사회질서로서 가정, 노동, 국가, 문화, 교회의 세부적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가정 공동체이다.  가정은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서 성(性)에 의한 공동체이다.  이 성은 인류 보존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인간성 내에 있는 강한 본능.충동과 결합하여 얻어진다. 인간적 관점에서 인류의 번식은 종족 보존보다는 성적 충동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성 간의 사랑은 아마 결정적 요인은 아닌 것 같다.  결혼과 가족에서 본질적인 요소는 '피'이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를 한데 묶고 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더 나아가 종족과 국가를 하나로 묶는다.

둘째 노동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생계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된다.  물론 혼자 일하고 사물을 홀로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반면에 필요는 협력과 교환, 보다 완전한 삶에 대한 기대감을 요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다 완전한 사회보장을 위해서 사람들은 경제그룹, 사교회 그리고 여러 종류의 모임에 출석한다.
오늘날 경제생활은 루터가 생각했던 것처럼 옛 의미대로 가족 공동체(Household,          )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제공동체는 가정이나 국가와는 별도로 존재하며 그 자신 특유의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세째 국가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무질서에서 벗어나 경제나 가정생활에서 안정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발달되었다.  국가를 형성시키고 권력을 유지.증가시키는 동기들은 무한히 복잡하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서 서로 경쟁하는 사회 영역들 간에 조절을 꾀하고 권력에 의하여 각 영역들의 범위를 정하고 다른 집단에 대하여 안정성을 확보하게 한다.  권력과 정의는 국가를 봉인하는 두 가지 힘이다.

네째 문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여타 공동체와는 달리 자연적이거나 역사적 근거가 아닌 순전히 인간의 지적인 충동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성격상 이 공동체를 파악하거나 설명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큰 집단 내에 있는 개별적 구조조차도 공동체의 형태로서 특징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 생활 없이는 교회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결국 문화, 교육, 예술, 과학은 국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공동체적 삶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위대한 천재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공헌을 삭감할 필요없이 바로 그 관점에서 올바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이다.  가시적 교회를 생각해 보면 이 공동체는 신앙에 대한 교회 자신의 특별한 충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질서를 창조하고 세상과 교회의 분명한 구별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성에 기인한다.  이 점에서 교회는 국가를 닮는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교회는 신앙에 근거한 사랑의 교제가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제도, 치밀한 성격, 구체적인 현실성으로 나타나며 교회는 정신적 집단이 아닌 법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 즉 비가시적(非可示的) 교회는 교회 자체 내에서 실제적인 사랑을 새롭게 생산하고 믿음을 새롭게 제공한다.  그리고 여타 공동체들을 비판하거나 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제까지 브루너의 창조질서 개념의 성립과 그 질서 속에 존재하는 각 공동체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 브루너의 질서개념에 있어서 야기되는 문제는 없을까?


그것은 루터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질서 절대화의 경향성과 정치.종교의 절대분리설이다.  창조의 질서는 자연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 즉 그것 자체로서 유지되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나 구속의 사건과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말 때 이런 경향에 빠진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창조질서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나치즘의 수정으로써 창조 시에 주어진 원초적 질서의 회복에 국한시킨 것이 브루너의 창조질서이다.
브루너는 루터의 두왕국설과 거의 비슷한 인격적 윤리와 제도적 윤리의 이분법을 말한다.  신앙과 사랑의 윤리는 인격적인 차원에서만 적용 가능하고 제도적 차원에서는 오직 자연법과 정의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죄를 견제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상도 루터와 흡사하다.
이런 점에서 브루너는 보수적이며 질서 절대화의 경향성을 띤다.  그러나 나치즘을 경험한 브루너는 맹목적인 질서 주창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연적인 질서 자체가 선한 것이기는 하나 인간의 죄악에 기인한 질서 타락의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즉 그 질서 자체가 완성되고 구속되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질서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져야 하고 자연이나 이성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브루너는 본래적인 질서, 원초적인 질서 회복에 그쳤지 질서 자체의 변혁에까지는 발전해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한가지 진전된 것이 있다면 기존 질서 자체의 부패 가능성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공직의 신적인 배경 때문에 미화되었던 공직무오설에 대한 커다란 수정이며 공직과 공직자 모두의 부패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장에서 본 필자는 질서개념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질서개념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인간 윤리의 보편성에 근거한 자연법 사상이다.  그 다음으로 질서개념이 형성되기 위한 서론적 고찰을 살펴보았다.
본격적인 질서개념을 수립하면서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은 인간 사회 질서를 가정, 국가, 교회로 세 구분하여 설명하였으나 두왕국설의 주장과 함께 질서 절대화의 경향과 공직미화 사상에 빠지는 오류를 낳았다.
이에 브루너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서 인간 사회질서를 가정, 노동, 국가, 문화, 교회 공동체로 부연 설명하면서 기존 질서의 부패가능성을 말하였다.  그러나 나치즘을 경험한 브루너도 질서의 회복에만 그쳤지 질서 자체의 변혁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본회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된 인간 사회질서 구조를 제시하고자 한다.  즉 그의 위임사상은 창조질서의 개념을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Ⅲ.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위임사상
 
본 장에서는 본 논고의 중심 테마인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논술하고자 한다.  전술하였듯이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루터나 브루너와는 달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그리스도 구속의 질서와 무관하게 창조의 질서로 남아있던 것이 본회퍼에게 와서는 그리스도의 주권 속으로 귀속되어지고 있다.
두왕국설을 주장하므로 질서 절대화의 경향성에 빠진 것이 루터라면 본회퍼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궁극이전의 것과 궁극적인 것이 통일된 하나의 현실을 고하므로 성.속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현실개념을 제시한다.  즉 루터의 두왕국설, 브루너의 이분법적 윤리를 하나님의 주권 하에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시킨 사회질서 구조를 제시한 것이 본회퍼의 위임사상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브루너의 창조질서를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과 연관지으려 하였고 이것을 좀더 구체화시켜 그리스도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A. 위임의 개념

 

본회퍼는 질서개념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탁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선서' 대신에 '위임'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위임(Mandate)이란 술어는 라틴어 Mand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위임, 위탁, 명령, 수임의 뜻을 가진다.  본회퍼는 사회의 제도적인 현상을 신학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제 현상의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여 주고자 위임이란 술어를 채택한다.  즉 노동, 결혼, 정부, 교회의 제 현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여 주신 것으로서 인간은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네 가지 위임받은 사항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두 번에 걸쳐 '위임'개념을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첫번째는 현실의 그리스도론적인 통일성에서 두번째는 구체적으로 계명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또 윤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세계 전체는 알든 모르든 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관계는 하나님의 위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분명하고도 영속적인 기본 관계와 삶의 영역은 이 위임 속에서 한정되고 형성된다는 것이다.

위임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기초를 두고 성서를 통하여 증거된 구체적인 하나님의  위탁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일정한  하나님의 계명의 실행을 위한 자격을 부여받고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것, 지상 법정
에서 하나님의 권위의 대여를 말한다. 위임이라는 말 가운데는 동시에 어떤 특정한 지상의 영역을  하나님의 계명에
의하여 받는 요구, 그 영역의 장악, 형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질서', '직분', '직무' 등의 지금까지 인습적으로 사용하여 오던 개념들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들에 대한 역사적인 여러 오해 때문에 그는 무엇보다 먼저 위임개념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내용 자체를 해명함으로써 질서, 직분, 직무 등의 낡은 개념을 재생시키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다분하다.  이러한 낡은 개념보다는 네 가지 제도를 책임있게 운영하고 혁신시키는 '위임'이라는 표현이 더 기독론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위임이란 용어의 채택에 있어서 본 필자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실재 특성에 대한 본회퍼의 법적 사고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본회퍼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운데 노동, 결혼, 정치적 권위, 교회가  존재하기를 원하며 그것들이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기를 원한다. 노동, 결혼, 정부,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한다.  의식하든 못하든 그것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위탁에 복종할 때 비로소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위임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명제 배후에는 히틀러의 제3공화국 때, '독일 기독교인'집단 내에서 결정적인 창조질서로서 게르만 종족과 독일 민족을 신격화한 나치스의 '국민법'과의 치열한 저항이 숨어있다.


본회퍼는 위임개념에서 루터의 삼대권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한다.  전술하였듯이 루터에게 있어서 질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사회적 삶에 세 가지 기본적인 질서 즉 결혼, 정부, 교회를 창조하심으로 악마에 대항하도록 하셨다.  본회퍼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여 노동, 결혼, 정부, 교회 네 개의 위임으로 생각하였다.  본회퍼는 루터의 삼대권에 비추어 그의 위임론을 설명하면서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중요시한다.  첫째 계시의 빛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장소로서 설립하였고 둘째 하나님께서 설립하신 것은 인간과 함께 창조되었고 인간 존재의 사회적인 구조이다.  세째 모든 위임은 계명이 구체화된 것으로 동일한 성질이고 상호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혼합되어 용해되어 버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위임을 통하여 창조 시 하나님 자신이 수행하셨고 체험하신 통치와 삶에 근거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논거 하에 위임개념 속에 내포된 세상 가운데의 실천성을 살펴보자.  이것은 윤리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이 만날 때 문제되는 사실로서 어떻게 이 위임들을 성취하며 위임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위임이든 문제가 되는 사실은 세속 한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위임'이다.  따라서 위임은 인간으로 하여금 단 하나이면서 전체로서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킨 '그리스도 몸'의 현실 속에 들어가 봉사한다.  그러나 위임은 단독으로 봉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제 위임을 병존케 하셨으므로 제 위임은 서로 함께 봉사한다.  결국 위임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속 안에서 '참된 세속성'을 향하여 해방되도록 봉사한다. 위 은 다양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창조 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설립된 것이며 성서의 그리스도계시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것이다.  위임은 하나님의 통치의 지체들로서 말하자면 위로부터 이 세상 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통치와 그리스도론적인 통일성과 현실의 전체성이 서로 화해하여 부채꼴 모양으로 펼친 것과 같다.  그 중심은 인격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위임은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과 수난과 찬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세속적인 삶을 지향한다.  세속적인 삶은 위임 속에서 그의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형태를 발견한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계명으로서의 하나님의 위임을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의 삶을 내포하고 있는 통일성 가운데서 네 가지 형태 즉 교회, 결혼과 가족, 문화, 정치적 권위에서 만난다.  마음 진술에서 우리는 본회퍼가 위임을 이해하는 제2국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은 오직 스스로 존재하는 곳에서만 발견된다.  하나님의 계명이 말해지는 곳은 오직  하나님 스스로 거기에 권위를 허락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권위를 허락하시는 한에서만 그것은 바르게 실행될 수 있다.

계명은 그 자체로서 '중성적인 믿음의 순종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순종에 대한 요구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장소요, 기관이요, 직분이다.  그리고 이 직분은 계명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 위임은 그리스도 계시에 근거되어 있고 성서를 통하여 입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위탁하신 것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계명을 수행할 자격을 부여받고 합법화된 것이다.  또한 위임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 땅 위의 기관에 양도하여 온 것이다.......위임을 영위하는 자는 대리로 행동하며 위탁하신 분의 자리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자로서 행동한다.위임은 한편으로는 이 땅 위에 속한 영역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형태를 취하도록 하며 이를 수행하도록 맡기는 것이다.


이와같은 두 가지 국면에서 위임은 삶의 구체적인 여러 기본관계 속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인간에게 전권을 위탁하여 맡긴다.  첫째 면에서 위임개념은 화석화(化石化)되어 버린 직업 질서나 계급 질서보다도 구체적인 '직업'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상이한 세속적인 제 영역에 있어서 믿음의 순종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면에서 계명으로서 위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격을 부여해 주는 사실과 따라서 타인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격을 허락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B. 위임의 의미

 

   1. 존재의 관점에서 본 위임의 소여성

 

본회퍼는 굳어져서 의미를 상실한 질서개념과 공간개념을 벗어나기 위하여 존재론적 입장에서 위임개념을 선택한다.  화석화된 개념들에 반대한 나머지 그는 인간의 순종에 있어서 단지 명령적인 면과 행위적인 면 그리고 특수한 사건의 역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위임에 관한 그의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적 동기를 강조하며 제반 제도에 어떤 형태를 부여해야 할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결단에 기인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위임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현실의 마음대로 처리 못할 존재에 속하며 또 위임은 인간의 의지를 선행하며 인간의 의향에 의존하지 않는 제 관계 및 시간적으로 한정된 제 구조를 뜻한다.  본회퍼는 "역사적인 모든 질서는 변하나 위임은 이 세상 끝날까지 존속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위임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제 기본관계의 본질을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기본관계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구체적인 존재자는 위임을 통하여 상대적인 의로 인정하심을 얻는다.  위임 속의 관계 형식과 존재자는 하나님의 위탁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위임에 순종할 때 그 근원적인 본질은 실현된다. 위임으로 말미암아 야기되고 수립된 현존하는 제반 관계의 형태도 역시 그 상대적인 정당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권력의 악용이나 그릇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위임의 제반 관계로부터 윤리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도리어 위임으로 말미암아 공동의 책임과 '죄를 짊어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죄의 인수를 본회퍼는 그가 생존하던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열열히 강조하였고 또 실존적으로 수행하였다.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그의 위임사상에서 추상적이고 결의론(決疑論)적인 것을 단연코 거부하고 구체적으로 '오늘, 여기에, 우리 사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을 수립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탁에 순종할 것을 강조한다.

 

   2. 위임의 성격

 

본회퍼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 (Die Letzten und die Vorletzten Dinge)을 구별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궁극이전의 이 영역 즉 역사의 영역, 외면적인 삶의 영역은 하나님의 위임을 통하여 일관성을 가지게 되고 질서있게 정돈된다.  이 위임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말씀은 구체적인 형태를 얻어 구현되며 세속적인 삶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향한다.  그리하여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의 베일'이 되며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시는 그리스도 통치의 외곽 영역이 된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위임은 종말론적으로 또 잠정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땅 위에 있는 궁극적인 것이 인격화된 베일 속에서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며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인 자손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져 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련'을 도와주는 위임의 시간과 공간이 주어져 있다.  이와같은 한계에서 위임은 Chaos를 직면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질서를뜻하며 오시는 그리스도를 직면하고 있는 개방된 완성의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하나님의 베일'로서 루터의 질서개념을 새롭게 해석한다. 즉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의 베일'이며 궁극이전의 영역과 운명은 위임을 위하여 봉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련'을 도와준다.  따라서 본회퍼가 위임을 궁극이전의 영역에 귀속시키며 또한 위임을 궁극적인 것을 드러내는 베일로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자명한 일이다.  지음을 받은 모든 질서는 하나님의 탈(Mask)이요, 알레고리이다.
결론적으로 위임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고 부활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삶이 되도록 한다.  즉 궁극이전의 길 안내자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3. 위임의 대리개념

 

하나님의 위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계명에만 달려있다.  하나님의 위임들은 그리스도의 현실성, 즉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있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현실을 구성하는 제도(제반 질서)로서 위에서 세계에 주어진다.  따라서 이 위임들은 결코 역사로부터 자라난 것이 아니며, 지상의 힘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위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은 자는 대리자, 대변자이다.  그러므로 위임의 영역에 있어서 뒤바꿀 수 없는 상위와 하위의 질서가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주어진다. 여느 위임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上.下의 돌이킬 수 없는 권위 관계를 수립한다.  그리고 사실상 힘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러므로써 하나님의 계명은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고 또 수행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단순히 어떤 직권 상의 권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대리로 행동하고 희생의 제물이 되신 그분의 실존과 담보를 통하여 이루어진 권위를 의미한다.  이 권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을 대리로 행동하며 책임지도록 새롭게 규정된다.  이웃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대신 행동하며 책임을 지는 것은 하나님의 위임에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위임 속에서 맺고 있는 인간의 제반 관계 - 상위와 하위의 질서 - 를 바꾸어 놓을 수 없게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따라 대리행위를 수행할 때 - 타인을 위하여 책임적인 존재가 됨 - 동등하면서도 서로 다른 기능과 직책들이 소유하는 인간 상호 간의 제반 관계가 위임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본회퍼는 위임의 대리개념에서 타인을 위한 존재(Man for Others)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는 그의 신학에서 피안성(彼岸性)을 발견할 수 있게 하며 세속화(Secularization)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대리로서 삶을 사셨고 대리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결론적으로 위임의 대리적 성격은 이 세상에서 각 위임들이 궁극적인 것을 위하여 책임을 다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의사명을 보다 분명히 한다.

 

   4. 위임의 유비론적인 구조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그것을 설립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암시하며 또한 이웃을 위한 봉사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협동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점은 왜 이것들이 위임이 되느냐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이 네 가지를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으로 택하게 되었는가 ?
첫째 이 위임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성서적으로 증거된 위탁과 약속에 근거한다.  둘째 제 위임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장소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립하신 것으로서 인간의 현실에 부합하여 유익하도록 설정되었다.  왜냐하면 제 위임은 인간과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째 이 위임들의 원래 모상(模像, Abbild)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즉 위임의 모상들을 비교해 보면 결혼:그리스도와의 공동체, 가족,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와 모든 인류와의 형제 관계 / 노동:세상을 위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창조자적인 봉사,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봉사 / 정부:그리스도의 영원한 지배, 하나님의 도시이다.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 유비(Analogia, 유추)에 있어서위임의 한 항목인 교회가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비론적인 구조는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환상과 회상에 머물러 있다.  중요한 것은 유비론적 구조에 있어서 존재적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제반 관계, 이들 사이의 관계의 유비이다.  결국 관계의 유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주권 속에 인간의 인격성과 사회성이 통합된다는 현실이다.

 

   5. 각 위임의 동등성

 

본회퍼는 네 개의 위임 노동, 결혼, 국가, 교회를 신학적으로 통일한다.  즉 어느 하나는 세속적이고 다른 하나가 거룩하다고 하는 사고는 용납될 수 없고 각 영역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면 국가가 교회나 가정을 지배할 수 없고, 노동이 교회나 가정을 지양시켜서는 안된다. 각각위임은 자기 고유의 가치와 결코 양도될 수 없는 권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각 위임들을 서로 혼동시켜서 하나로 합쳐 버리거나 혹은 어떤 단 하나의 위임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 가지로 자연적이며 세속적인 질서의 우위를 차지하는 영적인 교권제도라고 하는 상위(上位)의 질서(Überordnung)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 위임하여 주신 것으로서 다른 위임과 동등하다.  따라서 교회와 세속적인 위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오히려 서로 견제하며 동시에 서로 보충하여 주면서 그 기능에 있어서 동등한 위치를 유지한다. 이처럼 본회퍼는 모든 위임을 동등하게 보며 위임의 전체성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예비해 두신 이 땅 위에 있는 영원한 현실" 전체에 직면하게 된다.
위임의 동등성은 본회퍼의 다음 진술에 잘 집약되어 나타난다.

교회, 결혼과 가족, 문화, 정치적 권위, 이들 하나님의 위임은 서로 의존하고  대립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
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으로서  경청된다.  이 위임들 가운데 어느 것도 혼자 설 수 없으며 다른 것들과 교체를 요
구할 수 없다.  이  위임들은 공존적(Miteinander)이며 상호 의존적(Füreinander)이다.

 

즉 하나의 위임은 그 자체로서 충분치 못하며 또 다른 위임을 지배할 수 없다.  모든 위임이 소유하고 있는 상대적인 권위들은 상호 관계 속에서(Zueinander), 동등하게(Nebeneinander), 서로 함께(Miteinander), 상대하여(Gegeneinder) 배열되어 있으며 전 세계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는 이런 위임의 구체적인 제반 관계의 복수성에서 나타나고 유효하게 된다. 이 보아 각 위임은 다른 위임과 공존하고 있으며 역사적 국면 속에서 구체적으로 견제되고 보호되며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고유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다른 위임들의 고무를 받는다.  이와같이 각 위임들이 서로 견제하고 보충함으로써 위임은 그리스도 통치의 전모를 드러낸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계명은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의 고유한 법칙을 완성하도록 해방시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교회와 가족과 문화와 정부를 다스리며 이 위임들 각자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한다. 이처럼 본회퍼는 모든 위임들을 동등하게 생각한다.  이 위임 관계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동등의 질서(Nebenordnung)이다.
그러면 동등성에 입각한 각 위임들의 권리 영역과 권위 문제를 생각해 보자.


 C. 위임의 권리 영역과 권위 문제

 

   1. 권리 영역

 

우선 각 위임들의 권리 영역을 생각해 보자.  본회퍼는 모든 위임은 그 본질과 위탁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위하여 또 그 한계에 있어서 다른 위임들에 의하여 견제된다고 말한다.

공존과 의존에서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서 제한되
고 이 제한성은 상호 의존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상호 대
립하는 것으로써 경험된다.

몰트만은 이것은 특별히 교권주의와 세계관적인 국가교회주의에 빠질 경향이 있는 국가에 좋은 경고라고말한다.
그런데 각 위임들은 의존성과 기능에 있어서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 수행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상위 존재는 세 개의 방식, 즉 위탁을 주신 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그리고 하위  존재를  통해서
 제한된 서로 다른 방식에서 성립된다....... 그 제한은 상위 존재의 월권행위에 대한 경고와 같다.  보호와 제한은
동일한 사실의 두 개의 다른 면이다.

이런 생각은 루터의 삼대권에 첨가시켜 발전시킨 것이다.  본회퍼는 이 삼대권의 결정적인 특징과 불변의 의미는 상위(上位)의 질서(Überordnung) 대신에 동등의 질서(Nebenordnung)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나 신정통주의의 삼대권은 기독교의 대조직체인 중세 구조를 개조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스콜라 철학의 자연법 사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본회퍼는 삼대권을 새로 해석하고 인습화된 삼대권을 보다 현실적으로 적용한 점에서 공로가 크다.
네델란드 신학자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이러한 위임의 권리 영역에 대한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영역주권이론'(Sphere Soverei- gnty Theory)을 제창했다. 영주권이론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삶의 모든 부분에 미친다는 고백 위에 세워진다. 

 

이러한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모든 생활 영역 속에서 그를 섬기도록 본질적이고 종교적인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영역주권이론은 또한 삶의 여러가지 영역들이 소유한 자체의 주권을 인정한다.  각 영역의 경계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각 영역은 경계 내에서 자체의 합법성과 능력을 가진다.  각자 파생된 주권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복종을 표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그 어떤 영역도 다른 영역이 소유한 고유 권리를 침해하거나 전복시킬 수 없다.  국가는 가정의 내부적인 문제를 법률로 다스릴 수 없고 교회도 국가의 문제들을 통솔하고 지배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각 영역의 경계들은 보존되어야 한다.  이를 부인할 경우 혼란과 무질서를 부른다.
영역주권이론에 따르면 루터의 두왕국설과 같은 성.속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 영역은 그 나름대로 소명에 따라 그의 언약적 책임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삶의 특정 영역이 고유한 주권을 가진다는 관념이 한 영역이 다른 영역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필자는 이러한 관련성을 '유기적 연결'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결론적으로 영역주권이론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할 언약적, 계약적 책임이 있다는  념을 동반한다.

 

   2. 권위 문제

 

이제 각 위임들의 권리 영역이 성립되었으면 각 위임들이 화석화(化石化)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지탱해 나아갈 권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위탁으로서 위임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곧 지상법정에서 하나님 권위의 대여"라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의 지상적인 권위 관계에서 명백하게 상위와 하위를 규정하는 질서를 통하여 인간과 만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위임 영역들 내에 있어서 제 위임들을 형성케 하는 '권위 문제'를 생각해 보자.


기독교적 사회철학은 유기체의 유비를 빌어서 모든 사회에는 하나의 단일적이며 구성원을 공익 실현으로 이끄는 권위가 필요함을 여실히 보여 준다.  권위의 과제는 그때마다 공공복지를 위해서 주어진 조치를 취하고 계획적으로 사회의 존립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다.  개인이나 단체의 공동생활은 정당한 규범의 고시와 그 적응을 통하여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이 사회적 권위의 과제이다.  이러한 권위는 각 위임들의 존립을 가능케 한다.
본회퍼는 권위를 크게 직책의 권위와 인격에 의한 권위로 나누었으나 본장에서는 각 위임에 따른 권위 문제를 살펴보겠다.  우선 노동 위임에 있어서의 권위 문제이다.  노동은 가장 기초적인 인간성의 표현이므로 인간에게는 누구나 일할 권리가 있다.  일할 권리에는 사회적 책임도 따른다.  그러나 노동의 위임(또는 영역)에 있어서 존립을 가능케 하는 권위(Dignity, Authority)의 확립은 더욱 중요하다.  헨리(Carl F.H.Henry)는 네 가지 점에서 노동의 성서적 권위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는 노동의 권위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곧 노동을 통한 땅의관리이다  하나님은 노동 권위의 본이 된다.  타종교와는 달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단순한 사고자(Thinker)가 아닌 일하는 분(Worker)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했다. 나사렛 목수로서의 예수는 노동 권위의 본보기이다.  카타콤에 새겨진 벽화들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가정의 위임에 있어서 권위 문제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위의 다섯째 계명은 가정의 권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가정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정치적 권위이다.  도노반(Oliver O'Donovan)은 정치적 권위는 자연적 권위와 도덕적 권위에 힘입는 복합적 현상임을 말한다.  자연적 권위는 무력(武力)과 연령의 형태인 힘과 전통에 다소간 기인하고 도덕적 권위는 무력에 의한 제재보다는 단순히 복종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식에 기인한다. 이는 정치적 권위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태도 역시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는 정치적 권력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이 영역에 사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표현한다.  바울이 강조한 바와 같이 정부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한다.


다음은 교회 위임에 있어서 권위 문제이다.  교회의 권위는 정치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제도적 측면에 있기보다도 그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성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머무는 한에 있어서 성서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이 제도적 행정적 권위로 변질될 때에는 그 본질적 가치는 은폐되거나 상실되어 버린다. 본회퍼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막 10:43)라는말씀을 통하여 형제의 봉사에 의존한 결속에서 권위를 주장한다.  진정한 권위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 봉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영적 권위는 듣고 돕고 인내하며 선포하는 일이 수행되는 곳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므로 성직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가운데 성취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권위는 섬김과 자기 희생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와같이 본회퍼가 주장한 제 위임은 권리 영역과 권위의 확립 하에 올바른 기능 수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D. 위임의 기능

 

   1. 노동

 

본회퍼에 있어서 노동의 위임은 타락전 예정설(Supralapsarish)에 의거한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처음 일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사 그 동산을 가꾸고(Cultivate) 지키게 하였다(창 2:15).   타락 후에도 노동은 하나님의 훈련과 은혜의 위임으로 존속한다(창 3:17 - 19).  파라다이스에 근거를 두고 있는노동은 인간이 창조 행위에 참여함을 뜻한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봉사를 위해서 규정된 물질과 가치의 세계가 창조되어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같이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처음 창조에 근거를 둔 새로운 창조이다.  누구도 이 위임에서 면제된 사람은 없다. 이는하나님의 위임을 완성하려는 인간들의 노력 가운데 하늘나라 사상(Abbild, 寫像)이  타난다.  그것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한 사람들은 실락원을 회상하게 된다.  가인이 최초로 창조한 것은 도시, 즉 하나님의 영원한 도시에 대응하는 지상적인 도시였다. 뒤이어 지상에서 우리가 하늘의 음악을 미리 맛볼 제금과 피리의 발명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땅 위의 광산으로부터 금속재의 적출과 가공이 있었다.  그것의 일부는 하늘의 도시가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듯이 지상의 집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며, 일부는 보복을 위한 정의의 칼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노동 위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그를 향하여 자기를 열고, 그에게 봉사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세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위임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가인의 후예라고 하는 사실은 다시금 모든 인간의 노동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그러면 노동의 위임 가운데 나타난 기독교인의 윤리관을 살펴보자.  기독교의 직업윤리에 의하면 노동은 사랑으로써 이웃에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노동의 이차적인 목적은 창조적인 활동을 통한 자아의 성취이다.  즉 노동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가 증진된다.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노동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형제들과 결합되고 봉사하며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을 통한 직업윤리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경제발달로 기계화 비인격화된 시대에 기독교인들에게는 노동과 직업에 대한 성서적 개념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된다. 일은 노동이 하나님과 이웃을 봉사하는 축복된 소명이 되느냐 아니면 순전히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직업이 되느냐에는그리스도인의 대리행위적 책임이 부 된다.

 

2. 결혼

 

결혼의 위임은 결혼과 가족을 포함하며 노동의 위임과 동일한 타락전 예정설에 근거한다. 결혼에서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와 하나가 되듯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된다(엡 5:22 이하). 인간은 자녀를 분만하고 양육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적인 통치에 동참한다.  결혼을 통하여 인간들은 아기를 낳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봉사하며 그의 나라를 성장케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단 결혼이 출산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자녀를 양육한다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출산자, 교육자, 대리자이다. 그러나 최초 인간의 아들 가인은 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출생하고 동생의 살인자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도 이미 가정과 결혼의 위임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면 결혼의 위임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윤리관을 살펴보자.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인격적 존엄성에 의하여 결합되며 부모도 거기에 자연적 개입을 못한다.  그리고 일단 결합된 다음에는 두 개체가 아니고 한 몸이 된다. 동반자의 평등한 사랑에 근거한 결혼은 권한과 의무를 동등으로 세우며 한 쪽의 무성실로 인한 결혼 제정의 파기를 다른 쪽의 인격 침해로 간주한다.  곧 결혼은 양쪽 계약으로 성립한다.  결혼은 인격적 결단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인격적 계약의 원리에서 인위적인 분리를 금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고 말하였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네 가지 근본적인 원칙에 기초를 둔다.  첫째 일부일처제의 원칙이다.  이는 창조의 섭리에 기초한다(창 1:26 - 27, 2:18 - 24).  틸리케는 성서에 일부일처제의 법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경향을 띠며 그것이 결혼에 있어서 관계의 단독 형태임을 관찰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결혼에는 항구성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전 생애적인 위임이다.  세째 그리스도인의 결혼의 또 다른 기초는 신실성이다.  브루너는 오직 사랑에만 기초했을 때 결혼은 처음부터 파멸될 수 있다.  그러나 신실성과 사랑이 모두 있을 때 결혼이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째 결혼의 궁극적인 기초는 아가페 사랑이다.  이것은 호감 또는 감정적 충동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관심과 신뢰, 협동, 정의 그리고 용서의 태도로 표현되는 사랑이다. 결혼은 신성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질서 중 하나인 결혼은 궁극적인 곳을 항하여 열려진 소망과 하나님의 강력한 위탁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결혼 질서에 경성을 촉구하고 있다.

 

3. 국가

 

본회퍼에 의하면 정치적 권위에 대한 하나님의 위탁 명령은 노동과 결혼 위임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위탁 명령이 지배하는 세계에 있어서 정치적 권위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창조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두 개의 위임을 발견하고, 그 위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정치적 권위는 그 자체로서 생명과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탁에 의해서 주어진 질서를 지킴으로 창조된 것을 보존한다.  더불어 정치적 권위는 하나님의 위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칼의 힘으로 지킴으로써 창조된 세계를 보존한다.  정부는 사회에 있어서 노동, 문화, 결혼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사한다. 따라서 결혼은 정치적 권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권위 앞에서 성립된다.  노동의 광대한 영역들은 정치적 권위에 의해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역들은 정치적 권위의 지도 감독 밑에 종속되며 일정한 한계를 두고 정치적 권위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정치적 권위는 결코 이 노동 영역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만일 정부가 이들의 주체가 된다면 정부에 대하여 고유한 존재가 되는 노동과 결혼은 파괴될 것이고 정부 자체도 파괴될 것이다. 정치적 권위는 입법과 칼의 위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을 위하여 이 세계를 지킨다.  정부의 고유한 권위는 그리스도 권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국가의 통치는 장차 드러날 그리스도 통치를 상기하게 하고 그 윤곽을 보여주는 하나의 유비를 인식하게 된다.  국가의 봉사는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국가의 기능은 '현실에 상응하는 책임적인 삶'의 구조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정치적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면 정부의 위임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을 살펴보자.  국가의 개념은 신약성서와는 무관계한 것으로 고대 이교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그것 대신에 정치적 권위(Obrigk- eit)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고대인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는 국가의 기초를 인간의 본성에다 두었다.  국가는 인간의 이성적 본질의 최고 완성체요, 국가에 봉사하는 것은 인간 생활의 최고 목적이다.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고대국가 개념을 극복했다.  종교개혁은 공동체로서의 국가 기원을 인간의 창조적 본성에 두려고 하지 않고, 정치적 권위로서의 국가의 기원을 죄의 타락 안에 두었다.  죄로 인하여 정치적 권위의 신적 질서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강제력과 외적 정의의 수호자로서 정치적 권위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회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치적 권위의 근거를 둠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과 죄로부터 정치적 권위의 근거를 찾는 자연법적 경향을 극복했다.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정치적 권위를 고려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계없이 정치적 권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권위의 진정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정치적 권위의 신적 성격에 있어서 본회퍼는 정치적 권위의 성립에서가 아니라 존재에서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설사 정치적 권위가 죄를 범하고 윤리적으로 공격을 당할 때에도 그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정치적 권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그 존재 근거를 가지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된다.  정치적 권위의 존재는 하나님의 위탁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 칼과 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지배에 봉사하는 데서 성립된다.  곧 그리스도에게 열려져 있는 외적인 정의의 칼의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  외적인 정의의 칼로 경건한 자를 보호하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정치적 권위가 주어진 위임의 한계를 넘어 그의 권위를 주장할 때에는 이들 영역에 대하여 가진 정치적 권위의 상실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행동지침을 발견하게 되는데 만일 국가가 하나님의 법도 안에 머물러 있다면 개인이 거기에 충성과 봉사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그 나라의 법과 요구가 하나님의 것과 상반될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선행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국가 기원을 인간의 죄의 타락에 두는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본회퍼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위임되어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져 있는 정치적 권위를 말하고 있다.

 

4. 교회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위임은 이상 세 개의 위임들과는 구별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실 선포, 교회의 질서, 기독교인의 생활이 실현되도록 하는 위탁을 받은 데서 그러하다.  따라서 교회의 관심은 온 세상의 구원이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해야만 한다. 교회의 위임은 모든 인간에게 미치며 다른 세 개의 위임 안에도 미친다.  사람은 노동자이며 동시에 결혼상대자, 신하인 것처럼 또 한 인간 안에서 여러 위임이 서로 교차하며 거기에서 이 모든 위임들이 동시에 성취된다.  교회의 위임 역시 다른 세 개의 위임들 가운데 겹쳐 있으며 기독교인은 노동자이며 동시에 결혼상대자, 신하인 셈이다.  처음 세 개의 위임은 인간을 분열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창조주, 화해주, 구속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전체로서의 인간을 문제삼는다.  따라서 현실은 그것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임들은 인간을 끝없는 투쟁 속에서 소멸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전체로서의 인간을 현실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우는 것이 목표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위임들과의 일치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사건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세계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현실 가운데에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하나님 위임들의 통일성의 근거이다.


본회퍼는 그의 윤리학 후반부에서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 서술하고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설교와 고백의 두 가지 형태로 만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의 선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교회가 선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교회의 위임은 곧 선포의 위임이다.  선포의 직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성서에 기초한다.  성서에 근거하여 설교할 직무를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구세주라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임에 의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한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임이 완성되도록 봉사한다.교회가 세상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한,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다른 한편 세상은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 자기 자신이 지향한 것을 실현한다.  교회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피조물"이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길이며 목표이다.  이 이중의 대리관계를 통하여 교회는 세상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동시에 바로 그것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장소로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5. 자유활동 영역

 

브루너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서 인간 공동체를 다섯으로 분류했다.  결혼, 노동, 국가, 문화, 교회이다.  그리고 문화의 영역 속에 인간이 누리는 자유스러운 제반 활동 - 과학, 예술, 우정, 오락 등 - 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본회퍼는 처음 그의 윤리학에서 하나님의 위임으로서 노동과 문화를 서로 혼용하고 있으나 후일 옥중서간에서는 문화를 우정과 함께 자유활동 영역에 귀속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결혼, 노동, 국가, 교회는 각각 구체적인 하나님의 위 임을 가지고 있거니와 문화와 교양은 어떻게 될까 ?  그것
은 간단히 노동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복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임의 세 가지
영역 주위의 자유활동 영역에 속한다....... 프로테스탄트적(비루터교적) 프러시아의 세계는 아주  강하게 네 개의
 위임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자유활동 영역은 그 배후에 후퇴해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교회만이 자유활동 영역(예술, 교양, 우정, 유희)에 대한 이해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본회퍼는 이 '미적 실존'(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생기있게 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영역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게 되었다.

이것을 가꿀 수 있는 것은 윤리적 인간이 아니라 오직 기독교인이다.  우정(기독교 공동체에 흔히 나타남) 이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 영역을 옹호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필연성에 호소하는 것
이 아니라 자유의 필연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보리밭에 민들레꽃이 피듯이 네 가지 위임 영역에 있어서 자유활동 영
 역은 기독교인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자유의 영역 내부에 있어서도 우정은 극히 드물고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

 

결론적으로 이 자유의 개념은 순종의 개념과 위임의 개념에 필연적으로 속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회퍼의 위임개념에 있어서 삶의 현실 전체를 파악하는 것과 완전한 의미의 인간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간 존재는 어떤 조직으로 환원되어 버리거나 일면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Ⅳ . 결  론
 
A. 요약

 

일찌기 그리이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러한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이기 때문에 자유가 있어야 하고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라인홀드 니이버는 자유와 질서가 잘 균형잡힌 사회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과거 제정일치(祭政一致)되었던 중세시대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이것이 분리된 현대에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본 필자는 이러한 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인간의 제반 사회질서를 설명해 보고자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논제로 택하였다.본회퍼의 위임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질서개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자연법 사상은 인간성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인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 사상은 바울에서 시작하여 아퀴나스, 루터의 베일개념, 틸리케 그리고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에 대하여 비관론을 펴는 개신교는 자연법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그리스도 계시 외에 인간 내부의 윤리적 지혜의 근거를 강조하는 카톨릭은 긍정적이다.
일반적인 질서개념은 예수, 바울, 어거스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거스틴은 선.악의 문제에서 질서개념을 다루었다.  본격적으로 질서개념을 다룬 것은 아퀴나스이며 그는 기원개념과 목표개념, 이중적 관점에서 취급했다.  루터는 인간의 신분 - 영적 신분, 정치적 신분, 가정 신분 -을 통한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그도 질서구조 자체의 변화는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적 정의로서 브루너는 인간의 제반 공동체에서 이 질서개념을 찾으려 하였고 알트하우스는 '원계시'라는 명제 하에, 고가르텐은 국가를 통한 질서를 강조했다.  이 질서개념은 퀴네트, 틸리케의 유지질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본회퍼도 창조질서를 부정하고 보존의 질서를 강조하나 오해의 우려성 때문에 이 개념도 포기하고 위임사상을 선택한다.


루터의 삼대권 질서사상은 본회퍼의 위임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루터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설정하신 삼대 질서가 있다.  그 이유는 죄가 형별되고 묵인되지 않기 위함이다.  그것은 첫째 엄한 훈계로 가정을 다스리는 부모이다.  경제관은 가정 질서에 포함된다.  둘째 불법을 행하는 자를 권력과 칼로 다스리는 국가이다.  세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교회이다.  이러한 루터의 질서개념은 두왕국설로 발전하면서 질서 절대화의 경향성과 공직미화 사상의 오류를 범했다.  루터의 소명론은 그의 삼대권 질서사상 내에 있는 직업.노동개념에서 비롯되어 본회퍼의 노동 위임을 구체화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브루너는 창조질서란 명제 하에 현대적 질서개념을 정립했다.  그의 질서개념은 윤리적 가치로서 정의개념 확립에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어떤 형태를 주었는데 이것이 곧 질서이며 만물이 곧 이 질서 가운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브루너는 창조질서에 근거한 인간 공동체를 가정, 노동, 국가, 문화, 교회 다섯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치즘을 경험한 브루너도 질서의 회복에만 그쳤지 질서 자체의 변혁에는 미치지 못했다.  발전된 사항이 있다면 루터와는 달리 기존 질서 자체의 타락 가능성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본회퍼의 위임사상은 루터의 두왕국설, 브루너의 이분법적 윤리를 하나님의 주권 하에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두왕국설을 주장하므로 질서 절대화의 경향성에 빠진 것이 루터라면 본회퍼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궁극이전의 것과 궁극적인 것이 통일된 하나의 현실을 말하므로 성.속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현실개념을 제시한다.


본회퍼는 질서개념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탁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여 주고자 질서 대신에 위임이란 용어를 채택한다.  본회퍼는 두 번에 걸쳐 위임개념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첫번째는 현실의 그리스도론적인 통일성에서 두번째는 구체적으로 계명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수행할 수 있는가에서이다.  어쨌든 이 위임이란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본 필자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실재 특성에 대한 본회퍼의 법적 사고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위임개념을 통하여 루터의 삼대권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세상 속에서 각자 책임을 맡은 자가 각 영역에서 순종할 것을 강조한다.  또 구체적인 계명으로서 위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본회퍼는 굳어져서 의미를 상실한 질서개념과 공간개념을 벗어나기 위하여 존재론적 입장에서 위임개념을 선택한다.  존재론적 입장에서의 위임은 '오늘, 여기에, 우리 사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을 수립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탁에 순종할 것을 주장한다.
위임의 성격에서 본회퍼는 궁극이전의 것(das Letzte)과 궁극적인 것(das Vorletzte)을 구별한다.  하나님의 베일로서 위임은 궁극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을 향하여 봉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련을 인도하는 안내자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위임의 대리개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구체적으로 위임의 형태를 입고 나타나므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대리적 권한을 행사한다.  위임을 수행하는 자는 대리로 행동하며 위탁하신 분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는 또 위임의 대리개념에서 '타인을 위한 존재'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위임의 유비론적인 구조에서 본회퍼는 원래 이 위임들의 모상(模像)이 하늘에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적 일치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이다.  결국 관계의 유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주권 속에 인간의 인격성과 사회성이 통합된다.


그는 또한 위임의 동등성을 말한다.  각 위임은 자기 고유의 가치와 결코양도될 수 없는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  이 위임들은 서로 혼동되지 않고 보충하여 주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그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등의 질서이다.
권리 영역에 있어서 본회퍼는 각 위임들의 제한성을 말하고 이 제한성을 넘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월권행위임을 명백히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영역주권이론'을 제창했다.  각 영역은 그 자체의 고유한 주권을 가지며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의 고유 권리를 침해하거나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권위 문제에 잇어서 칼 F.H.헨리는 창 1:28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는 노동의 권위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십계명 중 다섯째 계명은 가정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롬13:1에서 정치적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교회의 권위는 성도들을 성별하여 부른신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달려있다.  따라서 진정한 권위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봉사와 자기 희생 안에서만 존재한다.
성서에 의하면 사람은 노동 위임 가운데 창조되었다(창 2:15).  타락 후에도 노동은 하나님의 훈련과 은혜의 위임으로 존속한다(창 3:17-19).  기독교인직업윤리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에 봉사한다.


결혼 위임은 비단 출산의 장소일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자녀를 양육케 한다.  헨리 H.바네트는 기독교인 결혼윤리에 네 가지 원칙 즉 일부일처제, 항구성, 신실성, 아가페 사랑을 강조한다.
정부의 위임은 하나님의 위탁 명령에 따라 입법과 칼의 위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을 위해 창조된 세계를 보존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정치적 권위로서의 국가 기원을 인간의 창조적 본성에 두려고 하지 않고 인간의 죄의 타락 안에 두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위임되어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려져 있는 정치적 권위를 말한다.
교회 위임은 그리스도의 현실의 선포, 교회의 질서, 기독교인의 생활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의 관심은 온 세상의 구원이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선포이다.
본회퍼는 후일 옥중서간에서 문화를 우정과 함께 자유활동 영역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이 영역을 담당하고 활기있게 하는 것은 교회임을 강조한다.

 

B. 평가

 

본 필자는 여기까지 질서개념의 역사적 고찰과 본회퍼 위임사상의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면 본회퍼 위임사상에 내포된 문제점이나 이 사상이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우선 바르트의 비판을 생각해 본 후에 현대신학 사상에 끼친 영향을 검토해 보자.
바르트는 본회퍼의 위임사상이 알트하우스나 브루너를 능가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제 사건의 불변성과 관계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습득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본회퍼의 위임사상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그의 위임은 애매하게 선택되었고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  둘째 위임을 권위 관계라고 해석한 것은 일방적인 처사이며 하위에 속한 자유가 상위의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못한다.  세째 위임개념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계명의 개념을 가지고 항구적인 인간 공동체의 제 관계를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본회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위임들의 제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적으로 통일된 현실 구조를 제시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의 부여와 세속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위임걔념은 각 영역에 있어서 책임의 한계를 제한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회퍼의 대답은 그리스도로부터 책임있는 행위를 지향하며 율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위임의 화석화(化石化)의 우려에 대하여 그는 위임은 하나님의 생동적인 역사에 통합되며 그래서 결국 계명을 주신 이의 손 안에서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위임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화석화되지 않게 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위임사상이 현대신학 사상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 위임사상은 특히 근래에 대두된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질서와 분리되어 존재하던 자연의 질서가 그리스도의 주권 속으로 들어왔다.  들어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명령 속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위임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 속에 명시되어 있다.
이제는 질서가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명령 여하에 따라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질서 변혁설을 등장케까지 한다.
이것이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에 그대로 계승되어 질서 자체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즉 질서 자체를 부인하거나 반체제론까지 등장케 하였다.   속화론도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참 고 문 헌
 
1. Primary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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